■ 보학/성씨별관향

덕수이문을 빛낸 인물

야촌(1) 2009. 1. 6. 19:21

덕수이문을 빛낸 인물

 

2世 이양준(李陽俊)

추밀공은 1202년 (고려신종5년) 출생 1221년 벼슬에 나가 판의조승 1224년 산원 1227년 식목도감이되었다.

1228년 도병마사의 녹사가 되었다가 그해 다시 산원이 되고 1230년 별장이 되었으며 1232년 전주판관이 되었다.

 

1236년 낭장 1238년 삼사판관을 겸직 하였고 1240년 이부원외랑으로 옴겼고 이듬해 용호군 중량장이 되었다가 어시잡단으로 승진 하였다. 1243년 신호군 중량장이 되고 뒤에 조산대부(종6풍)로 가자 되어 흥위위 보승장군이 되었다.

돌아가신후 은청광록대부(정3품) 동지추밀원사. 어사대부. 이부상서. 상장군에 증직 되었다.

 

4世 이윤운(李允芸)

1249년(고종36년)에 출생 1275년 양온량동정이되고 1279년 잡직령이 되었으며 1282년 별장을 거쳐 신호위정용낭장이 되었다. 1291년 좌우위중랑장 1295년 대부소윤을 역임하고 1297년 조현대부로 장작윤이 되었다. 이듬해 조산대부조서 공조시랑이 되었다가 겨울에 군부총랑으로 옮겼고 1299년 대부윤을거쳐 조의대부로서 소부서사가 되었다.

 

1300년(충렬왕26) 태복윤이 되었다가 광주부사로 나갔으며 1302년 수원도호부 부사로 전임 했다. 1304년에는 조의대부로서 외영서사 지통례문사를 지냈고 1307년 판위위시사에 올랐다가 청주목부사로 나갔다. 이듬해 통헌대부로서 민부전서가 되었다가 봉익대부에 승진 밀직사.판도판서.상호군을 역임했다.

 

1334년(충숙왕 복위3)에 돌아가신후 선충경절공신.벽상삼한삼중대광 추첨의정승(종1품). 감춘추관사 .상호군. 판전리사사에 추증되고 덕수부원군에 추봉 되었다.

 

7世 이변(李邊)

1391(공양왕 3)∼1473(성종4). 조선 초기의 문신아버지는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 공진(公晉)이다.

1419년(세종 1)진사시에 합격하고 승문원박사가 되었으며, 한문훈해(漢文訓解)에 정통하여 부교리에 올랐다.

 

1427년에 사역원판관이 되어, 이로부터 항상 승문원과 사역원의 직을 겸임하였다. 이어 전농시판관(典農寺判官)·호군·봉상시윤(奉常寺尹)·대호군·예문관직제학·우사간·호조참의·공조참의를 지냈다.

 

1448년에 중추원부사가 되고, 예조·이조·공조·병조의 참판을 거쳐, 경창부윤(慶昌府尹)·형조판서를 지냈다.

1456년(세조 2)예문관대제학을 지낸 뒤, 공조판서·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판중추원사를 지냈고, 1467년 궤장을 하사받았으며, 1472년(성종 3)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다. 화어(華語)에 능통하여 중국에까지 알려졌다고 한다. 시호는 정정(貞靖)이다.

 

8世 이명신(李明晨)

1392(태조1)~1459(세조5).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백부(伯扶). 1414년(태종 14)벼슬길에 올라 통사랑· 사온서부직장(司署副直長)을 역임하였으며 지돈녕부사에 이르렀다. 지방관으로는 공주와 홍주의 목민관으로 있으면서 권농관(勸農官)과 병마절제사를 겸직하였다.



특히, 홍주에서는 선정을 베풀어 명관으로 칭송이 높았고, 김종직(金宗直)이 만시를 지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시호는 강평(康平)이다.

 

9世 이거(李琚)

?∼1502(연산군 8).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자미(子美). 대제학 변(邊)의 손자, 효조(孝組)의 아들이며, 이순신(李舜臣)의 증조부이다. 1480년(성종 11)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설경(說經)·홍문관박사·사경(司經)을 역임 하였다.



1484년 암행어사로 나가 과천에서 현감 최급(崔伋)을 오리(汚吏)로 잡아 올렸다.

1486년 사간원정언, 1489년 이조정랑, 1491년 장령, 1495년(연산군 1) 보덕을 지내고, 이해에 장악원정, 승문원참교·한학교수를 겸하여 춘추관편수관으로 《성종실록》의 편찬에 참여 하였다. 1497년 순천부사에 이어 호군이 되었다.

성격이 강직하여 언관으로 있으면서 부정한 관리에 대해서는 관직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탄핵하였다.

 

10世 이의무(李宜茂)

1449(세종 31)∼1507(중종 2).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형지(馨之), 호는 연헌(蓮軒). 아버지는 온양군사 추(抽)이다.

1467년(세조 13) 사마시를 거쳐 1477년(성종 8)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박사·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을 역임하고, 1487년 성균관전적으로 《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하여 녹피(鹿皮)를 하사받았다.

 

이해 홍문관교리로 밀양에 파견되어 흥학(興學)에 관한 일을 조사, 보고하고, 이듬해 사헌부지평, 1492년 사헌부장령을 지냈다. 1493년 홍문관응교로서 형벌을 남용하여 임실현감 노처리(盧處利)를 치사(致死)하게 한 사건으로 파직되었다.

 

1495년(연산군 1) 사간원사간, 이듬해 사헌부집의·상의원정을 역임했다. 1502년 성균관사성·군기시정에 보직되었으나, 정치가 문란해짐을 보고 외직을 청하여 홍주목사로 나갔으며, 1507년(중종 2) 선정으로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기도(氣度)가 활달하고 시문에 능하였으며, 등조(登朝)한 지 30여년에 조금의 저축도 없어 가세가 늘 청빈하였다.

 

11世 이미(李薇)

1484(성종 15)∼? 조선 전기의 문신. 초명은 환(). 자는 자패(子佩), 호는 산북(山北). 사간 의무(宜茂)의 아들이며, 좌의정 행(荇)의 동생이다. 1515년(중종 10)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정언·감찰·수찬·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46년(명종 1)대사헌에 이어 한성부우윤을 지냈고, 그뒤 동지의금부사·동지중추부사를 거쳐, 1548년 예조판서가 되었으며, 이듬해 우찬성에 임명되었다. 이어서 형조판서·한성부판윤을 거치는 동안 병이 많아 송사를 늦게 처리한다는 탄핵을 받기도 하였지만 계속해서 지중추부사 ·동지 성균관사 등을 지냈다.

 

11世 이기(李芑)

1476(성종 7)∼1552(명종 7).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문중(文仲), 호는 경재(敬齋). 사간 의무(宜茂)의 아들이다. 

1501년(연산군 7) 식년문과에. 1522년(중종 17) 공조참의를 지내고, 이어서 함경도병마절도 사·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으며, 1527년 한성부우윤이 되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경상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를 거치면서 민정과 국방에 이바지하였다. 1533년 공조참판에 오르고, 이어서 예조참판·한성부판윤을 역임하고, 1539년 진하사(進賀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사이의 공로로 국왕이 병조판서에 임명하려 하였으나, 이조판서 유관(柳灌)이 장리의 사위로서 서경을 받을 수 없다고 반대하였다.

 

이로 인하여 유관은 뒤에 보복을 당하였다. 국왕의 신임과 이언적(李彦迪)의 주장으로 형조판서가 되고, 이어서 병조판서로 발탁되었다. 1543년 의정부우찬성에 이어서 좌찬성·우의정에 올랐다.

 

명종이 즉위하여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첨정을 하자 윤원형(尹元衡)과 손을 잡고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유관 등을 제거하고, 추성위사협찬홍제보익공신(推誠衛社協贊弘濟保翼功臣) 1등에 책록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가 되면서 병조판서를 겸하여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였으며 풍성부원군(豊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좌의정이 되고, 1549년(명종 4) 영의정에 올랐다.

 

11世 이행(李荇)

1478(성종 9)∼1534(중종 29).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택지(擇之), 호는 용재(容齋)·창택어수(滄澤漁水)·청학도인(靑鶴道人). 사간 의무(宜茂)의 아들이다. 1495년(연산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예문관 검열·봉교, 성균관전적을 역임하고,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00년 하성절질정관(賀聖節質正官)으로명나라에 다녀온 뒤 홍문관수찬에 임명되었고, 홍문관교리까지 올랐으며, 1504년 갑자사화 때 사간원헌납을 거쳐 홍문관응교로 있으면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윤씨의복위를 반대하다가 충주에 유배되고,이어 함안으로 옮겨졌다가 1506년초에는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이해 9월에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다시 홍문관교리로 등용되고, 이어 부응교로 승진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13년(중종 8) 다시 성균관사예가 되었다가 이듬해 사성으로 승진하였다. 사섬시정(司贍寺正)을 거쳐 1515년 사간원사간이 되고, 이어대사간으로 승진하였다.

 

이어 첨지중추부사·홍문관부제학·성균관대사성·좌승지·도승지를 거쳐 1517년에 대사헌이 되었다. 1519년 홍문관부제학이 되고, 이듬해 공조참판에 임명됨과 동시에 대사헌과 예문관대제학을 겸하였다. 그리고 동지의금부사와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도 겸임하였다.

 

1521년 공조판서가 된 이후 우참찬·좌참찬·우찬성으로 승진하고, 1524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다시 좌찬성을 거쳐 1527년에는 우의정에 올라 홍문관대제학 등을 겸임하였다. 1530년 《동국여지승람》의 신증(新增)을 책임맡아 끝내고 좌의정이 되었다. 저서로는 《용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定)이었으나 뒤에 문헌(文獻)으로 바뀌었다.

 

11世 이치(李致)

1504(연산군 10)∼1550(명종5).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가원(可遠). 현감 자하(自夏)의 아들이다. 19세 때 성균관에 입학하여 수학하였고, 1540년(중종 35)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그뒤 성균관학유·사간원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이기의 죄를 탄핵하고 외척인 윤원형이 정치에 간여하는 일의 부당성을 논하였다가 결국 정적들의 함으로 체포되어 杖刑을 받고 풀려 났으나 끝내는 그 후유증으로 돌아갔다.

 

12世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인종1-선조31) 조선의 무신 자는 여해(汝諧) 시호 충무(忠武).  28세 되던 해에 비로소 무인 선발시험의 일종인 훈련원별과(訓鍊院別科)에 응시하였으나 불행히도 시험장에서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서 왼발을 다치고 실격하였다.

 

그 뒤에도 계속 무예를 닦아 4년 뒤인 1576년(선조 9)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갔으며,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에 보직되고, 이듬해에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역임하고, 1586년에는 사복시주부가 되었다.

 

그러나 무관으로 발을 들여놓은 그의 진로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사복시주부에 이어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造山堡萬戶兼鹿島屯田事宜)가 되었는데, 이때 그는 국방의 강화를 위하여 중앙에 군사를 더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던 차에 호인(胡人)의 침입을 받고 적은 군사로 막아낼 수 없어 부득이 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그것이 오로지 그의 죄라 하여 문책하였다. 그러나 그는 처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장(主將)의 판결에 불복하면서 첨병(添兵)을 들어주지 않고 정죄(定罪)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끝내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서 중형을 면하기는 하였으나, 첫번째로 백의종군(白衣從軍)이라는 억울한 길을 걷게 되었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선전관 등이 되고, 1589년 정읍현감으로 있을 때 유성룡에게 추천되어 고사리첨사(高沙里僉使)로 승진, 이어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만포첨사(滿浦僉使)·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47세가 되던 해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592년 왜구가 대거 칩입하여 오자 옥포,노량,당포,사량 등 전투에서 연전 연승하자 세품계를 더하여 정헌대부를 승차하고 삼도수군 통제사를 겸직하여 1598년까지 임진왜란을 종결짓고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하였다.

 

1604년 효충장의 협책 선무공신의 호를 내렸으며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봉했다. 정조대왕은 묘전에 어필로써 이제신도비을 세워 전공을 기리고 있다.

 

12世 이원록(李元祿)

1514(중종 9)∼1574(선조 7).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정서(廷瑞). 판중추부사 행(荇)의아들이다.
1540년(중종 35)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541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에 발탁되고, 1543년에 저작이 되고, 1544년에 부수찬·정언 등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1545년에 지평·교리를 역임하였다.

 

영흥부사에 이어 사인 ·판교·공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을사사화때 퇴계 이황 선생이 관직을 삭탈 당했을때 公이 극렬히 변론하여 왕명을 철회케했다.

 

12世 이사성(李思聖)

1525(중종 20)∼1571(선조 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성지(誠之). 헌납 치(致)의 아들이다. 1546년(명종 1)생원시에 합격하고, 154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에 임명되었다. 이어서 승문원박사로 봉상시직장(奉常寺直長)을 겸하였다.

 

그뒤 예조·형조의 좌랑을 거쳐 충청도도사·성균관직강·형조정랑 등을 역임하였고, 영해부사·홍주목사·광주목사(廣州牧使) 등 외직에 계속 임명되었다. 다시 경직인 군자감정을 거쳐, 사옹원정이 되였다. 문예(文藝)에 능하여 외삼촌 박계현(朴啓賢)과 함께 당시에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13世 이이(李珥)

11536-1584(중종31-선조17년) 자는 숙헌(淑獻) 호는 율곡(栗谷) , 석담(石潭), 우재(禹齎). 29세에 호조좌랑에 처음 임명되고 예조좌랑·이조좌랑 등을 역임, 33세(1568)에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부교리로 춘추기사관을 겸임하여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해에 성혼과 ‘지선여중(至善與中)’ 및 ‘안자격치성정지설(顔子格致誠正之說)’을 논하였다. 34세에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올렸다. 37세에 율곡리에서 성혼과 이기(理氣)·사단칠정(四端七情)·인심도심(人心道心) 등을 논하였고, 39세(1574)에 우부승지에 임명되고 재해로 인하여 〈만언봉사 萬言封事〉를 올렸으며, 40세 때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제진하였다.

 

42세에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지었고, 45세에 기자실기(箕子實記)를 편찬하였다. 47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고, 어명으로 〈인심도심설 人心道心說〉을 지었다. 이해에 김시습전(金時習傳)과 학교모범(學校模範)을 지었으며, 48세에 시무육조( 時務六條)를 계진하고 십만양병을 주청하였다.

 

49세에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죽었으며 파주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었다.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풍덕의 구암서원(龜巖書院), 황주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등 20여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13世 이우(李瑀)

1542(중종 37)∼1609(광해군 1). 조선 중기의 서화가. 이름은 위(瑋) 또는 후(珝). 자는 계헌(季獻), 호는 옥산(玉山)·죽와(竹窩)·기와(寄窩). 원수(元秀)의 아들이며, 이(珥)의 동생으로,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師任堂申氏)이다.

 

1567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비안현감과 괴산·고부군수를 거쳐 군자감정에 이르렀다. 시(詩)·서(書)·화(畵)·금(琴)을 다 잘하여 4절(四絶)이라 불렸다. 그림은 초충(草蟲)·사군자·포도 등을 다 잘 그렸는데, 어머니의 화풍을 따랐다.

 

아들 경절(景節)도 가법(家法)을 이어 서·화·금에 능하여 3절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가 초충을 그려 길에 던지면 닭이 와서 쪼았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화훼초충(花卉草蟲)을 잘 그렸다고 한다. 묵매화(墨梅畵)는 주로 횡관식구도(橫貫式構圖)로 힘차게 묘사하였다. 

 

유작으로는 설중매죽도(雪中梅竹圖)(개인 소장)· 노매도(老梅圖)· 수과초충도(水瓜草蟲圖)(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포도도(葡萄圖) 등이 전하고 있다.

 

 

옥산 이우 유필

 

13世 이통(李通)

1556(명종 11)∼1620(광해군 12).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천구(天衢). 생부는 현감 원근(元謹)이고 덕안군 인상(麟祥)에게 입계(入繼)하였다. 9세부터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84년(선조 17)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대과(大科)에 실패, 다시는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그뒤 현량으로 천거, 내시교관이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다가 다시 경안도찰방(慶安道察訪)에 제수되자 관직에 나갔다. 6품에 오른 뒤 내직을 거쳐 고산현감·흠곡현령·평창군수·순천군수 등을 거쳐 온양군수로 아산현령을 겸임하기도 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 서호(西湖)에 은거하여 학문에 힘썼고, 이덕형(李德馨)·이정구(李廷龜) 등과 교유하였다. 1614년 영창대군(永昌大君)이 피살되고 폐모론이 일어나자, 가족을 데리고 광릉(廣陵) 선롱(先壟)아래 숨어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았다.

 

13世 이회(李薈)

1567(명종 22)∼1625(인조3).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무백(茂白). 아버지는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순신(舜臣)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따라 한산도해전을 비롯하여 여러 해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그는 해전에서 뚜렷한 전투공로는 없었으나, 통제사인 아버지를 도와 진중처사에서 자세한 분야에 이르기까지 뒷바라지를 하여 무장들이 불편없이 전투에 임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등 숨은 공로가 많았다.

 

그러한 그의 숨은 공로가 인정되고, 또한 아버지 순신이 2품직에 승진하였으므로 국법에 따라 음보(蔭補)로 임실현감에 제수되었다. 곧 통훈대부(通訓大夫)가 되고 이어서 첨정에 승직되었다. 통정대부(通政大夫)좌승지에 추증되고, 임진왜란의 공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책록되었다.

 

13世 이완(李莞)

1579(선조 12)∼1627(인조 5).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열보(悅甫). 순신(舜臣)의 조카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이순신 휘하에서 종군하였고, 1598년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한 사실을 알리지 않고 독전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1599년 무과에 급제, 1618년(광해군 10) 평양중군이 되었고, 1623년 충청도병마절도사에 올랐다. 이듬해 호현에서 결집하여 이천으로 도망치는 이괄(李适)의 난군을 평정한 공으로 가선대부에 올랐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 적이 의주를 포위하였을 때 적과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패하자 병기고에 불지르고 종제 신(藎)과 함께 분사(焚死)하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1706년 아산 현충사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강민(剛愍)이다.

 

13世 이광(李洸)

1541(중종 36)∼1607(선조 4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사무(士武), 호는 우계산인(雨溪散人) 도사 원상(元祥)의 아들이다. 1567년(명종 22) 생원이 되고, 1574년(선조 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어 권지성균관학유·의정부사록을 거쳐, 1577년 예문관검열이 되어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다.

 

그 뒤 평안병마평사·성균관전적·병조좌랑·정언·형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82년 예조정랑·지평에 이어 이듬해 성균관직강·북청판관·함경도도사를 지냈다. 1584년 병조정랑·장악원첨정을 거쳐, 함경도암행어사로 나가 북도민의 구호현황을 살피고 돌아와서 영흥부사가 되었다. 

 

1586년 길주목사로 나갔다가 함경도관찰사 겸 순찰사로 승진되었다. 1589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1591년 호조참판으로 다시 기용되었으며, 곧 지중추부사로서 전라도관찰사를 겸임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감사로서 충청도관찰사 윤선각(尹先覺), 경상도관찰사 김수(金)와 함께 관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서울을 수복할 계획을 세웠으며, 5월에 최원(崔遠)에게 전라도를 지키게 하고, 스스로 4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주목사 이경복(李慶福)을 중위장으로 삼고, 조방장(助防將) 이지시(李之詩)를 선봉으로 하여 임천(林川)을 거쳐 전진 하였다.

 

그뒤 다시 전라도로 돌아가서 왜적이 전주·금산 지역을 침입하자, 광주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을 도절제사로 삼아 웅치(熊峙)에서 적을 크게 무찌르고, 전주에 육박한 왜적을 그 고을 선비 이정란(李廷鸞)과 함께 격퇴시켰다. 저서로는 《우계집》이 있다.

 

14世 이유중(李有中)

1544(중종 39)∼1602(선조 35).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시가(時可). 아버지는 인(認)이다.

1576년(선조 9)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92년에 장령을 비롯하여 필선·홍문관교리·동부승지·좌승지·우승지·대사간을 역임하고, 이조·병조·예조의 참의, 대사헌·예조참판 등의 청요직을 오랫동안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의주에 호종한 공으로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3등에 추록되고 덕원군(德原君)에 봉하여졌다.

 

14世 이경진(李景震)

1559(명종 14)∼1594(선조 27). 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성보(誠甫). 아버지는 죽곡 선(璿)이다. 성혼(成渾)에게서 수학하였다. 이이가 죽은 뒤 동인 정여립(鄭汝立) 등이 이이를 무고하자 1585년(선조 18)에 변무항진(辨誣抗陳)하였고, 1587년 이이의 문인인 이귀(李貴) 가 포의(布衣)로 있을 때 변무소(辨誣疏)를 올렸으나 중도에 전달되지 않으려는 것을 대신 전달하여, 이이가 시류(時流)에 휩쓸리지 않는 인물임을 천명하기도 하였다.

 

1591년 전옥서참봉(典獄署參奉)을 내렸으나 받지 않았으며, 임진왜란 때는 이이의 부인 노씨(盧氏)를 모시고 고향으로 피난하였고, 노씨가 적에게 화를 당하자 양덕현(陽德縣)으로 갔다가 1593년에 해주석담(海州石潭)으로 돌아갔다.

 

그때 스승인 성혼으로부터 강학을 받고 1594년 정월에 제릉참봉(齊陵參奉)이 되었다. 후일 해주 향현사(鄕賢祠)에 배향되었다.

 

14世 이안눌(李安訥)

1571(선조 4)∼1637(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 행(荇)의 증손으로 진사 형(泂)의 아들이며. 재종숙부인 사헌부감찰 필(泌)에게 입양되었다.. 18세에 진사시에 수석합격 29세 때 과거에 나아가 문과에 급제하였다.

 

여러 언관직(言官職)을 거쳐 예조와 이조의 정랑으로 있다가 1601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성균직강(成均直講)으로 옮겨 봉조하(奉朝賀)를 겸하였다. 공조로 옮겼다가 주시관(主試官)으로 호서와 관서에 나갔으며, 다시 예조에 들어왔다가 단천군수가 되었다.

 

 1607년 홍주목사·동래부사를 거쳐 1610년 담양부사가 되었다.경주부윤이 되었다가 곧 호조참의 겸 승문원부제조로 임명되었다. 동부승지에서 좌부승지가 된 뒤 사직하고 강화부사가 되었다. 어머니의 3년상을 마치고, 인조반정으로 예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강화로 피란하여 공의 옜날 공적을 몸소 느껴 얼마후 다시 강화부 유수에 임명하였다. 1631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었으며, 다음해 예조판서 겸 예문관제학을 거쳐 충청도도순찰사에 제수되었다. 조정에서 청렴근면한 관리를 뽑는 데 들게 되어 숭정대부(崇政大夫)의 가자(加資)를 받고, 형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에 임명되었다.

 

이해(1636년)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병중의 몸을 이끌고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갔다. 특히 시작에 주력하여 문집에 4,379수라는 방대한 양의 시를 남기고 있다. 두보(杜甫)의 시를 만번이나 읽었다고 하며, 시를 지을 때 일자일구도 가벼이 쓰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당시(唐詩)에 능하여 이태백에 비유되었고 글씨도 잘 썼다. 정철(鄭澈)의 〈사미인곡〉을 듣고 지은 〈문가 聞歌〉가 특히 절창이라일컬어졌고,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지은 〈동래사월십오일 東萊四月十五日〉은 사실적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국난을 형상화시킨 장편시로서, 왜적이 동래에 쳐들어왔을 때 관민이 함께 막으려다 장렬하게 전사한 사연을 담고 있다. 그의 시는 고답적 표현을 버리고 절실한 주제를 기발한 시상으로 표현한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그의 문집에 실린 시는 자신이 옮겨다닌 고장을 중심으로 묶여 있어서 그 지방의 민중생활사 및 사회사적 자료를 담고 있으며, 특히 그의 생애가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양란에 걸쳐 있으므로 국난에 피폐해진 당시의 상황을 추적하여 볼 수 있다.

 

또한, 명나라로 사행가면서 지은 그의 시에서는 대명교섭사(對明交涉史)의 자료를 발견할 수 있다. 숭록대부의정부좌찬성 겸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에 추증되었다. 담양의 구산서원(龜山書院)과 면천의 향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저서로는 《동악집》 26권이 있다.

 

14世 이경절(李景節)

1571(선조 4)∼1640(인조 18). 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길보(吉甫) 호는 성재(省齎),옥산공 우(瑀)의 아들이며, 이(珥)의 조카이다. 1606년(선조 39)에 진사가 되고, 1615년(광해군 7)에 문과 회시에 통과되었으나 과거시험의 공정성에 회의를 품고 전시에 응하지 아니하였다.

 

인조반정 이후에 황산도찰방으로 임명되어, 인심을 수습하고 황폐되었던 역로(驛路)를 완전히 복구하여 상을 받은 바 있고, 또 중림도찰방(重林道察訪)이 되어 역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그뒤 제용감직장(濟用監直長)·예빈시별좌·사헌부감찰을 거쳐 문경현감으로 나가서 치적을 남겼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향인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이 되었으며 문경인들도 그를 도와서 그 지역을 잘 지켰으나, 삼전도화약(三田渡和約)의 소식을 전하여듣고 고향에 돌아가서 관계에는 나오지 않고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그림과 글씨 및 가야금에 능하였다. 1651년(효종 2)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14世 이경안(李景顔)

1572(선조5)∼1614(광해군 6).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여우(汝愚), 호는 송석(松石). 순천 부사(順天府使) 통(通)의 아들이다. 1591년(선조 24)에 진사가 되고, 160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학정(學正)으로서 중시(重試)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예조좌랑·정언을 거쳐 1619년에 강서현령·중화부사·황해병사를 역임하였다. 그는 문예에 뛰어나 이름을 일대에 떨쳤으며, 그의 시부(詩賦) 작품은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유생에 의하여 다투어 전사되어 세상에 크게 유행되었다.

 

14世 이명달(李命達)

1576(선조 9)∼1654(효종 5).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여현(汝顯) 호는 월촌(月村) 교위(校尉) 광(廣)의 아들이다.

1606년(선조 39)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이 되고, 그뒤 인천부사를 역임하였다.

 

공은 1613(광해5)년 조정에서 폐모론이 일자 생원으로서 유생들을 거느리고 앞장서서 이위경,정조,윤인 등을 베자고 상소하였다. 당시 외방의 상소로는 처음 나온것이있고 그 내용이 늠름하고 매서워 온 조정이 압도되었다.

 

14世 이경용(李景容)

1580(선조 13)∼1635(인조 1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여복(汝復), 호는 두곡(杜谷)·계곡(桂谷). 아버지는 군수 통(通)이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18년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직을 받고,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승문원정자가 되었으며, 곧이어 저작을 거쳐 주서가 되었다.

 

반정 초기에 조정의 대소의 글씨를 잘 써서 왕으로부터 상으로 《동문선》 한 질을 하사받는 영광을 입었다. 곧 승진하여 전적·감찰 등이 되었고, 1624년 병조좌랑·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이 되었다.

 

이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언관으로 금령을 대대적으로 행하여 난 후의 처리를 잘하여냈고, 1625년에 홍문관수찬·사헌부지평·직강 등을 거쳐, 홍문관교리가 되어 최명길(崔鳴吉) 등과 함께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폐지를 진언하였다. 이어서 사간원헌납·종성부사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직후에는 광주목사(廣州牧使)로 부임하였는데, 서울과 가까워서 귀족공경(貴族公卿)이 많은 지방이었으나 일을 공정하게 잘 처리하여 칭송을 들었다. 곧 이어 황해도감사가 되어 이이(李珥)의 저서 《격몽요결 擊蒙要訣》을 수백본 만들어 올려서 중앙과 지방에 반포하게 한 일이 있다.

 

그뒤 참찬관·양양부사·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글씨가 뛰어났는데 특히 초서와 예서를 잘 썼다고 한다.

 

14世 이경헌(李景憲)

1585(선조 18)∼1651(효종 2).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여사(汝思), 호는 지전(芝田). 아버지는 군수 통(通)이다, 1609년(광해군 1)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618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었고, 봉상시주부를 거쳐, 강원도도사를 역임하였다.

 

광해군 말년에는 대북파의 득세로 관계에 진출하지 않고 있다가 인조반정 후 대각(臺閣)에 들어가 장령·지평 등을 역임 하였다. 이어 예조·형조의 정랑, 전적·직강·사예원첨정·사복시첨정·장악원정·필선·시강 등을 지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왕을 호종하였으며 그뒤 병조참의·승정원동부승지를 지내고,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이 되어 공주목사로 나갔다. 1630년에 접반사(接伴使)로 가도(#가15島)에 나아가 일을 잘 처리하였고, 돌아와 형조참의· 승지·호조참의를 지냈다.

 

1636년 한재로 인하여 대사헌 조익(趙翼)이 사면을 청하여 승정원 신하들과 함께 풀려 형조 참의가 되었고,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에 왕을 호종하였다. 환도 후 병조참의가 되었으며, 화의 때의 공로로 병조참판이 되었다가 개성부유수가 되었다. 1639년에 서추 겸 동지의금부사(西樞兼同知義禁府事)가 되고, 공조참판으로 부총관을 겸하였다.

 

1642년에 경기감사로 나아가 진휼을 잘하였으며, 이어 도승지·서반 겸 사옹원제조(西班兼司饔院提調)를 지냈고, 1644년 원접사(遠接使)로 다녀온 뒤 강화부유수를 역임하였다. 1647년 동지의금부사로 호조참판을 겸하였고, 이듬해는 공조·예조의 참판, 지돈녕부사를 역임하고, 1651년에는 인열왕후(仁烈王后)옥책을 진서(進書)하여 상을 받았다.

 

이어서 병조와 의금부 등에 봉직하다가 그해에 돌아 가셨다. 착실하고 능력있는 관료였으며,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서, 궁중의 옥책문(玉冊文)을 많이 썼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4世 이안진(李安眞)

1588(선조 8)∼1640(인조 18).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보여(汝). 전라도도순찰사 광(洸)의 아들이다.

1606년(선조 39) 진사에 합격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의 옥사와 폐모론이 일어났으나 이를 감히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때 성균관유생 300여명을 이끌고 궐문에 나아가 항소하였다. 또한, 1618년 동학유생 조경기(趙慶起)·권념(權#심17)·정복형(鄭復亨)·심지한(沈之漢)·구방(具枋)·노원범(盧元範)·이원충(李元忠) 등과 함께 폐모론을 주동한 정조(鄭造)·윤인(尹)·이위경(李偉卿) 등을 목베기를 청하는 소를 올렸다.

 

이후 청양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이어 공조좌랑·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을 거쳐 1635년(인조 13)한산군수, 1639년 한성서윤을 역임하였다. 성품은 효우(孝友)가 돈독하고 언소(言笑)를 잊지 않았으며, 바른 행의(行義)가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공사에서는 매사 염정(廉靜)하고 엄하여 위엄을 갖추었다.

 

14世 이경증(李景曾)

1595(선조 28)∼1648(인조 26).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여성(汝省), 호는 미강(眉江) 또는 송음(松陰). 아버지는 군수 통(通)이다. 19세 때 진사가 되었으나, 당시 폐모론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두문불출하다가 인조반정 후 참봉으로 알성문과에 장원급제 하였다.

 

처음 전적에 임명되어 정언, 예조·병조의 좌랑을 거친 뒤 1626년(인조 4)에 다시 정언이다. 그뒤 전적·정언·문학을 거쳐 지평이 되었고, 정묘호란 때에는 왕이 강화로 피란을 가자 어사로서 호남에 내려가 식량조달에 큰 공을 세웠다.

 

그뒤 5, 6년간은 양사의 지평·헌납·사간을 지냈으며, 세자시강원에서 사서·보덕 등을, 홍문관에서는 수찬·응교 등을 여러 차례 거쳤다. 교리 때에는 경천(敬天)·휼민(恤民)·납간(納諫)·용인(用人)·숭검(崇儉)·돈종(敦宗)·진학(進學)·형내(刑內) 등 8조를 진언하여, 광해군 때의 폐풍의 잔해를 쇄신하도록 주장하여 왕이 이를 가납(嘉納)하였다.

 

교리 때에는 경천(敬天)·휼민(恤民)·납간(納諫)·용인(用人)·숭검(崇儉)·돈종(敦宗)·진학(進學)·형내(刑內) 등 8조를 진언하여, 광해군 때의 폐풍의 잔해를 쇄신하도록 주장하여 왕이 이를 가납(嘉納)하였다. 이어서 검상을 거쳐 사인·형조정랑으로 승진되었다.

 

그뒤 청주목사·응교·첨지가 되었고, 병자호란 때에는 병방승지로 호종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환도 이후 도승지로 승격하고, 곧이어 병조판서 겸 비변사유사 및 군공청당상(軍功廳堂上)을 맡아 전국의 장사(將士)들의 공죄(功罪)를 잘 조사한 공으로 대사간이 되었다.

 

1638년에는 왜인들이 호란을 빙자하여 침구할 기세를 보이므로 그가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임기응변으로 일을 잘 처리하였다. 뒤에 병조판서가 되어 원접사(遠接使)로서 용만(龍灣)에 나갔다가 병으로 인하여 정직하였다가 1644년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조판서 때에는 홍무적(洪茂績)·유백증(兪伯曾) 등의 질척(疾斥)을 받았으나 왕과 다른 대간들의 인정을 받고 있었으며, 왜인들의 간교함과 민막의 문제를 잘 처리하였다.

 

15世 이식(李植)

1584(선조 17)∼1647(인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 좌찬성에 증직된 안성(安性)의 아들이다. 1610년(광해군 2) 별시문과에 급제, 1613년 설서를 거쳐 1616년 북평사(北評事)가 되고, 이듬해 선전관을 지냈다.

 

1618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은퇴하여 경기도 지평(砥平:지금의 양평군 양동면)으로 낙향하여 남한강변에 택풍당(澤風堂)을 짓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호를 택당이라 한 것은 여기에 연유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 교분이 두터운 친구들이 집권하게 되자 요직에 발탁되어 이조좌랑에 등용되고, 이듬해에 부수찬·응교·사간· 집의를 역임하였다.

 

1625년(인조 3) 예조참의·동부승지·우참찬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에 대사간·대사성·좌부승지 등을 지냈다.

1632년까지 대사간을 세 차례 역임하였다. 1633년에 부제학을 거쳐 1638년 대제학과 예조참판·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642년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척화를 주장한다 하여 심양(瀋陽)으로 잡혀갔다가 돌아올 때 다시 의주에서 잡혀 갇혔으나 탈출하여 돌아왔다. 1643년 대사헌과 형조·이조·예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특히, 문장이 뛰어나 신흠(申欽)·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와 함께 한문사대가로 꼽혔다. 그의 문장은 우리나라의 정통적인 고문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김택영(金澤榮)에 의하여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의 한 사람으로 뽑혀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抄)에 〈사간원차자 司諫院箚子) 등 6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시는 각 체에 모두 능숙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대체로 정경의 묘사가 뛰어나고 직서적인 것이 많다.

 

그는 고체에 능하였다고 하나 오언율시에 가장 특색을 발휘하였다. 1686년 영의정에 추증되고,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 《택당집)이 전하며, 《초학자훈증집 初學字訓增輯)·《두시비해 杜詩批解) 등을 저술하였고, 《수성지 水城志)·《야사초본 野史初本) 등을 편찬하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15世 이정(李程)

1618(광해군 10)∼1671(현종 12).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운장(雲長), 호는 남곡(南谷). 아버지는 예조참판 경헌(景憲)이다. 1635년(인조 13)사마시에 합격하고, 1650년(효종 1)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57년 정언, 이듬해 지평·세자시강원사서를 거친 뒤 1659년 암행어사로 외방에 나갔다. 같은해 찬집청낭청으로 임용되고 1662년(현종 3)장령·집의·사간을 거쳐, 1664년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홍문관교리를 거쳐 1666년 홍문관수찬·응교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가자되었다. 같은해 승정원동부승지를 거쳐, 1668년 좌우부승지·승지로 승진하였다. 품성이 어질고 자신에 엄격하였으며 문재(文才)가 있었다. 관계로 나아간 뒤 교유를 삼갔고, 지방관으로 부임해서는 선정을 베풀었다. 누항에 거처하였을 때는 청빈한 선비와 같았다.

 

15世 이합(李柙)

1624(인조 2)∼1680(숙종 6).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윤적(允迪), 호는 대산(臺山). 병조참판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추증된 경헌(景憲)의 아들로서 동악공 안눌(東岳公 安訥)의 입계하다. 1646년(인조 24)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57년(효종 8)에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서부터 관직을 시작하였다.

 

곧 6품으로 승진하여 성균관의 전적·사예·사성, 사헌부의 지평·장령·집의, 사간원의 정언·사간, 세자시강원의 필선·보덕·사서, 홍문관의 부수찬·수찬·부교리·교리·응교를 역임하였다. 이어 상의원(尙衣院)·장악원(掌樂院)·사복시(司僕寺)의 정(正)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결성현감·서천군수를 지냈다.

 

1674년(현종 15)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어 형조·호조·공조의 참의를 지내고 승정원의 좌승지를 거쳐 대사간에까지 올랐다. 윤선도(尹善道)의 오만함을 탄핵하기도 하였으며, 윤휴(尹)의 무리인 이유(李$류01)의 옥사를 형조가 관대하게 해주는 것에 대하여 논하였다.

 

15世 이혜(李嵇)

1635(인조 13)∼1715(숙종41).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차산(次山), 호는 현포(玄圃). 경증(景曾)의 아들이다.

1654년(효종 5)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효종이 죽자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예송(禮訟)이 치열할 때, 성균관의 학생으로서 3년상을 주장하는 윤선도(尹善道)를 통렬히 비판하는 상소를 올림으로써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660년(현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봉교(奉敎)로 임명되었다.

 

1662년 정언이 되고, 1665년 홍문록(弘文錄)에 올라 권점(圈點) 6점을 받았으나 홍문관관원으로 기용되지는 못하였다.

그뒤 1668년 이조좌랑에 제수 되었다. 1670년 부교리·부응교·사간 등을 거쳐, 다음해 삼남의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암행을 마치고 돌아와 전라도지방의 기근이 극심함을 아뢰고 남원· 무안·진안현감을 파직하도록 계(啓)를 올렸다.

그뒤 동부승지·우승지·예조참의 등을 거쳐 1673년 대사간이 되었다. 풍채가 단아하고 성격이 온화하여 일찍부터 덕망을 얻어 중요관직을 역임하였다. 문예에도 조예가 있어 문장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16世 이단하(李端夏)

1625(인조 3)∼1689(숙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계주(季周), 호는 외재(畏齋)·송간(松磵). 판서 식(植)의 아들이다. 

음보(蔭補)로 벼슬에 나아가 공조좌랑으로 재직중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그뒤 정언·부교리·용안현감·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1669년 이조정랑이 되어 각사(各司) 노비의 공안(貢案)을 정리할 것을 청하여 신공(身貢)을 반 필씩 감하게 하였다. 이어 교리로 경서교정청(經書校正廳)의 교정관이 되고, 훈련별대(訓鍊別隊)의 창설을 주청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그뒤 응교·사간·사인 등을 역임하고, 1671년 동부승지가 되고 다음해 이조참의가 되어 중종의 폐비 신씨(愼氏)의 신주를 신씨 본손의 집으로 옮기게 하였고, 1674년 대사성으로 양관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풀려나와 이듬해 홍문관제학이 되어 《현종개수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682년 대사헌으로 각릉 기신(忌辰) 제사에 유과(油果) 및 과일 위에 덮는 채색꽃을 감하여 제사비용을 줄이도록 하였고, 1684년 예조판서가 되어 〈사창절목 社倉節目〉과 《선묘보감 宣廟寶鑑》을 지어올렸다. 1686년 우의정이 되어 사창설치의 다섯 가지 이익을 건의하였고, 죽을 죄인에 대하여 삼복(三覆:三審制)을 실시할 것을 청하였다.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행판돈녕부사로 있다가 돌아 가셨다. 송시열의 문하에서 자라나 조선 후기 경학에 있어서 대표할만한 학자이다. 용안(龍安)에 영당이 있다. 저서로는 문집인 《외재집》과 편서로 《북관지 北關誌》가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6世 이동명(李東溟)

1624(인조 2)∼1692(숙종 18).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백종(白宗), 호는 학정(鶴汀). 군수 즙(楫)의 아들이다.

1652년(효종 3)에 생원이 되고, 그해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경주부윤·예조참의·서천군수를 역임하고, 여섯번이나 승정원에서 근무하였으며, 상신 이시백(李時白)과 판서 송준길(宋浚吉)을 인조묘정에 추배하자고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뒤 청송부사가 되었다.

 

16世 이광하(李光夏)

1643(인조 21)∼1701(숙종 27).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계이(啓以). 대사간 합(柙 )의 아들이다.

1662년(현종 3) 진사가 되고, 1687년(숙종 13)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사평(司評)·호조좌랑을 거쳐 여러 주군(州郡)을 다스리고, 1694년에는 수원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좌승지·한성부우윤을 거쳐 함경도관찰사가 되었다. 이해는 전국적으로 대흉년이 들어 도내 각 지역에서 아사자가 속출하였다.

 

이때 그는 기민(飢民)을 구제하기 위하여 병영의 창고에 비축된 곡식을 풀어 나누어주는 한편, 당시 함경도에서 많이 생산되던 생선과 소금을 남쪽지역에 보내어 곡식과 쌀로 바꾸어 굶주린 백성들에게 배급하였다. 뿐만 아니라, 경사(京司)에 공납하여야 할 곡식마저 구제용으로 쓰는 등 많은 인정을 베풀었다. 이러한 공으로 그가 관찰사직에서 떠날 때 백성들은 송덕비를 세워 칭송하였다.

 

그뒤 병조·형조의 참판과 한성부판윤을 거쳐, 1700년 동지사의 정사로 임명되어 연경(燕京)에 갔다가 사신들의 숙소였던 옥하관(玉河館)에서 돌아 가셨다. 이듬해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함흥의 문회서원(文會書院)의 별사(別祠), 경성의 광혜사(光惠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익(貞翼)이다.

 

16世 이희무(李喜茂)

1649(인조 27)∼1708(숙종 3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무경(茂卿).호는 석촌(石村). 예조참판 경헌(景憲)의 손자다. 

12,13세에 경사(經史)의 뜻에 통하였고 약관에 진사가 되었다. 1681년(숙종 7) 희릉참봉(禧陵參奉)이 되고, 1689년 영평현감이 되었으나 관찰사와 마음이 맞지 않아 사직하였다.

 

1691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지평·정언·헌납 등을 거쳐, 1695년 동래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홍문관에 등용된 후 보덕·강릉부사·사간을 지내고, 1698년 시독관(侍讀官)으로서 사전(私錢)의 주조를 엄금하도록 건의하였다. 그뒤 승지를 지내고, 당쟁은 나라를 망치게 하는 근원이라 하여 배격하였다.

 

1702년 강원도관찰사로 있을 때 양구현 등 여러 군현은 사옹원(司饔院)에서 그릇을 굽기 위하여 요구한 백토(白土) 상공(上供)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는 양구지역의 백토가 고갈되어 백성들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점을 상소하여 이를 면제시키도록 함으로써 백성들의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대사간으로 재임시 정식(鄭#식03)이 이이명(李#이96命)·조태채(趙泰采)를 탄핵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 사건을 편협하게 처리한 사간 윤헌주(尹憲柱)를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그리고 신완(申琓)이 사복시(司僕寺)를 관장할 때 간사한 무리의 말을 듣고 당진·태안의 민전(民田)을 빼앗자, 그를탄핵하여 백성들에게 되돌려주게 하니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1705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조참의가 되고, 이어 호조참판을 거쳐 1707년 개성유수가 되었다.

 

17世 이여(李畬)

1645(인조 23)∼1718(숙종 44).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자삼(子三) 또는 치보(治甫), 호는 포음(浦陰) 또는 수곡(睡谷). 시정(寺正) 신하(紳夏)의 아들이다. 1662년(현종 3)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80년(숙종 6)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고, 다음해에 홍문록(弘文錄)에 등재되고 정자가 되었다.

 

이어서 독서당(讀書堂)에 들어갔고, 박사·수찬을 거쳐 1683년 암행어사로 강원도에 파견되었다. 이후 헌납·이조좌랑·이조정랑·부응교·집의·사간 등을 역임하고, 1685년 승지에 발탁되었다. 이어 부제학·대사성·이조참의·대사간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1694년 중궁복위 및 갑술환국에 적극 참여하여 형조참판에 발탁되었고, 다음해 도승지를 거쳐 이조참판이 되었는데, 이때 재해로 인한 농촌피폐에 대한 수습책을 상소하였다. 이어서 공조참판·한성판윤·대사헌·좌참찬을 거쳐 양관대제학에 올라 대사성을 겸하니 조부이신 택당공과 의재공을 잇는 三代 문형으로 문중의 큰 영예였다.

 

예조판서·이조판서·판의금부사 등을 거쳐 1702년 좌의정이 되었고, 곧 영의정에 승배(陞拜)되었다.

1712년 처음으로 덕수이씨 세보를 편찬 간행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17世 이선부(李善溥)

1646(인조 24)∼1721(경종 1).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계천(季泉), 호는 육송(六松). 관하(觀夏)의 아들이다. 

1673년(현종 14) 춘당대시(春塘臺試)에 병과로 급제하고 고창현감·지평·정언·헌납·사간·집의를 거쳐 1696년(숙종 22)충청도관찰사와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710년에는 대사간, 이듬해 함경도관찰사를 지냈으며, 1713년에는 비국(備局)이 그의 건의로 북도 친기위(親騎衛)개혁안을 제출하기도 하였다. 1714년 경기감사, 1716년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기로소에 들어가 김창집(金昌集)· 신임(申#임08) 등과 같이 기영회(耆英會)에 참가하였다. 풍채와 위의(威儀)가 엄숙하고 정려(整慮)하였으며 술을 좋아하는 호탕한 성품이었다.

 

17世 이선원(李善源)

1632(인조 10)∼1684(숙종 10).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경보(敬甫). 좌의정 행(荇)의 6대손이며, 진위현령(振威縣令) 관하(觀夏)의 아들이다. 문사(文詞)에 능하여 젊어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1669년(현종 10)36세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 정자·저작·박사, 성균관 전적·직강, 병조 좌랑·정랑, 사간원정언·해운판관(海運判官)·사헌부장령, 영평(永平)·문의(文義)의 현령, 통례원통례(通禮院通禮)·울산부사 등의 내외직을 역임하였고, 제원찰방(濟源察訪)·진주목사·풍기군수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世 이당(李)

1661(현종 2)∼1712(숙종 38).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의숙(猗叔). 실학자 식(植)의 손자로, 예빈시정 신하(紳夏)의 아들이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모친상에 3년을 시묘하였다.  1704년 음보로 사산감역(四山監役)에 기용되고 이듬해 세자익위사시직이 되었으며, 이듬해 부수(副率)에 올랐다.

 

1707년 사복시주부가 되고, 이어서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1709년 양구현감이 되어서는 백성을 아끼는 정치를 행하여 백성에게는 너그럽고 공평하게 대하고 토호와 아전들의 횡포를 막아 죄를 범하는 자는 지위의 고하와 권력의 유무를 막론하고 엄격하게 다스렸다.

 

1712년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일찍이 금강산에 들어갔다가 김창흡(金昌翕)과 설악에서 만나 시문을 논하다가 막역한 친구가 되었다. 시를 잘하여 청이간담(淸易簡淡)하면서도 격에 잘 맞았다.

 

17世 이집(李潗)

1664(현종 5)∼1733(영조9).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노천(老泉), 호는 취촌(醉村). 안눌(安訥)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한성판윤 광하(光夏)이다. 1684년(숙종 10)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169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705년 겸문학으로 김재(金栽)를 논척하였다.

 

1707년 다시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 1710년 승지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다. 경종 때 예조참판·황해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영조초 예조판서·이조판서 등을 거쳐, 1729년(영조 5)우의정이 되어 실록청총재관으로 《경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글씨에 뛰어났으며, 작품으로는 〈백세청풍비 百世淸風碑〉·〈청성묘비 淸聖廟碑〉 등의 글씨가 있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17世 이봉상(李鳳祥)

1676(숙종 2)∼1728(영조 4). 조선 후기의 순절자. 자는 의숙(儀叔). 순신(舜臣)의 5대손이다.

1702년(숙종 28)무과에 급제하였으며 경종의 재위 중에 포도대장·훈련원도정·삼도수군통제사·총융사·한성부우윤 등을 역임하였다.

 

1725년(영조 1)형조참판으로서 훈련금위대장을 겸임 하였다.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가 반란을 일으켜 청주를 함락하였을 때 작은아버지 홍무(弘茂)와 함께 반란군에게 붙잡혀 돌아 가셨다. 충청감영에 들어온 이인좌가 항복할 것을 권하였지만 충무가(忠武家)의 충의(忠義)를 내세워 끝내 굽히지 않았다 한다.

 

어사 이도겸(李道謙)이 청주로부터 돌아와 그 순절을 전하자, 영조는 정려를 세우고 좌찬성에 추증하였으며, 후에 헌종이 청주에 표충사(表忠祠)를 세워 제향하게 하였다. 시호는 충민 (忠愍)이다.

 

18世 이형진(李衡鎭)

1675(숙종 1)∼1757(영조 33).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호는 백애(白崖). 아버지는 현감 유(留)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큰아버지의 교도(敎導)를 받았으며, 1721년(경종 1) 생원시에 합격하고, 1725년(영조 1) 영릉참봉(寧陵參奉)에 제수되어 태릉참봉(泰陵參奉)을 거쳐 중훈대부(中訓大夫)로서 의영고봉사(義盈庫奉事)가 되었다.

 

그뒤 형조좌랑으로서 정읍현감이 되었으며,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서 호조·공조의 좌랑으로 있다가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전보되었다. 뒤에 돈녕부도정에 제수되고,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저서로는 백애유고( 白崖遺稿)가 남아 있다.

 

18世 이기진(李箕鎭)

1687(숙종 13)∼1755(영조 31).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군범(君範), 호는 목곡(牧谷). 양구현감 당의 아들로, 큰아버지인 삼척부사 번(蕃)에게 입양되었다. 1717년(숙종 43)에 진사가 되고, 같은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홍문관에서 재직하였다. 

 

1724년 홍문관교리가 되고, 이듬해 시독관(侍讀官)이 되었다. 1725년(영조 1)에 승지를 지내고, 이조참의를 거쳐 1727년에 부제학 등을 역임하고 강화부유수가 되었다. 그 뒤 향리에 머물고 있던 중, 1728년 이인좌(李麟佐) 등 소론 일파가 밀풍군 탄(密豊君坦:소현세자의 嫡孫)을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급거 상경하여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이 반란이 평정되자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있다가 1729년 재차 벼슬길에 올라 함경도관찰사를 지내고, 이어서 언관으로서 최고직인 대사간을 지내고, 경상도관찰사·형조판서·경기도관찰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741년 판의금부사·이조판서를 지내고, 1744년 홍주목사를 거쳐 이듬해 다시 경기도관찰사· 판의금부사를 지내고, 이어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1749년에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51년 광주부유수로 《한봉도 汗峰圖》를 지어 올렸고, 판돈녕부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저서로는 《목곡집》이 있고, 덕수이씨 세보 2간을 간행했다.

 

18世 이주진(李周鎭)

1691(숙종 17)∼1749(영조 25).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문보(文甫), 호는 탄옹(炭翁). 아버지는 좌의정 집이다.

1714년(숙종 40)생원시에 합격하고, 1725년(영조 1)통덕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27년 설서에 이어 이듬해 검열·대교·봉교·전적 등을 역임하였는데, 대교로 있을 때에는 인군에게 필요한 일로 경천(敬天)·휼민 (恤民)·전학(典學)·납간(納諫)·임현(任賢)·진강(振綱)의 6개조를 들어 상소하였다.

 

1730년 정언에 이어, 1731년 지평, 이듬해 병조정랑·문학·필선 등의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였다. 1733년 부수찬·헌납·지평·교리·응교·사복시정 등을 거쳐, 1736년 시독관(侍讀官)·검토관·이조정랑·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737년 공홍감사(公洪監司)·승지에 이어, 이듬해 전라감사로 나갔고, 1740년 공조·형조·호조·예조 참판과 도승지·한성부우윤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1742년 평안도관찰사로 나갔으며, 이듬해 예조참판이 되었다.

 

1744년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되고, 이조·병조·예조·형조·공조 판서를 거쳐 지중추부사로 내의원(內醫院)·봉상시(奉常寺)·선공감(繕工監)·선혜청(宣惠廳)·사역원(司譯院)·평시서(平市署)·사복시 등의 제조를 역임하였다.

 

1746년 경기도관찰사로 나갔으며, 1747년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승계되고 판돈녕부사가 되었다. 비용을 절감하여 국력의 충실에 힘썼고, 불편부당의 자세로 소신껏 진언하였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18世 이한응(李漢膺)

1711(숙종 37)∼1779(정조3) 조선후기의 무신. 자는 사준(士俊). 순신(舜臣)의 증손이며, 통제사 언상(彦祥)의 아들이다.

1752년(영조 28)에 선전관이 되었는데 영조에게 직언을 간하다가 영해로 귀양갔다.

 

1758년 경상좌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뒤 1768년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하였고, 1776년 총융사에 임명되었다.

1777년(정조 1)에 금위대장·우포도대장을 거쳐 이듬해 어영대장을 역임하였다.

 

19世 이은(李溵)

1722(경종 2)∼1781(정조 5).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치호(稚浩), 호는 첨재(瞻齋). 병조판서 주진(周鎭)의 아들이다.

1740년(영조 16)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음보로 남평현감을 지냈으며, 1759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교리가 되고 1764년에 사직이 되었다. 1767년에 대사헌이 되었다가 뒤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1772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1775년에 판중추부사로 왕세손에게 국정을 대행시키는 문제로 논란이 일어났을 때 지지파인 서명선(徐命善)을 도운 공으로 정조가 국정을 대리하게 되면서 좌·우의정이 되었다.

 

1777년에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로 청나라에 가서 《고금도서집성 古今圖書集成》 5, 020권을 구득하여왔다. 그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으며, 그 이듬해에 다시 심양문안사(瀋陽問安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좌의정으로 있다가 1780년에 사직하였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19世 이담(李潭)

1723(경종 3)∼1775(영조 51).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경룡(景龍). 현감 당(簹)의 손자로, 익진(翼鎭)의 아들이다.

1747년(영조 23)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751년 부평부사를 역임한 뒤, 1756년 봉사가 되었다. 이해 봉사로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을 거쳐 이듬해 정언이 되었다.

 

1759년 북평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돌아와 교리를 역임한 뒤, 다시 면천군수로 나갔다. 그뒤 1763년 대사간에 올랐다. 이어 이듬해 승지가 되고 1766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으며, 1768년 부제학으로 중앙에 돌아와 이듬해 공조참판이 되었다.

 

1770년 편집청당상으로 《동국문헌비고》 편찬에 참여한 공으로 가자되었다. 그 뒤 1771년 이조참판이 되고 이듬해 다시 대사간을 역임한 뒤, 1773년 이조판서, 1775년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19世 이인수(李仁秀)

1737(영조 13)∼1813(순조 13). 조선 후기의 무신. 자는 성빈(聖賓). 충무공(忠武公) 순신(舜臣)의 후손이며, 금위대장(禁衛大將) 한응(漢膺)의 아들이다. 무재(武才)를 인정받아 1784년(정조 8)에는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올랐고, 삼도수군통제사 등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강직하여 1803년(순조 3)에는 총융사로 있었으며, 좌우포도대장을 거쳐 1807년에는 금위대장에 임명되었고 다시 총융사·금위대장·훈련대장에 임명되었다.

 

20世 이병모(李秉模)

1742(영조17)∼1806(순조 6).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이칙(彛則), 호는 정수재(靜修齋). 단하(端夏)의 현손이며, 연(演)의 아들이다. 1773년(영조 49)진사시를 거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당시 영의정 한익모(韓翼謨)의 주청으로 6품에 올랐다.

 

경기지방·관동지방을 암행하고,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김상로(金尙魯)의 죄를 탄핵하였다. 이조좌랑·대사간·예조참의를 거쳐 이조참의에 임명되었고 국조보감찬집당상(國朝寶鑑纂輯堂上)· 우부승지·동래부사·대사간 등을 거쳐 경상도관찰사로 재임중인 1784년에 《돈효록 敦孝錄》을 간행하였다.

 

이어 대사성·이조참판·예조판서·형조판서·호조판서·병조판서·예문관제학·홍문관제학·함경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 등을 거쳐 1794년 우의정에 임명되고, 좌의정을 거쳐 1799년 영의정이 되었다. 그동안 1778년 동지부사(冬至副使), 1795년 진하사(進賀使) 등으로 중국에 다녀왔으며, 1800년에도 책봉주청사(冊封奏請使)로 사행(使行) 중에 정조의 상을 당하였다.

 

순조가 즉위하자 실록총재관에 임명되고, 1803년(순조 3)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20世 이익모(李翊模)

1747(영조 23)∼1812(순조 12).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여간(汝豤)으로, 형(瀅)의 아들이다. 한양에서 자랐으며 문음(門蔭)으로 관직에 올라 봉사로 있으면서 1790년(정조 14) 증광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록(弘文錄)·도당록(都堂錄)에 올랐다.

 

1796년 사헌부집의로 재임시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순조가 즉위하자 《정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이조참판·홍문관부제학·한성부판윤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1806년(순조 6) 대사헌에 임명 되었다.

 

20世 이항권(李恒權)

1783(정조7)∼1835(헌종1). 조선 후기의 무신. 자는 중구(仲久). 순신(舜臣)의 8대 손으로 좌승지 진수(晋秀)의 아들이다.

1808년(순조 8) 문음(門蔭)으로 선전관이 된 뒤, 그 이듬해 무과에 다시 급제하여 별군직에 올라 궁궐을 숙위(宿衛)하였다.

 

그 뒤 승진을 거듭하여 1820년 황해도수군절도사가 되었으며 그로부터 4년 후에는 전라도 병마절도사에 취임하였고, 1827년 다시 황해도병마절도사에 올라 지방을 방어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평소 어떤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나 빈틈없이 철저한 동시에 조리가 있었고, 특히 순조의 지우(知遇)를 받아서 오랫동안 대궐에 출입하여 궁중의 일을 소상히 알고 있었으나 이를 외부에 나가서 한번도 말한 적이 없었으며, 아울러 직무를 수행하면서는 한번도 질병 등을 핑계하지 않고 부지런히 노력하여 모범이 되었다.

 

더구나 국사를 30여년간이나 다루면서 중책을 맡아왔으나 한번도 사사로운 일을 가지고 남에게 간섭하지 않았다.

이와같은 일련의 사실들이 인정되어 1830년에는 3도수군통제사라는 막중한 지위에 올라 전국의 수군을 총지휘하게 되었다.

 

이렇게 대소의 외직을 여러 번 거치면서 이르는 곳마다 큰 치적을 쌓았으며,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취임하여 훈련원과 금위영, 그리고 어영청의 중군별장이 되었다.

 

21世 이노춘(李魯春)

1752(영조 28)∼1821(순조21)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군정(君正). 여주출신. 동지돈녕부사 용모(龍模)의 아들이다. 

1779년(정조 3) 유생강제(儒生講製)에서 제거수(製居首)가 되었으며, 178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홍문관에 등용되었다.

 

1782년 강화경력(江華經歷)이 되고 이듬해 교리·부응교·서장관을 거쳐1785년 흑산도에 안치되었다가 1799년에 풀려나 이조참의가 되었다. 1800년(순조 즉위년) 강원도관찰사가 되고, 1802년 실록청당상으로 《정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대사성이 되었다. 1803년 예조참판이 되었다. 편서로 《홍문관지 弘文館志》가 있다.

 

21世 이노익(李魯益)

1767(영조 43)∼1821(순조 21). 조선 후기의 문신자는 군수(君受), 호는 탄초(灘樵). 영의정 병모(秉模)의 아들이다.

1790년(정조 14) 음보로 관직에 나가 부사과를 지낸 뒤, 1805년(순조 5)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홍문록(弘文錄)에 등록되었다. 직각·부교리에 이어 1809년 선교관(宣敎官)을 거쳐 1812년 보덕을 역임하였다.

 

그뒤 1815년 원소제조(園所提調)를 거쳐 1818년 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1819년 대사헌·형조판서를 역임하고 진하정사(進賀正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820년 예조판서에 이어 한성부판윤·좌부빈객(左副賓客)을 겸하였다. 이듬해 평안도관찰사로 나갔으나 임지에서 돌아 가셨다.

 

21世 이원희(李元熙)

1805(순조5)∼1888(고종 25). 조선 말기의 무신. 자는 선장(善長). 선전관 익권(益權)의 아들이다. 여러 무관직을 두루 역임한 뒤 1858년(철종 9)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오르고, 이듬해 우포도대장 올랐다.

 

1864년(고종 1) 황해병사를 거쳐 1866년 행호군이 되었다가 병인양요로 인하여 프랑스군대를 물리치기 위하여 총융청(總戎廳) 중군으로 임명되어 강화에 파견되었다. 그해 10월 강화도 양화진(楊花津)에 진을 친 뒤 프랑스군대에 대항하여 싸웠으며, 소모사(召募使)가 되어 경기일원의 장정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그뒤 11월 다시 우포도대장이 되었고, 1869년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이듬해 어영대장·훈련대장·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같은해 7월 공조판서에 임명되고, 1871년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를지냈다. 시호는 정희(靖僖)이다.

 

21世 이필희(李弼熙)

1857(철종 8)∼1900. 조선 말기의 의병장. 자는 만여(萬汝), 호는 실곡(實谷). 서울출신. 주로 단양 매포(梅浦)에서 살았다. 1878년 무과에 급제, 관직에 있던 중 변복령(變服令)이 내려지자 단양으로 퇴거하였다.

 

이항로(李恒老)의 고제(高弟) 유중교(柳重敎)가 1889년 제천에서 강학을 하자 그의 문하에 나아가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입각한 존화양이(尊華攘夷)정신을 체인(體認)하였며, 이어 1893년 유중교 사후에는 유인석(柳麟錫)을 스승으로 섬기게 되었다.

 

그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인하여 항일의 기운이 전국적으로 고조되자, 같은 문인인 이춘영(李春永)과 안승(安承禹)가 1895년 11월 28일(음) 지평(砥平)에서 김백선(金伯先)의 포군(砲軍)을 주축으로 거의(擧義)한 뒤 제천으로 들어가 군수 김익진(金益珍)을 몰아내었다.

 

제천에서 이 두 사람과, 역시 동문인 서상렬(徐相烈)·신지수(申芝秀)·이범직(李範稷) 등의 추대로 의병대장에 올라, 군사(軍師) 서상렬, 중군장 이춘영, 선봉장 김백선 등의 편제를 갖추고 전열을 정비한 뒤 12월 5일 단양으로 진군, 군수 권축(權潚)을 구금하고, 같은달 8일 공주병참 소속의 관군 및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으로 영월로 퇴각하자, 같은달 15일 이곳에서 유인석이 총대장에 올라 제천의병의 본격적인 활동이 개시되었다. 이때 그는 진동별모장(鎭東別募將)에 임명되어 유치경(兪致慶)·정화용(鄭華鎔) 등과 함께 서북지방으로 파견되어 강병모집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활동이 여의치 못하자, 중국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원병을 요청하고자 송상규(宋尙奎)·유치경 등과 함께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 계획도 실패하게 되자, 취푸(曲阜)로 가 공자상(孔子像)을 봉안하고 돌아왔다.

 

그뒤 유인석의 명을 받고 성묘(聖廟)를 건립할 장인(匠人)을 구하여 팔왕동(八王洞)으로 돌아오던 중 1900년 3월 흥도진(興道津)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하여 죽었다.

 

22世 이규석(李奎奭)

1835(헌종1)~1894(고종31). 조선 말기의 무신.자는 군백(君伯). 부총관 관희(觀熙)의 둘째아들로서 병마절도사 겸희(謙熙)의 아들로 입계되였다. 1864년(고종 1) 경상좌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된 이래 함경북도병마절도사·평안도병마절도사·3도수군통제사를 역임 했다.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수구파정권이 등장하자 다시 친군영좌영사(親軍營左營使)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친군영후영사·협판내무부사·공조판서·춘천부유수 등을 지냈으며, 1894년 제1차 김홍집내각(金弘集內閣)이 성립되자 이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26世 이정렬(李定烈)

1900∼1962. 독립운동가. 일명 방(芳)·윤봉조(尹鳳朝). 자는 만위(晩瑋), 호는 춘호(春湖)·한정(漢汀)·법명(法明). 충청남도 당진출생. 종백(鍾百)의 아들로 현(賢)에게 입양되었다. 경성법정전수학교(京城法政專修學校)를 졸업하였다. 통훈대부행효덕전참봉(通訓大夫行孝德殿參奉)을 지냈다.

 

1919년 3·1운동 때 종로 경찰서에 유치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같은해 10월 사유토지(200석 추수분)를 매각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운동자금 모금원인 강태동(姜泰東)을 통하여 전달하였다. 1921년 5월 사유토지(270석 추수분)를 다시 매각하여 그 대금전액을 휴대하고 그해 6월 임경호(林京鎬) 등과 같이 북경으로 가서 이회영(李會榮)에게 헌납하였다.

 

여기에서 약 1년간 조성환(曺成煥)·김좌진(金佐鎭)·이세영(李世永) 등과 접촉하는 한편, 김원봉(金元鳳)·유석현(劉錫鉉)·유근(柳瑾) 등 10여명의 독립지사와 독립운동의 방략을 협의하였으며, 1922년 4월 자금조달차 국내에 잠입하였다가 서울에서 일본경찰에 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그 뒤 다시 사유토지(150석분)를 매각, 강태동을 통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헌납하였다. 1924년 가을 사유토지 230석분을 매각한 대금을 휴대하고 민효식(閔孝植) 등과 같이 상해에 가서 이시영(李始榮)에게 헌납하고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김창숙(金昌淑)·신익희(申翼熙) 등과 접촉하여 군자금 문제를 협의하였다.

 

1929년에도 잔여 사유재산을 전부 매각하여 이시영에게 헌납하였으며, 1932∼1945년까지 이시영의 지령하에 자금조달을 위하여 국내에 위장 입국한 뒤 평안북도 구성·삭주 등지에서 광산을 경영하였다. 여기에서 나오는 수익을 매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송금 헌납하고 광산은 독립운동가의 회합장소로 제공하였다.

 

1945년 2월 김구의 지령에 따라 국내 밀파 행동대원 60명의 군량조달의 사명을 받고 이를 주선하였으나 비밀이 누설되어 여의하지 못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26世 이창렬(李昌烈)

이창렬 고대 경제학 교수

 

1917∼1974. 경제학자.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경제학과교수. 경제학박사. 대학교수인 동시에 정책자문위원으로서 경제계·정계 등에서 활약하였다. 1940년 4월 일본의 제이고등학교(第二高等學校)에 입학하였고, 1942년 9월의 졸업과 동시에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법학부 정치학과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2년 후인 1945년 8월 광복을 맞이하여 동경제국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1946년 6월 경성대학(京城大學)에서 법학사의 학위를 받았다. 1946년 8월∼1950년 10월까지 식산은행(殖産銀行)조사부에서 근무하였고, 1951년 11월∼1955년 11월까지는 한국은행 조사부에서 근무하였다.



1947년 10월∼1950년 6월까지는 단국대학교에서 강의를 맡기도 하였으며, 1954년 4월 이후에는 고려대학교에서 강의를 하여 조교수와 부교수를 거쳐 1957년 10월 교수로 승진하였다.

 

1957년 《국제경제기초이론》, 1962년 《한국경제의 구조와 순환》, 1966년 《한국의 금융과 자본동원》 등의 저서를 간행하였다. 1967년 〈한국금융시장의 구성과 기능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고려대학교에서 경제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58년 4월 부흥부산업개발위원회(復興部産業開發委員會)고문을 비롯, 1963년 8월 재정금융위원회 위원, 1967년 7월 경제과학심의회의 위원등 각종 정책자문위원을 지냈다. 1975년 9월 그가 발표해온 금융정책에 관한 논문들을 모아 《한국금융정책의 전개과정》이라는 기념논문집이 고승제(高承濟) 등의 편찬위원들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