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일본사(日本史)

임나일본부설 고찰(任那日本府 說 考察)

야촌(1) 2018. 1. 15. 12:26

■임나 일본부설 고찰(任那日本府說考察)

 

1. 정의

    왜가 4세기 중엽에 가야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벌해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학설이다.

 

2. 내용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이라고도 한다.

이는 일제가 그들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해 낸 식민사관 중에서, 한국사의 전개과정이 고대부터 외세의 간섭과 압제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타율성이론의 대표적인 산물의 하나이다.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7]에도 『고사기(古事記)』·『일본서기(日本書紀)』 등의 일본고전을 연구하는 국학자들은 그를 통해 태고 때부터의 일본의 조선 지배를 주장하였다.

 

그 뒤 메이지 연간(明治年間, 1868∼1911)에 문헌고증의 근대 역사학이 성립되면서, 국학연구의 전통을 이어받은 간[菅政友]·쓰다[津田左右吉]·이마니시[今西龍]·아유가이[鮎貝房之進] 등은 일본의 임나 지배를 전제하고 주로 임나관계의 지명 고증작업을 행하였다.

 

이어 스에마쓰[末松保和]는 『대일본사(大日本史)』(1933)의 한 편으로 「일한관계(日韓關係)」를 정리했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학문적 체계를 갖춘 남선경영론을 완성시켰으니, 그것이 『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1949)였다. 그의 임나일본부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삼국지』 위서 왜인전 서두의 문구로 보아, 3세기 중엽에 이미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즉 임나가라를 점

           유하고, 왕은 그 중계지를 통해 삼한에 통제력을 미치고 있었다.

 

둘째,『일본서기』진쿠황후[神功皇后] 49년조의 7국 및 4읍 평정기사로 보아, 369년 당시 왜는 지금의 경상남북

           도 대부분평정하고, 전라남북도와 충청남도 일부를 귀복시켜 임나 지배체제를 성립시키고, 백제왕의 조공

           을 서약 받았다.

 

셋째, 광개토왕비문의 기사로 보아, 왜는 400년 전후해서 고구려군과 전쟁을 통해 임나를 공고히 하고 백제에 대

           한  관계를 강화하였다.

 

넷째,『송서(宋書)』 왜국전에 나오는 왜 5왕의 작호로 보아, 일본은 5세기에 외교적인 수단으로 왜·신라·임나·

           가라에 대영유권을 중국 남조로부터 인정받았으며, 백제의 지배까지 송나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였다.

 

다섯째, 『남제서(南齊書)』 가라국전 및 『일본서기』 게이타이왕[繼體王] 때의 기사들로 보아, 일본은 5세기

               후반에 임나에 대한 통제력이 완화되기 시작해 6세기 초반에는 백제에게 전라남북도 일대의 임나땅을 할

               양해 주기도하고, 신라에게 남가라(南加羅) 등을 약탈당하기도 하면서 임나가 쇠퇴하였다.

 

여섯째,『일본서기』긴메이왕[欽明王] 때의 기사들로 보아, 540년대 이후 백제와 임나일본부는 임나의 부흥을

               꾀했으나, 국 562년에 신라가 임나 관가를 토멸함으로써 임나가 멸망하였다.

 

일곱째, 그 뒤에도 일본은 임나 고지에 대한 연고권을 가져서 646년까지 신라에게 임나의 조(調)를 요구해 받아

              내었다. 즉, 임나일본부설은 왜왕권이 한반도의 임나지역을 정벌해 현지에 설치한 직할통치기관으로서,

             왜는 이를 기반하여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200년간 가야를 비롯해 백제·신라 등의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다.

 

그러나 임나일본부설의 주요 근거사료인 『일본서기』는 8세기 초에 일본왕가를 미화하기 위해 편찬된 책으로서, 원사료 편찬과정에 상당한 조작이 가해졌다. 특히 5세기 이전의 기록은 대체로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려우며, 「광개토왕비문」이나 『송서』 왜국전의 문헌기록은 과장되게 해석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헌사료상의 문제점 외에 그 주장의 사실관계만 검토해 보아도 임나일본부설의 한계성은 곧 드러난다. 

김석형(金錫亨)의 연구에 따르면, 기나이[畿內]의 야마토세력[大和勢力]이 주변의 일본열도를 통합하기 시작한 것은 6세기에 들어서야 겨우 가능했다고 하며, 이러한 견해는 일본학계에서도 이제 통설화 되어 있다.

 

그렇다면 야마토 국가가 멀리 떨어진 남한을 4세기부터 경영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없는 것이며, 이는 내부 성장과정을 고려하지 않고 대외관계를 우선적으로 언급한 일본고대사 자체의 맹점이었다. 

 

또한, 왜가 임나를 200년 동안이나 군사적으로 지배했다면 그 지역에 일본 문화유물의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야 하는데, 가야지역 고분 발굴자료들에 의하면 4세기 이전의 유물문화가 5, 6세기까지도 연속적으로 계승되는 양상이 나타난다.

 

즉, 일본에 의해 지배당했다는 증거가 문화유물에 반영된 바 없으므로, 임나일본부설에서의 문헌사료 해석이 크게 잘못되었음이 입증되는 것이다. 스에마쓰에 의해 학문적으로 정립된 임나일본부설은 오랫동안 일본고대사 연구자들 사이에 정설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김석형의 일본고대사 자체에 대한 반론이 1960년대에 발표되자, 그 충격에 의해 1970년대 이후 일본사학계에서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재검토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노우에[井上秀雄]는 『일본서기』의 사료계통의 원전을 분석, 부레쓰기[武烈紀] 이전 기록의 신빙성을 의문시하고 그들 기록에 의한 더 이상의 상상을 배제하였다.

 

반면 「광개토왕비문」에 나타나는 4세기 말의 왜군이나 긴메이기[欽明紀]에 나타나는 6세기 전반의 임나일본부에 관한 기록은 신뢰할 수 있되 이들은 야마토왕조에서 파견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실태는 왜인으로 칭하는 임나의 지방호족이 일본의 중앙귀족이나 지방호족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세력을 확대하려 한 것이고, 그들은 백제·신라의 접촉지대에 있던 일본부의 군현을 통치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즉, 임나일본부는 왜인을 자칭하는 가야의 한 지방세력에 의한 독립소국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인학자의 연구결과 중에서 왜왕권의 임나지배를 부인한 최초의 것이다. 

 

우케다[請田正幸]는 사료상으로 임나일본부는 6세기 전반의 안라(安羅: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에 있던 일본부만을 가리키며, ‘일본부(日本府)’의 고훈(古訓)은 ‘야마토노미코토모치’로 그 뜻은 일본왕이 임시로 파견한 사신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요시다[吉田晶]도 우케다와 비슷한 입장에 서면서, 6세기 전반의 기나이 세력은 국가형성의 주체세력으로서 한반도의 선진문물을 독점하는 것에 주안을 두고 임나에 사신을 파견한 것이므로, 일본부는 왜왕권에서 파견된 관인(官人)과 가라제국의 한기층(旱岐層)으로 구성되어 상호간의 외교 등 중요사항을 논의하는 회의체였다고 보았다.

 

거의 같은 시기에 기토[鬼頭淸明]는 우케다나 요시다와 같은 견해이면서도, 당시에 관인을 파견해 임나일본부에 의한 공납 수령체제를 형성시킨 주체인 왜는 야마토 왕권이 아니고 그에 선행하는 일본열도 내 별개의 정치세력일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야마오[山尾幸久]는 『일본서기』의 기사들을 재검토하고 백제사와의 관련성을 첨가해, 왜왕권이 임나 경영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5세기 후반 백제의 대신이면서 임나의 지배자였던 목만치(木滿致)가 왜국으로 이주한 이후부터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를 맞이함으로써 임나에 대한 연고권을 갖게 된 왜왕권이 가야지역에 관인을 파견해 구성한 것이 임나일본부이며, 5세기 후반에는 직접 경영이었고, 6세기 전반에는 백제왕을 사이에 낀 간접 경영이었다고 주장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 오야마[大山誠一]는 6세기 전반에 백제·신라에 의해 독립을 위협받던 가야제국과 현지 거주의 일계인(日系人)이 야마토 왕조에 요청해, 게이타이왕 26년(532년으로 고증)에 아후미노게나노오미[近江毛野臣]가 파견됨으로써 임나일본부가 성립되었다고 하였다.

 

즉, 가야제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가야제국의 왕과 야마토에서 파견된 관인이 일종의 합의체를 구성한 것이 임나일본부인데, 562년 가야의 멸망과 함께 소멸되었다는 것이다. 

 

최근에 스즈키[鈴木英夫]는 임나일본부의 존립 시기와 의의를 극도로 축약한 연구를 보여주었다. 임나일본부는 가야 재지 지배층의 요청에 의해 530년에 왜왕권에서 게나노오미가 군사집단을 이끌고 안라에 파견됨으로써 성립되었으나, 이듬해 백제군대가 안라로 진주함으로써 실질적인 활동, 즉 임나 지배가 종결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근래의 일본인학자들의 임나관계 연구경향은 종래에 비해 상당한 차이가 나타난다.

 

첫째,『일본서기』의 5세기 이전 사료의 신빙성을 부인함으로써 임나일본부의 성립 시기를 4세기 중엽으로 설정

           하는 고정적 관점에서 후퇴해 대체로 6세기 전반으로 제한해 보고 있다.

 

둘째, 임나일본부의 성격을 왜왕권이 임나를 군사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지배기관이 아니라, 왜왕권이 한반

          도의 선진문물을 독점 수용하기 위해 임나에 파견한 사신 또는 관인집단으로 보고 있다.

 

셋째, 임나일본부의 존립 이유를 왜의 군사적 압제에서 구한다기보다 백제·신라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가

          야제국의 자주적 의지에서 구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의 변화는 종래의 임나일본부설에서 일단 진일보한 것이라고 인정된다. 그러나 임나일본부와 야마토 왕조와의 관계를 부인하는 견해에서 알 수 있듯이, 6세기 이전의 일본고대사가 아직 정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점이라 하겠다.

 

일본열도 내의 기본적인 세력판도를 모르는 상태에서, 모든 대외관계의 주체를 기나이의 왕가로 돌려서 보려는 고정관념이 얼마나 타당할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야재지세력의 자립성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주된 관심을 일본부 자체에 두고 있다. 

 

그리하여 가야지역 내의 가야인의 대응방식에는 소홀하고, 『일본서기』를 찬술한 이래 일본의 일방적인 관점이 강조되어 여전히 실태 파악의 균형을 잃고 있다. 국내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스에마쓰의 임나일본부설을 금기시해 외면하고 체계적 반론을 펴지 않고 있다가 1970년대 후반 이후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천관우(千寬宇)는 『일본서기』의 임나관계 기록들을 재해석, 기록의 주어를 왜왕이 아닌 백제왕으로 봄으로써 ‘왜의 임나 지배’가 아닌 ‘백제의 가야 지배’라는 시각으로 가야사를 복원하고자 하였다.

 

그는 근초고왕이 369년에 가야지역을 정벌해 백제권에 편입시킨 후, 가야 지배를 위해 설치한 파견군사령부가 이른바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그리고 5세기부터 6세기 초에는 군사령부가 김천·달성 등의 낙동강 중·상류방면에 있었고, 530년대 이후에는 진주·함안 등의 낙동강 하류방면에 있었다는 것이다.

 

김현구(金鉉球)는 보다 신중하게 긴메이기의 기록만을 이용해, 임나일본부는 백제가 가야 통치를 위해 설치한 기관이었다는 천관우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6, 7세기 백제와 야마토 사이의 외교관계의 특징을 용병관계(傭兵關係)로 파악하였다.

 

즉, 4세기 후반 이후 백제는 임나에 직할령을 두고 군령(郡令)·성주(城主)를 파견해 다스렸는데, 6세기 전반에는 일본인 계통의 백제 관료와 야마토 정권으로부터의 용병을 배치시켰다는 것이다. 

 

이근우(李根雨)는 게이타이기 이전의 4, 5세기의 상황에 대해서는 천관우의 입론을 수용하면서, 일본열도 내의 세력주체가 6세기 초에 구주(九州)의 왜왕조에서 기나이의 야마토 세력으로 바뀌었다는 점을 주목하였다.

 

그러므로 임나일본부는 원래 구주의 왜왕조와 관련이 있는 문물 수용의 통로였고, 야마토 세력과는 무관한 것이었는데, 6세기 전반에 야마토 세력이 가야 문제에 말려들어 임나일본부에 대한 연고권이 있는 것처럼 인식하게 된 것은 백제의 외교적 술수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다.

 

근래의 국내학자들에 의한 임나관계 연구경향은 백제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인식을 보이고 있다. 

특히, 540년대 이후로 가야지역이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고 지적한 연구성과는 존중되어야 할 것이며, 임나일본부를 구주의 왜왕조와 관련시킨 것도 주목된다고 하겠다.

 

그러나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가야가 백제의 지배 아래에 놓여 있었다고 추정한 점은, 앞에 서술한 가야문화의 전대(前代) 계승적인 경향과 어긋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가야사 및 가야의 문화능력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사료상으로 임나일본부는 백제로부터 명령을 받거나 백제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지 않고 반백제적인 성향을 보인다. 그러므로 이를 백제 군사령부로 보기 어려울 뿐 아니라, 그에 소속된 일본인 계통의 관인을 백제의 군령·성주로 동일시하기도 어렵다는 난점이 있다.

 

그러므로 문헌에 나오는 임나일본부는 가야 문화의 독자성을 배경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광개토왕릉비문」의 신묘년 기사는 매우 불분명한 것이어서, 왜의 임나 지배에 대한 증빙 자료로 활용될 수는 없다.

 

또한 한일간에 근래의 연구 동향에서 『일본서기』의 신공황후 관련 기사를 모두 조작된 전설로 처리해 이를 토대로 임나의 성립을 말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백제본기』가 인용된 『일본서기』의 기사들을 통해, 6세기 전반에 이른바 ‘임나일본부’라는 기구가 가야연맹의 강국 중 하나였던 안라국(安羅國: 지금 경상남도 함안)에 있었다는 것은 인정된다. 

 

530년대는 가야연맹이 신라와 백제의 복속 압력을 받아 맹주국인 대가야의 영도력이 흔들리던 시기였다. 당시 ‘임나일본부‘를 안라국에 설치한 것은 백제였고, 관리들은 친 백제계 왜인들로 구성되었다. 성립 초기의 안라왜신관은 백제·왜 사이의 교역 대행기관의 성격을 가지며, 백제는 이를 통해 안라국(함안)·탁순국(창원)을 거쳐 왜국으로 향하는 교역로를 확보하려고 한 듯하다. 

 

반면에 안라는 ‘일본부’의 존재를 이용해 대왜 교역 중개기지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가야연맹 내에서 북부의 대가야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중심세력으로 대두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안라는 530년대 후반 국제관계의 혼란을 틈타 백제의 의사와 관계없이 ‘임나일본부’의 왜인 관리들을 재편성함으로써 기구를 장악하였다. 

 

그러므로 540년대 이후의 사료상에 나타나는 ‘임나일본부’는 안라왕의 통제를 받는 대왜(對倭) 외무관서로 성격이 변질된 것이며, 그곳의 관리들은 친 안라계 왜인 또는 그들과 가야인 사이의 혼혈계의 인물들로서 안라를 비롯한 가야연맹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가야연맹의 제2인자였던 안라국은 왜와의 교역에서 유리한 입지 조건을 차지하고 있는 이점을 살려 자신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 체제를 도모하기 위해 이를 운영했던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이 외무관서는 실제와 달리 ‘왜국 사절들의 주재관’처럼 표방되어, 가야연맹을 병합하려고 도모하는 백제·신라의 외교적 공세로부터 가야의 독립성을 연장시키는데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550년을 전후해 안라의 왜인 관료 기구가 백제의 압력으로 해체되고 다시 백제의 교역 대행기관으로 변모되었다. 이에 가야의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고, 560년경 안라국이 신라에 병합되면서 결국 이른바 ‘임나일본부’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그런데 ‘일본(日本)’이라는 국명은 7세기 중엽 이후에 성립된 것이므로 6세기 전반에 ‘일본부(日本府)’라는 명칭은 있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왜의 임나 지배’라는 선입견이 들어있는 ‘임나일본부’라는 용어는 폐기하고, 앞으로는 ‘안라에 있던 안라의 왜인 신하들이 일을 보던 곳’이라는 관점에서 ‘안라왜신관(安羅倭臣館)’이라는 이름으로 고쳐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스에마쓰에 의해 정립된 임나일본부설은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비판되고 수정되어, 이제는 학설로서의 생명을 거의 잃었다. 1970년대 이후 본격화된 임나관계의 연구들은 서로 근접된 인식들을 보여주고 있다. 

 

즉,

① 임나일본부의 문제를 6세기 전반에 한정해 취급한다든가,

② 임나일본부의 성격을 지배가 아닌 외교의 측면에서 이해한다든가,

③ 임나문제에 대해 백제와 가야의 역할을 중시한다든가 하는 점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6세기 이전의 가야사 및 일본고대사에 대한 연구가 아직 미진해, 그들 사이의 대외관계사로서의 성격을

     지니임나관계 연구는 더 이상의 규명이 어려운 단계에 와 있다.

 

    그러므로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6세기 중엽 당시 임나일본부의 실체에 대해서는 가야사 및 일본고대사의 체

    계적 연구 이후에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광개토왕릉비문(廣開土王陵碑文)』

『삼국지(三國志)』

『송서(宋書)』

『남제서(南齊書)』

『일본서기(日本書紀)』

『임나일본부연구』(김현구, 일조각, 1993)

『가야연맹사』(김태식, 일조각, 1993)

『초기조일관계연구』(김석형, 사회과학원출판사, 1966)

「가야사연구의 제문제」(김태식,

『한국상고사』, 민음사, 1989)

「일본서기 임나관계기사에 관하여」(이근우, 『청계사학』2, 1985)

「복원가야사」(천관우, 『문학과 지성』28·29·31, 1977·1978)

『大和政權の對外關係硏究』(金鉉球, 吉川弘文館, 1985)

『任那日本府と倭』(井上秀雄, 寧樂社, 1973)

『任那興亡史』(末松保和, 吉川弘文館, 1949)

『任那考』(菅政友, 菅政友全集, 國書刊行會, 1907)

「加耶·百濟と倭: 任那日本府論」(鈴木英夫,

『朝鮮史硏究會論文集』24, 1987)

「所謂任那日本府の成立について」(大山誠一, 『古代文化』32-9, 32-11, 32-12, 1980)

「任那に關する一試論: 史料の檢討を中心に」(山尾幸久, 『古代東アジア史論集』下, 1978)

「任那日本府の檢討」(鬼頭淸明, 『日本古代國家の形成と東アジア』, 校倉書房, 1976)

「古代國家の形成」(吉田晶, 『岩波講座 日本歷史』2, 1975)

「六世紀前期の日朝關係: 任那日本府を中心といて」(請田正幸,

『朝鮮史硏究會論文集』11, 1974)

「日本書紀朝鮮地名攷」(鮎貝房之進, 『雜攷』7, 1937)

「加羅疆域考」(今西龍, 『史林』4-3, 4-4, 1919)

「任那疆域考」(津田左右吉, 『朝鮮歷史地理硏究』1,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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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능비(廣開土大王陵碑)

 

광개토대왕릉비는 조선초기부터 우리에게 알려져 있었으나 우리 조상들은 여진의 영토에 있고 여진의 역사라고 평가하여 연구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 1877년 관월산(關月山)이라는 자가 왕릉비를 발견하였는데, 비 전체가 이끼에 덮여 제대로 탁본을 뜰 수 없었다.

 

광개토대왕릉비가 있던 마을에 초천부(初天富), 초균덕(初均德)이라는 부자(父子)가 비의 탁본이 돈이 됨을 알고 탁본을 팔아 생활하였는데, 비의 이끼가 탁본을 어렵게 하자 쇠똥을 발라 불을 질렀다. 이로 인해 이끼는 제거되었지만, 비의 표면에 균열이 생기고 일부가 터져나가 글자가 훼손 되는 등 심각한 손상이 발생하였다.

 

우리에게 광개토대왕릉비가 중요한 것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원리를 제공했었던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附設)의 단초를 제공한다고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883년 일본 헌병 중위인 사토오 가게노부(酒勾景信)가 이 탁본을 입수하여 일본으로 가져가자 일본 학계에 큰 바람이 불게 되는데, 일본은 이를 한반도 침략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임나일본부설 조작의 자료로 삼게 된다.

 

조작은 원문 백잔 신라구시속민 유래조공 이왜이신묘년 도해파백잔 □□ 신라 이위신민(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 破百殘 □□ 新羅 以爲臣民)에서, 애초에 멸실되어 탁본에 보이지 않던 두 글자 □□ 부분에 임나(任那)라고 하는 글자를 일본이 임의로 끼워 넣어 해석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일본의 해석에 따르면‘백제와 신라는 과거 속국으로 지금까지(고구려에) 조공해 왔는데, 왜가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 임나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 구절은 뒤에 나오는 ‘이에 병신년(영락6년)에 (고구려)왕이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토벌하였다(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討伐殘國)는 말과 앞뒤가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본은 하필 왜 그 자리에 뜬금없이 임나(任那)가 들어가야 하는지도 설명을 못하였다. 뒤 구절에 나오는 토벌 대상은 왜(倭)이지 백제가 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다 1972년 재일사학자인 이진희가 석회도말론(石灰塗抹論)을 발표하여 사학계를 흔들게 된다. 일본이 왕릉 에 석회를 발라 글자를 조작하였다는 것이다. 그동안 일본학계의 주장에 제대로 반론조차 못하던 한국 사학계가 이 석회도말 론을 쌍수를 들어 환영하였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중국사학자들이 연구를 진행한 결과 석회도말은 애초에 없었던 것으로 결론이 났다. 석회도말론이 나온 배경은 탁본 장사로 먹고 살던 초초부자(初初父子)가 비석의 글자가 흐려 탁본에 잘 나타나지 않자 임의로 석회를 발라 일부 글자를 교정하려 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탁본마다 글자 생김새가 조금씩 달라진 배경도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일본 교과서에도 버젓이 수록되어 있던 왕릉비의 임나라는 글자가 전혀 사실이 아님을 유추할 수 있는 증거가 근자에 발견되었다.

 

중국의 왕건군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장이란 사람이 왕릉비를 오랫동안 연구하였는데, 그의 저서 말미에 실은 참고자료 중에 광개토대왕비 초본이 마이크로필름으로 담겨있었다. 초본에는 보이지 않던 글자 ㅇㅇ 중 앞 글자가 동(東)으로 적혀있었다.

 

그 초본은 초초부자(初初父子)중 아들인 초균덕(初均德)이 적은 것으로, 그들이 왕릉비에 쇠똥을 발라 불태워 비를 훼손하기 전 일일이 비의 전자(全字) 1750여자를 필사하여 기록한 것이었다. 

 

초균덕은 고고학에는 문외한인 사람이었으나 별명이 초대비(初大碑)라 불릴만큼 왕릉비를 평생 끼고 산 사람으로 유명했는데, 그가 죽으면서 남긴 유물 중에 왕건군의 저작에 실린 왕릉비 초본이 있었다.

 

그는 비를 불태우기 전 탁본에도 잘 나타나지 않던 글자를 일일이 눈으로 확인하여 왕릉비 초본을 만들었던 것이다. 초균덕이 만든 초본은 기록된 다른 글자가 하나도 기존 알려진 탁본과 다르지 않아 그 진정성을 인정받고 있다.

 

균덕의 초본으로 알게 동(東)자를 집어넣어 글귀를 완성해 보면 도해파백잔 동□신라 이위신민(渡海 破百殘 東?新羅 以爲臣民)이 되는데, 나머지 멸실된□자는 자연히 동사인 정(征)이나 벌(伐)이 되어 백제가 동쪽으로 신라를 정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는 뜻이 된다. 

 

그러면 이에 화가 난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백제를 치게 되는 뒤의 글자 풀이가 자연스러워 지는 것이다.

요즘 일본 국사교과서에 왕릉비의 임나일본부 주장은 거의 사라졌다. 

 

그리고 일본 역사학자들도 일본서기에 적힌 임나일본부가 역사적 사실이 아닐 것으로 생각하는 이가 많아지고 있다. 당시의 일본 국력으로 보나 연대기로 보나 가능하지 않은 일일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일본이 해방 후 퇴각하면서 자기들이 남긴 교육효과가 조선반도에서 일백년은 갈 것으로 예측하였다는데, 불행히도 거의 사실화 되어가고 있다. 조선사편수회의 망령이 들씌운 우리 강단역사학계의 노력이 아직도 부족함을 많이 느낀다.(오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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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에 대한 비판(批判)

 

6.위작(僞作)“倭(왜)”자고(字考)에 대한 재론.

  <성야량작(星野良作)의 “위작‘왜’자고 비판”에 대한 재 비판>

 

1981년 12월 18일 이형구(李亨求)·박노희(朴魯姬)가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에서 발표한 바 있는  “광개토대왕릉비문(廣開土大王陵碑文)의 이른바 신묘년기사(辛卯年記事)에 대하여 –僞作‘倭’字考(위작‘왜’자고)-” 논문에 대하여 성야량작(星野良作)의 부정적인 논평이『광장(廣場)』1983년 1월호 “논단”(58~71쪽)에 “광개토대왕릉비문(廣開土大王陵碑文) 연구(硏究)의 새로운 전개(展開) – 이형구의 신설(新說)에 접하여 - ”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하였다. 이에 대해<위작 ‘왜’자고>논문의 저자의 답변을 하였다. 

 

이에 대해서 상세하게 보기로 하자.

“僞作‘倭’字考(위작‘왜’자고)”는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가 재발견(再發見)되고부터 근 백 년 동안 한(북 포함)·일 양국 간에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이른바 신묘년기사(辛卯年記事)라고 하는 광개토대왕릉비문의 제 1면 제8행 제34자부터 제9행 제24자까지의 32자에 대해서 논증을 한 것이다.

 

그러나“僞作‘倭’字考(위작‘왜’자고)”라고 하는 부제를 보아 알 수 있듯이 이른바 신묘년기사(辛卯年記事), 즉 횡정충직(橫井忠直) 석문(釋文)에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後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백잔신라구시속민유래조공이후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라이위신민

 

百殘(백잔. 제)과 新羅(신라)는 예로부터 屬民(속민)으로서 朝貢(조공)하여 왔다. 

그리하여 倭(왜)는 辛卯年(신묘년. 291년)부터 이쪽에서 바다를 건너 百濟(백제) · □□羅를 破(파)하여 이를 臣民(신민)으로 삼았다.〔井上光貞等編(정상광정등편), 日本(일본) 文部省(문부성) 檢定淸(검정청) 敎科書(교과서) 「詳說 日本史(상설 일본사)」, 1983, 25쪽 번역문〕

 

이라고 하는 문장 중에서 기왕의 여러 설이 통념적으로 믿어 왔던“倭(왜)”자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분석·고증을 하여, 마침내 논자는“倭(왜)”자가 일본의 관학자(官學者)들에 의하여 위작(僞作)되었다는 것을 밝혀내고 이를 특별히 강조하고 소위 신묘년기사(辛卯年記事)를 아래와 같이 복원을 하였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以辛卯年破白殘新羅以爲臣民.

백잔신라구시속민유래조공이이신묘년파백잔신라이위신민.

 

百殘(백잔. 제)과 新羅(신라)는 예로부터〔高句麗(고구려)의〕屬民(속민)으로서 朝貢(조공)을 바쳐왔는데, 그후 辛卯年(신묘년. 291)부터 朝貢(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廣開土大王(광개토대왕)은〕 百殘(백잔. 제)·倭寇(왜구)·新羅(신라)를 파하여 이를 臣民(신민)으로 삼았다.

 

다시 말해서 –僞作‘倭’字考(위작‘왜’자고)-의 핵심적인 주제를“倭(왜)”자의 진위(眞僞)에 두고 이를 분석 · 고증한 결과, 이는 위작(僞作)임을 밝히고 또 다른 의심스러운 문자(文字)에 대해서도 철저히 분석·고증하여 복원을 해보았다.

 

본 논문에 대해서 물론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여긴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다른 학자들의 비판을 기다리던 중 성야량작(星野良作)의 논평(論評)을 접하였는바 성야량작(星野良作)은 논자(論者)의 논문(論文)에 대해“新‘虛構’說(신‘허구’설)”또는“新‘바꿔치기’說(신‘바꿔치기’설)”이라 규정을 하고

 

「나는 이 연구에서 핵심적으로 구사된다고 여겨지는 비문의 서법에 의한 분석에 대하여 발언하는 자격을 갖지 못한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용서를 빈다.¹」고 하였다. 성야량작의 사려 깊은 겸허에 대해서 오히려 숙연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성야량작은 80매 가량의 원고 중에 3/4은“僞作‘倭’字考(위작‘왜’자고)”의 논지를 주석을 곁들여 논평을 하였고, 나머지 1/4을 할애하여 크게 두 가지 문제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였다.

 

즉“僞作‘倭’字考(위작‘왜’자고)”에서“倭(왜)”자를 부정하게 된 동기가 된 주구경신(酒勾景信)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 별칭 酒勾雙鉤本주구쌍구본)의 제4면 제9행 제41자인“後(후)”자와 또 하나는 이른바 신묘년기사(辛卯年記事)의 복원 중에서“缺字(결자)”로 가정한 점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야량작(星野良作)이 제기한 두 가지 의문점 이외의 여타 문제를 긍정하고 있다고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으로 본다. 논자는 먼저 성야량작(星野良作)이 제기한 위 두 가지 의문점에 대해서 답변형식으로“僞作 ‘倭’字考(위작‘왜’자고)”를 재론하였다.

 

우첨자

성야량작이 주 6)에서 “탁본의 복사본의 입수에 대해서 편의를 보아주면 대단히 고맙겠다!”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탁본이란 아마 중국 중앙연구원과 임창순 소장탁본(즉,‘원석정탁본’)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여겨지는데, 전자는 논자가 본서에 전문을 사진판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후자는 소장자가 독자적으로 편인을 준비중 이라고 한다.

 

1) “倭(왜)”字(자)의 출현(出現)과 삭제(削除)

 

성야량작(星野良作)은“이형구(李亨求) 설(說)에서의 의문점”이라는 장에서. 첫째로 酒勾景信(주구경신)의 雙鉤加墨本(쌍구가묵본)의 맨 끝 글자인 “後(후)”자의 출현과 삭제 문제에 대해서 다시 몇 가지로 구분하여 의문을 제기하였다. 즉, 성야량작(星野良作)은 여기에서“

 

이 작업 과정을

(1) “而後以辛卯年不貢因破白殘倭寇新羅(이후이신묘년불공인파백잔왜구신라)”라는 원비문(原碑文)을 쌍구

       (雙鉤),

(2)“後(후)”·“不貢(불공)” ·“倭寇(왜구)”의 僞刻(위각) ·삭제,

(3) 재쌍구(再雙鉤)로 상정해도 좋으면, (2)·(3)의 단계에서 “또 하나의 쌍구가묵(雙鉤加墨)한‘倭(왜)’자를 전문

      (全文)과 다시조합하면서”라는 문의(文意)가 알기 힘들고, 또 “不貢因(불공인)”·“倭寇(왜구)”의 문제

      도 별개로 해서 잘못이는 하나 “後(후)”자만을 잔류한 구체적 경우에 부자연성을 느끼는 것이다.”라고 하

     였다.

 

“僞作‘倭’字考(위작‘왜’자고)”에서 이른바 신묘년기사(辛卯年記事)가 변조된 시기를 1879년부터 1883년 사이로 추정하였는데, 이는 중총명(中塚明)의“근세일본사학사におけゐ조선문제:とくに‘광개토대왕릉비’をめぐつて“에 보면 일본(日本) 육군참모본부(陸軍參謀本部)가 설치된 1878년 다음해 즉, 1879년부터 십 수 명의 장교를 주재무관(駐在武官)·어학유학생(語學留學生)의 명목으로 청(淸)나라에 파견하여‘스파이’ 활동을 시켰는데, 주구경신(酒勾景信)이라고 하는 군인도 그와 같은 사명을 띠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간첩)이 광개토대왕릉비에 관계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시기는 현지에서 비교적 익숙해지고 첩보활동에 익숙해질 수 있는 1, 2년의 세월이 경과한 후의 1880년경 전후부터가 아닌가 한다. 여기대해 이진희(李進熙)는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가 재발견(再發見)된 시기를 1880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주구경신(酒勾景信)이 문제의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일본으로 가지고 간 1883년 이전까지의 2, 3년 동안에 작업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에서 일본(日本)의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 연구자들은 1884년으로 보고 있으나, 이진희(李進熙)는 1883년으로 보고 있다. 논자 역시 이진희의 설을 받아들이고 있다.

 

다시 말해서 대략 1879년~1883년경의 어느 시기에 일본(日本) 육군참모본부(陸軍參謀本部)의‘스파이(간첩)’인 주구경신(酒勾景信)에 의하여 광개토대왕릉비문(廣開土大王陵碑文)의 내용은 참모본부(參謀本部)와 협의를 거쳐 모종의 설계가 작성됐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물론 변조 대상을 이른바 신묘년기사(辛卯年記事)로 설정했다고 했을 때 전문을 쌍구가묵(雙鉤加墨)하기 전에 우선 변조할 대상의 원자에 대한 쌍구(雙鉤)를 만들어 놓고 자의적 자획(字劃)을 습각(習刻)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일 것이다.

 

물론 이때의 쌍구는“後(후)”·“不(불)”·“貢(공)”·“因(인)”등으로 단자로 하든가, 아니면“而後(이후)” 그리고“不貢因(불공인)”과 같이 연자(連字)로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 자획(字劃)이“倭(왜)”와“來渡海(래도해)”자로 변조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을 후에 비로소 원래의 자에 첨획(添劃) ·개각(改刻)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과정을 저친 후 전문에 대한 쌍구(雙鉤)를 하게 되는데, 이때야 비로소 현재 동경국립박물관(東京國立博物館) 소장 주구경신(酒勾景信)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과 같이 제1면의 경우 제1행에서 제 4행까지의 각 4자 모두 16개의 글자를 한 장의 종이에 쌍구하여 제 1면의 총 매수는 33매가 된다.

 

논자는 글에서 비문위작(碑文僞作)에 참여한 인물이 주구경신(酒勾景信) 한 명이었을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 당시 비문위조작업(碑文僞造作業)에는 육군 장교 한 사람이 아닌“酒勾景信一黨(주구경신일당. 일본제국주의관학자日本帝國主義官學者)”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다.

 

만일 이른바 신묘년기사(辛卯年記事) 중에서“破白殘□□新羅以爲臣民(파백잔□□신라이위신민)”의 □□에 원래“倭寇(왜구)”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일본(日本) 육군참모본부(陸軍參謀本部)가 자의적으로 박삭(剝削)할 의도가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굳이 이 두 글자는 쌍구가묵(雙鉤加墨)하는 과정을 거칠 것도 없이 박삭(剝削)해 버릴 수도 있다.

 

그리고 성야량작은 주구경신 쌍구가묵본의 제4면 제9행에 맨 끝 글자인 문제의“後(후)”자가“‘制令守墓(제령수묘)’, “後(후)””와 같이 단독으로 쌍구된 경우는 같은 행의 최상단에 위치한“之(지)”자도“‘之(지)’, ‘人自今以(인자금이)’”로 각각 한 장의 지편에 쌍구되었는데, 그렇다면“之(지)”자 문제가 참고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제4면의 글자가 원래 9행 각 41자로 모두 369자인데, 제1행의 상단 4개자가 빠졌으므로 상단은 제2행에서 제5행, 제6행에서 제9행까지의 각 행 43자 모두 한 장에 쌍구(雙鉤)하고, 그 이하부터는 제1행부터 제4행, 제5행부터 제8행까지 각16자로 쌍구(雙鉤)하고, 또한 제9행의 제5자부터 제40자까지는 모두 9장에 쌍구(雙鉤)하였다.

 

그리고 광개토대왕릉비문(廣開土大王陵碑文)의 최하단에 해당하는 제41자 선상의 9개 글자는 제 1~4행의 4개 글자, 제5~8행의 4개 글자를 각각 한 장에 쌍구(雙鉤)하였으므로 결국 제4면에서는 최종적으로“之(지)”자만이 단자(單字)로 쌍구(雙鉤)되었다.

 

특히 제4면이 지편(紙片)으로써 편성될 때 크게 혼동을 일으켜 많은 부분이 서로 교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성야량작(星野良作)이 우려하는 것처럼 그렇게 문제될 것은 없다. 이와 같은 작업이 단시일 내에 완성되었을 리도 없을 것이고 더구나 적은 인원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사전에 쌍구(雙鉤)된 수 개 글자 중에서 혹시 연자(連字)로 쌍구(雙鉤)될 가능성이 많은“不貢因(불공인)”만은 쉽게 소각시키고 실수로 전기“之(지)”자는 잔류시킨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렇다면 혹자는 문제의“後(후)”자를 제4면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나“僞作‘倭’字考(위작‘왜’자고)”에서도 논증한 바와 같이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의 다른 여러“後(후)”자와 대조해 봐도 동일한 자체(字體)는 발견되고 있지 않다.

 

그리고 만일 광개토대왕릉비문(廣開土大王陵碑文) 제4면 중에서 잘못 결락(缺落)시켰다고 본다면, 오직 제1행 오른쪽 위쪽의 6, 7개 글자의 흔적 중에서 찾아야 하는데, 제1자부터 제4자까지는 쌍구(雙鉤)할 때에도 이미 빠졌을 것이므로 나머지 두 세 글자에서 찾아봐야 하겠다.

 

그러나 수곡제이랑(水谷悌二郞) 원탁(原拓)이나 중앙연구원(中央硏究院) 원탁(原拓)에서 도저히“後(후)”자에 대체될 만한 흔적을 찾아 낼 수 없다. 한편 성야량작(星野良作)은 “이씨(李氏)의 신설(新說)의 특징은 연구사상 맹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주구쌍구본(酒勾雙鉤本)의“後(후)”자에 착안하여, 그 의미를 목하(目下) 독단장(獨壇場)이라고도 볼 수 있다.

 

새 방법으로 정탁본(精拓本)을 해석함으로써 이른바 신묘년기사(辛卯年記事)의‘신허구설(新虛構說)’을 구축한 데 있다.”라고 하고, 문제의“後(후)”자가 삭제된 시기에 대해서 역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성야량작은 특히“僞作‘倭’字考(위작‘왜’자고)”의 결론 부분에서 기왕에 진술한 제 면의“後(후)”자에 대한 삭제 문제를 종결하면서 “사계의 학자를 총동원하여 해독 작업을 거친 이후 돌연히 삭제되었다”고 한 데 대해서 혹시 정상뢰국(井上賴國)의 “王簏(왕록)” 중의 석문 맨 끝 여백에 더 써진 내용 중에 보이는 1888년 10월 11일 석문(釋文)을 작성하기 위하여 모인 하전강(河田剛)·환산작영(丸山作榮)·횡정충직(橫井忠直)·정상뢰국(井上賴國)·주구경신(酒勾景信)을 지칭하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하고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에 『會餘錄(회여록)』 제5집에“高句麗古碑文(寫眞石版), 고구려고비문(사진석판)” 즉, 주구경신(酒勾景信)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 발표되고, 관정우(菅政友)는 계속해서 “高麗好太王碑銘考(고려호태왕비명고)”(1891)에서 “又制, 守墓□□□之人, 自今以後, 後不得······制令守墓(우제, 수묘□□□지인, 자금이후, 후불득······제령수묘)”라 정리하였는데, “後(후)”자 위의 □□□는 “守墓(수묘)” 다음에 가고 상단의 “之(지)”자를 “自今以後(자금이후)” 다음에 넣어서 중복되게 하였다.

 

그리고 나가통세(那珂通世)는 “高句麗古碑考(고구려고비고)”(1893)에서 “後(후)”자는 관정우와 마찬가지로 반복하고 있으나 오직 “□□□之人(지인)” 위의 □□□만은 삭제해 버렸다.

 

1898년에 이르러서는 삼택미길(三宅米吉)이“高句麗古碑考(고구려고비고)”와 “高麗古碑考追加(고려고비고추가)”를 내놓았는데,“高麗古碑考追加(고려고비고추가)”의 釋文(석문)에서는 三宅米吉(삼택미길) 이전까지 엄연히 존재했던 문제의“後(후)”자가 돌연히 삭제되고 반면“之(지)”자는 맨 끝, 즉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의“後(후)”자의 위치에 옮겨 놓아 원비(原碑)의 위치로 환원되었다.

 

이와 같은 석문(釋文)이 나오기까지 많은 사람의 손을 거치고 있다. 그래서 논자(論者)는 주구경신(酒勾景信)·횡정충직(橫井忠直) 등 일본(日本) 육군참모본부(陸軍參謀本部)의 군인 및 군속을 비롯하여 작업에 동원된 하전강(河田剛)·환산작영(丸山作榮)·정상뢰국(井上賴國) 및 그 후의 관정우(菅政友)· 나가통세(那珂通世)·삼택미길(三宅米吉) 등까지를 포함해서“사계의 학자”라고 칭하였다고 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주구경신(酒勾景信) 일당(一黨)”이라고까지 표현을 하고 있다.

 

이는 직접적인 작업(작전)을 전개했던 주구경신(酒勾景信) 일당 이외에도 일본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 시대에“對朝鮮關係(대조선관계)”에 활약한 학자들을 통틀어서 관학의 범주에 넣은 것으로, 만일 이와 같은 뜻을 성야량작이 이해할 때 곧 의문의 실마리가 풀릴 것이라고 말 하고 있다.

 

2) “倭寇(왜구)”字(자)의 원상설(原傷說)에 대하여

 

성야량작(星野良作)이“이형구(李亨求)의 설(說)에의 의문점(疑問點)”이란 장에서 두 번째로 의문을 제기한 문제는 이른바 신묘년기사(辛卯年記事)의 후반에 해당하는 “······破白殘□□新羅以爲臣民(······파백잔□□신라이위신민)”의 □□ 두 글자를 논자가“倭寇(왜구)”자로 가정한 논지를 비평하여

 

“이 “倭寇(왜구)”자 복원에 보강하는 구실을 지니고 용의(用意)된 것이 이른바 신묘년기사(辛卯年記事)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성야량작(星野良作)은 논자가 마치 궁극적으로 이 □□ 두 글자를“倭寇(왜구)”자로 복원하기 위하여 앞에서 전술한“倭(왜)”자의 부정에 전력투구한 것처럼 느끼고 있는 것 같으나 반드시 그러하지만은 않았다고 논자를 밝히고 있다.

 

“僞作‘倭’字考(위작‘왜’자고)”이전까지는 물론 누구도 이른바 신묘년기사(辛卯年記事) 중의“倭(왜)”자를 추호도 의심해 본적이 없었던 것을 논자가 철저히 부정을 했다고 한다. 따라서“倭(왜)”자를 고정해놓고 □□ 두 글자만은 지금까지“□擊(격)”²·“任那(임나)”·“加羅(가라)”³·“更討(경토)”⁴·“隨破(수파)”⁵·“聯侵(련침)”⁶·“將侵(장침)”·“欲侵(욕침)”⁷ 등으로 복원해왔는데, 논자가 앞서의“倭(왜)”자를 부정하고 뒤의 □□에 “倭寇(왜구)”자를 보충하는 것은 문제로 남을 것이라고 한 것 같다.

 

우첨자 보충 

2. 菅政友(관정우), “高麗好太王碑銘考(고려호태왕비명고)”

3. 那珂通世(나가통세), “高句麗古碑考(고구려고비고)”

4. 三宅米吉(삼택미길), “高句麗古碑考追加(고구려고비고추가)”

5. 榮禧(영희), “高句麗永樂太王墓碑文(고구려영락태왕묘비문)”

6. 鄭寅普(정인보), “廣開土境平安好太王陵碑文釋略(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석략)”朴時亨(박시형), “廣開

    土王陵碑(광토왕릉비)”

7. 千寬宇(천관우), “廣開土王陵碑文 再論(광개토왕릉비문 재론)”

 

그러나“僞作‘倭’字考(위작‘왜’자고)”는 전자의“倭(왜)”자의 서법(書法)에 중점을 두고 재차 □□ 주위 탁흔(拓痕)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함으로써 “某人(모인)”에 의하여 자의적으로 박삭(剝削)됐을 것이라고 가정을 하였는데, 만일 자의적 행위의 소산이라고 한다면 누구든지 이는 결코 범상한 자구(字句)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상기하게 될 것이다.

 

이미“倭(왜)”자의 허구를 밝힌 후인지라 당연히 이 두 글자 □□는“倭(왜)”(倭寇왜구, 당시의 史官사관은 왜를 왜구라 칭하였다. 광개토대왕릉비문 제2면 제10행과 제3면 제4행 참조)과 관련된 부분이었을 것이라는 연상으로 귀납되는 것이 오히려 범상한 이치가 아닐까 한다.

 

한편 성야량작(星野良作)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형구가“倭寇(왜구)”자를 보충한 것과 관련해서 상기되는 것은 앞서 말한 말송보화(末松保和)의 주장이다. 

 

말송보화(末松保和)는 최근 비문의 제1면의 우각선상(隅角線上)에 또 1행을 인정해야 한다는 지론을 발전시켜 비문(碑文)의 원상(原傷)을 추정하여 이형구의 설에서“倭寇(왜구)”자에 해당하는 부분도 原傷(원상)의 일부이며 原文(원문)은“破白殘新羅(파백잔신라)”의 5자로 해야 하지 않느냐고 지적하고 있다.(중략)

 

지금에 와서는 비석의 原傷(원상) 문제는 끝이 안 나는 논쟁으로 흐르는 느낌이 없다고 하지 않을 수 없으나 碑文(비문)의 복원을 기본으로 하는 입장에서는 등한시할 수 없을 것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성야량작(星野良作)이 말송보화(末松保和)의 설을 빌어 두 글자 □□가 원래 손상된 부분이며, 건비(建碑) 당시부터 근본적으로 글자를 새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면으로 유추하려 하는 저의가 숨어 있지 않았는가 여겨진다.

 

아무튼 성야량작(星野良作)이 상기시킨 말송보화(末松保和)의 두 가지 설을 일단 집고 넘어가야 할 상황이 되었다. 말송보화(末松保和)의 “제1면과 제2면의 모서리에 1행이 또 있었을 것”이라고 하는 설을 우선 살펴보면,

 

“「高句麗好太王碑縮本(고구려호태왕비축본)」(大正대정 7년 간행)을 살펴보면 제1면 제11행의 좌측(제 1면의 좌단左端) 위에 문자의 흔적이 약 20자가 있다. 그것은 문자의 우부(右部) 3분의 1 정도의 것이지만, 제2면 제 1행의 우측(제 2면의 우단(右端)우단)에도 문자의 좌부(左部) 3분의 1 정도의 흔적이 똑같이 약 20자가 인정되고, 양자는 서로 상응하여 한 자(字)를 이룬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탁자(拓者)가 부주의로 보지 못한, 또한 거기에다가 무의식중에 탁출(拓出)한 제1면과 제2면의 우각선상(隅角線上)의 1행의 존재를 증명한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된다.(굵고 붉은 글씨 부분은 末松保和).”라고 하였다. 말송보화(末松保和)는 이들 두 행의 손상은 건비(建碑) 이전부터 “原傷(원상)”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中國) 중앙연구원(中央硏究院)의 탁본(拓本)에는 중국(中國) 사회과학원(社會科學院)의 조사와 마찬가지로 또다른 행을 찾아낼 수 없었다.(그림. 1)

 

그리고 1916년에 나온『朝鮮古墳圖譜(조선고분도보)(1)』 도판 308 호태왕비(好太王碑) 전경(정면 및 우측면), 도판 311 호태왕비(好太王碑) 제1면(정면), 도판 312 호태왕비(好太王碑) 제2면(우측면)을 살펴보아도 말송보화(末松保和)가 인정하고 있는 제1면과 제2면의 모서리에 문자의 행간을 찾아낼 장소가 없다(그림. 2). 이에 대해 논자는 절대 수긍을 하지 않고 있다.

 

또한 성야량작(星野良作)이 말송보화(末松保和)가 이른바 신묘년기사(辛卯年記事)의 “破白殘□□□羅(파백잔□□□라)” 7자 중 □□□ 3자를 “原傷(원상)”으로 추정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켰는데, 이는 말송보화의 다음과 같은 설을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짐작된다. 즉,

 

“그런데 이 결자(缺字) 부분은 내가 말한 원상(原傷)에 연속한다. 즉, 원상(原傷)의 일부분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종래 이 부분을“破白殘□□□羅(파백잔□□□라)” 와 같이 7자라고 생각되었지만 원문은“破白殘新羅(파백잔신라)”의 5자 뿐이었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제안이 가능하다.”라고 하는 말송보화의 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논자가 앞에서 기술한 가정에 대응한 것으로 여겨지나, 논자는 앞에서 살짝 언급한 바 있듯이 이를 “원상”이라고 보는 것은 많은 무리가 있다고 보았다.

 

〈그림,. 1, 2, 3, 4〉 제2면 모서리, 제1면 모서리, 신묘년기사 파열부분,

 

제1, 2 모서리 중앙 파열 부분 사진

 

말송보화(末松保和)의 설에 따르면 건립(建立) 당시의“原傷(원상)”으로 인하여 글자를 새길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음에 오게 되는“□羅”의“羅(라)”앞에 오는 □를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나 중국(中國) 중앙연구원(中央硏究院)의 탁본(拓本)에서 찾아보면 斤(근)형으로 이 자의 오른쪽에“斤(근)”부의 새겨진 획이 역력히 보인다(그림. 3)

 

그러나 말송보화(末松保和)는 이를 완전히 공백자로 보고 뒤에 오는“羅(라)”자와 연관시켜“新羅(신라)”의“新(신)”자로 추정하고 있다. 물론 여러 설이 신라(新羅)로 정립되어 있지만, 만일 말송보화(末松保和)의 설처 “新(신)”자 앞의 두 글자를‘原傷(원상)’으로 본다면 마땅히“新(신)”자로 추정하고 있는 글자의 위치, 즉 斤(근)자도 1자 뒤로 밀어내 “羅(라)”자의 위치에서 글자가 새겨졌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탁본이나 사진상에 나타나는 斤(근)자의 잔상(殘像)이 斤형으로 대각선상의 오른쪽 위의 반이 이미 깊은 상처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현상은 곧 원래 손상이 아닐 뿐만 아니라 자연적인 손상으로 보기에도 무리가 있다.

 

그리고 제1면 제10행·11행 중간 부분에도 제1면 제9행에서와 마찬가지로 빠진 글자가 있는데, 말송보화(末松保和)의 설대로라면 여기에도“原傷(원상)”이어야 할 텐데 석문상(釋文上)으로는 도저히 성립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原傷(원상)”흔적을 1918년에 흑판승미(黑板勝美)가 촬영한 도판으로도 찾아내기 어렵다(그림. 4).

 

물론 이른바 신묘년기사(辛卯年記事)의 전반부에 보이는“倭(왜)”자가 부정된 후의 일이지만, 이미 말한 바와 같이“倭(왜)”자는 부정돼야만 하기 때문에 논자는 뒤에 오게 될“倭寇(왜구)”자를 인위적인 상흔이 아닌가 가정하고 있다.

 

[출처]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비판-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22|작성자 byunsdd8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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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日本書紀)』의 사료적인 성격을 생각할 때 중요한 점은 720년에 완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일본서기』는 고대인들이 고대의 역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 『삼국사기(三國史記)』는 1145년, 즉 중세에 들어서 고대의 역사를 최종적으로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사기』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김부식 등은 고대인들의 사고방식은 불합리한 것이거나 비이성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그러한 내용들을 자신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언어로 바꾸어 놓은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므로 오히려 『일본서기』의 내용을 통해서 고대인들의 사유에 보다 접근할 수 있다.


『일본서기』와 『삼국사기』를 비교해 보면, 『일본서기』는 역대 왕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본기(本紀)'만 있고, 여러 인물들의 전기를 기록한 부분이나, 특정한 주제를 중심으로 정리한 '지(志)'가 없다.

 

예를 들어 김유신, 연개소문 같은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열전(列傳) 그리고 지리지(地理志), 직관지(職官志)와 같이 특정한 주제를 중심으로 한 지(志)를 세우지 않은 것이 『일본서기』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일본서기』는 일본국이라는 새로운 나라 이름을 짓고 또 그 지배자의 이름을 천황(天皇)이라고 정하여 스스로 일본국을 중국과 대등한 제국(帝國)으로 인식한 한편, 고구려와 백제, 신라와 같은 나라들을 일본국에 조공하는 제후의 나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일본서기』를 보면, 한반도의 삼국이 일본국에 종속된 국가로 묘사된 부분들을 도처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서기』의 전체 내용을 허구로 간주할 수는 없다. 백제가 여러 가지 선진 문물을 일본 열도에 전한 사실이나, 가야의 여러 나라가 멸망해가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일본서기』는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어에 독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복어를 버리지는 않는 것처럼, 『일본서기』의 부정적인 측면이나 일본 중심적인 편향성을 고려하는 동시에, 그 속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들 가운데 우리의 고대사 연구에 필요한 자료들은 적극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이제 『일본서기』의 기사가 갖는 의미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 보도록 하자.

 

위서(僞書)로 비난받아 온 『일본서기』

 

『일본서기』는 720년에 편찬된 일본 최초의 사서이며, 이 세상의 생성 및 일본의 건국 신화를 담고 있는 신대(神代)에서 시작하여, 697년 지통천황(持統天皇)이 사망한 해까지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기록한 통사(通史)이다. 7세기 이전의 일본 역사를 기록한 사서이므로 『고사기(古事記)』와 더불어 일본 고대사 연구의 핵심적인 사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대한 우리 학계의 인식은 그것이 단지 일본의 역사책이라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 책에는 한반도와 관련된 많은 기록이 있으며 그중에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근거가 되는 내용도 들어 있기 때문이다. 임나일본부설이란, 야마토(大和) 왕권이 4세기 중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였다는 내용으로서 일본 학계의 해묵은 주장이다.

 

그런 까닭에 일각에서는 이 책을 후대에 조작된 사서라 하여 비판하기도 하고, 터무니없는 내용을 담은 이야기책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따라서 『일본서기』 자체에 대한 연구는 물론이고, 그 속에 인용되어 있는 한반도 관련 기사에 대한 연구도 극히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나라에 『일본서기』의 학술적인 번역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문제가 되는 텍스트의 번역이야말로 본격적인 연구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아직까지 누구도 학술적인 번역을 내놓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는 몹시 냉대받는 책이지만, 그러나 일본에서는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사료로 대접받고 있다. 유명한 역사책이면서도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의 『사기』나 『한서』처럼 고전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일반적으로 고전은 인간의 삶이나 인간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어서 우리에게 감명을 준다. 하지만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은 인간의 과거사를 특정한 의도에 따라 편집하고 정리한 것이어서 역사적 사실이 아닌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그냥 읽는 것으로 끝날 수는 없고 다른 사료와 비교하거나 내용의 일관성 및 정합성을 따져 본 연후에, 그것이 과연 역사적인 사실인가를 판단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성왕은 어떻게 죽었을까?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일본서기』는 과연 황당무계하기만 한 사서일까? 몇 가지 예를 통해서 『일본서기』의 사료적인 성격을 짐작해 보고자 한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진흥왕 15년(554) 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가을 7월에 명활성을 수리하여 쌓았다. 백제왕 명농(明禯) — 성왕을 가리킨다 — 이 가량(加良)과 함께 관산성 — 현재의 옥천 — 을 공격해 왔다. 

 

군주(軍主)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新州)의 군주 김무력이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함에, 비장 삼년산군의 고우도도(高于都刀)라는 사람이 급히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 네 명과 군사 2만 9천6백 명의 목을 베니, 한 마리 말도 돌아가지 못했다.

 

이 기사와 대응하여,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가을 7월에 왕은 신라를 습격하고자 하여 친히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이 일어나자 더불어 싸웠으나 복병에게 해침을 당하여 죽었다. 시호를 성(聖)이라고 하였다.

 

이 두 기사의 내용은 같은 해의 일이며 동시에 성왕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스토리에서는 적잖은 차이가 있다. 아래의 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신라본기」에서는 백제군과 가라군이 합세하여 관산성을 공격하였고 거기에 주둔하고 있던 신라군은 위기에 빠졌다. 

 

이를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가 잘 아는 김유신 장군의 조부이자 현재의 서울 부근 군사권을 통할하던 군주였던 김무력까지 관산성 전투에 참여하는 등 신라의 위기 상황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런데 「백제본기」의 내용은 사뭇 다르다.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성왕이 동원한 병력은 보병과 기병을 합해서 50명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무예가 출중하다고 하더라도 50명의 병력으로 관산성을 위기에 빠뜨릴 수 있었을까? 

 

또 그처럼 보잘것없는 병력으로 신라를 습격하고자 한 성왕은 제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두 가지 기사를 비교해 보면, 성왕의 죽음이 공통적인 내용으로 들어있기는 하지만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구분 신라본기 백제본기 비교
연대(554) 진흥왕15년 성왕 32년 일치
병력 백제군+가리군 보기(步騎) 50명 불일치
장소 관산성(옥천) 구천(拘川) 불일치
전세 신라가 불리했음 신라의 복명을 만남 불일치
성왕 살해자 고우도도(高于都刀) 난병  
결과 좌평 4명, 3만 명 전사 성왕의 죽음만 기록 불일치

 

성왕은 전쟁을 하러 간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서로 모순적으로 보이는 두 가지 기사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일본서기』이다. 우연찮게도 성왕의 죽음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흠명(欽明) 15년(554) 겨울 12월의 기사이다.

 

여창(餘昌)이 신라를 치고자 꾀하였다. 기로(耆老)들이 간하기를,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고 하였다. 

여창이 말하기를, "늙었도다. 어찌 겁이 많은가? 나는 대국(大國)을 섬기고 있으니, 무슨 두려움이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신라국에 들어가 구타모라 요새를 세웠다. 

 

그 아버지 명왕은 여창이 오랫동안 진영에서 고생하고 또 오랜 기간 잠과 음식을 폐하고 있을 것을 우려했다. 아버지의 자애는 성글기 쉽고, 자식의 효성은 이루어지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에 몸소 전장에 가서 위로하고자 하였다.

신라는 명왕이 친히 온다는 것을 듣고, 나라 안의 병사를 모두 내어 길을 끊고 쳤다. 

이때 신라는 좌지촌의 말을 먹이는 노예 고도(苦都)에 말하기를, "너는 천한 노예이고, 명왕은 유명한 군주다. 

 

이제 천한 노예로 하여금 유명한 군주를 죽이게 하고 그 사실을 후세에 전하여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드디어 고도는 명왕을 붙잡고,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청컨대 왕의 목을 치겠습니다"고 하였다. 

 

명왕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왕의 머리는 노예의 손으로 자를 수 없다"고 하였다. 고도는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법에 의하면 맹서한 바를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고 하더라도, 마땅히 노예의 손으로 죽일 수 있습니다"고 하였다.

 

이 기사의 전후에도 관산성 전투에 대한 내용이 연결되어 있어서, 당시 전투의 정황을 소상히 알 수 있다. 

즉 관산성 전투를 주도 한 것은 성왕이 아니라 성왕의 태자인 여창이었다. 

 

여창이 3만 명에 이르는 백제군과 가라군을 이끌었고 심지어는 왜의 병력까지도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이 전투는 백제군에게 유리하여 김무력까지 원군을 이끌고 와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을 결정적으로 뒤바꾸어 놓은 것은 어처구니 없게도 성왕의 부성애였다.  오랫동안 전쟁터에서 고생하고 있는 아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50명이라는 소수의 호위병만을 거느리고 아들이 있는 관산성을 향해 출발한 것이다.

 

관산성 전투의 형국을 반전시키고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신라군으로서는 이러한 성왕의 출현이야말로 다시없는 기회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성왕은 신라의 매복에 걸려 신라의 천한 노예의 손에 목이 잘려 죽었다. 

 

『삼국사기』의 고우도도와 『일본서기』의 고도가 바로 성왕의 목을 자른 사람의 이름이다. 과연 그의 이름은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게 되었다. 『일본서기』의 기사 덕택에 비로소 「신라본기」와 「백제본기」 사이에서 나타나는 불일치 및 어색함이 일거에 해소될 수 있었다.

 

이처럼 백제사와 가야사에 관한 『일본서기』의 기록은 일본 중심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대단히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서기』의 기록이 모두 사실인 것은 아니다. 백제와 관련된 기사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왕인은『논어』와 『천자문』을 전하였는가?

 

왕인이 일본 열도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였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우리의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일본서기』와 『고사기』 등 일본 측의 사료에만 보인다.

 

그런데 『일본서기』에 왕인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의문의 여지가 없는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왕인에 대한 기록 역시도 다른, 확정되어 있는 사실들과 정합적인 관계에 있는지 확인한 연후라야 비로소 역사적 사실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왕인에 대한 『일본서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응신(應神) 15년(404?) 가을 8월 임술삭 정묘에 백제왕이 아직기(阿直岐)를 보내 양마 2필을 바쳤다. 그것을 카루(輕)의 사카노우에(坂上)에 있는 마구간에서 기르게 하고 아직기로 하여금 사육을 관장케 하였다. 

 

그 말을 기른 곳을 우마야사카(廐坂)라고 한다. 아직기는 또한 능히 경서를 읽었다. 그래서 태자 우지노와키이라쯔코(菟道郞稚子)의 스승으로 삼았다. 천황은 아직기에게 "그대보다도 나은 박사가 또 있는가" 하고 물었다.

 

그는, "왕인(王仁)이라는 자가 있는데, 이 사람이 뛰어납니다"고 대답했다. 이때 카미쯔노케누노키미(上毛野君)의 조상인 아라타와케(荒田別)와 칸나키와케(巫別)를 백제에 보내어 왕인을 불렀다. 아직기는 아직기사(阿直岐史)의 시조이다.

 

16년(405년?) 봄 2월에 왕인이 도래하자 그를 태자 우지노와키이라쯔코의 스승으로 삼았다. 

태자는 여러 전적을 왕인에게서 배웠다. 통달하지 않은 책이 없었다. 왕인은 후미노오비토(書首) 등의 시조이다.

 

저명한 왕인에 관한 기사다. 그런데 이 기사에 대해서는 또 다른 전승이 있다. 

바로 『고사기(古事記)』의 기록이다. 『고사기』는 『일본서기』보다 8년 전에 완성된 문헌이며 왜국 왕실의 계보와 설화들을 중심으로 일본 고대사를 엮은 책이다.


다음은 『고사기』 중권 가운데 응신(應神)에 대한 기록이다. 또한 백제국주 조고왕(照古王) — 근초고왕을 가리킨다 — 이 수말 한 마리와 암말 한 마리를 아지길사(阿知吉師)에게 붙여 공상(貢上)하였다. 또한 횡도(橫刀)와 큰 거울을 보냈다 — 이 아지길사라는 자는 아찌노후비토(阿直史) 등의 시조이다

 

또한 백제국에 명령을 내려 만약 현인(賢人)이 있으면 공상하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명을 받아 사람을 공상하였는데, 이름이 화이길사(和邇吉師)라고 하였다.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 등 모두 11권을 이 사람을 통해 바쳤다 — 이 화이길사라는 사람은 후미노오비토(文首) 등의 시

  조이다 .

 

이 두 사료에서도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다. 먼저 『고사기』에서는 아지길사(阿知吉師)를 얻은 뒤에 백제에 더 나은 인물을 바치라고 하여 화이길사(和邇吉師)를 얻게 되었다고 기록했으나, 『일본서기』에서는 아직기에게 물어 왕인을 알게 되었다고 기록해 놓았다. 

 

그보다도 더 중요한 차이는, 『고사기』에는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 등 도합 11권의 서적을 명시하고 있지만 『일본서기』에서는 왕인이 태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경전에 통달하지 않은 바가 없다고만 하여 책이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논어』와 『천자문』은 왕인 개인이 전한 것이 아니라, 백제 왕의 의지에 따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고사기』에는 아지길사나 화이길사가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고 하는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일본서기』를 편찬할 때 새롭게 부가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두 사료에 나타나는 이러한 차이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먼저 사료의 성립 연대를 보면 『고사기』는 712년이고 『일본서기』는 720년이다. 그리고 『고사기』는 당시 왜국 왕실의 하급 관리였던 히에다노아레(稗田阿禮)의 암송을 바탕으로 한 것이고 문체도 일본어와 한문 혼용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일본서기』는 그보다 다소 늦게 성립되었으며 순한문체로 중국계 인물이 최종적인 윤문 과정에서 깊이 개입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최근에 제기된 바 있다. 흔히 우리가 왕인에 대해, 그가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고 동시에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종합한 데 불과한 것으로서 반드시 사실이라고 볼 수 없다. 

 

사료를 통해서 과거의 사실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먼저 어떤 사료가 담고 있는 내용 중에서 어떤 것이 사실이고 어떤 것은 허구적인 내용인지를 따져야 한다.

 

『천자문』은 언제 만들어졌나?

 

왕인이 일본에 전해주었다고 하는 『천자문』에 대해서 좀더 알아보자. 중국에는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천자문』이 존재해 왔다. 그중에서 현재까지 잘 알려진 대표적인 천자문으로는 주흥사1)의 『천자문』과 소자범(蕭子範)의 『천자문』을 들 수 있다. 

 

만약 왕인이 전래한 것이 최초의 『천자문』이고 그것이 현전하는 것이라면 남조(南朝) 시대 양(梁)나라의 무제 때 만들어진 주흥사의 『천자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주흥사는 521년에 사망했으므로 『천자문』의 찬술은 그 이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서기』에서 왕인이 천자문을 전래하였다는 시기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해당하므로 『천자문』이 만들어진 시기와 무려 100년 이상의 차이가 난다. 즉, 왕인은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천자문』을 일본에 전래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한편, 왕인은 『논어』 10권도 전했다고 했는데, 그것은 현재 전하는 『논어』의 권수보다 많으므로 본문만이 아니라 주석서도 포함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주석서 중에서 저명한 것으로는 위(魏)나라 때의 하안(何晏)2)이 쓴 『논어집해』와 남조 시대 양나라의 황간(皇侃)3)이 쓴 『논어의소』 등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논어집해』가 먼저 나왔고, 『논어의소』는 하안의 주석서를 대상으로, 황간이 다시 소(疏)를 붙인 책이다. 

그중 『논어의 소』는 남송(南宋) 무렵에는 중국에서는 없어져 버렸는데, 어느 시기인가 일본으로 전래된 책이 청(淸)나라 때에 중국으로 역유입(逆流入)되었다고 하며, 『논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또 송(宋)나라 때 형병(邢昺)이 왕명을 받고 지은 『논어정의(論語正義)』에 중요한 참고서가 되었다고도 한다.

이처럼 『논어』 텍스트와 그 주석에 있어서는 정현의 『논어』 텍스트, 이를 바탕으로 한 하안의 『논어집해』, 다시 『논어집해』를 바탕으로 한 황간의 『논어의소』 그리고 다시 이를 바탕으로 한 『논어정의』로 큰 흐름을 정리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없어졌으나, 일본에 황간의 『논어의소』가 전해졌던 점을 중시한다면, 왕인이 전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논어』 주석서로는 『논어집해』와 『논어의소』가 유력하다.


그런데 하안의 『논어집해』는 일본 측의 사료에 나타나는 왕인의 활동 시기로 따져도 이미 100년 이전에 만들어진 주석서다. 이에 비해서 황간의 『논어의소』는 편찬 직후부터 널리 보급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것이 완성된 시기가 주흥사의 『천자문』이 편찬된 시기와 비슷하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양나라의 무제가 즉위한 기간은 남북조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이채를 발하는 시기로서 소명태자의 『문선』, 주흥사의 『천자문』, 황간의 『논어의소』 등 후대까지 널리 읽혀진 문헌들이 다수 편찬되었다. 무제 스스로가 각종 전적에 해박하였으며, 신하들의 학문적인 의문에 답할 정도로 학식을 갖춘 군주였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두 문헌이 편찬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중국의 새로운 문화적인 성과로서 왕인을 통해 일본에 전래되었다고 보는 편이, 보다 적극적인 해석이 될 것이다. 결국 황간의 『논어의소』와 주흥사의 『천자문』이 중국에서 편찬된 직후 곧 일본 열도에 전해졌다고 한다면, 왕인의 역할이 극대화될 수 있는 것이다. 우연찮게도 두 문헌은 모두 6세기 전반에 완성된 것이다.


그렇다면 왕인이 활동한 시기도 실제는 6세기 전반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사기』의 기록대로 왕인이 『논어』와 『천자문』을 전해 준 것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 후손들이 자기 가계가 유서 깊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왕인의 활동 시기를 100년 이상 앞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그런데 『일본서기』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천자문』의 편찬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중국인들이 관여하면서,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왕인이 『천자문』을 전했다는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왕인의 활동 시기는 그대로 두는 대신, 오히려 역사적 사실이라고 할 수 있는 『논어』와 『천자문』을 전래하였다는 내용은 없애 버리고, 그냥 경전에 능했다고만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일본서기』라는 사료도 그 자체로서 완전한 위서이거나 반대로 완전한 사료도 아니다. 

 

다른 사서의 기록과 정밀하게 비교하는 가운데 역사적인 사실을 추출해 내야 할 일반적인 성격의 사료 중 하나일 뿐인 것이다. 일본 중심의 편향된 인식이 심한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나라의 사서들 또한 그런 결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면이 있다.


그밖에도 백제의 성왕이 불교를 전하였다거나 왕인이 유교 경전에 관한 지식을 전하고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는 내용 그리고 백제가 단양이 등의 오경박사와 절을 짓는 기술자들을 파견한 이야기들은 모두 『일본서기』에만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무비판적으로 역사적인 사실로 수용하면서, 다른 내용들은 모두 허구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이중적인 태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서기』의 편향성에 주의하면서 한반도 관련 기사들을 검토한다면, 절대적으로 부족한 우리의 고대사 연구에 긴요한 사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성왕의 죽음에 대한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내용을 비교하였을 때, 어떤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가?

   『삼국사기』의 「신라본기」는 신라의 입장에서, 「백제본기」는 백제의 입장에서, 그리고 『일본서기』는

     일본 측 입장에서 각각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백제와의 정면 대결을 통해서 성왕을 사로잡아 죽인 것으로 기록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에 대해서 백제는 성왕이 불과 50명의 병사를 이끌고 간 사실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성왕의 죽음과 아울러 왜의 병력이 관산성 전투에서 크게 활약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사서들은 그 기록하는 주체의 시각과 이해를 반영하고 있다. 사료를 통해서 어떤 사실을 복원하고자 할 때, 반드시 이러한 사료의 한계성과 문제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2. 왕인이 『천자문』과 『논어』를 전한 시기가 실제로 주흥사의 『천자문』과 황간의 『논어의소』가 편찬된

     시기보다 150가량 앞당겨져 기록된 사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왕인은 왜에서 문필을 관장하는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현재의 우리들도 자신의 가문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음

    을 자랑하는 경우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대인들도 자신들의 가문이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자랑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자신들의 시조인 왕인이 오래 전부터 일본 열도에서 와서 활약한 것으로 기록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가문의 시조에 대한 전승은 전설적인 내용이 되거나 과장된 내용이 포함될 수 있다.



3. 『천자문』과 『논어의소』가 편찬되고 오경박사들이 활동한 시기는 언제인가?
       중국 남조의 양 무제 때이다. 양 무제는 박학다식한 군주이자, 불교에도 심취한 인물이었다. 

 

    그는 신하들의 학문적인 의문에 대답할 수 있을 만큼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백제의 부여에는 정림사라는 절이 있는데, 이 또한 양나라 수도에 있던 절 이름과 같다. 

 

    실제로 일본에 파견된 오경박사들은 백제인이 아니라 양나라에서 파견된 인물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유교적인

    지식과 불교를 발신하는 기지로서 양나라가 있었음을 생각하면,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가 보다 선명하게 이해된

    다.

 

[네이브 지식인]

[부경대학교 박물관장  부경대학교 사학과 부교수   이근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