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제인(閔齊仁, 1493~1549)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여흥(驪興),자(字)는 희중(希仲),호(號)는입암(立巖)이며전적(典籍) 민구손(閔龜孫)의 아들이다. 1520년(중종 15) 별시 문과에 급제한 후,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 하였으며 이듬해 승정원주서로 임용되었다.
그러나 이 때 《척간유생도기(擲奸儒生到記)를 고쳐 썼다하여 탄핵을( 받고 물러났다.
이후 김안로(金安老)가 물러난 1525년에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 다시 등용되었고 1528년 사간원 정언, 1531년 이조정랑을 거쳐 성균관사성에 있을 때 문신제술시(文臣製述試)에서 수석을 차지하였다.
1536년 호조참의를 거쳐 홍문관부제학·사간원대간을지냈고1538년 승정원동부승지기 되었는데 이때 국왕의명으로《구언전지(求言傳旨)》를지어 올렸다. 1541년에 외직으로 나가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從二品)가 되었고, 이어 사헌부대사헌. 형조참판(刑曹參判-從二品)을 지냈다.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호조판서로 윤임(尹任) 등을 제거하는데 앞장서 추성위사홍제보익공신(推誠衛社弘濟保翼功臣) 2등에여원군(驪原君)이 되었다.1547년(명종 2)에좌찬성(左贊成)에올라진휼사(賑恤使)를겸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는데 노력하였다.
1548년윤원형 일파가을사사화(乙巳士禍)를은폐시키려고 안명세(安名世)가 기록한 《시정기(時政記)》를고치려하자 이를 제지하다가 파직되었다. 이 후 대사간진복창(陳復昌)등의탄핵으로 녹훈이 지워지고공주로유배되었는데, 을사사화때 많은선비들에게 화를 입힌 것을 후회하다 적소에서 사망하였다. 저서에《입암집(賜暇讀書)》6권이 있다.
입암공 민제인 묘(立巖公 閔齊仁 墓)
민제인 신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