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숙종 이순(肅宗 李焞)
[생졸년] 1661년(현종 2) ~ 1720년(숙종 46) / 향년 60세(歲)
◇현종의 적 장남임
◇정식칭호 : 숙종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
◇재위기간 : 1674년.8월 ~ 1720년.6월(45년 10개월)
◇이름은 순(焞), 자는 명보(明普).
◇1661년 8월 15일 경덕궁 회상전에서 출생.
◇1667년 세자에 책봉.
◇1674년 어린 나이(14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수렴청정 없이 바로 친정 시작.
◇1720년 6월 8일 사망.
◇능호는 명릉(明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에 있다.
● 부인(夫人)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 金氏) 김씨
[생졸년] 1661년(현종 2)∼1680년(숙종 6)
광산김씨 광 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딸이고, 어머니는 청주한씨 유량의 딸이다.
1661년 9월 3일 회현방 사저에서 태어나 1670년(현종 11) 10세 때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의 동 별궁(義洞 別宮)에 들었고, 1671년(현종 12) 3월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1674년(현종 15) 현종이 죽고 숙종이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고, 1676년(숙종 2) 정식으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1680년 10월에 천연두(天然痘: 痘患)의 증세가 보였는데, 이때 숙종도 천연두를 겪지 않아서 약방도제조(藥房都提調)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건의에 의하여 숙종은 창덕궁(昌德宮)으로 이어하였다.
인경왕후는 발병 8일 만에 경덕궁(慶德宮) 회상 전에서 사망했다.
1713년(숙종 39) 존호(尊號)를 광렬(光烈)로 올려 졌고, 1722년(경종 2) 휘호(徽號)를 효장명현(孝莊明顯)으로, 1753년(영조 29) 존호를 선목(宣穆)로, 1776년(영조 52)에는 존호를 혜성(惠聖)으로 각각 올려졌다.
능은 익릉(翼陵)으로 경기도 고양시에 있고, 소생으로는 공주 2명(1678년, 1679년에 각각 사망 – 조졸(早卒=요절))이 있다.
●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
[생졸년] 1667년(현종 8)∼1701년(숙종 27)
여흥민씨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인유중(閔維重)의 딸이고, 어머니는 은진송씨 송준길(宋浚吉)의 딸이다.
1667년(현종 8) 4월 23일 반송동 사저에서 태어났고, 1681년(숙종 7) 가례를 올리고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예의가 바르고 덕성이 높아 국모로서 백성의 추앙을 받았으나, 왕자를 낳지 못하여 왕의 총애를 잃게 되었다.
특히, 1688년(숙종 14) 소의 장씨(후에 희빈)에게서 왕자 윤(昀, 경종)이 출생하자, 숙종의 총애는 소의 장 씨에게 쏠리게 되었다.
1689년(숙종 15)에 숙종이 왕자 윤(昀)을 원자로 봉하고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송시열(宋時烈) 등 노론파 인사들이 소를 올려 이에 반대함으로써 숙종과 심하게 대립하였다.
숙종은 이들을 면직, 사사시키고, 이현기(李玄紀) ·남치훈(南致薰) 등 남인들을 등용하는 이른바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났으며, 지위가 오른 희빈 장 씨의 간계로 폐서인이 되어 안국동 본댁인 감고당(感古堂)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 뒤 숙종이 폐비에 대한 처사를 후회하고 있던 중에 1694년(숙종 20) 소론파의 김춘택(金春澤) · 한중혁(韓重爀) 등이 폐비복위운동을 일으키자, 이를 저해하려는 남인 민암(閔黯) ·김덕원(金德遠) · 권대운(權大運) 등을 유배, 사사시키는 갑술옥사(甲戌獄事)를 거쳐 다시 복위되었다.
그 뒤 덕을 베풀고 희빈 장 씨와 화기(和氣)를 도모하면서 지내다가 병을 얻어 1701년(숙종 27)에 8월 14일 창경궁 경춘 전(景春殿)에서 사망했다. 존호는 효경숙성장순(孝敬淑聖莊純), 휘호는 의열정목(懿烈貞穆), 능호는 명릉(明陵)이다. 한 궁녀가 인현왕후를 주인공으로 하여 쓴 소설《인현왕후전》이 전한다.
소생은 없고, 능은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에 있는 명릉(明陵)으로 후에 숙종도 이곳에 묻혔다.
●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金氏)
[생졸년] 1687년(숙종 13)∼1757년(영조 33).
경주김씨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주신(金柱臣)의 딸이고, 어머니는 임천 조 씨 경창의 딸이다.
1687년(숙종 13) 9월 29일 순화방 사저의 양성 재에서 태어났고,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 민 씨가 죽자, 간택되어 궁중에 들어가 1702년(숙종 28)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711년(숙종 37) 천연두를 앓았으나 소생했고, 2년 뒤에 혜순(惠順)이라는 호를 받았다.
1720년(숙종 46) 숙종이 죽은 뒤 왕대비에 올랐고, 1724년(경종 4) 경종이 죽은 뒤 다시 대왕대비에 올랐다.
1722년(경종 2) 자경(慈敬), 1726년(영조 2) 헌열(獻烈), 1740년(영조 16) 광선현익(光宣顯翼), 1747년(영조 23) 강성(康聖), 1751년(영조 27) 정덕(貞德), 1752년 수창(壽昌), 1753년(영조 29) 영복(永福), 1756년(영조 32) 융화(隆化) 등의 존호가 올려졌다. 사후에 휘호 정의장목(定懿章穆)이 올려졌다. 소생은 없고, 능은 명릉(明陵)이다.
●희빈장씨(嬉嬪張氏)
[생졸년] 1659년(현종 즉위년)~1701년(숙종 27)
이름은 옥정(張玉貞). 인동장씨 경의 딸이고 어머니는 윤 씨이다. 윤씨는 조사석(趙師錫)의 노비였는데 독사에 물린 조사석을 목숨 걸고 구해주었다 하여 노비의 신분에서 면천되어 양인이 되었고 그 때 장형(張炯)의 후실이 되어 옥정을 낳았다.
조사석(趙師錫, 1632년∼ 1693년/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4촌 동생)과 종친인 동평군 항(東平君 杭 : 인조의 서1남 숭선군의 아들)의 주선으로 궁녀로 들어가 숙종의 총애를 독차지하였다. 1686년(숙종 12) 숙원(淑媛)이 되고, 1688년(숙종 14) 왕자 윤(昀, 경종)을 낳아 소의(昭儀)로 승격되었다.
숙종은 기뻐하여 왕자 윤(昀)을 세자로 봉하려 하였으나 송시열(宋時烈) 등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이 지지하지 않으므로 남인들의 원조를 얻어 책봉하려 하였다. 이에 서인의 노론 ·소론은 모두 아직 인현왕후 민 씨가 나이가 많지 않으니 후일을 기다리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이를 듣지 아니하고 1689년(숙종 15) 정월에 왕자 윤을 원자에 봉하고, 장 씨를 희빈(嬉嬪)으로 승격하였다. 이때 송시열이 세자를 봉함이 아직 빠르다고 상소하자, 숙종은 이미 명호(名號)가 결정된 다음에 이런 의견을 말하는 것은 무슨 일이냐고 진노하므로, 남인 이현기(李玄紀) ·남치훈(南致薰) ·윤빈(尹彬) 등이 송시열의 상소를 논박하며 파직시켜 제주도로 유배하게 하고 다시 사사하게 하였다.
이밖에 서인의 영수들도 파직 또는 유배를 면하지 못하였고, 반면에 남인의 권대운(權大運) · 김덕원(金德遠) 등이 등용되었다. 이 정권의 교체를 기사환국(己巳換局) 또는 기사사화(己巳士禍)라고 한다.
이해 5월에 다시 인현왕후 민 씨를 폐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삼으려 할 때, 서인 오두인(吳斗寅) · 박태보(朴泰輔) 등 80여명이 상소하여 이를 반대하였으나 도리어 참혹한 형문을 받게 되니, 이후 정국은 남인의 세상이 되었다.
기사환국 후, 시간이 감에 따라 숙종은 폐비사건을 후회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694년(숙종 20) 서인의 김춘택(金春澤) ·한중혁(韓重爀) 등이 폐비의 복위운동을 꾀하다가 고발되었다.
이때에 남인의 영수이자 당시 우의정으로 있던 민암(閔黯) 등이 이 기회에 반대당 서인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김춘택 등 수 십 명을 하옥하고 범위를 넓혀 일대 옥사를 일으켰다.
이때 숙종은 폐비에 대한 반성으로 옥사를 다스리던 민암을 파직하고 사사하였으며, 권대운(權大運)·목내선(睦來善) ·김덕원 등을 유배하고, 소론 남구만(南九萬) ·박세채(朴世采) ·윤지완(尹趾完) 등을 등용하고, 왕비 장 씨를 희빈으로 내렸는데 이것을 갑술옥사(甲戌獄事)라고 한다.
또한, 이미 죽은 송시열 ·김수항(金壽恒) 등은 복작되고, 남인은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소론이 들어서고 남인이 물러나게 될 때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張希載)가 희빈 에게 보낸 서장(書狀) 속에 폐비 민 씨에 관련된 문구가 논쟁이 되어 여러 사람이 장희재를 죽이자고 하였으나 세자에게 화가 미칠까 염려하여 남구만(南九萬)· 윤지완(尹趾完/윤임의 증손) 등이 용서하게 하였다.
그런데 뒤에 인현왕후 민 씨가 죽은 다음에 희빈 장 씨가 취선당(就善堂) 서쪽에다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인현왕후가 죽기를 기도한 일이 발각되었다. 이 일에 관련된 희빈 장 씨와 장희재는 살해되고 궁인· 무녀와 그 족당(族黨)도 화를 입게 되었다.
이것을 무고(巫蠱)의 옥(獄)이라 하는데, 이때에 희빈 장 씨에 대하여 관대한 태도를 취한 남구만 · 최석정(崔錫鼎) ·유상운(柳尙運) 등 소론의 선비들도 몰락하게 되고, 다시 노론이 득세하게 되었다. 숙종은 이후 후궁이 왕후로 승격하는 일을 없애는 법을 만들었다.
경종의 생모라는 이유에서 영조로부터「대빈궁(大嬪宮)」의 궁호를 하사받았다. 소생으로는 경종(景宗)과 왕자 성수(早卒)이다.
●숙빈 최씨(淑嬪崔氏)
[생졸년] 1670년(현종 11) ~ 1718년(숙종 44)
해주최씨 효원(崔孝元)의 딸.
1670년(효종 11) 11월에 태어났고, 1676년(숙종 2) 입궐하여 무수리(궁중에서 청소 일을 맡은 여종)로 있다가 숙종에 눈에 들어 아들 영수(永壽/두 달 후 사망)을 낳아, 1693년(숙종 19) 숙원에 봉해졌다. 이후 1694년 숙의(淑儀), 소의(昭儀), 1695년 귀인(貴人)을 거쳐 1699년(숙종 25) 빈(嬪)으로 승격되었다.
처소를 얻을 때 처음 숙종이 가장 애용하던 보경당(寶慶堂)을 하사받았지만, 그녀의 출신이 천출이라 대신들의 반발이 많았고, 숙종은 보경당을 다시 회수했다. 1718년(숙종 44) 3월 9일에 사망했고, 무덤은 경기도 파주시 광탄에 마련되었다.
영조(英祖)는 왕위에 오른 후 자신의 어머니인 숙빈의 궁호를 육상궁으로 하고, 숙빈의 묘를 원(園)으로 격상시켜 소령원(昭寧園)이라 했으며 묘비는 영조가 친히 썼다. 사당은 육상궁(毓祥宮)이라 한다.
영조 만년에 각지의 유생들이 소령원을 능으로 격상시키자는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렸으나 영조는 벼슬자리를 얻기 위한 아부 상소로 판단하고 끝내 능으로 격상시키지 않았다. 소생으로는 왕자 영수(1693년에 사망 - 早卒), 영조, 왕자(1698년 사망 - 早卒) 등 3남이 있다.
1744년 7월 영조(1694∼1776)는 어머니 숙빈최씨(1670∼1718)의 묘에‘소령(昭寧)’이란 묘호(墓號)를 올리며 묘갈문(무덤 앞에 세우는 돌비석의 비문)을 직접 지었습니다. 묘갈문에는 자신이 왕세제(王世弟·왕위를 이어받을 왕의 아우)에 오르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병으로 49세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담았습니다.
- 보물 제1631-2호 '영조어필-숙빈최씨소령묘갈문원고'
[비문 전문]
사친(私親)은 본관이 수양(首陽)이요, 우리 성고(聖考)이신 숙종대왕의 후궁이다. 경술년(1670: 현종11) 11월 6일에 여경방(餘慶坊) 사제(私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효원(孝元)이고, 모친은 정경부인에 추증된 홍씨(洪氏)이다.
조부는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된 태일(泰逸)이고, 조모는 정경부인에 추증된 장씨(張氏)이다. 증조부는 이조판서에 추증된 말정(末貞)이고, 증조모는 정부인에 추증된 장씨(張氏)이다. 외조부는 통정대부인 계남(繼南)이고, 외조모는 김씨이다.
빈(嬪)께서는 일곱 살에 궁중으로 들어오셨다. 처음에는 숙의(淑儀)와 귀인(貴人)에 봉해졌다가 다시 숙빈(淑嬪)으로 진봉(進封)되었으니 이는 내명부 정1품의 품계이다. 빈께서는 세 명의 왕자를 낳았는데 나는 그 중에 둘째다.
즉위 원년(1725) 순화방(順和坊)의 도성 북쪽 산기슭 아래에 사당을 건립하였고, 즉위 10년 갑인(1734) 2월에 비로소 빈의 고비(考妣)를 추증하였다. 즉위 20년 갑자(1744) 정월에는 다시 빈의 조고(祖考)와 조비(祖妣), 증조고(曾祖考)와 증조비(曾祖妣)를 추증하였다.
3개월 후, 묘호(廟號)를 육상(毓祥)으로 묘호(墓號)를 소령(昭寧)으로 정했는데 제사를 받들어 모시는 사람은 대원군 봉사손의 예에 따라 4대 이후에 돈녕정(敦寧正)을 세습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전감(典監)을 두어 묘(墓)를 지키게 함으로써 체모를 높였다.
아! 오늘 이후로 사친께서 예전에 지니셨던 현철한 덕이 현양될 수 있거니와 높이 떠받들어 근본에 보답하고 싶은 자식으로서의 도리가 다소나마 풀릴 수 있으리라.
나는 2남 10녀를 두었다. 효장세자(孝章世子)는 정빈(靖嬪)이 낳았는데, 세자빈인 현빈조씨(賢嬪趙氏)는 바로 풍릉부원군(豊陵府院君) 문명(文命)의 딸이다. 세자는 영빈(暎嬪) 소생으로 을묘년(1735: 영조11) 처음으로 원자에 봉해졌고, 병진년(1736: 영조12)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갑자년(1744: 영조20)에 가례를 설행하였다.
빈(嬪) 홍씨(洪氏)는 바로 세마(洗馬) 봉한(鳳漢)의 딸이다. 둘째 딸 화순옹주(和順翁主)는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에게 하가(下嫁)하였고, 셋째 딸 화평옹주(和平翁主)는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에게 하가하였으며, 일곱째 딸 화협옹주(和恊翁主)는 영성위(永城尉) 신광수(申光洙)에게 하가하였다.
아홉째 딸 화완옹주(和㣪翁主)와 열째 딸 옹주는 아직 어리다. 지금 묘갈문을 찬술하면서 묘표(墓表)와 비문(碑文)에 누락시킨 것을 모두 기록한다.
아! 지금 비석을 세우는 것은 정해진 호(號)를 드러내어 후세에 전하기 위함이다. 만약 터럭만큼이라도 과장된 뜻이 있다면 어찌 예전에 삼가시던 도리를 실천하는 것이겠는가!
전․후면에 대자(大字)와 음기(陰記) 및 전자(篆字)를 직접 쓰고, 묘표와 묘비(墓碑), 묘갈(墓碣)을 세운 곳과 갈석(碣石)을 세운 날짜를 서평군(西平君) 요(橈)에게 명하여 농대석(籠臺石) 위에 선사(繕寫)함으로써 훗날 고증의 자료로 삼게 하였다. 그리고 동년 8월, 길일을 택하여 묘소 좌측에 세울 것이다.
아! 25년 동안 낳아주고 길러주신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수 있을 듯하다. 지금 비문을 지음에 문임(文任)의 신하를 버려두고 내 스스로 소략하게 기술하는 것은 또한 자식으로서 사친의 삼가는 마음을 체득한다는 의미이다. 붓을 잡고 글을 쓰려하니 눈물과 콧물이 얼굴을 뒤덮는다. 옛날을 추억하노니 이내 감회가 곱절이나 애틋하구나.
황명(皇明) 숭정(崇禎) 기원후 117년 갑자(1744) 7월 15일에 삼가 쓰다.
● 명빈 박씨(示冥嬪朴氏)
[생졸년] 미상~ 1703년(숙종 29)
밀양 박 씨 효건(朴孝健)의 딸. 상궁출신으로 1698년 숙원, 1699년 숙의, 후에 귀인에 봉해졌다가 1702년(숙종 28) 빈으로 승격되었다. 소생으로는 연령군(延齡君 李昍, 1699~1719)이 있다.
● 영빈 김씨(寧嬪金氏)
[생졸년] 1669년(현종 10) ~ 1735년(영조 11)
안동김씨 창국(金昌國)의 딸로 숙종의 후궁이 되어 숙의에 봉해졌다가 소의, 귀인을 거쳐 1702년 빈으로 승격되었다. 당쟁에 휘말려 서인 세력의 몰락으로 인현왕후가 폐위될 때 함께 폐출당해 본가로 쫓겨났다가 인현왕후가 복위되었을 때 다시 입궐했다.
연잉군(영조)를 친아들처럼 여기며 자주 불러 음식도 주고 업어주기도 했다.
연잉군도 영빈김씨를 어머니라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소생은 없다.
● 귀인 김씨(貴人金氏)
[생졸년] 1690년(숙종 16)~1735년(영조 11)
경주김씨. 궁인출신으로 처음엔 숙원(淑媛) 이였다가 숙의(淑儀)가 되었고, 1686년 5월 소의(昭儀)에 봉해졌다가 6개월만인 1686년 11월 귀인(貴人)으로 승격되었다. 소생은 없다.
●소의유씨(昭儀 劉氏)
[생졸년] 미상~1707년(숙종 33)
강릉유씨. 궁인출신으로 1698년 숙원에 봉해졌다가 1699년 숙의, 1702년 소의로 승격되었다.
소생은 없다.
● 자녀
○적장녀 : 공주[1678 ~ 1678] >인경왕후 김 씨 소생
○적2녀 : 공주[1679 ~ 1679] >인경왕후 김 씨 소생
○서장남 : 경종 >희빈 장씨 소생
○서2남 : 왕자 성수(盛壽)[1690 ~ 1690] >희빈 장 씨 소생. 태어난지 일주일 만에 사망.
○서3남 : 왕자 영수(永壽)[1693 ~ 1693] >숙빈 최 씨 소생. 태어난 지 2달 만에 사망.
○서4남 : 영조 > 숙빈 최 씨 소생
○서5남 : 왕자[1698 ~ 1698] > 숙빈 최 씨 소생
○서6남 : 연령군 휜(延齡君 日日)[1699 ∼ 1719] >명빈 박 씨 소생.
1703년(숙종 29) 5세에 연령 군으로 봉하여졌다.
예법에서는 6세 이후에 봉작하는 것이 관례이나, 5세 당시 생모인 명빈 박 씨가 죽음으로써 주상자(主喪者)가 되었기 때문에 서둘러 봉해졌다. 이때에 대간들의 논란이 많았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대간들을 파직시키기도 하였다.
1707년 혼인하였고, 1708년 연령군 저택을 마련해 주라는 명령에 신하들이 호화주택을 반대하자 숙종은 선조대왕의 딸인 정명공주(貞明公主)의 집을 주었다. 1711년 10일간 천연두를 앓기도 했다.
1718년(숙종 44) 4월에 도총관이 되었다가 1719년 10월 2일 어린 나이에 죽었다.
숙종은 특별히 연령군을 사랑하여 제문과 묘지문을 직접 지었다.
부인은 상산김씨 동필(金東弼)의 딸인 상산군부인(商山郡夫人)으로 소생은 없다.
숙종이 소현세자의 증손 밀풍군(密豊君) 탄(坦)의 차남 상원군 공(商原君糿)으로 후사를 잇게 했으나, 일찍 사망하여 낙천군 온(洛川君縕), 달선군 영(達善君泳) 등으로 후사를 이었으나 역시 일찍 사망했다. 그리고 마침내 1777년(정조 1) 사도세자의 서2남 은신군(恩信君)으로 후사를 이을 수 있었다.
편집 : 이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