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이주(李冑)

야촌(1) 2010. 3. 31. 22:47

■ 이주(李冑)

    1468년(세조 14)∼1504년(연산 10)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고성(固城). 자(字)는 주지(胄之), 호(號)는 망헌(忘軒). 안동(安東)사람이다.

그는 좌의정 이원(李原)의 증손으로, 조부(祖父)는 현감 이증(李增)이고,1468년(세조 14) 아버지 현감 이평(李評)과 어머니 양천(陽川) 허(許)씨[허추(許樞)의 딸] 사이에서 차남(次男)으로 태어났으며. 배위(配位)는 전주(全州) 이해(李偕)의 딸이다.

 

1488년(성종 19)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여, 정언(正言)을 지냈으며, 선비들이 영예롭게 생각하는 사가독서에 천거될 정도로 잘 나갔지만 언관으로서 지나칠 정도로 강직한 발언도 스슴치 않았다 한다. 

 

연산군은「이주(李冑)등은 분명 나를 용렬한 임금으로 여겨, 나의 신하가 되지 않는구나」라는 전교를 내렸다고 한하여 1498년(연산군 4) 31살의 나이에 김종직의 문도로 붕당을 결성하여, 국정을 비판하고, 시사를 비방했다는 혐의로 무오사화 『1498년(연산군 4)』 에 연루되어 곤장 100대를 맞고, 그해 7월 26일 진도로 유배되었고, 그곳 진도  금골산  해언사(海堰寺)에서  6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제주도로 이배(移配) 된 후, 1504년 갑자사화 때, 예전에 궁궐 내에 대간청을 설치할 것을 청한 일이 있다는 이유로 서울로 압송되어 군기시 앞에서 백관이 보는 가운데, 김굉필(金宏弼) 재사당(再思堂) 이원(李黿)등과 함께 효수형(梟首刑)을 당했다.

 

그후 중종 반정으로 신원되고,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고 시호(諡號)는 충원(忠元)이다.

유집으로 후손들이 소장한 78수의 유시들을 모아  1571년(선조 4) 친구 최이재(崔貳宰)· 장옥산(張玉山)과 후학하중환(河中煥)등이 편집한 것을 뒤에 방후손들이 편찬 간행한「망헌문집(望軒文集)」이 있다.

진도에 있는 동안 금골산 해언사에서 유배자의 심정을 피력한금골산록(金骨山錄)이≪동문선≫에 전하고, ≪동국여지지≫와 진≪도읍지≫에도 수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국조방목(國朝榜目)》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문과방목(文科榜目)》
《사마방목(司馬榜目)》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진도군지》(진도군·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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