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서종태(徐宗泰)

야촌(1) 2010. 3. 27. 19:19

■ 서종태(徐宗泰)

     3대(代) 재상[영의정]을 배출한 가문.

 

[생졸년] 1652년(효종 3)~1719년(숙종 45)

[문과] 숙종(肅宗) 6년(1680) 경신(庚申) 별시(別試) 을과(乙科) 2[探花郞]위(3/20)

 [진사] 숙종(肅宗) 1년(1675)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44위(74/100) 

 [생원] 숙종(肅宗) 1년(1675)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 [생원] 1등(一等) 1[壯元]위(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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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달성(達城). 자(字)는  군망(君望), 호(號)는 만정(晩靜)· 서곡(瑞谷)· 송애(松厓). 1652년(효종 3)병조참의 문상(文尙)의 아들로 태어나. 1719년(숙종 45)에 졸했다.1675년(숙종 1) 생원시에 장원, 1680년(숙종 6) 문과 별시에 을과 2위로 급제하고, 이듬해 검열이 되어 실록청도청(實錄廳都廳)· 낭청(郞廳)으로서 《현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가 폐위되자, 오두인(吳斗寅)· 박태보(朴泰輔) 등과 소를 올리고 은퇴하여 저술에만 전념하였다.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다시 관직에 나와 승지· 대사간· 대제학· 공조판서·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703년(숙종 29) 정조사(正朝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거쳐 1716년(숙종 42)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가 되었다. 저서로《만정당집》이 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글쓴이 : 야촌 이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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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37년(1711년) 4월 영의정에 오른 서종태는, 본관이 달성(達城), 인조때 6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죽은 뒤 영의정에 추증 된 서성(徐?)의 현손으로, 증조부가 선조임금의 사위였던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주), 할아버지는 부사 서정리(徐貞履), 아버지가 병조참의 서문상(徐文尙)이었는데, 숙부 서문중(徐文重)이 영의정으로 있어, 그의 가문은 왕실의 척족에 재상가문이라 비길데 없는 호족이었던 셈이다.

 

선조의 딸 정신옹주(貞愼翁主)를 아내로 맞아, 왕의 부마로 달성위에 봉해진 서경주는, 그의 가문을 튼튼한 반석위에 올려 놓은 인물로 꼽혀 관직이 도총부도총관에 올라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서종태는 숙종즉위년(1675) 생원시에 장원으로 오르고, 5년 뒤에 문과에 급제, 이듬해 검열이 되어 실록청도청(實錄廳都廳)의 낭청(郎廳)을 겸해 <현종실록>편찬에 참여하여 이름을 냈는데, 그때 그의 나이 불과 26세였다.

 

숙종8년(1682) 서종태는 사가독서로 학문을 닦은 뒤, 사헌부헌납·집의·승정원승지·대사간을 거쳐 대제학으로 문형을 잡아 명예가 한층 높아졌는데, 숙종15년(1689) 기사환국으로 인현왕후 민씨가 폐위 되자 마음이 상해, 인현왕후의 폐위의 부당성을 강력하게 꼬집는 상소를 올리고 관직에서 물러나 은둔하고 말았다.


숙종20년(1694)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와 함께 남인정권이 붕괴되고, 소론이 득세하니 서종태는 다시 복직하여 대제학 자리를 되찾게 되었다. 정변으로 새롭게 활기를 되찾은 서종태는 곧 공조판서에 올라 육경의 반열에 들었다가, 대사헌이 되어 관기를 다스린 뒤, 숙종29년(1703) 정조사(正朝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조판서가 되었다.

 

정조사는 정월 초하룻날 중국황제에게 새해 축하인사를 가던 사신이었다.

이어 숙종33년(1707) 우의정에 오른 서종태는 이듬해 5월, 당파간의 알력으로 영의정 최석정(崔錫鼎)과 함께 물러났다가, 같은해 7월 다시 좌의정으로 기용 되었다. 이때 최석정도 영의정으로 복직하였다.

 

숙종37년 4월 서종태는 60세 나이로 영의정에 올랐는데, 이 무렵 정부는 북한산성 수축을 시작하여 1712년 10월 완공을 보았고, 함경감사 이선부(李善簿)가 백두산에 국경표지를 설정하고 오랑캐의 범접을 막고자 목책(木柵)을 설치하는 대형 공사를 벌였으나, 이듬해 흉년이 들어 공사를 중단하고 말았다.


두차레 영의정을 역임한 서종태는 행판중추부사로 물러 앉았다가 숙종45년(1719) 2월 68세 일기로 숨을 거두니, 시호가 문효공(文孝公)으로 내려졌다. 저술에 힘쓴 서종태는 <만정당집(晩靜堂集)>을 저서로 남겼다.

 

오늘날의 경기도 파주시 장단 도라산리 도라산 전망대 근처 비무장지대 남쪽에 서종태의 묘소가 있는 것으로 전하는데, 관리가 안되고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서종태의 아들에 명윤(命倫)· 명균(命均)· 명빈(命彬)이 있어, 그들 후예가 모두 현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 후손에 큰 인물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숱하게 쏟아져 나왔다.


장자 서명윤은 크게 들어나질 않았으나, 차자 서명균은 숙종36년 문과에 올라 사관으로 관직을 시작, 나중에 좌의정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서지수(徐志修)가 영조말엽에 영의정까지 오르니, 서종태는 우선 여기서 자신은 영의정, 아들은 좌의정, 손자가 영의정에 오른 셈이 되니, 곧 직계 3대에 걸쳐 연달아 재상이 나온 셈이 되었다.

 

거기다가 서종태의 숙부 서문중이 영의정에 오른 것까지 치면 4대에 걸쳐 정승이 줄을 이어 영의정이 셋이나 배출 된 셈이 된다. 글씨를 잘썼던 서명균은 문익공(文翼公)으로 시호까지 받았는데, 그의 후손들은 갈수록 번창하였다.

 

서명균의 손자, 즉 영의정 서지수의 아들에 서유신(徐有臣)이 있어, 그는 영조때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정조때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지내, 이른바 명예가 재상을 능가하는 양관대제학에 올라, 가문을 양관대제학배출명문으로 일구었다. 

 

이어 서유신의 아들에 영보(榮輔)·경보(畊輔)가있어, 서영보는 정조때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역시 대제학을 역임하고 호조판서에 올랐다가 판돈녕부사에 이르렀고, 서경보도 순조때 문과에 장원으로 오르니 형제가 장원급제의 영광을 안았던 셈이다. 서경보는 공조판서와 대사헌을 지냈다.

 

 이들이 곧 서종태의 현손인데 그들 후예도 매우 번창하여 큰 인물이 줄을 이었다.

또 서명균의 다른 아들 서무수(徐茂修)가 있어 이는 영의정 서지수의 아우였다.

 

서무수는 손자 서당보(徐堂輔)가있어 곧 서종태의 현손이 되는데, 서당보도 고종때 영의정에 이르니, 서종태는 현손에서 영의정이 두사람이나 나온 셈이 되었다.  또 서종태의 셋째 아들 서명빈은 경종때 문과에 올라 6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한 명신이었다.

 

이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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