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지명(墓誌銘)

발해의 정혜, 정효공주 묘지명

야촌(1) 2009. 11. 15. 19:09

발해의 정혜(貞惠), 정효공주(貞惠公主墓碑) 묘지명발해 제3대 문왕(文王)인 대흠무(大欽茂)의 둘째딸 정혜공주(貞孝公主 ,737~777) 무덤은 1949년 중국 지린성 둔화현의 계동중학과 연변대학 역사과가 지린성 둔화현 류딩산[吉林省 敦化縣 六頂山)에서 발굴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둔화의 중학교 교장이 학교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하던 중근처에 있는  옛날 무덤들에 혹시 보물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파헤쳤다고 한다. 그러다가 글자가 새겨진 돌조각들을 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문왕(文王)의 넷째딸 정효공주(貞惠公主,757~792)은 정혜공주의 동생이고  동궁(東宮, 태자)의 누이로 그녀의 무덤은 1980년 길림성 허룽현[和龍縣] 룽터우산[龍頭山]에서 발견되었다. 문화대혁명 당시 이곳에 하방(下放=중국에서, 1957년부터 상급 간부들의 관료화를 막기 위해 실시한 운동) 되었던 학생이 소꼴을 먹이다가 벽돌 탑을 발견하였고, 이어 연변박물관이 탑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 밑에 위치한 무덤을 발굴하게 되었다.

 

 

↑그림>인터넷에서

 

↑1949년, 중국 지린성 둔화현 류딩산(吉林省 敦化市 六頂山)에서 발굴된 발해 3대 문왕의

    둘째딸 정혜공주의 묘.  <사진 1> / 옛날 사진

 

↑정혜공주의 묘  <사진> 인터넷에서 

 

정혜공주(貞惠公主,738~777)는 발해 제3대왕 문왕(文王,737년 ~ 793년 까지 재위)의 둘째 딸이다.

두 무덤에서 발견된 제일 중요한 유물은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묘지명이다.

 

이를 통해 무덤의 주인은 발해의 제3대 왕 문왕(737~793)의 둘째 딸 정혜공주(738~777)와 넷째 딸인 정효공주(757~792)임이 밝혀졌다. 그밖에 정혜공주 무덤에서는 힘차고 생동감 넘치는 돌사자 두 마리를 찾아냈고, 정효공주 무덤에는 화려한 벽화가 그려져 있어 처음으로 발해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정혜공주 묘지명은 발굴 당시 연도羨道에서 일곱 조각으로 깨진 채 발견되었다. 재질은 화강암이며 모양은 위가 뾰족하고 아래는 네모진 형태를 띤 모습에, 크기는 높이 90cm, 너비 49cm, 두께 29cm이다. 발굴 당시에는 앞면에 단정한 해서체로 새겨진 21행 725자 중 491자만 식별할 수 있었는데, 나중에 그 내용이 거의 비슷한 정효공주 묘지를 통해 나머지도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묘지명은 전형적인 騈儷文(넉자와 여섯자로 이루어진 구절을 중심으로 대구법을 사용하는 화려한 문장)으로 서문 13행과 명문 6행 그리고 건립일을 적은 마지막 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중국 길림성 장춘시에 있는 길림성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정효공주 묘지는 정혜공주 묘지와 달리 발굴할 때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었다. 재질이나 모양은 정혜공주 묘지와 같다. 크기는 높이 105cm, 너비 58cm, 두께 26cm이고 앞면에 해서체로 18행 728자가 새겨져 있다.

 

이 역시 변려문으로 서문 12행과 명문 6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묘지란 죽은 사람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하여 무덤 안에 묻은 글을 가리킨다. 보통 돌에 글을 새겼기 때문에 묘지석(墓誌石) 또는 지석(誌石)이라고도 하지만 정식 명칭은 묘지명(墓誌銘)이다.

 

전체 문장이 지(誌)와 명(銘)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지는 죽은 사람의 생애를 기록한 산문이고, 명은 그를 추도하는 운문이다. 4ㆍ6구의 화려한 변려문을 사용한 묘지명은 당나라 때 크게 유행하였다.두 공주의 묘지는 똑같이 서문 네 단락과 명문 여섯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의 첫째 단락은 부녀자의 덕을 중국 고사에서 빌려와 전체 문장을 이끌고, 둘째 단락은 공주의 조상과 부왕이 세운 위대한 업적을 찬양하여 공주가 고귀한 출신임을 밝혔다.셋째 단락은 공주가 태어나고 시집가서 남편과 아이를 먼저 보내고 수절하다가 세상을 떠난 생애를 그렸고, 넷째 단락은 공주의 장례식을 적어 놓았다.

 

그리고 서문을 줄여서 운문으로 표현한 명문의 첫째 단락은 출신, 둘째 단락은 지혜로움과 아름다움, 셋째 단락은 출가, 넷째 단락은 수절, 다섯째 단락은 장례, 여섯째 단락은 애도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혜공주묘지문 병서

 

정혜공주묘지문은 정효공주의 것 보다도 먼저 발견되었으나, 심하게 파괴되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해독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정효공주의 비문이 발견되자 정혜공주의 비문을 쉽게 판독할 수 있었다. 두 묘지의 비문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앞으로 다른 묘비들이 발굴되어도 그 격식과 내용이 판판 다르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서는 개인적인 내용을 제외하면 정효공주묘지와 중복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일부분만 인용해 본다.

 

본문

 

이에 시호를 정혜공주(貞惠孝主)라 하였다. 보력 7년 겨울 11월 24일 갑신일(甲申日)에 진릉(珍陵)의 서쪽 언덕에 배장하였으니, 이것은 예의에 맞는 것이다.(중략) 이에 명문(銘文)을 새겼으니 다음과 같도다. 위대하고 빛나는 업적을 세운 조상들은 천하를 통일하였고, 상주는 것을 분명히 하고 벌내리는 것은 신중히 하여 그 인정(仁政)이 사방에 미쳤다.

 

부왕(父王)에 이르러서는 만수무강하여 3황(皇) 5제(帝)와 짝하였고 주(周)나라 성왕(成王), 강왕(康王)을 포괄하였다. 생각컨대 공주가 태어나매 어려서부터 진실로 아름다웠고, 비상하게 총명하고 슬기로워 널리 듣고 높이 보았다. 

 

궁궐의 모범이 되었고 동궁(東宮)의 누나가 되었으니, 옥 같은 얼굴은 무궁화만이 비길 수 있었다. (하략) 보력(寶曆) 7년 11월 24일.

 

 

↑정혜공주 묘지 병서

 

↑정효공주 묘지 병서

 

↑정효공주 무덤의 벽화/그림 >인터넷에서

 

묘지명을 통해 두 공주의 삶을 살펴보면 의외로 간단하다. 문왕의 둘째 딸 정혜공주는 남편과 어린 아들을 여의고 수절하다가 777년에 마흔 살에 죽었고, 문왕의 넷째 딸 정효공주 역시 남편과 어린 딸을 잃고 792년 서른여섯에 사망하였다.

 

그런데 두 공주의 생애가 비슷했기 때문인지, 두 공주의 묘지명은 몇 가지 구체적인 사실만 빼고는 내용이 똑같다. 즉 정혜공주와 정효공주가 각각 문왕의 둘째 딸과 넷째 딸이라는 점, 각각 아들과 딸을 낳았다는 점, 그리고 사망한 해와 당시 나이, 시호, 장례일과 장지 등 인적 사항만 다르고, 공주의 인품이나 행실 등을 적은 대부분 내용은 동일한 문장으로 표현했다.

 

이는 발해에서 국가의 의례와 관련된 문장을 담당하는 문적원(文籍院)이 묘지가 갖고 있는 정형적인 격식을 바탕으로 상황에 따라 필요한 부분만 고치고 나머지는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두 공주의 묘지명에서 특히 관심이 가는 부분은 바로 연호 사용이다. 

 

문왕은 737년 즉위하여 ‘크게 흥한다’는 뜻을 지닌 대흥(大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연호에는 그 시대가 갖고 있는 정치적 이상과 포부가 집약되어 있다. 57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지배 체제를 확립하는 데 힘쓴 문왕은 국정 지표를 아마도 발해의 국세를 크게 일으키는 것으로 삼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정혜공주 묘지명에는 공주가 보력 4년 4월 14일 을미에 죽어 3년 상을 치르고 나서 보력 7년 11월 24일 갑신에 장사지냈다고 적혀 있다. 이는 문왕이 처음에는 대흥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다가 나중에 보력으로 고쳐 사용하였음을 얘기해 준다. 

 

묘지명에 적힌 날짜의 간지를 헤아려 본 결과, 보력 4년과 7년은 각각 777년과 780년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보력으로 연호를 고친 해는 774년으로 대흥 38년에 해당한다. 보력은 왕이 새해에 신하들에게 나누어주는 달력을 말한다. 

 

그런데 달력을 나누어주는 것은 제왕의 고유한 권한이므로, 보력은 왕위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결국 보력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데에는 왕권을 더욱 강화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묘지명에 나타난 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라는 문왕의 존호에서도 엿볼 수 있다.

 

대흥과 보력은 모두 연호이고, 효감은 유교 용어이며, 금륜과 성법은 불교 용어이다. 특히 금륜은 무력이 아닌 불법으로서 세상을 통치하는 이상적인 왕을 뜻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 이념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문왕은 황상(皇上) 즉 황제로 불리우기도 하였다. 이처럼 문왕에 대한 호칭도 왕권이 강화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12년 후에 작성된 정효공주 묘지명에서는 공주가 대흥 56년(792) 6월 9일 사망하여 그해 11월 28일 장사를 치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문왕 말기에 다시 대흥 연호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문왕은 57년간 재위하면서 체제를 정비하고 왕권 강화에 힘썼지만 그가 죽고 나서 25년간 발해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정치적 격변기에 휩싸이게 된다. 문왕 후기에 연호가 보력에서 대흥으로 바뀐 사실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글 : 금석문 종합영상시스템

 

↑발해국의 3대왕 대흠무의 넷째 딸인 정효공주의 무덤을 알리는 묘지 안내 비.

 

↑발해국의 3대왕 대흠무의 넷째 딸인 정효공주의 무덤으로, 묘를 붉은 벽돌 건물로 뒤덮은 이모습이 정말로

    말이 안되는 중국인들의 소수민족을 폄하하는 역사외곡 유적 관리인 것이다.

 

정효공주 묘는 이미 발굴이 되면서 파괴가 되었는지 콘크리트 건물로 묘 전체를 완전히 봉쇄를 해 놓아서 어디가 무덤인지 전혀 알 수가 없고, 그 건물 안에 정효공주의 무덤이 있을 것이라고만 여겨졌다. 발해국의 3대왕 대흠무의 넷째 딸인 정효공주의 무덤은 하룡시로 가는길의 용해에 있는데, 이 무덤을 찾아가기가 정말로 쉽지 않다. 

 

그런데, 이 중국의 무식한 작자들이 무덤을 아예 파헤쳤는지 주위에 기와 파편들이 널려 있고 사진에서와 같이 벽돌 건물을 지어 무덤을 아예 덮어버려서 접근이 되지 않도록 막아 놓았다. 과연 이 유적이 주류민족인 한족들의 유적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무분별하게 발굴하여 파괴가 되도록 하였을까?

 

중국은 이런 문화재 관리의 속 좁은 행동을 보면 절대로 강대국이 될 수 없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주위를 둘러보니, 발굴 당시에 정효공주의 무덤이 얼마나 심한 파손이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기와 파편들이 무더 기로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다. 

 

무 무늬 기와조각들이었다.중국 정부에서는 이 무덤을 발굴하면서 아마도 거의 파괴를 한 듯하다.앞으로 돌아가니 무덤 건물 앞문에 누군가 정효공주 묘를 참배를 하고 갔는지, 철창문에 꽃아 둔 진달래가보였다 아마도 누구인가 한국인 관광객이 이곳을 방문 하였으리라.그리고 들어 가 볼 수 없는 안타까움에 주위에 핀 진달래를 철창에나마 꽂아두고 공주의 혼을 위로 하였으리라!. 

 

정효공주의 무덤에서는 발해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될 벽화 및 비석이 출토되었다고 한다.그런데, 이런 무덤을 건물로 막아 버리고 철문으로 봉쇄를 하였다.주위에는 발굴당시의 참상을 말해 주듯이 흩어져 있는 기와조각들이 중국정부의 비열하고 아주 교묘함을 느끼게 한다.

 

대국으로서 선진국을 꿈꾸는 중국 그리고 소수민족을 우대하는 정책을 펴는 중국!, 모두를 어우르는 그런 중화의 정책을 펴는 중국이, 이렇게 그들이 말하는 소수민족의 문화 유적을 관리하는 것만 보아도 이들은 결코 선진국이 될 수가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고구려도 발해국도 자기네들의 역사로 뜯어 고치면서 정작 이 귀중한 문화유적들은 왜 이렇게 파괴가 되고 방치 가 되는지 알 길이 없는 그들의 속 좁은 마음을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이런 문화정책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은 선진국이 될 수 있는 자질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문화재들이 명이나, 당과 같은 고대 한족 국가의 것이었다면, 과연 이런 식으로 파괴와 같은 발굴이 되고 그리고 이런 식으로 관리를 하였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출처 : 휠천국 직거래장터 원문보기> 글쓴이 : 레볼루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