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간략소개]
● 조위(趙瑋)
[시대] 고려 말
[생졸년] 1287(충렬왕 13)∼1348(충목왕 4).
[본관] 평양(平壤)
[출생지] 평양(平壤)
[대표관직]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고려 후기의 문신. 자는 계보(季寶)이며 평양부(平壤府) 상원 출신이다. 충렬왕 때 자의 도첨의사사(咨議都僉議司事)를 지낸 조인규(趙仁規)의 막내아들이다. 어머니는 사재경(司宰卿)으로 치사(致仕)한 조온려(趙溫呂)의 딸이다. 배위(配位)는 관군만호(管軍萬戶) 나유(羅裕)의 딸로, 통의군부인(通義郡夫人)에 봉해졌으며 아들이 하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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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집 제12권 / 묘지명(墓誌銘)
고려국 중대광(重大匡) 첨의찬성사 상호군(僉議贊成事上護軍) 평양군(平壤君) 조공(趙公)의 묘지(墓誌)
옛날 세황(世皇 원 세조(元世祖) )이 해내를 통일하고 나서 요황(要荒)을 회유할 적에, 우리 충헌왕(忠憲王 고종(高宗) )이 귀부(歸附)한 것과 충경왕(忠敬王 원종(元宗) )이 근로한 것을 가상하게 여겨, 덕을 높이고 공을 갚는 은전을 행하였다. 그리하여 황제의 딸을 충렬왕(忠烈王)에게 이강(釐降)하였으니, 그 이실(貳室)의 은혜와 삼접(三接)의 총애는 천하에 비할 곳이 없었다.
이때를 당하여 현능한 자들이 한꺼번에 나와 분주히 보익하면서 삼한(三韓)의 기업을 크게 빛냈는데, 그중에서도 정숙(貞肅) 조공이 특히 걸출하였다. 정숙공의 휘는 인규(仁規)인데, 관직은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이르렀고, 평강부원군(平康府院君)에 봉해졌다.
국가를 중흥하는 공을 세우고 나서 상상(上相)의 지위에 거하였으니, 공훈으로 보나 연륜으로 보나 울연히 원로대신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많은 자제들 역시 모두 가업을 제대로 잇는 가운데 공명과 부귀가 한 시대의 으뜸이었는데, 공은 그 자제들 중의 막내였다.
공은 휘가 위(瑋)요, 자는 계보(季寶)이니, 평양(平壤) 상원(祥原) 사람이다. 공은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에 추증된 영(瑩)의 손자요, 사재경(司宰卿)으로 치사한 조공 온려(趙公溫呂)의 외손이요, 관군 만호(管軍萬戶) 나공 유(羅公裕)의 사위이다.
9세에 문공(門功)으로 권무 창희궁(權務昌禧宮)이 되고, 두 차례 전직하여 섭호군(攝護軍)이 되고, 다섯 차례 전직하여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 경술년(1310, 충선왕 2)에 밀직 좌부대언(密直左副代言)에 임명되었으며, 네 차례 전직하여 우대언(右代言)이 되었다.
을묘년(1315, 충숙왕 2)에 언부 전서(讞部典書)를 제수받았다. 다음 해에 총부 전서(摠部典書)의 신분으로 평양 윤(平壤尹)의 직무를 행하였으며, 또 그 다음 해에 청주 목사(淸州牧使)로 나갔다.
북쪽 지역 사람들은 대부분 사나웠고, 남방 지역의 풍속 역시 교활하였는데, 공은 한 결 같이 은혜를 위주로 하고 위엄을 가하지 않으면서 태평 무사하게 되기를 기대하였으며, 청송(聽訟)하는 여가에는 술을 마시고 사냥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의 덕을 알지 못하다가, 떠나고 난 뒤에 사모하였다.
연우(延祐 원 인종(元仁宗)의 연호 ) 말년에 충숙왕(忠肅王)이 심왕(瀋王)과 갈등을 빚었는데, 혹자가 그 틈을 타고 공을 이간하니, 공에게 원윤(元尹)을 제수하여 산지(散地)에 두었다. 사태가 안정된 뒤에 충숙왕이 공에게 다른 뜻이 없음을 알고는 계유년(1333)에 지밀직(知密直)에 임명하였다.
을 해년(1335)에 판밀직(判密直)으로 옮겼다가 얼마 뒤에 첨의 찬성사(僉議贊成事)로 승진하였다. 이때 충숙왕이 정사에 권태를 느껴 재상에게 일을 위임하였는데, 공이 대체를 살피고 잗단 일을 힘쓰지 않으면서 발언을 강직하게 하자, 사람들이 공의 공정함에 심복하는 한편 부친의 풍모가 있다고 이르면서 총재(冢宰)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무인년(1338) 윤월에 어떤 일로 면직되었다. 그리고 이때 재상에게 은총을 내려 습봉(襲封)하게 하는 관례에 따라 평양군(平壤君)에 봉해졌다. 얼마 뒤에 충숙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사태가 일변하자 공이 조정에서 물러나 집으로 돌아와서는 날마다 친구들과 모여 술자리를 벌이곤 하였다.
그런데 지정(至正)으로 개원(改元)하던 해의 봄에, 화(禍)를 일으키기 좋아하는 자가 공을 무함하면서 객들과 함께 국가 정책을 비판했다고 고자질하자, 영릉(永陵 충혜왕 )이 매우 노하여 한밤중에 복주목(福州牧)으로 폄직(貶職)시키라고 명을 내리고는, 일각도 지체하지 말고서 위사(衛使)에게 압송하게 하였다.
공이 창황 중에 도성을 나가 임소로 달려가는 중에 기분이 꽤나 언짢아지면서 몸이 점점 이상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일단 돌아왔으나 병이 발작하여 걷기도 어렵고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는데 백방으로 치료해 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정해년(1347, 충목왕 3) 가을에 부원군(府院君)으로 진봉되었으나, 병 때문에 사은하지 못하였다. 무자년(1348) 11월 을사일에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2세였다. 부인 나씨(羅氏)는 통의군부인(通義郡夫人)에 봉해졌다. 아들 흥문(興門)을 낳았는데 지금 소부윤(少府尹)이다. 손자가 한 사람 있다.
이듬해 3월 기미일에 송림원(松林原)에 장례를 행하였는데, 장사를 지내려고 할 적에 그의 형인 원조(元朝)의 삼장법사(三藏法師) 선공(旋公)이 묘지(墓誌)를 나에게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조카가 지금 만리 길에 분상 중이라서 포복하여 와서 그대에게 청할 겨를이 없다.
우리 아우의 뜻에 대해서는 그대가 잘 알 터이니, 묘지를 써 주면 좋겠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우리 아우는 덕성으로 보나 품행으로 보나 옛사람에게 참으로 부끄러울 것이 없다. 한 번 일어나 동방 사람들의 기대를 위로해 줄까 하고 생각하였는데, 슬프게도 이제는 모두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국상(國喪) 중에 죽었는데도 뭇사람들이 그의 시호를 의논하여 내려 주었고, 관청에서 일을 도와주며 백관이 모여서 장례를 행하였으니, 그의 덕성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이 이와 같다. 그러니 어찌 명(銘)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내가 알았다고 하고는 다음과 같이 명하였다.
하늘이 재질을 내림에 / 天之降材
이 사람에게 더욱 후했나니 / 彌篤于人
어떻게 후하게 하였는가 / 何以篤之
임금과 어버이가 특별하였네 / 有君有親
정숙공의 아들이요 / 貞肅之子
충숙왕의 신하로서 / 忠肅之臣
있는 힘껏 효도를 다하고 / 旣能竭力
몸 바쳐 또 충성하였다네 / 又致其身
송곳니를 주었으면 뿔이 없게 한 것은 / 予齒去角
품부할 때 이미 다르게 한 것이거니와 / 賦已不均
덕을 주고서 수명을 또 빼앗다니 / 予德奪壽
하늘이 어쩌면 불인(不仁)한 것인가 / 天或匪仁
내가 공의 묘지에 명하는 것은 / 我銘公墓
백성을 위해 슬퍼하기 때문이니 / 其悲爲民
말을 만들되 부끄럽지 않게 해서 / 措辭無愧
이 지석(誌石)에 새기게 하였노라 / 刻此貞珉
[각주]
[주01] 요황(要荒) : 요복(要服)과 황복(荒服)의 합칭으로,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 지역을 가리킨다.
[주02] 이강(釐降) : 요(堯) 임금이 딸을 순(舜)에게 시집보낸 《서경(書經)》 요전(堯典)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왕녀를 신하에게 시집보낼 때 쓰는 표현이다. 충렬왕이 세자의 신분으로 있을 때 원 세조가 자기의 딸인 홀도노게리미실공주(忽都魯揭里迷失公主)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주03] 이실(貳室)의 은혜 : 원나라가 고려를 사위 나라로 대우했다는 말이다. 《맹자(孟子)》 만장 하(萬章下)에 “요 임금이 사위인 순을 이실에 머물게 하였다.〔帝館甥于貳室〕”라는 말이 나온다. 이실은 별궁이다.
[주04] 삼접(三接)의 총애 : 제후국인 고려를 천자국인 원나라가 특별히 총애했다는 말이다. 《주역(周易)》 진괘(晉卦) 괘사(卦辭)에 “진괘는 강후에게 말을 많이 하사하고 낮에 세 번씩 접견하는 상이다.〔晉 康侯用錫馬蕃庶 晝日三接〕”라는 말이 나온다. 강후는 나라를 잘 다스리는 제후라는 뜻이다.
[주05] 심왕(瀋王) : 충선왕(忠宣王)의 조카인 심양왕(瀋陽王) 왕고(王暠)를 말하는데, 충선왕의 장자인 충숙왕(忠肅王)과 고려 국왕의 자리를 놓고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다.
[주06] 송곳니를 …… 것이거니와 : 《한서(漢書)》 卷56 동중서전(董仲舒傳)에 “하늘은 역시 골고루 나눠 주는 바가 있으니, 예컨대 송곳니를 주었을 경우에는 뿔이 없게 한다.〔天亦有所分與 與之齒者去其角〕”라는 말이 나오는데, 하늘이 한 사람에게 완전무결한 행복을 내려 주지는 않는다는 뜻으로 흔히 쓰인다.
[주07] 덕을 …… 것인가 : 《중용장구(中庸章句)》 제 17 장에 “큰 덕의 소유자는 반드시 이에 합당한 지위를 얻고, 반드시 이에 합당한 작록을 받고, 반드시 이에 합당한 이름을 얻고, 반드시 이에 합당한 수명을 누리게 마련이다.〔大德 必得其位 必得其祿 必得其名 必得其壽〕”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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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高麗國重大匡,僉議贊成事,上護軍。平壤君趙公墓誌。
惟昔世皇。旣一海內而懷柔要荒。嘉我忠憲之歸款。忠敬之勤勞。而行崇德報功之典。迺釐降帝女于忠烈王。其貳室之恩。三接之寵。天下無對焉。當是時。賢能並出。奔走輔翼。光大三韓之業。貞肅趙公尤爲傑然者也。貞肅諱仁䂓。官至僉議中贊。封平康府院君。旣樹中興之功。都上相之位。以勳以舊。蔚爲元臣。諸子振振。又皆克家。功名富貴。冠於一時。公其季也。公諱瑋。字季寶。平壤祥原人。贈樞密院副使瑩之孫。司宰卿致仕趙公溫呂之外孫。管軍萬戶羅公裕之婿也。生九歲。以門功權務昌禧宮。再遷攝護軍。五轉大護軍。歲庚戌。拜密直左副代言。四轉右代言。乙卯。除讞部典書。明年。以揔部典書行平壤尹事。又明年。出牧淸州。北界人多桀驁。南方俗亦姦黠。公壹以惠不以威。期于無事。聽訟之餘。飮酒圍獵。人始不知其德。去乃思之。延祐末。忠肅王與瀋王構釁。或以間公。授以元尹。置之散地。事旣定。忠肅知其無它。癸酉。拜知密直。乙亥。遷判密直。俄陞僉議贊成事。時忠肅倦于政。委之宰相。公大體不務瑣尾。發言侃侃。人服其公。謂有父風。期以冢宰。戊寅閏月。以事免。時宰相例寵襲封平壤。已而忠肅損國。事隨以變。公屛掃。日與親故讌集。至正改元之春。樂禍者誣公與客論議國是。永陵怒甚。夜半下命。貶福州牧。衛使押送。不許一刻留。公倉皇出城。馳赴任所。意頗不樂。稍覺傷和。旣還疾作。艱行步重語言。百方莫醫。丁亥秋。進封府院君。以病不謝。戊子十一月乙巳。卒于家。亭年六十二。夫人羅氏。封通義郡夫人。生男興門。今爲少府尹。孫男一人。以明年三月己未。葬于松林原。將葬。其兄元朝三藏法師旋公以墓誌屬予曰。吾姪方萬里奔喪。未暇匍匐以請。吾弟之志子知之。乞誌之。又曰。吾弟之德之行。誠不愧于前人。謂當一起以慰東人之望。嗚呼今已矣夫。又其亡雖丁國恤。衆議謚以易名。官尤事以會葬。其德之感人如此。盍銘諸。糓諾而銘之曰。
天之降村。彌篤于人。何以篤之。有君有親。貞肅之子。忠肅之臣。旣能竭力。又致其身。予齒去爾。賦已不均。予德奪壽。天或匪仁。我銘公墓。其悲爲民。措辭無愧。刻此貞珉。<끝>
가정집 > 稼亭先生文集卷之十二 / 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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