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고궁,정려,서원

용산서원(龍山書院)

야촌(1) 2017. 10. 25. 03:24

↑용산서원(龍山書院)

 

 

 

 

 

↑용산사

 

용산서원(龍山書院) - 강원도 동해(東海)

 

[소재지] 강원도 동해시 쇄운동 201-1

[문화재지정] 용산서원 학규현판-강원도유형문화재 제78호(1982.11.03지정)

     용산서원 전적류(일괄)-강원도문화재자료 제140호(2007.1.19.지정)

[배향인물] 이세필(李世弼)

[창건연도] 1705년(숙종 31)

[향 사 일] 3월 3일. 9월 9일

 

1705년(숙종 31)에 최찬규(崔燦圭)·최찬기(崔燦基) 등이 지방유림과 협력하여 이세필(李世弼)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생사당(生祠堂)과 흥학비각(興學碑閣)을 세우고 용산사(龍山祠)라 하였다. 이세필이 죽은 이듬해인 1719년(숙종 45)에 위패를 모시고 용산서원으로 개편하였다.

 

1784년(정조 8)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789년에 박문수(朴文秀)·이태좌(李台佐)·이형좌(李衡佐) 등이 중건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뒤 1956년에 최만희(崔晩熙)· 홍질현(洪櫍鉉) 등이 중심이 되어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고, 이이(李珥)와 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하였다. 1984년에 다시 이이와 송시열의 위패는 훼철하고 이세필만 단독 배향하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각 4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신문(神門), 고사(雇舍) 등이 있다. 사우에는 이세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동재와 서재는 유림의 회합과 학문강론 및 숙소로 사용하고 있다. 고사는 서원의 관리인이 기거하는 곳이다.

 

용산서원에서는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변(籩) 4두(豆)이다. 이 서원의 학규(學規) 현판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8호로 지정되어 있다. 소장하고 있는 전적으로는 『천금록(天禁錄)』·『분향록(焚香錄)』·『제관록(祭官錄)』·『도기(到記)』 등이 있으며, 재산으로는 전답 2,000여 평, 임야 4,800여 평 등이 있다.

 

 

↑구천 이세필 선생 영정(龜川 李世弼先生影幀)


[이세필선생 인물소개]

1642년(인조 20)∼1718년(숙종 44).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군보(君輔), 호(號)는 구천(龜川). 항복(恒福)의 증손이며, 이조참판(吏曹參判:從二品) 시술(時術)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났다.

1674년(현종 15)제2차복상문제로 송시열(宋時烈)이 삭직 당하자, 그를 적극 옹호하였다. 그는 평소에 송시열을 모르는 사이였으나, 개연히 선비들을 설득하여 상소, 송시열의 원통함을 호소하다가 영광에 유배되었는데, 적소에 5년 동안이나 있으면서도 문밖을 나가지 않았으며《퇴계집(退溪集)》을 읽고 느끼는 바가 있었다고 한다.

1678년(숙종 4)귀양에서 풀려나오자 학행으로 천거되어 1680년 창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듬해 동몽교관이 되었고, 1684년 형조좌랑(刑曹佐郞:正六品)을 거쳐 용안현감(龍安縣監:從六品)이 되었다가 진위령을 지내고 삭녕군수(郡守:從四品)로 부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이이(李珥)· 성혼(成渾)을 문묘로부터 출향(黜享)하려 하자 관직을 버리고 진위(振威)로 돌아왔다. 생활이 매우 곤궁하였으나, 개의하지 않고 날마다 《대학》·《중용》을 외우며 ‘격물궁리(格物窮理)’ 공부에 전심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다시 김제군수(金堤郡守:從四品)가 되고, 이어 사복시정(司僕寺正:正三品) 장악원정(掌樂院正:正三品) 을 지냈다. 그뒤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從二品)· 형조참판(刑曹參判:從二品)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717년 상신 이이명(李頤命)이 독대(獨對)를 전횡하자 상소하여 그 잘못을 극론하였다. 그는 고향에 돌아온 뒤부터는 성리학에 전심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대학》을 가장 깊이 연구하였다. 만년에는 예학에 힘을 쏟아 중국과 우리나라의 고금예설을 두루 연구하였다.

저술로는 경설을 논한 것과 예에 관하여 논답한 것 등 20여권이 있으며 《악원고사 樂院故事》 1책이 있는데, 이는 묘악(廟樂)의 전고(典故)를 설명하고, 악장(樂章)에 관한 여러 사람의 논의를 수집하여 엮은 것이다.

1722년(경종 2)에 아들인 호조판서(戶曹判書:正二品) 태좌(台佐)의 추은(推恩)에 의하여 이조판서(吏曹判書:正二品)에 추증되었다가 이듬해에 다시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從一品) 이 내려졌다. 영광의 백산서원(柏山書院)과 김제의 용암서원(龍巖書院). 강원도 동해의 용산서원(龍山書院)에 제향 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