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사양성소(志士養成所) - 우현서루(友弦書樓)
지사양성소(志士養成所)- 우현서루(友弦書樓)
[건 물 명] 우현서루(友弦書樓) 터(대구은행 북성로 지점)
[위 치] 대구광역시 중구 수창동 101~11
[역사적 배경]
우현서루(友弦書樓)는 '이상화‘시인의 조부인 ’이동진(李東珍)‘선생이 사재로 건립하고 그의 장남 ’이일우(李一雨)‘ 선생이 운영했던 사숙(私塾)이다. 1만 여권의 서적과 서고는 물론 숙식도 제공, 전국의 많은 지사(志士)들이 이곳에서 학문을 논하며 의기를 길렀던 곳으로 유명하다.
장지연(張志淵). 박은식(朴殷植), 이동휘(李東輝) 등 많은 애국지사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그러나 1911년 일제는 민족정신 말살을 위해 이곳을 폐쇄시켰고 1921년 이 자리에 교남학교(嶠南學校,현 대륜중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지금 이곳은 그나마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무심코 지나쳐버릴 정도로 초라한 작은 안내판 하나만 덩그렇게 세워져 있다.
일제가 강제로 폐쇄할 정도였다면 애국의 기운이 강하게 서렸을 중요한 터임에도 불구, 우현서루(友弦書樓)를 아는 대구시민은 몇이나 될까싶다.
이처럼 북성로 곳곳에는 우리의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지만 많은 곳이 무관심속에 방치되어있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대구의 역사가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 애국지사들의 아카데미이자 살롱[salon]
●우현서루(友弦書樓)
사람을 교육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두 가지 방법의 결합이 아닐까 싶다. 하나는 '독만권서(讀萬卷書)'이고, 다른 하나는 '행만리로(行萬里路)'이다. 만권의 책을 읽고 그다음에는 만리를 여행해 보는 것이다.책을 안 보고 여행을 하면, 나와 세상 사이에 스파크가 덜 튄다.
나와 세상이 부딪쳐서 일어나는 스파크가 공부가 되고 내공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스파크 없으면 공부 안 된다. 우선 책을 많이 보아야 한다.구한말에 나라가 망하는 조짐이 보이자 대구의 소남(小南) 이일우(李一雨) 선생은 우현서루(友弦書樓)를 세워 인재양성을 꾀하였다.
이일우는 구한말 대구 갑부였던 경주이씨 '이장가(李莊家)'의 후손이었다.이 집안의 1400석 재산 가운데 반절은 주변 친척 자손들의 장학금으로 내놓고, 반절은 우현서루를 운영하는 데에 투입하였다. '나라가 없으면 지방 토호의 재력 따위는 한 줌 티끌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현서루는 단순한 책방이 아니라, 수천 권의 책이 구비된 사설 도서관이었다. 여러 사람이 와서 책을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숙박시설도 갖춰진 도서관이 우현서루였다. 책을 보고 싶은 사람은 보름이고 한 달이고 간에 공짜로 머무르면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책을 제대로 보려면 최소한 일주일 정도는 진득하게 먹고 자면서 눌러앉아 있어야 한다. 대구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 소문을 듣고 전국에서 뜻있는 지사(志士)들이 우현서루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하루 평균 외부 방문객이 20명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우현서루는 애국지사들의 아카데미이자 살롱이었던 셈이다.우현서루를 출입하며 인연을 맺었던 저명인사의 숫자가 150명 정도 되었다. '시일야방성대곡'을 썼던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 상해임시정부의 박은식, 초대 국무령 이동휘, 몽양 여운형 등이 그들이었다.
우현서루는 6~7년 정도 운영되다가 1910년 무렵에 일제에 의하여 강제 폐쇄되었다. 이 집안의 후손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중국군 중장을 지낸 이상정,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쓴 시인 이상화, '이조 건국의 연구'와 IOC 위원을 지낸 이상백, 우리나라 수렵의 제일인자로서 '세계명포수전'을 쓴 이상오 형제이다.
팔공산 비슬산의 정기가 뭉쳐 있는 대구에 누가 또다시 우현서루를 만들 수 있을까? 그런 의부(義富)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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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서루(友弦書樓)는 현 대구은행 북성로 지점의 터에 민족시인 이상화의 조부인 금남(錦南) 이동진(李東珍) 선생이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민족지사양성을 위해 사재(私財)를 털어서 세우고, 그의 장자인 소남 이일우 선생이 운영한 곳이다.
우현서루의 옛 터는 지금의 서성로와 북성로가 교차되는 지점의 서북지역 일부분인 약 7백여평의 대지였다고 한다.
우현(友弦)의 의미는 ‘역사적인 현자(賢子)들과 벗을 삼는다.’ 는 뜻으로 일제시대 초기 민족지사를 길러내기 위한 사설학원이었다.
영남일대에서는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서 뜻을 품은 지사들이 많이 모여들어, 이곳을 거친 사람만 150여명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장지연, 박은식, 이동휘, 조성환, 금지섭 등이 있었다. 이곳에 많은 민족지사들이 모여들자, 이를 위협으로 여긴 일제가 1911년에 강제로 폐쇄시켰다고 한다.
폐쇄 후에도 이일우선생은 낙담하지 않고 그 자리에 다시 강의원(講義院)을 세우고, 한편으론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신여성 계몽운동을 전개하게 되는데, 한-일 야구시합 끝에 터진 패싸움에 연루된 것이 들통이 나면서 또 폐쇄 당하였다.
이후에는 홍주일, 김영서, 정운기 등과 의기투합하여 교육기관을 설립하게 되는데, 이것이 현재의 대륜중고등학교의 전신인 교남학교이다. 우현서루에서 보관했던 책의 일부분인 '사부총관’등 3천 937권은 후손의 기증으로 경북대 도서관에 보관하고 있다.
한글 서적들의 일부는 일제에 의해서 강탈 또는 유실되었고, 그 중 일부만 이 이천동의 고서점에 있었다고 하는데, 서점주인 사망이후 행방이 묘연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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