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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 이우의 초서 귀거래사

야촌(1) 2008. 6. 15. 09:55

강원도민일보2008년 06월 13일 (금)[문화재 이야기] 10. 옥산 이우의 초서귀거래사신사임당의 맏딸 이매창(1529∼1592)이 어머니 그림 솜씨를 이어받았다면 막내아들 옥산 이우(1542∼1609)는 어머니의 서풍을 물려받았다. 

 

옥산은 자질이 뛰어나 문사가 고고하고 서화도 잘 했는데 세상 사람들이 그의 시·글씨·그림·거문고에 특출하다 하여 ‘사절’이라 불렀으며 천문·지리·복서에도 두루 통하였다고 했다. 우암 송시열(1607∼1689)은 “옥산공은 참깨에 ‘龜’자를 썼으며 또 두 쪽을 내어 한쪽 면에다 오언절구를 써도 글씨의 짜임이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고 했다.

 

1567년 진사시에 올라 사헌부감찰, 비안현감, 고부, 괴산군수를 지냈으며 1605년 군자감정에 제수 되었으나 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옥산은 1589년 중국과 우리나라 역대 명필의 글씨를 논한 ‘논서법’이란 글을 지었는데 옥산의 서예관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여기서 그는 역대 명필의 글씨를 옛 문헌을 인용하여 비유하고 아울러 자신의 견해를 밝히면서 특히 진·당의 필법으로 돌아갈 것을 말하였다. 옥산은 ‘논서법’에서 어느 특정한 서풍에 치우치지 않고 폭넓게 수용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먼저 진· 당의의 고법으로 진나라 왕희지, 왕헌지, 위나라 종요, 당나라 태종, 안진경, 장욱, 회소 등을 거론했는데 옛 서론에서 각 명필의 글씨를 형용한 명구를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당 서호의 글씨는 “늙은 규룡이 돌을 후비는 듯, 목마른 천마가 냇가로 치달리는 듯하다”고 했고 당 아서의 글씨는 “놀란 뱀이 풀 섶에 들어가는 듯, 나는 새가 숲에서 뛰쳐나오는 듯하다”고 했다. 

 

또 우리나라 명필로는 신라의 김생을 비롯하여 스님으로 명필인 영업, 조맹부 서풍의 명필로 조선의 양평대군 이용(1418∼1453)을 거론하였다. 이어 근대의 글씨로 “아름다운 난초와 춤추는 바람처럼 일취가 유동하는 듯하다”와 “늙은 소나무 위에 눈이 쌓인 듯 고풍스러운 기운이 속됨을 끊은 듯하다”는 것도 명필의 정수를 발췌한 것이다.


도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된 옥산 ‘귀거래사초서병풍’은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쓴 것으로 끝부분에 “병진 모춘 옥산 서사”라 밝힌 점으로 보아 옥산의 나이 15세 되던 1556년 3월에 어머니 글씨를 모범삼아 썼음을 알 수 있다. 

 

비록 15세에 썼다고 하지만 “용이 천문으로 튀어 오른 듯, 호랑이가 봉각에 누워 있는 듯하고 구름 위를 나르는 학이 하늘에서 노는 듯하다”는 평이 걸맞을 정도다. 옥산은 당대 최고의 초서명필 고산 황기로(1521∼?)의 외동따님에게 장가들면서 장인의 서풍을 수용하게 되었다.

 

고산도 사위의 글씨를 평하기를 “서법의 씩씩하기는 나보다 낫지만 아름다움에서는 미치지 못하는데 조금만 더 공을 기울인다면 내가 미칠 바가 아니라” 했다. 심지어 선조 임금께서도 옥산의 글씨를 크게 칭찬하면서 어필 서화를 자주 하사 하였다고 했다.


이렇듯 옥산은 글씨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형제간 우애도 남달랐다. 특히 율곡 형님과는 늘 자리를 함께 했고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한가로이 머물 때면 필히 술을 준비하고 형님을 위해 거문고를 탔다. 형님의 임종을 끝까지 지켰으며 예를 다하여 장례를 치렀다.


조선 중기 시와 글씨로 당대를 주름잡던 백광훈(1537∼1582), 백진남(1564∼1618)과 함께 사임당서파를 형성한 옥산은 17세기 중·후반 우리나라 초서풍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글 : 정항교
◇오죽헌 시립박물관장
◇강릉 출신, 1955년생
◇경원대 대학원 고전문학전공(박사)
◇박사논문 ‘율곡 이이의 시문학 연구’

 

↑조선시대 뛰어난 문사인 옥산 이우(1542∼1609)의 ‘귀거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