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지리지(地理志)

조선시대 군기시(무기의 제조 보관) 유적 발견

야촌(1) 2009. 12. 18. 21:11

■ 조선시대 무기제조-보관시설인 군기시(軍器寺) 유적 발견 

 

2009년 11월 30일 서울 시내 한복판인 서울 시청 신축청사 공사장에서 조선시대 군기시(軍器寺) 터의 일부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굴되었군요. 동래성 해자 발굴에 이어 2년만에 조선시대 군사사 관련 유적 중 특A급 유적이 발굴된 셈입니다.

 

 

◇밑그림 저작권자-지적도/문화재청/한강문화재연구원

◇점선 표시-번동아제
◆ 청색-서울시청 건물지
◆ 붉은색-1912년 지적도상 국유지(추청 군기시 터)
◆ 노란색-이번 발굴지역

 

1) 군기시 유적 위치에 대한 검토


군기시(軍器寺)는 조선시대에 무기를 제조하고 보관하던 관서입니다. 활이나 칼 같은 냉병기부터 화약무기, 갑옷 제조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무기류를 제조했던 곳이 바로 군기시입니다. 조선시대 각종 기록을 보면 지방에서 제조한 무기가 군기시에서 제조한 무기의 품질만 못하다는 내용이 여러차례 등장합니다. 무기 제조에 관한 한 군기시의 위상과 지위는 압도적이라는 이야기죠.


경국대전에 따르면 군기시에서 근무하는 장인만 644명이라고 규정할 정도이니 수백명의 무기 제조 전문 장인이 근무하는 전문적인 무기 제조 집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884년 군기시가 폐지된 이후 등록류등 업무 관련 서류가 전혀 보존되지 못한 상태여서 군기시의 구체적인 업무 처리 과정이나 내부 시설 등 구체적을 활동상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군기시 터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굴된 것은 엄청난 의미가 있죠. 이번 발굴에서 개별 유물 중에도 눈길을 끌만한 것들이 많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군기시 터로 추정되는 유적의 일부가 발굴되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단 흥미로운 점은 이번에 발굴된 군기시 추정 유적이 기존에 군기시 터로 추정하던 지역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는 점입니다. 군기시는 현대 지도 제작이 이루어지기 전에 해체되었기 때문에 정밀한 현대 지도 위에서 그 위치를 특정하기는 매우 힘듭니다.

 

고종이 현 덕수궁에 거주하던 시절에 외곽 경호시설로 사용되던 숙위소(宿衛所)가 군기시 터라고 추정하는 것이 그동안 일반적이었습니다. 일본이 제작한 1903년도 경성지도와 1907년도 최신경성도를 보면 숙위소의 위치는 태평로에 접한 도로변에서 서울시 청사 바로 북쪽 일대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프레스센터-서울신문 건물이 있는 곳이죠.

이번 발굴과정에서는 한강문화재연구원측은 일제 강점초기-현대까지의 지적도를 조사해서 서울시 청사 북쪽 일대에서 원래 국유지였던 곳을 군기시 터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프레스센터 뿐 아니라 그 동쪽 일대에까지 군기시 터의 일부라는 것이죠. 그림으로 표시하면 위 그림과 같습니다.

위 그림에서 붉은색 점선으로 표시한 지점이 1912년 지적도상에서 국유지로 표시된 곳입니다. 군기시가 폐지된 이후 구 군기시 부지를 민간에 매각하지 않았다고 가정한다면 바로 이 붉은색 점선 안이 구 군기시 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래 파란 색으로 표시된 부분은 서울시 청사 관련 건물들이 들어서 있던 지역이며 노란색 점선 안이 이번에 발굴된 지역입니다.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노란색 점선 안은 1912년 지적도를 근거로 군기시 터로 추정할 수 있는 지역(붉은색 점선) 밖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점에서 군기시로 추정되는 유적이 확인되었습니다. 대장군전 촉, 대장군전 날개, 화약이 담긴 금속제 그릇, 화약무기용 발사체인 석환, 불랑기 자포, 승자총통이 무더기로 출토된 유적이라면 군기시 터 이외에는 생각하기 힘듭니다.

 

결국 이번에 발굴된 지역이 군기시 터의 일부가 맞다는 입장을 전제한 다음 기존 추정 위치와 다른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로 압축해 볼 수 있습니다.

1) 조선시대 당시에 군기시 건물 배치에 변화가 있었을 가능성. 특히 이번에 발굴된 지역은 조선 전기의 군기시 터의 일부이고 조선 후기에는 군기시 영역 외로 방치되던 외곽 지역일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조선 전기와 후기의 군기시 터가 임진왜란을 계기로 약간 영역 변화가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죠.

2) 1884년 군기시 폐지이후 1912년 지적도 작성 이전에 군기시 동남쪽 일대의 부지 중 일부(이번 발굴 지역)를 민간에 매각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조선 후기의 군기시도 기존에 추정하던 곳보다는 더 동남쪽까지 넓은 부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죠.

 

 1700년대 한양지도와 군기시 

 

↑1700년대 한양지도상의 군기시 (확대, 붉은색 점선 표시)

 

일단 두가지 가능성을 검토해 보기 위해선 조선시대 지도를 살펴봐야 합니다. 지금은 광화문에서 세종대왕-이순신장군 동상을 지나 덕수궁-시청 사이로 해서 숭례문까지 이어지는 도로가 존재하지만 이 도로는 조선시대 도로가 아닙니다.

 

조선시대 도로는 교보문고 앞에서 끝나고 큰 길은 종로를 거치는 좌우 도로로 연결되죠. 종로 방면에서 다시 시청 앞으로 빠지는 비스듬한 도로와 종로에서 명동 입구를 지나 숭례문으로 비스듬하게 연결되는 도로가 조선시대 주도로였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 군기시의 입구도 현재의 덕수궁 방향이나 프레스센터 입구쪽이 아니라 시청부지를 향하는 쪽에 입구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조선 후기 지도를 살펴보면 이런 점이 더욱 분명이 드러나죠.

조선시대 지도라는 것이 정확도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위치 짐작 이상으로 절대 위치를 찍기는 힘들지만 위 지도나 1834년 도성전도 등 상세한 조선시대 한양지도로 판단하건데 군기시의 남쪽 경계는 하천인 정릉동천의 서북안에 접했던 것으로 보이고 북쪽 경계는 분명하지 않으나 위 지도로 보면 군기시교(일명 무교) 보다 더 북쪽에까지 미쳤을 확율이 높습니다.

 

군기시 동쪽 경계의 경우 군기시 오른쪽으로 소로가 보이므로 종로에서 군기시교로 이어지는 큰 길에 미치지 못한 지점이 부지 경계가 될 것입니다. 서쪽 경계의 경우 넓은 도로가 새로 생기는 등 지형 변화가 심해서 짐작하기는 힘드나 군기시 바로 왼쪽에 소로가 보이므로 1907년 지도상의 숙위소 담장보다는 더 동쪽에 군기시 부지 경계가 위치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정리하자면 1907년 숙위소 부지가 군기시 터 그대로라기 보다는 숙위소 부지와 일부 겹쳐지는 그 보다 동쪽내지 동남쪽 지점이 군기시 터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특히 위 1700년대 지도의 군기시 주변 묘사를 보건데 군기시의 부지는 1912년 지적도상의 국유지보다는 동남쪽으로 조금 더 튀어나왔을 것 같다고 판단됩니다.

 

1907년 서울 지도,지도 이미지 출처-한강문화재연구원 현장발굴지도위 보고서

                

신왕성이라고 표시된 건물이 현재의 덕수궁. 숙위소라고 표시된 곳이 현재의 프레스센터다.

 

어느 가능성을 놓고 보던 간에 이번에 발굴된 지역이 조선시대 군기시의 가장 동남쪽 외곽지역에 해당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크게 이견이 없을듯합니다.

 

설사 위에서 생각해본 가설 1)에 따라 조선 전기의 군기시 터가 조선 후기의 군기시 터보다 더 동남쪽까지 펼쳐져 있다해도 발굴지점(노란색 점선 내부) 정중앙으로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조선시대 하안 석축이 확인된 이상 그 하안석축은 조선시대 한양 지도에서 보이는 정릉동천으로 봐야합니다.

 

그렇다면 하천 동남쪽으로는 더 이상 유적이 존재할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군기시의 다른 많은 시설들. 이를테면 갑옷 제조 흔적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유적 등은 지금 발굴된 지역의 북쪽과 서북쪽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문제는 프레스센터죠. 이건 지상 20층에 지하 상가까지 있는 건물이니 이 지점에 있던 군기시의 흔적은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봐야겠죠. 이번에 조선시대 유물층이 발견된 지역의 층위는 분명하지 않으나 현장지도위용 보고서에 따른다면 대체로 2~3.2m 사이에 조선시대 유물층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이 정도 깊이라면 도로 부지나 저층 건물용 부지 지하에는 파괴되지 않은 군기시 관련 유구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을듯 합니다. 특히 서울시청과 프레스센터 사이에 3~4차선 도로가 있고 프레스 센터 뒤쪽으로도 일부 저층건물군과 도로가 존재해서 이 지점에는 지하에 있는 유구가 부분적으로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20층 건물을 세우기 위해 건물 좌우로 꽤 넓게 터파기 공사를 했겠지만 프레스센터 앞쪽의 인도도 일부 보존 가능성이 있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프레스센터는 포기하더라도 도로 부지가 꽤 넓은 편이니 이 지점에 앞으로 포장 공사 등을 새로 할 필요가 있다면 그때는 도로를 폐쇄하고 발굴 결단을 내리는 방안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점선 표시-번동아제 

                         

이번 발굴지역 (노란색)과 앞으로 군기시 관련 유적이 발견된 가능성이 있는 지역 (적/청색)

 

사진에서 적색으로 표시된 부분은 제 개인적인 견해로 군기시 관련 유구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지역이고 청색으로 표시된 지역도 제 생각에 군기시 관련 일부 유구가 잔존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 지역입니다.

 

2)발굴유물

 

 사진저작권자-문화재청/한강문화재연구원, 위치표시-번동아제.              

◇아래 유물사진 저작권자-문화재청/한강문화재연구원

 

건물지1호 (붉은색)

이번에 사상 두번째로 조선시대 불랑기 자포가 출토되었으며 정식 발굴로는 이번이 첫 사례입니다. 목동 지하철 공사장에서 출토된 것은 흙을 이동시킨후 확인했기 때문에 정확한 출토 층위나 위치가 불명확했는데 이번에 좀 더 학술적 근거가 분명한 정식 출토품이 확인되어 의미가 적지 않습니다.

 

특히 가정계해라고 연호와 간지가 명기되어 있어 1563년 시점에 조선이 이미 불랑기를 도입했음을 재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같은 지점에서 승자총통이 무더기(최소 12자루 이상)로 나왔습니다.

 

 

 

건물지2호 (노란색)

사진으로 장담하기에는 조금 부담스럽지만 형태가 경희고소총통 등과 유사해 조선 초기 내지 전기로 소급될 수 있는 총통일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 흔한 불랑기나 승자총통보다는 건물지 2호에서 나온 총통이 더 따져볼 가치가 있는 무기 같습니다.

 

또 삼국시대 고분에선 흔히 보이지만 제가 아는한 조선시대 유적에서는 출토 사례가 전무했던 덩이쇠가 같은 건물지2호에서 나왔습니다.

 

삼국시대 철정과 유사한 일종의 철 소재로 보입니다. 조선시대 무기 제작에서도 철정을 사용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시 의미가 큰 유물 같습니다. 건물지 2호 주변에서 철제 재갈도 2점 이상 나왔습니다.

 

전세 유물을 제외하고 출토품 중에 조선시대 마구는 흔하지 않다는 점, 특히 건물지 2호 주변의 유물들이 다른 건물 유물들보다 전반적으로 연대가 올라가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재갈 또한 조선 초-전기로 소급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역시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 유물 같습니다.

 


건물지5호 (회색)
    일부 전세품 석환이 남아있지만 출토품으로는 역시 흔하지 않은 석환이 나왔습니다.


건물지10호 (흑색)
    승자총통(勝字銃筒)  다수(최소 9자루 이상)와 대형 철환이 나왔습니다.


건물지11호 (하늘색)
    철제 장군전촉, 철제 장군전 날개가 출토되었습니다. 현재 국내에서 전시중 장군전은 대부분 복원품이고 완형은

    일본에만 전세품이 남아있었습니다. 국내에 남아있던 것은 장군전의 철제 촉뿐이었죠. 이번에 처음으로 장군전

    철제 날개가 출토되었습니다. 매우 희귀한 유물이며 조선시대 장군전을 복원하는데 매우 의미가 큰 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형 철환 1발과 화약이 담긴 상태의 동제발이 나왔습니다. 기존 전세품이나 출토 유물 중 조선시대 총통 내부에

   화약이 잔존한 경우가 두서너건 사례가 있는데 이번에 새로운 사례가 추가되어 성분 분석 결과가 나올 경우 조선

  시대 화약의 성분을 정확하게 추정하는데 매우 유용한 비교 자료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담장 1호 (파란색)
    역시 대형 철환 1발이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