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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자도 탐낸 조선문예 걸작들.

야촌(1) 2006. 9. 5. 19:38

침략자도 탐낸 조선 문예사 걸작들

[한겨레 2006-04-19 21:18]

 

↑[한겨레] 경남대박물관 소장 ‘데라우치 문고’ 10년만에 서울 외출

 

일제의 조선 강점 뒤, 초대 총독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다케(1852~1919)는 무단 통치로 민족의 숨통을 짓눌렀던 군벌 정객이다. 뒤이어 총리까지 역임했던 그가 간송 전형필처럼 품격높은 고서화 애호가였다는 사실은 뜻밖이다.

 

총독 재직 때인 1910~15년 문화재 조사사업을 벌여 어마어마한 이땅의 서화들을 뭉치째 거둬들였다. 유명한 그의 컬렉션 ‘데라우치 문고’는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10년전 경남대가 일본에서 돌려받은 옛 ‘데라우치 문고’의 조선시대 시서화 명품들이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 나온다. 25일부터 6월11일까지 열리는 ‘경남대 박물관 소장 데라우치 문고 보물-시·서·화에 깃든 조선의 마음’전이다.

 

출품작들은 데라우치 문고를 기증받은 야마구치 현립대학으로부터 96년 돌려받은 98건 135책을 간추린 100여점이다. 개별작품으로는 1,000점이 넘는 이들 유물은 대부분 보기드문 조선시대의 최고 수준의 명품 서화첩 묶음 속에 들어있던 것들이다.

 

‘역사를 알아야 세계를 지배한다’는 지론을 지녔던 데라우치는 한·중·일 3국의 역사, 문예와 연관된 핵심 고문서와 시화들을 집중 수집했던 까닭에 그의 컬렉션들은 조선시대 문예사의 보고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환수 직후인 96년 유물 27종 47권이 덕수궁 석조전에서 선보인바 있으나, 이번 기획전은 10년간 컬렉션을 샅샅이 분석하고 새 사료를 발라낸 결과물이란 점에서 의미가 다르다는 설명이다.

 

전시는 1부 ‘유학자 시문’ 2부 ‘어제어필과 궁중기록화’, 3부 ‘별장첩’, 4부 ‘서화명가의 그림’, 5부 ‘서화명가의 글씨’ 등 5개의 뼈대로 세워졌다. 무엇보다 조선시대 서화사의 구멍을 메울 미술·서예사 자료들이 반갑다.

 

왕족화가인 이경윤(1545~1611)의 화첩 <낙파필희>, 1602년작 계회도인<계묘사마동방계회도첩>, 성삼문·서경덕·정철·곽재우 등의 육필시고가 담긴 <한묵청완> <선배시첩>·명필 한석봉의 작가 노트격인 <석봉필론> 등이 눈길을 끈다.

 

이들 가운데 이경윤의 인물, 산수, 노안도(기러기 그림) 등이 6면에 걸쳐 실린 <낙파필희>첩(사진 아래)은 단연 주목된다. 속세를 떠난 탈속 거사 등의 유유자적한 모습 등을 그린 이 화첩에는 동시대 인물인 유몽인, 이호민의 제시가 폭마다 실려 보기드문 작가의 진작으로 보고있다.

 

깔깔하고 거친 선묘를 쓰는 절파 화법의 대가인 이경윤은 <고사탁족도> 등 전칭작이 있었으나 그동안 진작은 호림박물관 소장 <산수인물첩>뿐인 것으로 알려졌었다.

 

<계묘 사마동방계회도첩>은 임진왜란 등의 격동기를 거친 과거급제자들 모임 도다.


중국 남종 문인화의 특징인 쌀알 모양 먹점 찍기(미법준)로 산을 표현해 남종문인화의 도입기를 16세기까지 앞당길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사군자, 산수, 동물화 등 28점이 실린 <홍운당첩>에도 겸재 정선의 가장 이른 작품으로 보이는 <한강독조도>를 비롯해 송민고의 <석란도>, 윤두서의 <모자원도> 등 중기 화인들의 미공개 그림들이 다수 들어있다.

 

<한묵청와> 등의 육필시고에서는 개성적인 필체로 쓰인 성삼문, 서경덕, 곽재우 등의 낯선 싯구들을 친필로 볼 수 있으며 명, 청 교체기 중국행 사신에게 준 전별시 모음인 17세기 별장첩 등은 중원의 정세변동에 대한 지식인들의 복잡한 심사를 보여준다.

 

1817년 순조의 세자 영의 왕실학교 입학 장면을 묘사한 <정축입학도첩>, 영조와 신하들이 청계천 준설을 축하하며 시를 나누는 장면을 그린 <제신제진>, 추사 김정희의 <완당법첩> 등도 보인다.

 

뒤엉킨 컬렉션 사료들을 유교적 미의식의 산물인 시서화 역사의 맥락에서 두루 꿴 기획자의 정성과 안목을 높이 살 만하다. 이동국 전시과장은 “자연과 하나된 물아일체의 도학자에서 실사구시의 현실론자로 변모해간 조선 선비들의 미의식 변천을 시서화 모음을 통해 생생히 살펴볼 수 있다는 게 묘미”라고 말했다.

 

(02)580-1475.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