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옹화상어록<나옹화상가송>(懶翁和尙語錄<懶翁和尙歌頌>
■ 나옹화상 어록 발(懶翁和尙語錄跋)
이상은 왕사 보제존자가 사방으로 돌아다닐 때 일상의 행동을 한마디, 한 구절 모두 그 시자가 모아 “나옹화상 어록"이라 이름 한 것이다. 그 제자 유곡(幽谷) ․굉각(宏覺) 등이 여러 동지들과 더불어 세상에 간행하려고 내게 그 서문을 청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서문이란 유래를 쓰는 것인데, 그 유래를 모르고 서문을 쓰면 반드시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것이오.
장님이 길을 인도하거나 귀머거리가 곡조를 고른다면 그것이 될 일이겠는가!?
나는 그것이 안 되는 일인 줄 알 뿐 아니라, 더구나 백담암(白淡庵)의 서문에서 남김없이 말했는데 거기 덧붙일 것이 무엇 있는가." 그랬더니 그들은 "그렇다면 발문(跋文)을 써 주시오" 하면서 재삼 간청하므로 부득이 쓰는 것이다.
그러나 스님의 넓은 그릇과 맑은 뜻을 엿볼 수 없거늘, 어떻게 그것을 나타낼 수 있겠는가. 다만 내 듣건대, 부처는 깨달음[覺]을 말하고, 그 깨달음으로 중생을 깨우치며 자비로써 교화한다 하니, 그것은 우리 유교로 말하면 먼저 깨달은 사람이 뒤에 깨달을 사람을 깨닫게 하고 인서(仁恕)로 교(敎)를 삼는 것이니, 그것이 같은가 다른가.
우리 군자[先儒]는 이렇게 말하였다. "서방에 큰 성인이 있으니 천하를 다스리지 않아도 어지럽지 않고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믿으며 교화하지 않아도 스스로 행하는데, 탕탕하여 아무도 그것을 무어라고 말할 수 없으니, 도는 하나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유불(儒佛)이 서로 비방 한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서로 비방하는 것이 그름을 안다. 유교를 비방하는 것이 불교를 비방하는 것이요,
불교를 비방하는 것이 유교를 비방하는 것이다. 다만 극치에 이르지 못한 제자들이 서로 맞서 비방할 뿐이요, 중니(仲尼)와 모니(牟尼) 는 오직 한 덩어리의 화기(和氣)인 것이다.
이제 이 어록을 보면 더욱 그러함을 믿을 수 있으니, 언제나 허망을 버리고 진실을 닦아 임금을 축수하고 나라를 복되게 함으로써 규범을 삼는 것이다. 이미 우리 임금은 이 분을 존경하여 스승으로 삼았으니 이 어록을 간행하여 세상을 깨우침이 마땅할 것이다.
정사년(1377) 첫여름 하순(下旬) 어느 날,
단성보리 익찬공신 중 대광계림 군 이달충(端誠輔理翊贊功臣重大翠鷄林呼李達衷)은 머리를 조아려 두 번 절하고 삼가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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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나옹화상어록<나옹화상가송>
(懶翁和尙語錄<懶翁和尙歌頌>
王師普濟尊者, 游歷諸方時, 凡日用施爲動作, 雖片言半句, 侍者皆撰集, 題之曰懶翁和尙語錄, 其徒幽谷覺宏. 與諸同
왕사보제존자. 유역제방시, 범일용시위동작, 수편언반구, 시자개찬집, 제지왈나옹화상어록, 기도유곡각굉, 여제동
志. 將刊行于世. 請序於余. 余曰序者. 序其所以. 不知其所以而强序之, 則爲人詆誚必矣. 以盲道行, 以聵調律, 其可乎,
지, 장간행우세, 청서어여, 여왈서자, 서기소이, 부지기소이이강서지, 즉위인저초필의, 이맹도행, 이외조율, 기가호,
吾知其不可也. 況有白淡庵之序, 無무餘蘊, 庸庸何贅乎, 答曰若然則幸跋卷後, 請至再. 旣不獲己然其所以廓乎其器.
오지기불가야, 황유백담암지서, 기무여온, 용용하췌호, 답왈약연즉행발권후, 청지재, 기불획기연기소이곽호기기,
澄然厥之, 未能窺狙(虛+見), 安有所著. 但嘗聞之. 佛之爲言, 覺也, 將以覺悟群生, 以慈悲爲化. 與吾儒先覺覺後覺. 以
징연궐지, 미능규저(허+견), 안유소저, 단상문지, 불지위언, 각야, 장이각오군생, 이자비위화, 여오유선각각후각, 이
仁恕爲敎, 其有同乎, 不乎, 吾君子嘗曰, 西方有大聖人者. 不治而不亂, 不言而自信, 不化而自行, 蕩蕩乎人無能名焉.
인서위교, 기유동호, 불호, 오군자상왈, 서방유대성인자, 불치이불란, 불언이자신, 불화이자행, 탕탕호인무능명언,
道則一也, 世之言曰, 儒佛相非, 吾知其相非之爲非也, 非儒非佛. 非佛非儒, 但其徒未至其至者. 相售而相非耳仲尼牟
도즉일야, 세지언왈, 유불상비, 오지기상비지위비야, 비유비유, 비불비유, 단기도미지기지자, 상수이상비이중니모
尼, 只是一團和氣. 令觀此錄, 益信其爲然, 常以去妄修眞. 壽君福國爲定規, 旣吾王尊敬王尊敬爲師, 爲此錄, 刊行警世
니, 지시일단화기, 영관차록, 익신기위연, 상이거망수진, 수군복국위정규, 기오왕존경왕존경위사, 위차록, 간행경세
爲此錄, 刊行警世.强圉大荒落夏孟旬季有日,
위차록, 간행경세, 강어대황락하맹순계유일,
端誠輔理翊贊功臣 重大匡鷄林君 李達衷, 稽首再拜 謹題.
단성보리익찬공신 중대광계림군 이달충, 계수재배 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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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題]
나옹혜근(懶翁惠勤, 1320~1376, 고려 공민왕 우왕 때의 스님으로 王師를 지냄) 스님의 어록을 `나옹화상어록(懶翁和尙語錄) "이라 한다. 이 어록에 실려 있는 스님의 행장과 탑명에 의하면, 스님은 영해부(寧海府) 사람으로 속성은 아(牙)씨이고, 아버지는 선관령(膳官令: 궁중의 음식을 관리하는 직책)을 지냈다.
스님의 나이 스무 살 때(1340년) 친구의 죽음을 보고 생에 의문을 가져서 공덕산(功德山) 요연(了然) 스님께 출가하였다. 이후 회암사(檜巖寺)로 가서 (1344년) 밤낮으로 수도하던 중 크게 깨치고 1348년 중국으로 가서 대도(大都) 법원사(法源寺)에서 지공화상(指空和尙)을 친견하고 한 해를 머물렀다(다른 기록에 의하면 스님은 8살 때, 당시 고려에 왔던 지공스님에게서 보살계를 받았으며, 그 보살계첩이 지금도 전한다). 그 다음해에는 휴휴암(休休艤)에서 여름 안거를 지냈다.
그 후 평산 처림(平山處林: 임제종 양기파) 스님에게서 불법을 이어받고 강남(江南) 등지를 행각하였다.
다시 지공스님을 찾아뵙고서 그에게서 선지(禪旨)를 전해 받았다. 이때 법의(法衣), 불자(拂子), 범어(梵語)로 쓴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이후 광제선사(廣濟禪寺)에서 개당설법을 하였고(1356년), 다시 지공스님을 뵌 후 고려로 돌아왔다(1358년), 10여 년만의 귀국이었다.
내원당에서 심요법문을 한 후 신광사(神光寺)에 주지로 있었다(1361년). 그 후 구월산(九月山)과 금강산(金剛山)에 계셨으며, 청평사에 계실 때(1367년) 지공스님이 보낸 가사와 편지를 받았고, 4년 후 회암사에서 지공스님의 사리를 친견했다.
1370년 스님이 51살 때 개경의 광명사(廣明寺)에서 공부선(功夫選)을 주관하였다.
여기에서는 선과 교를 총망라하여 시험을 보았으나 오직 환암 혼수(幻庵混修)만이 스님의 인정을 받았다.
이때 당시의 국사이며 화엄종의 대종사인 설산(雪山: 千熙) 스님을 방석으로 때린 사건이 이 어록에 실려 있다. 이듬해 8월 왕사(王師)로 봉숭 되어 금란가사와 법복 및 바루를 하사받았다. 그 후 4년간은 병란에 불타버린 회암사 중창에 전력하였다.
그동안에 공민왕이 돌아가시고 우왕이 즉위하여 다시 왕사로 추대되었으나 회암사를 낙성한 직후에 중앙 대간(臺¡)들의 압력으로 밀양 영원사(瑩源寺)로 그 처소를 옮겨 가던 중 신륵사 (神勒寺)에서 입적하시니(1376년 5월 15일) 세수는 57세이고 법랍은 38세이다.
스님은 자기의 죽음을 스스로 `열반불사(¿槃佛事)'라고 하였는데, 스님의 열반 후 10여년 이내에 신륵사 이외에도 금강산, 치악산, 소백산, 사불산, 용문산, 구룡산, 묘향산 등 7개소에 이색(李穡) 이 찬한 탑비가 세워졌고, 또 원주 영전사(令傳寺)에도 탑비가 세워졌다.
스님의 어록은 `어록(語錄)'과 `가송(歌頌)' 두 권으로 되어 있다. 시자 각련(覺璉)이 수집한 어록에는 상당법어 29칙, 짧은 글 25칙, 이색(李穡)이 찬(撰)한 탑명과 문인 각굉(覺宏)이 쓴 행장이 실려 있다.
이 상당법문의 형식상 특색은 첫째 특별한 구분의 기준 없이, 스님이 중국 광제선사에서 개당한 때의 법문을 시작으로 하여 스님의 행장과 거의 비슷한 순서로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모든 법문에 대해, 시기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상당법문에는 공민왕과 그 왕비인 승의공주에 대한 수륙재(水陸齋)에서 행한 법문을 비롯하여 영가를 위한 법문이 특히 많다. 그리고 대어(對語) 6칙, 감변(勘辨) 3칙, 착어(着語) 1칙은 무척 특색 있는 법문이다.
법문의 내용은 주로 간절하게 화두를 참구할 것을 말하였다. 즉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는 먼저 신심과 의지가 견고해야 하며, 하루 종일 화두를 들어서 마침내 저절로 의심이 일어나는 경지에 이르게 되면 마치 물살 급한 여울의 달과 같아서 부딪쳐도 흩어지지 않고 움직여도 없어지지 않는 지경이 되어 크게 깨침에 가까웠다고 한다.
특히 화두공부를 점검하는 10가지를 모아서 `공부10절목(工夫十節目)'이라 하였다. 또 법문을 하면서 주장자, 죽비, 불자, 할 등을 사용하였고, 영가에 대한 법문에서는 주장자 대신에 죽비를 사용하였다.
시자 각뢰(覺雷)가 편집한 가송(歌頌)에는 완주가(翫珠歌) 60구, 백납가(百歌) 40구, 고루가 (奇歌) 52구의 노래 세 수[三種]를 비롯하여 게송, 찬(讚), 발원문, 405구의 장편 가사인 승원가(僧元歌) 그리고 스님의 `노래 세 수'에 대해 이색이 쓴 후기가 함께 실려 있다.
게송은 단순히 풍경을 읊은 것을 비롯하여 계명(戒銘: 이름을 지어주면서 그 이름을 풀이 하여 지어주는 글), 여러 선인(禪人)을 떠나보내며 당부하는 것, 게송을 청하기에 주는 것, 임금의 덕을 칭송한 것, 옛사람의 송(頌)에 답한 것, 세상을 경계한 것, 제(題)한 것 등, 여러 가지를 모은 것이다.
승원가에서는 아미타불을 염불할 것을 말하고 있는데, 누이동생에게 준 글 등에서도 아미타불을 염할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법장(法藏) 비구가 스님의 삼종계를 계승하여 보다 장편으로 발전시킨 백납가 200구, 고루가 144구, 영주가 300도 실려 있다.
이렇게 수집된 어록은 환암 혼수가 교정을 하고 문인인 각우(覺, 또는 覺), 각변(覺卞), 각연 (覺然), 유곡(○○), 굉각(宏覺) 등이 힘을 모아 간행하였다.
그런데 이색(李穡)의 서문에 의하면 "옛 본을 교정하여 출판하려고 내게 서문을 청 한다"고 하였고, 백문보(白文寶)의 서문은 지정(至正) 23년(고려 공민왕 12, 1363)에 씌어졌다. 이때는 스님께서 신광사(神勒寺)에 거주하던 시기이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볼 때 스님께서 신광사에 거주하던 시기에 누군가에 의해서 스님의 어록이 한 번 편집되었고, 이것이 나중에 이색에 의해 `옛 본'이라 한 것인 듯하다. 결국 스님의 어록은 두 번 편집된 것으로 그 처음은 중국에서 돌아온 얼마 후에 있었고, 다음은 열반하신 후의 것으로 지금 전하는 것은 이것이다.
↑나옹선사 화상(懶翁禪師畫像). ↑나옹선사 부도(懶翁禪師浮屠).
[종목] 시도유형문화재 50호
[명칭] 나옹선사부도및석등(儺翁禪師浮屠및石燈)
[분류] 부도(浮屠)
[수량] 1기
[지정일] 1974.09.26
[소재지] 경기 양주시 회암동 산8-1
[소유자] 회암사.
[관리자] 회암사.
나옹선사(懶翁禪師)(1320∼1376)는 고려말(高麗末)의 명승(名僧)으로 본명(本名)은 혜근(慧勤)이고 호(號)는 나옹, 강월헌(江月軒), 초명(初名)은 원혜(元惠)이다.
고려(高麗) 충혜왕(忠惠王) 복위(復位) 5년(1344)에 회암사(檜巖寺)에서 좌선(坐禪)하고 충목왕(忠穆王) 3년(1347)에 뻬이징(北京)에서 인도(印度)의 고승(高僧) 지공선사(指空禪師)에게 배운 뒤 공민왕(恭愍王) 7년(1358)에 오대산(五臺山) 상두암(象頭庵)에 머물다가 공민왕 10년(1361)에 왕에게 설법(說法)하고 신광사(新光寺) 주지(住持)가 되었으며 공민왕 14년(1365) 다시 회암사 주지가 되었다가 우왕(禑王) 2년(1376) 신륵사(神勒寺)에 입적(入寂)하였다.
시호(諡號)는 선각(先覺)이다. 부도는 팔각지대석(八角地臺石) 위에 상·중·하대(上·中·下臺)의 기단을 두었으나 아무 조각(彫刻)도 없고, 팔각옥개석(八角屋蓋石) 위에 보주(寶珠)가 조각되어 있다.
부도의 높이는 3.6m로, 가로 세로 각각 1.15m이다. 석등은 방형(方形)의 하·중·상대(下·中·上臺) 위에 2매(枚)의 판석(板石)을 세워 화사(火舍)를 만들고 사각의 옥개석을 얹었으며 정상(頂上)에 상륜부(相輪部)가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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