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고전(古典)

[고전산문] 죽음과 바꾼 스승의 가르침 - 무오사화

야촌(1) 2017. 6. 3. 00:52

■ 죽음과 바꾼 스승의 가르침

 

[번역문]

 

선비의 습속이 밝지 않은 것은 도학(道學)이 행해지지 않는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고, 도학이 행해지지 않는 것은 사도(師道)가 전해지지 않는 데에 근원한 것입니다. 김종직은 처음으로 ‘마음을 바르게 하는 학문[正心之學]’을 제창하여 후진들을 인도하고 도와주어 바른 마음을 근본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몸소 사도(斯道)를 자임하고 사문(斯文)의 흥기를 자기 책임으로 삼았으니, 그 공은 도리어 공명과 사업에 우뚝한 자보다 나음이 있습니다. 시호(諡號)를 정하는 법에 ‘학문을 널리 닦고 견식이 많은 것[博文多見]’을 '문(文)'이라고 하고, ‘사물을 널리 들어 알고 재능이 많은 것[博聞多能]’을 '문'이라 하고, ‘도덕이 높고 사물을 널리 들어 아는 것[도덕박문(道德博聞)]’을 '문'이라 합니다.

 

만약 견식이 많고 재능이 많은 것으로 이름 짓는다면, 김종직이 바른 마음을 근본으로 삼고 몸소 사도(斯道)를 자임했던 공은 후세에 민멸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도덕이 높고 사물을 널리 들어 아는 것’으로 시호를 의논하였습니다.

 

원문士習之不明, 由於道學之不行, 道學之不行, 源於師道之不傳. 宗直始唱正心之學, 誘掖後進, 以正心爲本. 身任斯道, 興起斯文爲己責, 其功反有賢於功名事業之卓然者矣. 諡法有博文多見曰文, 博聞多能曰文, 道德博聞曰文. 若以多見多能名之, 則宗直正心爲本, 身任斯道之功, 泯滅於後, 故以道德博聞議諡.

 

-『성종실록』 24년 1월 9일(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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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성종 23년(1492) 8월 19일, 고향 밀양으로 낙향하여 지내던 점필재 김종직이 삶을 마쳤다.

소식을 전해들은 성종은 철조(輟朝)하고 사부(賜賻)ㆍ사제(賜祭)하며 시대의 스승으로 일컬어지던 한 인간에 대한 예를 표했다.

 

봉상시(奉常寺)에서도 제자 이원(李黿,1471 년 추정 ~1504)이 김종직의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정하는 게 좋겠다는 시의(諡議)를 올렸고, 그렇게 정해졌다. ‘마음을 바르게 하는 학문[正心之學]’으로 자기와 같은 후진들을 이끌어 주었다는 최고의 의미를 담은 시호였다.

 

그런데 김종직의 「졸기(卒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달려 있다.

처음의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다. 도덕이 높고 학문이 넓은 것이 ‘문(文)’이고, 청렴하고 공정한 것이 ‘충(忠)’이다. 뒤에 대간의 논박을 받아 시호를 ‘문간(文簡)’으로 고쳤다.

 

문학이 넓고 견문이 많은 것이 ‘문’이고, 경(敬)에 거하여 간소하게 행동하는 것이 ‘간(簡)’이다.

[初諡文忠, 道德博文, 文; 廉方公正, 忠, 後以臺駁改諡文簡, 博文多見, 文; 居敬行簡, 簡.]

 

무슨 곡절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아닌 게 아니라 김종직이 죽고 난 뒤, 성종 23년 12월 14일부터 이듬해 4월까지 대신(大臣)과 대간(大諫) 사이에서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둘러싼 논쟁이 집요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쪽은 영의정 윤필상(尹弼商)이 이끌고 있던 의정부였다.

 

봉상시에서 올린 시의(諡議)를 보면, 김종직을 공자와 같은 성인(聖人)에 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文)이란 글자도 도덕박문(道德博聞)으로 풀었는데 정주(程朱)처럼 도통(道統)을 전한 자가 아니라면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안침(安琛)ㆍ홍귀달(洪貴達)ㆍ남세주(南世周) 등이 예전에도 문충의 의미를 도덕박문으로 해석한 적이 있고, 한번 내린 시호를 바꾸는 것이 타당치 않다는 반대 의견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시호는 결국 ‘문간(文間)’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런 김종직의 시호 문제가 발발한 시기는 공교롭게도 성종 23년 12월 14일이었다. 공교롭다고 한 것은, 바로 그날 무관치 않아 보이는 두 개의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기 때문이다.

 

하나는 앞서 말한 김종직의 시호 논란이 불거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던 성균관 생원 이목(李穆, 1471~1498)이 방면된 것이다. 오전엔 김종직의 제자 이목의 문제가 해결되었다 했더니 오후엔 이목의 스승 김종직의 문제가 일어났다. 그건 우연이었을까, 우연이 아니었을까?

 

사태를 보다 분명하게 짚어보기 위해서는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 이목이 의금부에 잡혀 온 사연을 살펴보아야 한다. 김종직의 시호 논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1월 하순, 조정은 성종의 모후 인수대비(仁粹大妃)가 내린 언문 한 장으로 들끓고 있었다.

 

금승법(禁僧法)을 둘러싸고 조정의 의견이 찬반양론으로 극명하게 갈린 것이다. 윤필상ㆍ노사신과 같은 원로대신들은 성종과 인수대비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모호한 입장을 취했고, 안침ㆍ표연말과 같은 젊은 대간들은 그처럼 오락가락하는 대신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그런 와중에 성균관 유생 이목이 한 장의 상소를 올렸는데, 거기에서 영의정 윤필상을 ‘간귀(奸鬼)’라고 대놓고 비판했던 것이다. 성종은 불같이 화를 냈다. 그리고는 어린 유생이 감히 원로대신을 능욕했다는 것을 문제 삼아 의금부로 잡아들여 국문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의금부에 잡혀 온 이목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우의정 허종(許琮)을 비롯하여 이조판서 홍귀달 등등이 나서서 언로가 막혀서는 안 되니 젊은 선비의 광견(狂狷)으로 보아 너그럽게 용서해 줄 것을 간곡하게 청했다.

 

그리하여 열흘 만인 12월 14일 방면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간귀’라는 치욕적인 비난을 받은 윤필상은 물론 유자광과 같은 대신들은 앙앙불락(怏怏不樂)하여 쉽사리 화를 가라앉힐 수 없었다. 그리하여 대신조차 능욕하며 날뛰고 있는 젊은 사류의 기세를 꺾어 놓기 위해 다른 길을 택했다.

 

바로 그들이 시대의 스승으로 떠받들고 있는 김종직의 시호를 트집 잡고 나섰던 것이다.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겠다고 벼르던 이목을 놓치고 난, 바로 그날 오후에!

 

마침내 그들의 의도대로 시호는 ‘문간’으로 깎아내려지고,문충’이란 시호를 올린 이원(李黿)은 파직되는 수난을 겪었다. 하지만 윤필상의 분노와 보복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무오사화 때 운명처럼 다시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윤필상은 기어코 이목을 난언절해(亂言切害)의 죄로 몰아 참형에 처하고, 이원은 붕당(朋黨)의 죄로 몰아 곤장 80대에 원방부처(遠方付處)하게 만들었다. 또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연산군 10년 갑자사화에 벌어진 살육의 피바람은 겨우 살아남은 김종직의 제자들에게까지 미쳤는데, 유배지에서 끌려온 이원도 화를 면할 수 없었다. 실록에서는 저녁 무렵 잡아들여 초경(初更)에 바로 참형에 처했다고 전한다.

 

이원(李黿)이 죽기 직전, 아마 유배되어 있다 끌려온 아비를 보러 자식이 찾아왔던가 보다.

아들을 본 이원은 이런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 한다.

“즐겁도다. 우리 아들 왔느냐? 보고 싶었다.[樂哉! 吾子來乎?欲見.]”

 

살벌한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달게 받아들였던 젊은 그들. 이원(李黿)과 이목(李穆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 학문[正心之學]을 가르쳐준 스승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실천하고자 하는 굳은 다짐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다가 젊은 제자들이 죽임을 당한 뒤,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하지만 역사는 제자들이 굳게 믿고 지키고자 했던 그 사실을 잊지 않았다.

 

마침내 숙종 34년(1708) 7월 22일, 숙종은 김종직의 시호를 문충(文忠)으로 복시(復諡)하라는 전교를 내린다. 무려 215년 만의 일이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잘못된 역사는 그렇게 바로 잡히는 법이다.

 

글쓴이 : 정출헌(鄭出憲)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