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질의답변

이의추 선생에 대한 질의답변

야촌(1) 2006. 1. 16. 10:50

■ 이의추(李義秋) 선생에 대한 질의답변

    이의추李義秋, 15?? ~ 1619(광해군 11)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학술진흥재단 추안급국안 번역팀의 연구보조원 이혜령이라고 합니다.

저는 추안급국안 번역팀에서 현재 연구보조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영조시대에 만들어진 읍지인 여지도서를 번역, 교정을 하고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제가 여지도서 중 나주진관(羅州鎭管) 장성부(長城府)를 교정을 하고 있는데 이 편의 인물조 부분에 나오는 이의추(李義秋)의 아버님이 되시는 분의 성함과 생멸 시기를 알고 싶어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장성부 읍지에서는 무오년(광해군 10)에 스스로 전쟁에 지원하셔서 전사하였다고 나오고 조선왕조 실록 역시 그렇게 쓰여있군요. 아버지께서 호란(胡亂)때 돌아가셨다고만 기록 되어 있어 태어나신 시기와 돌아가신 시기를 알고 싶습니다.

 

본관이 경주이씨라는 것과 성함외에는 아는 것이 없어 이렇게 염치 송구스럽게 찾아와 감히 여쭤보고 갑니다.

무지한 제가 이렇게 질문만 댕 그러니 남겨놓고 가는것이 실례가 아닌 가 조심스럽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시구요. 편안하세요.

 

[답변 글]

답변이 늦어 죄송 합니다.

 

생몰년의 상세한 답변은 관련 경주이씨 국당공 파보를 소장하신 분의 답변을 기대하오며 이의추(李義秋)선생 께서는 오늘날 전라북도 정읍 사람으로 국당공(菊堂公), 이천선생의 8대손이 되시고 조선왕조 실록에 의하면 선생의 아버지(諱 : 箕)께서 오랑케 에게 죽음을 당했는데 일찍이 활쏘기와 말 타기를 익혀 반듯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러 결심하던 차 무오(1498)년의 전쟁에 나가 결국 전사 하셨고 그의 아들 이남(二男) 공은 선대의 2대가 모두 오랑케에게 죽은 것을 통분하게 여겨서 항상 이를 갈며 칼을 숫돌에 갈고 있었는데 정묘(1507)년의 전쟁터에 나가 또 전사 하였다.

 

이남공의 부인 변소사(卞召史)는 당시 나이가 20세 였는데 남편이 죽자 3년동안 상복을 입고 울음을 그치지 아니하니 마을 사람들이감탄 하였으며 3년 상이 끝난 후 그의 부모가 꽃다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것을 불쌍히 여겨 개가 시키려 하였으나 변소사는 밤을 틈타 스스로 목을 매어 그의 죽음 상태에서 발견 되 생명을 겨우 구했으며 그 후 또 머리를 깎고 남편의 친척집에 가서 몸을 의지하여 살면서 밤에는 반듯이 칼을 품고 있어서 수절 하려는 뜻이 강했으니 고을사람들이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따라서 나라에서는 전라도 선유어사(宣유御史),이동욱(李東郁)이 장계(狀啓)를 올려, 이의추(李義秋)선생 부자(父子)분과 자부(며느리)까지 정려(旌閭)를 내렸다.

 

慶州李氏三綱旌閭重建記 - 송사 기우만


臣而忠。子而孝。婦而烈。是爲三綱。三綱萃於一家。天之報施厚矣。報施之天。使貞忠孝烈不久泯於二百年之後。乃與韓長興同日命旌。韓公忠勇耀人。至使栗谷先生作傳。可据而信。爲何如。而李氏三綱。與之幷命。徵信來百。豈但爲李廣傳。程不識乎。第言其人。則李公死於胡亂。義秋志復父讎。自幼學射。赴死深河之役。又其子以男痛父祖死敵。丁卯之變。仗劒從軍。力戰而死。夫人卞氏年未二十。縊家後樹。得傍人救甦。剪髮矢靡他。往依夫姓。全節而死。嗚呼。使死者有生。忠臣曰吾孝子。孝子曰吾烈婦。傳所謂死者復生。生者不愧者非耶。吁盛矣。旌舊濱大江。圮于水。粤七年今癸巳。十世孫元業。元弼。始重建於越江依山。力單不瓦而茅。元業頗自訟。余曰否否。今俗贗浮於眞。烏頭赤腳。煌煌道周。而識者或鄙之。李氏之茅屋存古。已知其實事。反不重耶。元業命以記事之文。樂聞而不敢辭

 

송사집 > 松沙先生文集卷之二十 > 記 >

 

● 이의추 선생의 세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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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당)  경중 정보 백안 창문 의추 이남
敬中 廷輔 伯安 昌文 義秋 二男
菊堂公 文貞公 參判公 監司公 署令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