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사도세자 배봉산에 잠들다

야촌(1) 2017. 4. 29. 20:13

↑서울 휘경동에 소재하는 배봉산(拜峰山)

 

사도세자 배봉산에 잠들다

1735년 1월 21일~1762년 윤5월 21일)/ 향년 27세

 

글 : 조영희[(사)문화살림]

 

서울 휘경동 배봉산(拜峰山)이다.

배봉산은 1992년에 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전체 면적은 265,582㎡(80,479평)이고 높이는 108m다.

그 주변에는 서울시립대학교와 위생병원이 있다.

 

지금은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잘 가꾸어 놓은 산책로도 갖추고 있다.

배봉산은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평생에 못 다한 불효를 속죄한다며 날마다 부친의 묘소를 향하여 배례했다는데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고 전한다.

 

이곳 산기슭에 영우원(永祐園/사도세자의 첫 무덤)과 휘경원(徽慶園/조선 정조의 후궁이자 조선 순조의 사친인 수비 박씨의 무덤) 등 왕실의 묘원이 있어 길손들이 늘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다고 한다. 그래서 배봉(拜峰)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 산이 마치 도성을 향하여 절하는 형세를 띄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배봉산의 이름이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첫 번째 무덤 영우원(永祐園)'

 

'휘경동(徽慶洞) 뒷산서 발견(發見)'이라는 제목의 1968년 11월 21일자 <조선일보>의 기사를 인용한다.

20일 뒤주에 가두어 굶겨 죽였던 사도세자(思悼世子, 21대 영조의 아들이며 정조의 아버지)의 첫 번째 무덤이었던 영우원(永佑園)의 잘못) 터가 발견되었다.

 

이날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29의 1번지 서울위생병원 뒷산 간호학교 신축 지를 닦다가 지하 5m지점에서 돌상자(길이 1m, 폭 50cm, 높이 75cm) 두 개를 발견, 열어보니 그 돌 상자 속에 납석으로 된 상자가 또 있었고 그 안에 상아 쪽에 쓰인 천릉문(遷陵文)이 적혀 있었다.

 

왕조실록에 보면 영조 38년(1762년)에 죽은 세자는 중랑천 위 배봉산에 묻었다가 그 후 수원 융릉(隆陵)으로 이장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봉분(封墳)을 하지 않았기에 그 장소를 몰랐던 것이다.

 

이날 이 출토물을 보고 고증한 문화재위원회 위원장 김상기(金庠基) 박사는 동 공사장이 사도세자의 천릉전의 능인 영우원임을 확인하고 왕릉을 옮기는 제도 연구에 최초며 귀중한 자료로서 뜻이 있다고 말하였다.

 

 

영조 38년 윤5월 21일 좁은 뒤주 속에서 발버둥조차 치지 못한 채 사도세자는 숨을 거두었다.

세자가 죽은 바로 그날 영조는 사도세자(思悼世子)라는 시호를 내렸다

생각 사(思) 슬퍼할 도(悼) 영조가 직접 지은 것이다.

 

그 사도세자가 죽은 직 후 영조는 이렇게 말했다

"과인은 미물도 불쌍히 여겨 부나비가 등잔으로 달려들면 손을 휘저어 내쫓고 길바닥에 개미가 지나가면 밟지 않고 건너갔다." 사도세자의 장례는 2달 후인 7월 23일에 치러졌다.

 

영조는 양주(楊州) 땅 남쪽 중량포(中梁浦) 옆 배봉산(拜峰山) 자락으로 사도세자의 장지를 정했다.

예법에 천자는 일곱 달 제후는 다섯 달 경대부(卿大夫)는 석 달 사서인(士庶人)은 달을 넘겨(踰月) 장사한다고 했다. 사도세자는 겨우 달을 넘겨 배봉산에 묻힌 것이다.

 

죽일 때는 광분에 가까운 행동을 보였던 영조는 장례식에서는 모든 일이 자기 탓이라며 대셩 통곡 하였다.

장례일 영조는 사도세자의 묘까지 거둥하였다고 한다.

 

영조실록에서 전하는 그날 기사를 그대로 옮겨봤다.

임금이 사도세자(思悼世子) 묘에 거둥하였는데 이 날은 사도세자의 장례일이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친히 가서 둘러보고 경기 감사(京畿監司) 홍계희(洪啓禧)를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는데, 경기 고을의 백성들이 올라오는 것을 본 까닭에 이런 명이 있었다.

 

임금이 정자각(丁字閣)에 들어가 곡림(哭臨)하고 나서 임금이 말하기를,

“상묘(上墓)는 언제인가?”

하니, 좌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미시(未時)에 상묘하고 현실(玄室)을 내리는 것은 신시(申時) 초 일각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13일의 일은 종사에 관계된 것이다.

 

그때에 비로소 아버지라 부르는 소리를 들었으니, 오늘은 아버지를 부르는 마음에 보답하려 한다.

하나는 내가 20년 부자지은(父子之恩)을 마치려온 것이고 하나는 내가 친히 제주(題主)하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친히 제주하면 다른 날에 반드시 신주를 묻어버리자는 논의가 없을 것이다.

뒷일은 비록 경들이라 해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내가 계빈전(啓殯奠)에 참여하고자 하니, 대축(大祝)은 옥당(玉堂)에서 하고 봉작(奉爵)은 승지가 하도록 하라.”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신들도 또한 곡하는 예에 참여해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참여하라. 또한 백관도 참여하라.” 하였다.

 

신여(神輿)가 묘위에 오르자 현실(玄室)을 퇴광(退壙)에 받들었고, 홍준한(洪駿漢)·홍낙신(洪樂信)·홍낙임(洪樂任) 등이 관의 줄을 끌었다. 임금이 친히 제주(題主)하고, 환궁할 때에 「관왕묘關王廟/중국 촉한(蜀漢)의 장수 관우(關羽)의 영을 모신 사당)」를 들렀다. 영조 스스로는 무덤에서 한번 울어 부자의 의(義)를 나타냈다고 기록은 전한다.

 

그러나 손자 정조는 장지(葬地)에 따라 가기는커녕 상여 나갈 때 배웅도 또 장사 후 혼백을 맞아들이는 반우(返虞)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정조는 그 뒤 할아버지 영조의 허락을 가까스로 받아 산소에 다니지만, 혜경궁 홍씨는 영이별(永訣)도 못한 채 떠나보낸 남편 무덤을 33년이 지난 정조 19년 을묘 년(1795)이 되어서야 현륭원(顯隆園-지금 융릉(隆陵)으로 처음 찾아 갈 수 있었다.

 

 

↑영조가 직접 지은 사도세자의 묘지명[청화백자 묘지석]이다.

 

영조가 직접 지은 사도세자의 묘지명에서 영조는 사도세자가
“결국 만고에 없었던 일에 이르러 백발의 아버지로 하여금 만고에 없었던 일을 하게 하였다(終至萬古所無之事 使白首之父 作萬古所無之事)”고 먼저 한탄한다.

“어찌 내가 좋아서 했겠는가? 어찌 내가 좋아서 했겠는가?(豈予樂爲 豈予樂爲)”라고 자신의 심정을 밝혔다.
 
앞의 “만고에 없었던 일은” 사도세자가 “나쁜 무리들과 어울려 국가가 망할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狎群小 將至國亡)”는 것이었다. 뒤의 “만고에 없었던 일”은 물론 스스로 사도세자를 죽게 한 일을 가리켰다.

 

“국가가 망할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는 것은 형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노론의 지지로 왕위에 오른 영조의 정당성에 대해 사도세자가 의혹을 가진 것을 가리킨다.

 

경종을 지지했던 소론은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에 ‘독살’ 의혹을 제기하고 있었고, 영조를 대신하여 정치를 담당했던 사도세자는 소론의 입장에 동의를 표하였던 것이다.

 

만약 자신이 죽은 후 사도세자가 왕위에 오른다면 노론뿐만 아니라 영조 자신도 의혹의 전면에 노출될지도 모른 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억울하게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사도세자가 잠든 곳은 흔히 풍수에서 말하는 명당은 아니었다고 한다. 풍수에 뛰어난 실력을 가졌던 정조는 왕위에 오른 뒤 13년간 배봉 산자락에 계시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모실 명당을 찾는데 골몰한다.

 

정조의 그 마음을 잘 알고 있던 금성위 박명원「錦城尉 朴明源, 1725년(영조 1)~1790년(정조 14)」은 1789년 7월 11일 사도세자의 묘를 천장할 것을 상소한다. 그때 금성위 박명원는 천장해야 할 이유를 조목조목 지적한다.

 

"영우원(수은묘)이 첫째는 띠가 말라죽는 것이고,

둘째는 청룡(靑龍)이 뚫린 것이고,

셋째는 뒤를 받치고 있는 곳에 물결이 심하게 부딪치는 것이다."

 

이 묘 자리는 정조 13년(1789) 10월 4일 천장할 때 영구를 파내고 보니 그 광중에 물이 거의 한자 남짓 고여 있었다고 전한다.아들 정조는 이를 보고 또다시 오열한다. 그렇게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가 죽어서도 물속에서 신음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정조는 가슴을 치며 통곡을 한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