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노산군 부인을 첩으로 삼으려 했던 신숙주

야촌(1) 2017. 2. 12. 01:19

[매경프리미엄]

배한철 ㅣ 입력 : 2016.02.05 15:42

 

미모 빼어난 단종의 부인을 첩으로 삼으려 했던 신숙주

 

[배한철의 한국초상화 읽기 - 41]

조선 말 3대 문장가로 꼽히는 김택영(金澤榮 : 1850~1927)이 구전 등을 정리해 엮은 《한사경(韓史綮)》에 "좌의정 신숙주(1417~1475년)가 노산군(魯山君) 부인(夫人: 定順王后 宋氏, 1440~1521)을 노비로 삼고자 주청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김택영은 "세조가 조카를 죽이고 여러 아우들을 살해하여 임금의 지위를 훔친 것도 사악한데 「신숙주가」가 단종부인(端宗夫人)을 노비로 삼겠다고 청한 것은 매우 간사하고 악한 짓"이라고 평가했다.


정순왕후는 미인이었다. 그녀의 뛰어난 미모에 이끌려 신숙주는 한때 주군으로 모셨던 단종 부인을 첩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어린 조카를 죽인 비정한 세조였지만 차마 질부(姪婦: 조카며느리) 까지 남의 첩으로 줄 수는 없었다.

 

세조는 그러면서 아무도 조카며느리를 범하지 못하도록 남편을 잃은 후궁이 출궁해 여생을 보내던 정업원(淨業院)에 살도록 명했다. 그녀는 1523년(중종 18)에 양력 7월 7일 82세를 일기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정순왕후(定順王后)는 남편 묘가 있는 강원도 영월의 장릉(莊陵)이 아닌 경기도 남양주시의 사릉(思陵)에 묻혔다.

이 일화의 주인공인 신숙주는 왕을 6명이나 섬기며 영의정을 두 차례 역임하고 국방과 외교에 탁월한 공적을 세웠던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정치가다. 세종 때 일본어, 몽골어, 만주어 등 외국어에도 두루 능통한 전문외교관으로 인정받았고 집현전 8학사 중 한명이기도 하다.

 

특히 세종이 주도한 훈민정음 창제의 일등공신이었다.

만주에 유배된 명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을 만나기 위해 10여차례나 중국을 내왕해 한글탄생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뒤에도 해설서인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을 집필해 창제뿐 아니라 보급에도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같은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화려한 경력과 중요한 업적을 이룬 조선전기의 대표적 명신이었지만. ‘숙주 나물’이라는 표현이 상징하듯이, 그는 절개를 저버리고 영달을 선택한 변절자의 한 표상으로 지목되어 상대적으로 폄하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초록색 관복 차림을 한 보한재 신숙주 영정(고령 신씨 문중 소장)은 비단에 채색되어 있으며 조선시대 영정중 흉배(胸背)형식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그의 성품 등을 잘 표현하고 채색이나 선 묘사도 뛰어나 예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1475년(성종 6)에 새롭게 고쳐졌으며 얼굴 음영 처리나 표현 기법을 볼 때 그 이후에도 여러 번 수정·보완된 것으로 보고 있다. 크기는 가로 109.5㎝ x 세로 167㎝이고, 1977년에 보물 613호로 지정되었다. 충북 청원군 가덕면 구봉영당(九峰影堂)에 소장되어 있다.

 

 

↑보한재 신숙주 영정/출처: 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