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상고사(上古史)

우리겨레의 우수성[3]

야촌(1) 2007. 4. 29. 19:20

<東夷族特輯>

 

東夷族의 優越性[3]

安秀吉 : 서울대학교 名譽敎授

 

6. 西洋에서 본 동양

 

完全히 방향을 바꿔 西쪽의 눈으로 본 아시아의 歷史를 살피는 것도 뜻이 있다. 우리에게 (思考의 座標變換(좌표전환)을 하는데) 示唆(시사)한 바가 큰 것들 中 하나는 Byzantine학자 Theophilaktos SIMOKATA가 쓴 中國의 描寫(묘사)이다.

 

事實上 징기스汗의 侵攻도 몽골은 强하다는 事實뿐이지 진짜 몽골사람은 人員이 워낙이 적기 때문에 大元帝國의 西方 侵攻은 몽골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키르기스, 타직, 우즈백, 투루크메니스탄 등 터키-몽골系(터-키 및 지금의 南러시아의 여러 나라), 그리고 소수의 녑族(Semite) 人力에 의해서 행해졌고, 지난 世紀 初 영국을 위시한 동맹국에 의해서 解體될 때까지만 해도 터키는 이란, 이라크를 포함한 廣闊(광활)하고 强力한 나라였다.

 

따라서 西洋에서 보면 당시 아시아를 代表하는 것은 터-키였기 때문에 상기 시모카타 記錄의 內容은 "동쪽에 '타우거스'(中國)라는 나라가 있어서 原來 터키의 植民地였지만, 지금은 勢力 人口 공히 世界第一이다……(중략)…… 長安(西安)을 貫通(관통)하는 江이 둘 있는 데……(중략)……그들은 白色의 印度人이라 불리우고, 養蠶(양잠) 技術이 좋다"라는 것이다.

 

當時 養蠶(양잠)을 위시해서 軍將 等 專門職은 전부 東夷가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이 글에서 비산틴人은 東夷를 백색의 印度人, 즉 '白人'으로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黃色人種'이라는 呼稱에 고집하는 것은 오히려 아시아 사람들이다) 그리고 殷나라 사람, 周나라사람도 서쪽에서 왔다.

 

秦始皇은 Bactria의 Diodotus라는 연구결과도 있고, 우리 제2기 檀君朝의 伏羲(복희)·女와(여와)를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유프라테스의 創造신화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하루에 70번 바뀐다는 女와의 이미지는 우리의 禪과 道를 同伴하는 知的노력의 상징으로서의 '神人'의 경우보다는 '무엇을 할지 모르는' 능력자로서의 원시적인 것이다.

 

이 東北亞와 시베리아에 걸친 당시 (하늘에서 온 것으로 알려진)東夷, Turkey-Mongoloid, Kurgan 族屬들은 강력하고 무자비했다. 이와 같은 緣由(연유)로 해서 초기 天主敎의 경우도 로마 치하에서의 천주교 長老들의 분위기는 항상 '神이란 處罰(처벌)하기 위해서 오게 되는 무서운 存在'로 파악되어 왔고 하느님이 慈悲스런 이미지로 바뀐 것은 로마를 위시해서 여러 정권이 확립되어 黃禍(황화)가 아닌 白禍(동이, 카작, 위굴)의 공포가 물러서고 '약한 文明'이 싹트기 시작한 다음으로부터였다.

 

7. 동서간의 距離

 

오늘날 우리는 東洋과 西洋을 거의 별개의 大陸에 있는 것으로 다루기가 쉬운데, 上古史를 연구하는 데에 있어서 'Eurasia 東西間 거리는 없는' 것으로 생각해야 오히려 眞實을 잘 알 수 있다.

 

東과 西는 그렇게 먼 것이 아니고, 그 交流는 오늘날도 끈임이 없는 것으로 그 實效距離(실효거리)가 가장 멀었던 것은 旅券(여권)과 비자가 까다로웠던 冷戰時代였고, 오히려 上古史시대에는 쉽게 다녔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다.

 

옛날에 '제비에 견주었던 駿馬'를 動員하면 로마까지 2個月이면 갔다고 하는 東西間 거리는 沙漠地帶(사막지대)를 지나는 배고픈 遊牧民들(3일만 같은 곳에 滯留(체류)하면 食糧이 동이 나는)을 위해서는 오히려 짧았던 것으로 봐야 한다.

 

지금 外몽골領土의 東西間길이에 해당되는 거리를 新疆省(신강성) 끝에서 西쪽으로 가면 이미 투르크메니스탄과 카스피海를 지나 터-키 땅이 되고, 그 두倍 距離면 Roumania와 Bulgaria가 되는데 지난 날 蘇聯邦(소연방)으로 해서, 또는 旅券과 Visa의 어려움으로 해서, 그리고 심지어는 中間地帶의 地圖의 入收亂으로 해서 東西洋을 과도히 絶緣된 것으로 생각해왔고, 전혀 동떨어져 共通의 歷史가 있을 수 없는 땅들로 생각했던 것이다.

 

종교로서 가장 人間的이고, (즉 人間의 弱함을 認定해주고 도와주는) 文化된 宗敎인 예수敎에서는 '人間은 틀리게 마련이다(Errare Humanum est)'라는 생각을 中心으로, 사람의 失手를 사람이 審判(심판)하지 않고 '하느님이 審判할 때 그대에게 그 審判이 寬大(관대)한 것이기를 祈禱(기도)한다'는 것이 西洋人들의 基本된 생각이다.

 

反對로 까다롭게 事物의 意義를 따지고, (西洋사람들은 관심을 안 가졌던 문제에까지) 그 뜻을 극도로 밝히고(to split hair into four), 쉽게 '죽여야 한다, 살려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또는 '容恕(용서)하기 위해서 극히 큰 努力을 해야 했다'는 等 사람들을 審判하려 드는 것이 東夷들의 態度인 것이다.

 

西洋과 동양에서 '사람으로 대접'을 받기 위해서 요구되는 基準은 東北亞가 즉 天山以東이 월등히 엄격하고 잘못했을 때 審判도 峻嚴(준엄)하다.

 

上述 스페인의 中美 進出 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恐怖의 宗敎'의 근거는 天山系 支配者들의 選民主義와 嚴格한 精神에서 오기도 했지만, 北에서 오게 될 '神人'을 근거로 '蠻'과 '漢'과 '支那'를 支配한 中間幹部, 또는 批王 等이 提示하곤 했던 '神'의 像이기도 했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해서 人類는 神의 槪念을 얻었지만, 東北方系에서는 '나쁜 놈은 당장 죽여야 한다'는 恐怖的(공포적)이면서, 또한 '모두가 노력하면 佛이 될 수 있다'는 人間들에 가까운 神人(佛)의 像에 이르기까지 廣範圍(광범위)하게 발달하고 있어서 동양의 宗敎의 단계가 더 높은 것도 알려진 사실이다.

 

例를 들어 '歷代神仙通鑑' 中의 한 句節 '---理有同歸 五常充備 仙也, 佛也, 聖也, 神也, 卽其人也---'라는 글 中 '仙, 佛, 聖, 神' 等을 飜譯(번역)해보면 안다. Saint의 語源에 無關해 보이지 않는 이 單語들은 모두 같은 系統에 속하는 槪念(개념)들이며 地域을 넓히지 않아도 서로가 完全히 區分이 되는 것들이다. 禪과 道에 關해서도 飜譯하기 始作하면 우리 思想體系의 幅을 알게 된다.

 

한편 西쪽에서는 人間의 손에 닿지 않는 完璧한 神(God)이 있어서 人間들끼리는 서로 審判할 수가 없고, 오로지 神만이 審判한다는 것이 西洋의 '神'像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유-라시아의 가장 긴 歷史로 이어지는 우리 東夷族 周邊에는 이러한 經緯(경위)를 通해서만이 解釋될 수 있는 現象들이 있는데, 例를 들면 寺刹內(사찰내)에서의 佛敎와 巫俗의 混在, 그리고 자기가 당장 直接 審判하고 斷罪하려고 하는 일부 改新敎 牧師(크리스토 精神에서 먼) 等의 過度한 峻嚴性(준엄성), 한국에서 觀察(관찰)되는 바 모든 人間에 要求되는 지나친 理想像 等을 볼 수 있다.

 

오늘날 다른 나라에서 信者가 계속 줄어가는 속에서 한국에서는 많은 種類의 多數의 敎會가 일어나고, 佛敎가 現代化되고 불경이 영역되고 한국인이 인도에 가서 布敎(포교)하고, Uzbek에서 宣敎를 하고 있는 것도 우리의 民族의 精神資産이란 뿌리 때문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結論的으로 인간에게 神이라는 槪念이 들어 올 때까지는 그 간 禪通은 물론, 道通을 이룩한 數10萬名의 得道者와, '神人'의 개념을 갖고 공포를 통해서 西域을 통치한 政權들의 존재가 있어서 極度로 닦인 '神'이란 超越槪念이 생길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8. 북쪽에 있던 强國 '진=Chin'과 남쪽 農奴國 '支那'

 

中國의 南山山脈은 아라山보다는 남쪽이라고 하겠지만 蘭州의 서북쪽 Kokonor라고도 불리우는 靑海湖, 그리고 西저(Sining)보다도 북쪽에 있는 山脈이다. 祁連山도 이에 소속되니 상당히 北便에 있는 셈인데, 이와 같이 北쪽에 있는 山脈을 南山山脈이라고 부르는 것은 支那(옛날의 농노의 땅)의 立場에서는 맞지 않는 感이 있지만 (진=Chin)이라는 天子國에서 보았을 때는 쉽게 納得(납득)이 간다.

 

(진=Chin)이라는 天子國은 大英博物館에 있는 지도에서 'China'와 동시에 더 높은 地域(거의 Baykal湖 위도)에 'Chin'으로 表示된 나라로서 앞으로 더 糾明돼야 하겠지만 대강 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 古朝鮮系로 나온 바 秦, 晉, 西晉, 東晋, 陳, (다시 晉), 또는 大震 등으로 좁힐 수 있을 것으로 보는데 그러나 서양에서는 이들이 겹친 이미지일 것이다.

 

이 (진=Chin)나라에서 王權도 그러했지만 그 아래 高級관리, 장군, 및 高級技能職을 도맡았던 東夷族은 漢나라를 위시해 그 후의 여러 왕조에도 血統的으로 모두 다 이어지기 때문에 繼續해서 큰 활동을 했다.

 

新羅와 나란히 小昊 金天氏의 後孫인 唐나라는 물론, 明朝에서 淸朝까지 모두 東夷族이기 때문에 中國王朝의 歷史는 순수한 支那人의 입장에서는 오늘날까지도 無關係하다고 말할 수 있는 반면, 중국 西部에 있는 漢江(長江의 지류)을 사이에 두고 發生한 (始皇의) 秦나라(西岸)와 (힘으로는 오히려 秦나라보다 강력하다고 할 수 있었던) 晉나라(東岸, 후에 趙, 漢, 및 魏나라로 갈라져 三韓을 형성)후손의 입장에서는 三危山, 天山天池, 燉煌을 포함해 지금은 잃어버린 땅에서 있었던 우리 祖上들의 역사인 것이다. 땅은 못 찾아도 빛나는 '選民의 歷史'마저 잃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한편 韓半島는 계속 檀君의 정신과 箕子의 法秩序로 살고 있었는데, 상기 三韓과 가야국의 왕족과 귀족들이, 그리고 新羅, 高句麗, 百濟의 후손들이 우리의 현재 彊域으로 점차적으로 옮겨오면서 모두 자기들의 좋은 血統을 자랑하면서 韓國內에 漢字지명, 그리고 祖上의 偉大함을 나타내는 假墓(가묘) 等 遺蹟이 생긴 것이다.

 

그 때마다 移動하게 된 人員이 尨大(방대)했기 때문에 이 (진=Chin)이라는 天子國에서 일어난 일도 우리의 歷史이고 오히려 더 중요한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우리 민족은 '단군 및 고인돌系' 後裔(후예)와 '中國, 그리고 假墓系' 後裔의 합성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後者의 주력은 계속 (지금은)중국 땅에서 서로 왕권다툼을 계속한다.

 

결국 청나라를 포함해서 최근까지 中國의 王權은 엄연히 東夷의 것이었고 따라서 韓國사람들이 '언제까지 中國의 王朝들을 자기네들의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가'는 主로 각각의 家族의 歷史에 속하는 것이다.

 

韓半島에서 처음부터 定着한 사람들은 중국의 王權역사란 남의 일로 생각하고 믿지 않을 것이고, 金首露王의 夫人 許氏의 遺跡(유적)이나 '怒江'을 내려왔다는 '石舟'의 象徵物(처음으로 밝혀진 새 伽倻史와 삼국열전. 이중재著)을 中國에서 본 許氏 집안 사람들을 위시해서 新羅, 百濟 等의 왕조의 규모를 제대로 갖춘 史蹟들을 中國에서 찾아낸 聖骨, 眞骨의 後孫들 立場에서는 (진=Chin)으로 이어지는 東夷의 여러 나라를 비록 지금은 國境을 달리하고 있지만 그 榮光스런 歷史까지 빼앗길 수는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의 정신문명의 根源싸움으로 작금의 교과서 싸움에 比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웃 땅에 더 큰 몫이 깔려 있는 우리의 역사를 자진해서 잃어서는 안 된다(新疆省 Turfan 西南쪽에는 영어로는 'Boston lake'라 表示되는 '博斯騰湖(박사등호)'가 있는데, 그 "博斯騰湖에서 서쪽은 '焉耆(언기)의 땅'이고 東쪽은 '朝鮮땅'"이라는 記錄도 있다). 옛날의 여러 王朝들은 항상 여기 저기 밀려다니면서 支配權을 다투었던 것이다.

 

한 王朝가 패망해 역사의 主舞臺에서 사라져버린 것 같은 後에도 땅을 옮겨 살아남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王朝의 移動은 이에 따르는 人口도 적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本質的으로 땅에 매달려야 했던 '물의 漢'의 歷史와 함께, 移動하는 支配層 '불의 韓'의 역사를 重要視하지 않을 수가 없다.

 

北京의 중국박물관 內의 殷나라와, 周나라에 關聯된 展示室에는 鼎(정), 爵(작), 彛(이) 等 9個의 銅鐸(동탁) 類가 展示되고 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趙, 韓, 魏(후일에 三韓이 됨)나라들이 7雄의 나머지 4國과 함께 어떠한 字形의 漢字들을 썼는가를 보여주는 表(matrix)가 있는데, 漢字창제에는 上述 東夷의 代表타자 趙, 韓, 魏 3국도 참여하고 있고(殷나라系에 밀착한 것이 東夷族이기 때문에 더 가깝고 黃帝(BC 2679)무렵에 썼다는 山海經은 말의 순서가 韓國語 그대로이다),

 

그 展示室 내에 있는 다른 설명에는 趙, 韓, 魏 3국이 "거칠어 民心을 잃어 떠나버렸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 후 차차 중국어는 借音(차음)노력을 해서 漢字를 활용해서 오늘날의 中國語가 형성됐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같은 모양으로 '吏讀'로 借音을 했던 한국의 경우는 이를 포기하고 중국에서 쓰는 漢文으로 자진 통합을 한 것이다. 그러나 王權과 行政의 漢文은 동등했다.

 

中原의 王權歷史는 東夷의 역사이고 上述한 바와 같이 唐과 新羅는 무척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에 唐이 東夷文明인 '禪讓(선양)'에 그처럼 執着(집착)한 事實과 나란히, 新羅의 지나친 崇唐경향에 이해가 가는 것이다. 高句麗와 百濟의 敗亡은 아직 新羅와 이들이 '진=Chin' 땅에 있을 무렵이고, 後日에 唐나라 코빼기 앞(齊, 魯의 땅)에서 反亂을 일으켜 3대 57년을 存續했던 東夷族系의 나라가 하나 있었는데 新羅가 唐과의 約束을 지켜 그 討伐을 했다는 것이 距離的으로 가능했다는 것도 이해가 된다.

 

9. 王族의 血統다툼

 

금년 5월에는 中國科學院 遺傳硏究所 소속 人類遺傳子 硏究센터에서 15년 硏究 結果 지금까지 單一民族으로 取扱해왔던 漢民族이 事實은 두 部類로 갈라져 있다고 발표했다. 北京을 中心으로 생각할 때 中國남쪽 福建省과 江西省에 걸쳐 있는 武夷山脈(무이산맥)과 南嶺山脈(남령산맥)을 경계로 그 以南에 사는 사람들의 DNA는 너무나 자기네들의 것과 달라서 南北 漢族間의 差異가 少數民族과의 差異보다 큰 것으로 나타났다고 發表(한국은 2001년 5월 25일 日刊新聞 報道)했다.

 

이것은 中國남부에 사는 사람들이 그 옛날 (BC 2350) 崑崙에서 東進해서 陝西省에 들어와 苗族(묘족)과 싸워 制壓, 同化하면서 長江下流에 이르렀다는 族屬(D.G. Brinton, "Races and Peoples", 1890)으로서 '불의 韓'인 東夷族의 支配를 최근까지 받아온 '물의 漢' 즉 '支那'族의 主流일 可能性이 있음을 말해준다.

 

우리는 中國을 過度히 崇尙하는 思潮속에 살아와 모든 왕권과 그 영광을 중국의 것으로 생각해 왔지만 東夷의 活躍舞臺가 이러했던 것으로 봐서 (집안의 歷史에 따라 各各 다르겠지만) 中國숭상의 反對의 極端(극단)으로는 中國, 즉 (진=Chin)은 우리 조상들의 영광의 무대였고, 그 백성의 나라 支那는 최근까지 東夷族이 지배를 해왔기 때문에 眞正 '물의 漢', 즉 '支那'의 王權을 標榜(표방)할 수 있는 것은 '모택동 이후'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중국이 공산화 이후 過去의 王朝문명의 殘存影響(잔존영향)이 너무 커서 하는 수없이 모택동이 文化革命을 일으켜 王朝의 遺蹟들을 破壞케 했다는 解釋도 可能하다.(三韓과 三國, 그리고 伽倻 等 동이의 유적들은 더 큰 피해를 보았을 것이다)

 

反面에 東夷들은 王族의 血統이 過度히 많아서 (어느 東方旅行記에는 "新羅에서는 만난 사람마다 모두가 다 王이었다"라고 되어 있다는 것이 放送된 일이 있다-날짜 等 提報요망) 王과 정승들 집안들이 王權을 잃었을 때마다,

또는 高位職 자리를 잃었을 때마다 上述한 바와 같이 檀君 箕子의 聖스러운 가르침 속에 살고 있었던 韓半島로 옮겨와서 많은 漢字지명과, 假墓(가묘)들을 만들며 지난날의 집안 자랑 속에서 살았을 可能性은 크다.

 

中國에서 계속 집권한 東夷族後裔 왕족들에게는 놀라울 이야기, 또는 싫어할 이야기겠지만 이것은 純粹한 支那族이 아닌, 東夷의 피를 나눈 支配層이었던 歷代 政權所有者들이 같은 동이의 피를 갖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中國 過敬(과경)사상의 反對極端(반대극단)으로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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