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夷族特輯>
東夷族의 優越性[2]
安秀吉 : 서울大學校 名譽敎授
3. 禪,道等 정신문화와 頭腦활동의 長久한 歷史
오늘날 人類는 과학의 힘으로 대단한 發達을 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人類의 發達과정에는 그밖에도 重要한 단계들이 있었다. 例를 들어 인류가 言語를 쓰기 시작한 것, 有形無形의 것에 이름을 붙이고, 完全한 形而上學的(형이상학적)인 觀念을 창조한 것 等은 더군다나 큰 발달의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動植物에 대해서도 옛날 사람들은 오늘날보다는 더 상세하고 큰 語彙를 갖고 있었고, 특히 우리의 글자인 漢字는 帝王들을 위해서 殷나라 이전부터 쓰기 始作한 것으로 特徵을 抽出해서 簡潔하게 나타내는 特性이 있기 때문에 現實 事物의 細部에 말려들지 않고 槪括的(개괄적)으로 보고 統合的인 把握(파악)을 하는 데에 有利하다.
漢字는 사물의 형태적 特徵, 그리고 動態 等을 簡單한 記號로 나타내서 感覺的인(따라서 빠른) 認知를 돕고, 複雜함을 整理해서 簡單한 符號(부호)로 만들어 줄 수 있어서 理想的인 것이다.
그리고 漢字와 한글의 混用은 머리의 右腦(圖形과 感覺性)부분과 左腦(判斷과 合理性)부분 兩편을 무리 없게 同時에 쓸 수 있게 해 주어 頭腦負擔(두뇌부담)에 均衡(균형)이 있고, 따라서 덜 고단하면서 情報傳達이 잘 되는 强力한 글이다.
상술한 바 '槪括的으로 보고 統合的인 把握'을 해 符號化한, 事物과 槪念들을 다시 윗段階에서 통합했을 때, 또는 다른 次元에서 보았을 때에 이 高次의 複雜槪念을 또다시 有意文字로 單純하게 表現해 줄 수 있으며, 그것을 필요한 만큼 되풀이함으로 해서 整理를 통해 더 큰 思想을 다룰 수가 있는 高級言語라는 것이 全幅的으로 認識돼야 한다.
漢字는 거의 恒久的인 것으로서 우리의 口語 및 支那의 白話는 歲月이 지남에 따라 變遷(변천)하게 마련이지만, 사실상 역사를 통해 '중국어의 漢字借音'이 계속되어 백화를 포함해서 중국어의 記錄방법이 완성되어 갔지만 원래 漢字 또는 기타 기록방법(글자)이 同伴하면서 牽制(견제)해주지 않으면 이 言語들이란 變化를 거듭해서 2∼3世紀만 지나도 알아보지 못하게 될 수 있다.
例를 들어 그 사이 英語가 變遷해서 Shakespear나 Chauser의 作品들은 지금 사람들에게는 極히 難解하다.
反對로 우리는 漢字로 해서 1000年 쯤 지나도 別差異가 없다. 漢文記錄物은 變함 없이 理解할 수 있는 데에서 千年단위의 글자인 것이다.
그리고 上述한 바 공부를 業으로 삼은 無數히 많은 人的자원으로 해서 깊은 생각으로 갈고 닦아진 言語로 發達초기부터 '王을 위한 文化'였던 것이다.
그리고 複雜한 '國事의 記錄用'으로 發達됐던 것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帝王들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우리의 조상 東夷族은 漢字의 始作과 그 發達에 중심적 役割과 적극적인 寄與를 해 온 것이다(陳泰夏 교수 業績을 소개한 中國新聞 "陳博士 與漢字敎育" 表題 (中國)人民日報 1998年 11月 1日 記事參照). 우리 조상의 이 偉業은 正確하게 評價되어야 한다.
지난 世紀에 중국의 白話史記編纂委員會(1939년)는 130권으로 된 '白話'史記를 간행했는데 그것이 口話에 의한 중국역사기록의 처음의 試圖인 반면 그 前에는 중국과 한국에서 王權 歷史는 항상 漢字로 記述해왔다. 國事란 항상 複雜한 것이어서 우리 使臣들의 中國 왕권과의 대화는 白話가 아니고 漢文이라는 時空을 넘어 正確한 言語로 行해졌을 것이다.
4. 東夷는 뿌리(東方曰夷 夷者灏也)
옛날에는 모두가 먹을 것을 찾아 헤매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사와 같은 먹을 수 있는 먹거리入手 활동에 관련됐겠지만, 지금 全地球的으로 非生産(食糧生産見地에서) 인원이 더 많아진 감이 있다.
따라서 生活에 여유가 생겨 자녀들을 공부시킬 수가 있고 이에 따른 知的 人力增加는 크게 인류의 수준을 向上 改善해주고 있지만, 한편 그러한 非農人力의 過剩(과잉)은 '좋은 자리'를 두고 일어나는 競爭 激化(격화)로 해서 도리어 서로 헐게 되고 남의 業績을 卑下(비하)하는 데에 知的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 一面이 없지 않다.
漢字를 百姓 支配를 위한 '權力의 文化'라고 비난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나 漢字는 物質的인 어려움 속에서 思索文化 또는 內的文化가 극단적으로 발달했던 그 옛날 많은 形而上學的인 槪念을 형성하는 데 寄與했고, 이를 기록, 表現할 수 있게 해서 哲學과 宗敎의 발달의 土壤이 되었는데 더욱이 우리 아시아圈은 漢字 덕분에 우리의 深奧(심오)한 思想활동은(今世紀에 들어 東洋의 것이 評價되기 始作함에 따라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는 더 그렇겠지만) 몇 백년 前까지만 해도 人類文化의 代表打者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무렵 道를 닦고 禪을 닦는 일에만 일생을 바친, 즉 思索과 공부를 '業'으로 삼는 사람들이 몇 十萬名씩 있었다(이들에 대한 존경과 布施慣習으로 해서 行旅 선비까지도 잘 대접하는 한국 고유의 '布施문명'이 생긴 것이다).
東夷族은 新疆省에 바로 가까운 燉煌(돈황)을 중심으로 해서 인류의 모든 깊이 있는 文化와 學問의 代表타자였고 뿌리도 깊어 後漢書에 "王制云 東方曰夷 夷者灏(저, 뿌리, 事物의 根本)也 言仁而好生 萬物灏地而出..."라고 즉 東夷가 '뿌리'라고 하는 구절이 나온다. 즉 後漢書 시대에는 東夷가 人類·權力·文化 等 모든 것의 뿌리라는 것이 認定됐던 것이다.
이러한 氏族의 뿌리와 고조선, 단군 등 비교적 평화롭고 文明된 '氏'와 '帝'의 歷史와 세계 始初(B.C 2600년대)의 大規模 戰爭(73會戰)을 싸웠던 黃帝∼蚩尤에서 시작한 바 夏·殷·周·秦晉 等 서쪽에서 온 '武力' 및 '王朝'의 歷史와는 다소 差異를 두고 보는 것도 하나의 方法일 것이다.
그러나 단군을 精神的 指導者로만 보고, 또는 巫俗的 지배자로만 보고 地上의 武力에 전혀 無關係한 것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는 贊成할 수가 없다. '檀君'은 한 地域에 限定된 것이 아니고, 全地球的인 理想지배형태로 보는데, 이 地域에서는 시간 걸어 차차 武力정권으로의 變化를 이룩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의 '성군'으로의 '단군'의 이미지는 人類전체의 잃어버린 꿈이기도 했는데 무척은 긴 세월을 두고 되풀이 된 倭寇 被侵의 歷史 등을 볼 때 우리는 거의 最近까지도 好戰的인 민족은 못 되고 檀君의 정신 아래 남아 있는 것이다. 민족 역사의 영향이란 그렇게 오래가는 것이기 때문에 앞일을 위해서 지금도 조심해야 한다.
5. "神"이란 槪念의 형성
上記한 바와 같이 '보이지 않는 것(物質)'을 추리해서 把握(파악)하게 된다는 것, 또는 '前에는 없었던 것(事)'을 頭腦활동을 통해서 把握, 또는 創制한다는 것은 쉽게 되는 일은 아니다.
여기에서 필자는 "'神'이란 槪念을 어떻게 人類가 갖게 된 것인가" 하는 것을 찾아보려 한다. 一般的으로 어떠한 새 槪念이 인류에게 導入될 때까지는 상당한 時間이 걸리고 契機(계기)가 필요하다.
프랑스에서 1789년에 '大革命'을 하고 일류 시초의 共和制度를 도입했을 때 아직 이 사람들은 "王이라는 統率者가 없는 나라"를 생각해 내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 베르사이유宮殿에 머물고 있었던 루이16世를 빠리에 모셔오면서 王과 함께 革命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프랑스의 3色의 共和國旗도 그 한복판에 王의 빛깔인 白色을 갖고 있다.
王을 擁立(옹립)하면서 革命한 것이었는데 後日에 사정이 생겨 다른 選擇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의 共和制를 하게 된 것이지 처음부터 '共和制'의 槪念을 생각해 낸 것은 아니었다.
지구 어느 구석에서나 植物이건, 동물이건 '좋은 씨'를 자식들에게 남겨주기 위한 노력은 컸다. 그러나 아시아圈에서는 그 中에도 똑똑한 後世를 두기 위한 意圖的인 노력이 꾸준히 있어 왔다. "사람노릇을 해야 한다"는 몹시 관념적인 성향도 影響이 있어, 출생한 2세들도 병신이거나 해서 후일에 살아남을 可能性이 없어 보이는 경우는 태어난 자리에서 '엎어버렸다'고 한다. 이와 같이 우수한 種을 남기기 위한 努力이 그칠 날이 없었다.
'엎어버리는 일'은 실크·로우드와 같이 食糧이 모자라고 生存條件이 나쁜 곳에서는 더 頻發(빈발)했고 기타 여러 가지 각박한 條件에서 살아남았기 때문에 우리 東夷族은 體質이 强靭(강인)하고 눈과 피부가 惡條件下에서도 强한, 그리고 光線에 익숙하고, 백색을 숭상하는 民族性向을 갖게 됐다.
오늘날 한국은 세금 많이 거둬 身體불구자 등 弱者를 여기저기에서 돕고 심지어는 學校를 기피하는 것도 인정돼 '대안학교'를 만들겠다는 等 歐美에서 들어온 '弱한 문명'에 민족적으로 傾倒되고 있는 감이 있는데, 우리는 원래 경쟁 속에서 살아남는 訓練을 하는 民族으로서 자식들에게도 禪과 道에 힘쓰는 (精神的)强者에게만 家姓을 주면서 남겨 두고, 努力이 모자라면 追放을 해버리는 '强한 文明'圈을 이뤄 왔던 민족이다.
위에서 소개한 바 있는 '佛敎는 인도에서 발생하지 않았다'라는 책에는 우리 조상이 '道通'의 일종인 '禪通'을 하면 王權을 받게 됐고, 이것을 '禪讓'이라 했는데 그래서 '禪'과 '道'를 業으로 삼은 사람들이 많았고, 道通한 사람들도 數 10萬名을 헤아린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당시에는 이러한 修行은 중요한 것으로서 人間으로서의 향상 노력이 없는, 즉 禪과 道에 관심이 없는 形而下學的 경향의 사람은 쫓겨나서 '蠻'이 됐다는 기록이 있다. (전욱 高陽氏는 25명의 아들 대부분을 머리가 나쁘다고 北方으로 추방하여 淘汰(도태)시켜버렸고, 黃帝의 경우도 25子 中 家姓을 받은 것은 半정도이다)
이들은 추운 나라로 갔거나, 몹시 濕하고 험한 南方 '野蠻'의 땅으로 간 것이다. 이러한 역사로 해서 우리 東夷族의 외모가 남부 러시아의 여러 共和國(Kazakh, Uighur, Turkmen, Altai 等)사람들과 몹시 닮은 반면, DNA가 중국 西쪽 少數민족이나 越南人들(蠻?)의 그것과도 가까운 것이다.
이와 같이 목숨을 걸어 禪을 닦음으로 해서 우리 祖上은 꾸준히 머리를 많이 쓰고 修養을 했고, 그래서 '弘益人間 在世理化'에 일찍이 뜻을 둔 것인데 옛날 일이라고 해서 그 時代를 蔑視(멸시)하려는 작금의 우리 性向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처럼 反射的이고 無責任한 판단은 보류함이 옳다. 옛날에는 그러한 輕率함에 대해서 어른들의 牽制가 있었고 그러한 어른들의 敎育은 輕視되지 않았다. '弘益人間'도 그렇지만, 특히 '在世理化'라는 先進的인 民族의 標語(표어)를 우리는 다시 되새길 必要가 있다.
'理化'는 'rational', 즉 '理性의 道理를 아는, 事理를 아는, 合理的인, 또는 理性主義의' 等을 뜻하기 때문에 理化思想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動物이 아니고 생각 있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어서 지금도 우리가 버릴 수 없는 座右銘(좌우명)으로 존중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頭腦위주의 性向, '뜻 밝힘'의 오랜 歷史, 그리고 맑은 마음으로 하는 修養의 一環으로 해온 弓術 등으로 해서 우리 體質은 일찍이 優秀하게 開發되어 왔고 頭腦에 의한 육체機能관장도 敏捷(민첩)하고 正確하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가 길수록 민족체질로 남아서 머리 중심의 육체여건(좋은 머리와 正確한 몸의 支配)이 갖춰지고 있다.
이에 比해서 民族이 集團생활을 한 것도 아니고 子息들의 敎育에는 無關心해 왔던 西歐 여러 나라에서는 머리와 몸이 아둔한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래도 그러한 사람들도 거둬야 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약한 文明'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4회의 禪通을 하면 道通을 한 것으로, 즉 得道한 것으로 보는데 道를 5회 以上 通하면 '神人'이 됐다. 그 정도 宇宙의 攝理(섭리)를 把握하고, 훌륭한 洞察力(통찰력)을 갖고 있는 사람을 輩出한 것이다.
그들은 훌륭했고, 王들도 禪을 한 사람들이었고, 이 王들을 모신 벼슬아치, 즉 支配集團(東夷族)은 고도의 '禪'과, '道'의 修養으로 해서 존경을 받아 王權을 强力한 것으로 만들었다. 이들은 靈的인 傾向도 강했다.
오늘날 Shaman이라고 貶視(폄시)되고 있는 것은 殷나라 무렵에는 반듯한 것으로 認定되고 있었고, 따라서 巫術 人才의 양성에도 努力한 것으로 우리의 正統에 좀 더 가까웠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에 있어서도 條件反射的으로 反應할 것이 아니고 評價할 일은 評價해주고 '샤마니즘'이라는 말을 反射的으로 천시하는 單純함으로부터는 解放되어야 할 것이다.
이 (꾸준히 禪과 道를 닦는 擧族的인) 경향은 宗敎를 형성하여 巫俗이 자리잡고, 또 한편 後日의 불교가 되는데, 道通의 정신문명을 綿綿히 이어와 白佛(이라 불리는 帝釋桓因(제석환인))을 위시해서 석가모니 이전에도 七佛이 있을 정도 精神문명의 歷史가 긴 우리 겨레가 그 바탕을 닦기 시작한 것이다.
단군의 나라와 佛敎와의 관계는 크리스트敎에 대한 유태교의 입장과 같이 그곳에서 출발한 母體라고 말할 수가 있어서 단순한 宗敎들의 '服從과 畏敬(외경)'만이 아닌 사람들의 內的 世界追究가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 오늘날의 불교의 뿌리가 되기도 했다. 결국 높은 禪과 道닦음이 '神人'을 形成했는데, 이 '神人'은 上述한 바와 같이 5회 以上 도통한 사람을 호칭했다.
한편 멀리 서쪽에까지 간 統治실권자들이(東에서 西로 侵入한 例로서는 B.C 3500年 頃부터 시작한 Kurgan족의 西方侵攻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단 이들이 上記 神人의 槪念을 가지고 갔는지는 不明하다) 이 禪通, 道通을 한 사람, 즉 '神人'의 이름을 팔아 강력한 統治를 했기 때문에 (그곳에서 봤을 때) 멀리 東方에 있는 이 帝王(또는 神人)이 신통한 存在로 승화되고, 全能한 존재가 되고 抽象觀念化한 것이다. 西洋사람들의 王에의 존경은 具體的이지만 東洋처럼 神聖化에 밀착한 것은 아니다.
이 東洋의 神聖관념을 내세우면서 서쪽에서 權力을 휘두른 사람들은 이 精神세계의 깊이를 自己에게 有利하게 활용했다. 東方에서 쳐들어온 사람들의 神人을 업은 이러한 堂堂한 精神姿勢 때문에 말로만 듣는 이 '神人'은 西洋사람들에게는 주로 審判하기 爲해서 언젠가 나타나게 될 무서운 (神的)存在로 알게 된다. 東洋圈 밖 地域의 초기의 종교는 주로 恐怖(공포)를 생각해야 했다.
그 後의 西方침공의 事例로 징기스汗의 경우는 유명한데 5世紀 頃에 있었던 Huns(鮮卑를 사이에 둔 北匈奴와 이어질 것으로 보는 데)의 Attila의 침공이 유럽에서는 더 恐怖感으로 알려져 있다.
天山山脈을 근거로 유라시아大陸을 정복한 人種(東夷, Turkey-Mongoloid, Kurgan)들은 "흰말을 타고 나타날 흰 天帝"를 내세운 무리로 中美에 까지 畏敬의 對象이었고, 이로 해서 美大陸에 白人들이 侵入해 왔을 때(스페인 征服者 Pissaro) 그곳 住民들은 싸움다운 싸움도 안하고 降伏(항복)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이 언젠가 올 것으로 두려워하고 있던 흰 사람들은 天山族으로 東夷, 카삭, 위굴族들은 얼굴은 비록 노란 편(tint)이지만 皮膚가 희어서 오늘날 白人種으로 分類되고 있는 北아프리카에 사는 햄族보다는 決定的으로 희고, 아랍族으로 代表되는 셈族보다도 평균적으로 흰 편이다. 아시아인은 근본적으로 골격에 차이가 있는 것이고 피부색은 흰 사람들이 참 많다.
Kon-Tiki로 유명한 Thor Heyerdahl은 2001년 5월에 發表하기를 자기 조상 Norway사람들은 원래 Cossack들로서 Alexander가 東洋을 침공했을 때 Russian Height(이것은 西方의 呼稱이고 우리로서는 Kirghiz高原, 즉 廣義의 天山)으로 부터 Alexander에 依해서 쫓긴 것이고, 그 祖上은 B.C 1세기부터 A.D 3세기 頃에는 Russia를 위해서 傭兵을 하던 Cossack로서(이 Cossack傭兵들이 東으로 쳐들어가 시베리아의 沿海州까지 戰爭을 안 하는 '檀君의 땅'을 러시아에 所屬시켰음) 그들이 神格으로 존경하는 'Odin'은 Kirghiz高原으로부터 民族을 Scandinavia까지 이끌어간 사람이라는 것이다. 즉 Caucasoid라 부르는 白人의 일부(또는 전부)의 起源은 東洋인 것이다.
上記한 바와 같이 Heyerdahl은 그렇게 해서 오늘날 Viking後孫이라고 불리는 民族이 形成됐다고 했다. 北歐人들을 包含해서 白人들을 학술적으로 Caucasoid라고 하는데,(Austria는 '東'이란 뜻이고, Turky는 '小亞細亞'이고, Roumania의 Sylvania숲의 東쪽(Trans-Sylvania)은 世上의 끝인 줄 알면서도 그보다 먼 Caucasus에 白人族이름을 분류한 것이다)
이는 로마를 멀리 떠나 黑海와 Turkey를 지나, (그들에게는) 아찔하게 먼 東쪽으로 간 곳이고, 우리와 人種이 닮은 Kazakhstan共和國을 사이에 두고 崑崙山-天山(Russian heights)과 이웃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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