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상고사(上古史)

우리겨레의 우수성[1]

야촌(1) 2005. 8. 26. 12:00

<東夷族特輯> 

東夷族의 優越性[1]

安秀吉 : 서울대학교 名譽敎授

 

   新疆省(신강성)의 首都 우루무치에서 北京까지의 비행시간 3시간 반 중에서 2시간 45분이란 긴 시간을 비행기는 沙漠(사막) 위를 날라야 한다. 黃河(황하)가 두 번 연달아 90도를 휘어 '번/종(鑁)'자를 형성하는 '오르도스(Ordos)' 지역은 옛날 '周'나라 때에는 沃土였지만 지금 중국 西北편 黃河유역은 砂漠이 대부분이다.

 

   蘭州(란주=西安의 西北편)보다 서편으로는 중국이라기보다 '西域(서역)'으로 回族(회족)과 위굴(Uighur)族이 主이고 新疆省부터는 코삭(Cossack)人들도 많다. Cossack이란 '자유인' 또는 '나라 잃은 사람'이란 뜻으로 回族과 함께 한국이나 일본의 얼굴 흰 사람들과 많이 닮아 있다. 新疆省인구의 65%를 차지한다는 Uighur族도 용모는 우리와 무척 닮았다.

 

   東夷의 조상은 莫高窟(막고굴)로 유명한 燉煌(돈황)의 동남 편에 있는 三危山(삼위산)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三危山에는 사당이 하나 남아 있다고 하지만 모래의 민둥산으로 사막의 모래바람에 露出(노출)돼 옛날의 높이를 유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곳에서 인류가 發生했더라도 그 모래바람으로 뼈도 가루가 되어 남아날 것 같지 않다.

 

   莫高窟도 다시 발굴됐을 때에는 그 모든 것이 모래로 덮여 있었다. 우리 단군의 孫들은 지금 莫高窟 동남쪽에 있는 삼위산의 몇 백미터 지하에 관심을 가져야 할지도 모른다. 무엇인가 묻혀있을 가망성은 있다.

 

   檀君(단군)은 하늘에서 이 三危山에 내려와 天山山脈(천산산맥) 푸른 물의 天池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檀君이라는 훌륭한 인물의 이야기는 여러 기록에서 나오는 實在인물이다. 黃河가 아직 푸르고 티베트(Tibet)의 북쪽, 지금의 靑海省(청해성)에 實際로 바다[한해(翰海)/사막)가 있었던 무렵이다.

 

   그때 檀君의 나라는 東西가 2만리였고, 南北이 5만리였다. 당시 360步가 1리였음으로 동서가 2,000km, 그리고 남북이 5,000km정도가 되는 셈이고 지금의 中國의 남쪽 南蠻(남만)의 땅을 넘어 安南으로부터, 북편은 Altai산맥의 서쪽, Balkhash 湖水의 뒤 Kirghiz 高原까지, 즉 사람이 살 수 있는 한계까지가 九夷의 땅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시베리아·중국·안남 等인데 이것을 서쪽에서 온 싸울아비 東夷가 지배한 것이다. 이것이 '桓(환)'이고 '韓(한)'이다. 반대로 물가를 옥토로 개간해 농사짓고 사는 온순한 사람들은 '漢(한)'이다. 나는 前者를 '불의 한'이라 부르고, 後者를 '물의 한'이라 訓 붙인다.

 

   단군은 약육강식의 好戰(호전)족속 '虎'族을 내치고 '熊'族은 문화민족으로 만들어 갔다. 비록 黃河유역이어서 땅이 肥沃(비옥)할 가망성은 있었지만 길들지 않아서 長期개발이 필요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 勞力을 투입할 만큼 安定되지 못했고, 내일에 대한 믿음이 결여됐다.

 

   수확이 自己 손에 들어온다는 보장이 없었다. 특히 虎族(호족)들은 참지 못하고 瞬間(순간) 순간의 氣分과, 눈앞 일만 힘 爲主로 챙겼기 때문에 相互間에 일상 損害(손해) 날 일의 되풀이였다. 즉 文化되지를 못했던 것이다.

 

1. 야만(野蠻)에서 天子國그리고 '선양(禪讓)'으로

 

   상호간 조금만 신뢰가 形成돼 있더라도 사람들의 생존이 그렇게 험하지는 않았을 그러한 野蠻의 생활형태가 계속됐다. 땅은 共同개발을 해서 크게 解決하면 될 터인데 노력을 해도 그 결과가 뒤에 꼭 자기네들 것이 된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秩序를 잡아주면 모두에게 이롭고 文化될 수가 있었다. 그 때 단군에게 모아진 信賴(신뢰)가 공동노력을 可能케 했고 收穫과 결실의 妥當한 분배가 이루어졌다. (九桓(구환)의 백성들이 모두 좋아해서 誠服하고 믿어 天帝(천제)의 化身으로 만들어 이를 帝로 삼고 檀君王儉(왕검)이라 했다..... 도랑을 치우고 논밭을 개간하고 蠶業(잠업)을 勸하고 漁獵(어렵)을 시켰다. - 桓檀古記)

 

   이 때 帝位(제위)에 오르는 것은 血統(혈통)을 따르는 것이 아니고 인물의 '禪'의 정도에 따랐다. 禪通(선통)한 사람이 왕위(당시에는 帝位)에 오르게 됐다. 그 때에는 모두 큰 人物이 되기 爲해서 '道'를 닦았고 공부와 수양을 쌓았다.

 

   弓術(궁술)을 위한 마을의 모임은 사람들의 '禪'의 정도를 평가하는 중요한 儀式(의식)이었고, '說文'에서는 "東方사람은 大人으로서 활을 따른다"라고 했다. 弓道(궁도)를 神이 내리신 基準으로 본 것이다. 어른들로부터의 활촉(嗐●矢, 호시)의 선물은 '道'를 닦는 인물로 인정해준다는 큰 待接(대접)이였다.

 

   반대로 道를 안 닦는 물질적인 사람들은 마을에서 逐出(축출)되어 떠나 '蠻(만)'이 됐다. 아들에게도 향상이 없고 아둔하면 姓을 안 줬다. 이 무렵 돈황의 땅은 道닦는 사람이 꼭 가야하는 땅이고 禪과 道에 관심이 없으면 추방하고 姓도 안 주는 等 嚴密한 '選民'풍습이 있었다. Hitler가 후일에 추구한 'Super Race'의 출발점이다.

 

   階級에 따라 주거지역을 달리, 즉 나라를 달리해서 사는 현상은 Scythai에서도 관찰됐다. 農奴(농노)들은 Black Scythia라 하여 무덥지만 농사가 잘 되는 濕한 지역에서 살았고, 王과 그 가족들은 '白色스키타이'라하여 濕氣가 없고 고슬고슬 살기 좋은 準사막지역에서 살았다.

 

   이들은 기후로부터의 부담이 없어서 모세관이 가늘어 살갗이 희고 體毛는 별로 없었고 추위를 위해 과도하게 살이 찌는 일이 없었다. 그 중간에 騎馬의 '싸울아비階級'이 살면서 租稅를 거두어 王族Scythai을 받들었다.

 

   極東圈에서도 帝王의 나라였던 '진=Chin' 나라는 북쪽에 있었고 '가지와 잎새, 그리고 豊盛'을 뜻하는 "支那"는 남쪽에 있었다. 지나는 역사상 '진-Chin系'에게 계속 Black Scythai의 입장에 있었다. 즉 최근까지 'Chin'의 農奴의 나라였다. 같은 모양의 '왕국 對 從屬된 백성의 땅'의 관계는 大月國과 月支國 사이에서도 있었다.

 

   東夷의 나라에서는 禪에 관심이 없는 자식들은 부모에게 姓도 못 받고, 살던 곳에서 쫓겨나 '蠻'이 됐는데, 너무 춥거나, 너무 더운 곳에 이주한 '戎'이나 '蠻'들은 육체가 極限기후에 견디기 위해서도 깊은 수염 등, 對應기능을 발달시켜 나쁜 기후에 適應된 體質을 갖게 됐다.

 

   그러한 기후로 因한 육체기능 개발부담은 머리를 쓰고 禪을 닦는 데 더욱 더 不利하게 하는 반면, 살기 좋은 지역에 남는 사람은 道를 닦고 '禪通'을 하고 長壽를 했다(단군은 그 한 분, 한 분이 오래 統治했고, 지금도 敦煌의 서편 Kirghiz에서 Turkmen까지 長壽村이 많다).

 

   '莊子'에 의하면 '禪'을 터득한 仙人들은 '必姑射'의 神人들로서 "그 피부는 어름이나 눈과 같이 희고… (중략) … 强靭한 生命力을 갖고 있으며 精神을 集中시키면 그 宇宙的인 精神작용이 모든 생물로 하여금 災禍도 없고, 疾病도 없고, 饑餓도 없는 平穩한 生의 歡喜를 갖게 해준다"고 했는데 이들은 禪通과 道通을 한 경우이다.

 

   孔子도 "東夷의 나라에서 살고 싶다"고 부러워한 큰 文明을 東夷族들은 이룩한 것이다. 인간들이 野蠻해서 필요이상 서로를 괴롭히는 속에서 弘益人間의 단군정신은 신뢰와 질서를 심어 人生다운 인생을 살 수 있게 해 줬던 것이다.

 

  즉 시대에 앞서 '王權을 통한 秩序'를 도입해서 人間다운 '生'을 享有할 수 있게 해주어 '부러운 나라, 精神文明의 나라'를 만든 것이다. 이 '禪'의 기준으로 政權을 이양하는 것을 '禪讓(선양)'이라 하여 예를 들어 昔脫解王은 가야에 가서 이 '禪'의 경쟁을 통해 정권을 자기에게 넘겨 줄 것을 요구했으나 金首露王에 판정패하여 물러서서 신라에 가서 후일에 신라왕이 된다. 단 이 舞臺는 지금의 중국이다.

 

   '禪讓'의 예를 들면 신라정권은 초기에는 朴氏가 3대, 昔氏가 1대, 다시 박씨가 4대, 그리고 다시 석씨가 4대, 그리고 金氏가 1대 석씨가 3대 등으로 '禪'중심으로 移讓되다가 그 다음 한참 가서 血統중심으로 된다.

 

   신라가 망할 때에도 경순왕과 그 가족, 즉 王族이 3개월 여행을 해서 가서 고려왕에게 정권의 '禪讓'을 했다. 이것이 人類역사에 자랑할만한 '禪讓'제도로서 우리 문명의 特徵인 것이다.

 

   중국은 '周'대에 '天子'라고 하는 바 王權의 완벽한 神聖化가 확립되어 戰國時代 諸雄들은 감히 왕권은 노리지 못하고 형식상으로나마 '周'의 天子이름을 계속 받들어 천하를 통치했다. 後代에 唐나라는 이 '禪讓의 精神'을 높이 올려 모셔서 자기 정권의 正統化에 힘을 다하여 이에 성공, 백성들에게 神聖하게 보였기 때문에 무리 없이 당시 최강의 거대한 제국이 된 것이다.

 

   東夷의 禪讓문명은 중국, 인도 등에 傳해져서 부러움을 샀고 '동방의 燈불'과 같은 東夷의 나라는 역사를 通해 계속 높임을 받았다. 그밖에 黃金과 비단옷에 반짝이는 '사람 사는 곳' 東洋에 대한 서양인들의 숭배는 수 천년에 거슬러 오른다.

 

   Babylon의 옛날에도 Akkad나 Assyria 등 Semite(셈族)들은 농사기술이 卓越한 Mesopotamia 先住民 Sumer人들을 존중했고, Greece의 정신문명을 Roma인들은 소중하게 계승했다.

 

   서양의 동양문명 숭배는 바비론(Babylon)시대를 포함해 5,000년에 이른다. 서양의 동양 숭배는 "ex oriente lux"라는 라틴 말 구절로 잘 나타난다. '빛은 동방에서 온다'는 뜻이지만 lux는 사치를 뜻하고 있다.

 

  서양사람들에게는 씰크로우드가 바로 '文化와, 사치와, 비단이 흘러오는 비단의 길'이였고, 神話시대 酒神 Baccus도 동양에 왔다가 가면서 비단옷을 입고 호랑이를 타고 Tigris강을 건너 돌아 온 것으로 되어 있다.

 

   지구의 지각변동에 의해 印度대륙 땅이 Eurasia대륙을 北으로 밀어 올려옴에 따라 '靑海'는 하늘로 밀려 올라서 '天海(翰海?)'라고 불리게 되고 그 물은 점차 빠져나가 오늘날에는 Kokonor 湖를 포함하여 몇個의 호수를 남길 따름이다. 반대로 黃海 북쪽에서는 발해가 꺼져 물 속으로 들어갔다. 天海에서 渤海 또는 韓半島까지를 20,000里라고 한 것이다.

 

   九夷族들은 그 남북 50,000里, 동서 20,000里 땅을 차지하고 있었고 天池에서 출발한 檀君의 나라는 중국의 中原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聖君에 의한 德治의 땅'으로 남았고 시대가 요구하는 武裝政權化 路線을 안 따랐기 때문에 秦始皇이 帝國을 만들 때에 단군 조선의 五加는 秦王政에 따르게 됐다(이 秦始皇의 나라는 망한 다음 秦韓, 즉 辰韓이 되어 三韓을 이룬다).

 

   太白敎를 믿고 '蘇塗'를 設置해서 신앙을 확인하는 것은 東夷族의 特徵이다. 실생활은 Shamanism(巫俗-무속)이 지배했다. Shamanism은 후일 불교와 함께 古朝鮮이 발달시킨 정신문명의 결실이며 당시 Shamanism와 고려조까지의 불교는 (오늘날의 여러 국가가 '國敎'라는 것을 지정하는 그러한 政權外的인, 또는 國體 外的것이 아니라)나라의 본질이었다.

 

   한국인들은 Shamanism에 관심을 가져 그 본질을 파악하고 조상의 것으로서 인식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같은 모양으로 佛敎도 밖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民族敎養으로 시초의 佛(Buddha)은 第一期 檀君 始祖였던 桓因帝釋(B.C. 8937)이 9번을 도통해서 始初의 Buddha로서 白佛라고 불리었다는 것, 즉 불교는 釋迦牟尼 以前에도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佛敎는 印度에서 發生하지 않았다.

 

   - 이중재著 - 아시아미디어社 參照). 그 후 精神的인 지배는 Shamanism, 그리고 (완전 宗敎化가 되기 以前, 나라 본질이었던) 佛敎의 시대까지 오랫동안 계속됐고 絶對的이었다. 단군의 가르침 태백교는 지금도 살아 있다.

 

   옛날 東夷族의 단군은 이미 周나라 때, 즉 箕子조선 때에 지상의 정권을 포기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것은 '中原의 땅'의 포기를 말하는 반 토막의 진실이고, 고도의 農業技術을 가졌던 백성들은 諸侯에게 分割되고 東夷族은 여러 정권으로 나뉘어져 '진-Chin系'의 왕조로 最近까지 黃河이남의 농업의 땅 '支那'를 지배해왔다. 漢나라와 당나라도 모두 다 東夷族의 政權이다.

 

   한국은 巫俗 等, 그 '氣'가 센 나라였고 이 根本정신은 新參종교에 편승하거나, 오히려 신참종교가 근본에 있어서 우리 巫俗土壤 위에 뿌리하고 있는 양상이 있다. 오늘날 여러 종교가 세계적으로 信徒數 維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속에서 한국에서만은 유난히 많은 신자수를 確保하면서 꽃 피고 있는 사실에서 우리 국민의 유난한 精神 指向性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은 그 바탕 토양이 결정하는 것이지 갑자기 이룩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의 頭腦중심 性向은 다른 기회에 論하려니와 아무튼 東夷族은 머리를 많이 쓰며 肉體가 정신의 영향을 크게 받는 성향이 있다. 요즈음 弓術이나 골프에서도 관찰되는 바이지만 우리 東夷族은 纖細하고, 銳敏하고, 행동이 敏捷하고 재주가 넘치는 민족이다.

 

   즉 사람의 육체기능을 電子회로에 比하자면 신경을 통해서 어떤 행동을 지시하고 그 결과를 다시 신경을 통해서 把握하고 再調整을 하는 하나의 系統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東夷의 경우는 그 全體 증폭률(loop gain)이 크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뺄셈을 못하는 商人들이 많아서 받은 돈이 물건값+잔돈과 같을 때까지 잔돈의 덧붙임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영국에서는 紙幣개혁을 하는 과정에서 자살을 한 소매상들이 있는 지경이다. 반면에 한국인의 정신의 육체지배력은 유난히 강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이 민첩하다. 技能올림픽에서도 한국인의 몸의 기능 우수성이 입증되고 있다.

 

   이럭저럭 '精神'과 '氣'의 문제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반면에 精神力 過敏으로 인한 病도 생긴다. UN기관에서도 한국인들의 '홧병'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게 精神이, 그리고 '氣'가 육체를 지배를 하며, 한편 몹시 관념적인 족속들인 것이다. Shaman이란 '신들림' 능력이 존중되는 신앙이다. 즉 '신'이 내리면 몸이 떨리는 족속들인 것이다.

 

   단군이 지상 지배를 포기하고 산신령이 됐을 때 일부 耆老(기로)는 북으로 떠나 東濊(동예) 나라를 만들고, 이것이 후일에 夫餘와 합쳐지고, 다시 辰韓이 되고 마한, 番韓(변한)과 함께 三韓을 이룬다.

 

   즉 지상의 지배도 계속됐던 것이다. 三韓의 역사는 周나라보다 길어서 특히 그 中 番韓(弁韓)의 경우는 B.C. 2224에 소급해서 帝禹의 夏나라 때이고 시조인 蚩頭男 氏는 姬씨 姓이었던 '帝禹'와 동일 인물로 보인다.(周는 B.C. 1122)

 

   秦始皇은 '周'왕조가 서쪽에서 왔고, '殷'왕조가 서쪽에서 왔던 것과 같이, 서쪽에서 와서 黃河를 근거로 정권을 확립한 다음 司馬遷으로 하여금 史記를 쓰게 했는데 이는 그 前의 東夷族의 Silk road 및 中原지배의 역사를 말소하고, 그들의 것으로 위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국이란 말은 최근에 나왔고 그 동안은 周를 위시한 '진-Chin'의 지배, 즉 동이의 지배하에 있었고 그 南쪽에 農奴國으로서 支那가 있었다. 중국(支那)의 수많은 (팔이 안에 굽은) 史書들에 의한 東夷의 상고사 剽竊簒奪(표절찬탈)에 우리는 눈감아서는 안 된다.

 

  人智의 발달에 따른 人類의 전반적인 武裝政權化 以前 堯舜을 위시해서 여러 聖君 等 좋은 역사의 대부분은 우리의 것이고, 필요이상 野蠻하고 험악했던 人類史에서 "문화되고 예의를 갖추자"는 단군의 교육은 자랑할만한 것으로 '東方禮義之國'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한국민 본성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2. 東夷人 體質우월성

 

   한국인의 體質을 연구한 사람들은 왜 한국과 같이 추운 나라에 東夷族과 같이 추위를 못 견디는 생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살게 됐는지를 모른다고 한다. 濕하고 추운 나라에 살려면 얼굴 및 피부의 毛細管이 굵어서 검붉은 피부가 되어야 한다.

 

   한국族은 몽골族, 키르기스族, 위굴族과 함께 아세아圈에서 가장 가는 毛細管, 즉 흰 피부를 갖고 있어서 濕한 곳에 살 수 있는 체질이 아니다.

 

   Roma史家 Herodotus는 Scythai國이 왕과 백성이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東方에서는 흔한 일로서 '江'과 '河'의 남 쪽 '支那'에서는 '漢'이 살고, 燉煌근처는 '韓'을 中心으로 높은 사람이 아니면 살지를 못해서 老子도 도를 닦기 위해서 '陀'의 地域(西北方의 東夷땅)에 가면서 쓴 글을 '西昇經'이라 이름했다(번역본-아시아문화社 -2001년 版).

 

   東夷族은 추울 때에 動物가죽도 애용했지만 웬만할 때에는 여전히 얇은 白衣를 입고 바람이 차게 되면 버선을 신고 대님을 매었다. 공기가 乾燥하기 때문에 추울 때에도 밑으로부터 스며드는 찬바람만 막으면 되고 대님으로 해서 바지 안에는 따뜻한 空氣가 보존된다.

 

   이러한 허술한 옷차림은 공기가 몹시 乾燥한 곳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砂漠지대에서 오랜 동안 지났다는 것을 나타낸다. 돈황에서 실크로우드까지의 건조한 공기는 防寒防暑가 쉬워서 모든 체력을 修道에만 集中할 수가 있어서 禪通과 道通을 하는 데 적합했다(禪通과 道通을 하는 데 좋기로 이름난 것은 須彌山으로서 불교도 帝釋桓因(白帝)를 위시해서 陀(天竺國)를 그 뿌리로 하고 있기 때문에 高僧들은 꼭 찾게 된다).

 

   東夷族은 피부가 희어서도 존경을 받았다. 人類의 白色애호성향은 지금 세상에서 發說이 허용된 것보다 훨씬 큰 것으로 東夷族이 아시아권에서 유독 희어서 有利한 입장에 있다는 사실을 한국인들은 알아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가장 검은 한국人도 동남아人의 눈에는 부러운 白人들이다)

 

   東夷族은 흰옷을 입는 것을 좋아했다. 그것은 光線이 강한 砂漠지대에서 熱線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단군시대에 한 동안(2세 扶婁帝 때) 머리를 따(編髮)고, 갓을 쓰(蓋首)고, 푸른 옷을 입히려 한 때도 있으나 끝내 흰옷으로 돌아왔다. 但 갓과 머리 따는 관습은 정착됐다.

 

   外出할 때에는 꼭 두루마기를 입었다. 砂漠기후는 덥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는 옆구리 等 여기저기 터져 있는 바람 잘 통하는 옷을 입고 살았고, 戰鬪보다는 精神세계를 중요시하는 평화로운 民族이었다.

 

   일본인들의 帶刀생활, 계속된 倭寇의 기록 등으로 보았을 때 일본인들의 好戰性向을 쉽게 볼 수 있고, 반대로 우리민족의 律法尊重 性向을 알 수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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