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전통예절

지나친 형식은 예(禮)가 아니다.

야촌(1) 2010. 4. 30. 11:16

■지나친 형식은 예가 아니다.

 

재상의 말을 땅에 엎드려 들어야 한다면,

임금의 말은 땅을 파고 들어가 들어야 하는지요?

 

[원문]

宰相之言伏地聽。則君上之言當掘地聽乎。

재상지언복지청。즉군상지언당굴지청호。

 

자료 : 이학규(李學逵,1770~1835),<해동악부(海東樂府)>,《낙하생집(洛下生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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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문절공(文節公) 주열『朱悅,1227(고종 14(~1287(충렬왕 13)』이라는 분은 고려 때의 명신입니다.

성품이 맑으면서도 강직하였으며, 시문과 글씨에도 능하였습니다.

그가 아직 벼슬이 높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공무 때문에 어떤 재상을 만났는데, 꼿꼿이 앉은 채로 듣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재상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무랐습니다.

“재상이 말을 할 때는 엎드려서 들어야 한다.”

그러자 그는 대뜸 반박을 합니다.

“그렇다면 임금이 말씀을 하실 때는 땅을 파고 들어가서 들어야 하겠군요.”

 

신분에 따라 지켜야 할 예절은 엄연히 있습니다.

그도 그런 것을 몰라서 지키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공손한 것은 오히려 예가 아닙니다.

 

그리고 윗사람에 대한 예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랫사람에게 갖추어야 할 예의도 있습니다.

상호 존중의 정신, 그것이 바로 예의 본질입니다.

 

그는 얼굴이 매우 못생겼습니다.

그를 보고 놀라는 공주를 위해 왕이

“얼굴은 귀신같이 추하지만 마음은 물같이 맑다.”

고 변명해 주었을 정도입니다.

 

그런 그에게 재상은 예의를 갖추지 않았습니다.

외모를 보고 하찮게 여겼던 것이지요.

 

이런 재상과 같은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도 많습니다.

형식을 각박하게 따지고, 외모로 능력을 짐작합니다.

자신의 조그만 능력이나 지위를 내세우길 좋아합니다.

 

어쩌면 그런 것으로 존재감을 만끽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대부분은 중간치 정도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 분처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럼 기관장에게는 어찌 할까요?”

“그럼 퇴계, 율곡 선생은 어떻게 받들어야 하나요?”

그가 조선조의 지식인들에게까지 대단하다고 칭송을 받았던 이유입니다.

 

글쓴이 : 권경열(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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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열『朱悅 : 1227(고종 14)∼1287년(충렬왕 13)』

 

고려의 문신.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이화(而和). 은사과(恩賜科)에 등제하여 현리(縣吏)를 지낸 경여(慶餘)의 아들이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남원판관이 되고, 국학학록(國學學錄)·감찰어사(監察御史) 등을 거쳐 나주(羅州)·정주(靜州)·승천부(昇天府)·장흥부(長興府) 등의 수령이 되어 정치를 잘하였다.

 

원종 때에는 병부낭중(兵部郞中)으로서 충청·전라·경상 3도의 안렴사(安廉使)를 역임하며 위명(威名)을 떨쳤으며 백성들도 경외하였다고 한다.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었으나 당시의 권신 임연(林衍)에게 거슬려 1269년(원종 10)에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임연이 죽자 동경유수(東京留守)가 되었다.

 

예빈경(禮賓卿)·간의대부(諫議大夫)·판소부 동궁시강학사(判少府東宮侍講學士)를 역임, 원나라가 일본정벌을 준비할 때 경상도안무사로 다녀와서 판비서성사(判祕書省事)로 승진하였으며, 충렬왕이 즉위하게 되자 그의 재명을 듣고 중용하였다.

 

한림학사에 제수하고 삼사사(三司使)로서 경상도계점사(慶尙道計點事)로 나가 유망민을 초집하였다. 판도판서(版圖判書)·부지밀직 전법판서(副知密直典法判書)에 나아갔으며 지도첨의부사(知都僉議府事)로 치사(致仕)하였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고, 성품이 활달하였으며,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근검하였고 어느 편에도 기울지 않는 공평함이 있었다고 한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참고문헌 : 高麗史/高麗史節要/元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