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계 김장생의 예설(沙溪 金長生의 禮說)
1.서 론
일반적으로 사계는 조선조의 대표적인 예학자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예학 뿐만 아니라 성리학에 대하여도 많은 연구를 하였으며 이것은 그의 예학의 이론적 기초가 되고 있다. 사계는 시기적으로 퇴율(退栗)을 정점으로 하는 조선 전기유학을 후기유학으로 매개시키는 교량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율곡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다.
조선조 유학은 자연의 문제보다는 인간의 문제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退栗에 의하여 사칠논쟁(論爭)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이러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사계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문제인 예학이 현실적으로 요청되게 되었다.
2.시대적 배경
沙溪 金長生이 살았던 16세기 중엽으로부터 17세기 중엽에 이르는 근백년은 국내외로 다난했던 시기이었다. 안으로는 반세기(1498 ~ 1545)에 걸친 사화(士禍)가 지니자 당쟁이 시작되고, 동서의 분당과 남북의 분파가 대립하며 광해의 폭정과 인조반정(1623) 이괄의 난(1624)등을 겪었으며, 밖으로는 임진왜란(1592)을 비롯하여 정유재란(1597) 정묘호란(1627)등 남과 북으로 부터의 외침이 쉴사이 없이 계속되던 시기이었다.
율곡은 16세기 후반의 상황을 「국세의 미진함이 지극하니 10년이 지나지 않아서 나라가 무너지는 환란을 당하리라」고 하여 정치 사회의 혼란을 경고하고 있다.
한편 여러 번의 사화를 겪은 사림들은 정치에 뜻을 버리고 산림에 숨어 학문과 교육에 힘쓰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학문 경향도 철학적 사색과 이론적 체계를 세우는 것을 중심으로 하게 되었다. 이것은 조선조 성리학이 융성하게 된 동기의 하나이다.
조선 전기 유학은 명종 선조 대에 이르러 이황과 이이 등의 학자가 등장하여 이기 심성의 성리학이 전성시대를 이루었으나 선조 8년에는 동서로 분당이 나뉘어 동인과 서인은 학설상의 시비와 정치상의 이견과 지방별의 대립이 엉켜서 갈등이 심화되고 당쟁이 계속되었다.
이와 함께 왜란과 호란 등 변방민족의 침입과 이에 따른 국토의 황폐화는 사회제도와 질서 전반에 걸친 붕괴를 야기하였다. 이러한 기존 사회제도의 변형은 그 근거를 이루는 시대이념인 유학사상에도 많은 문제를 던져주었다.
조선 전기의 통치이념으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던 주자학의 체계는 비록 정통적인 지위를 잃지는 않았지만 지도이념으로서의 기능에는 상당한 동요를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사회의 질서 확립을 위하여 禮學에 대한 관심이 점증하고 국가 기강의 확립을 禮學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난 후에 예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禮書의 간행도 전보다 점증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3.사계의 생애와 학문경향
1) 사계의 생애
사계의 자는 희원(希元)이고, 본명은 長生이고, 본관은 광산이고, 사계는 호다. 대사헌 김계휘(號 黃岡)와 평산신씨의 아들로 1548년(명종3년) 7월 8일 서울 정릉에서 태어났다. 우암(尤庵)의 어록에 의하면 그는 처음에는 송익필(龜峯 1534 ~ 1599)에게 四書와 근사록(近思錄)을 배우고 장성하여서는 율곡에게 사사하였다.
선조 11년 31세에 昌陵參奉으로 천거된 이후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35세에 부친상을 당하고 이듬해에 喪禮備要를 완성하였는데 이것은 사계의 최초의 禮書이다.
51세에는 近思錄釋疑를 지었고, 스승 구봉의 상을 당하고 家禮輯覽을 완성한 것 등은 그가 예와 성리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608년 선조가 승하를 하자 광해조에 잠시 관직에 있다가 계축옥사에 심문을 받고 무혐의로 누명을 벗은 뒤로 관직을 사퇴하고 연산에 은퇴하여 학문연구에 전심을 하였다.
이 기간에 그는 여러 지우들과 편지를 통하여 학문을 토론하고, 71세에는 경서변의를 지었다. 經書辯疑는 경서를 공부하는 동안 경학연구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기록하여 놓은 것이 쌓여서 책이 된 것이다. 1631년 인조 9년에 卒하니 84세이었다. 1688년(숙종 14)에 문묘에 배향되고 연산의 돈암서원과 안성의 도기서원 등 10여 개의 서원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문원이다.
2) 학문태도와 저술
사계는 구봉과 율곡으로부터 학문을 배워 학통을 계승하였다. 그는 학문을 함에 있어서 小學과 家禮로부터 시작을 하고 心經과 近思錄을 다음으로 배워 근본을 바로 세우고 四書와 五經을 배우게 하였다. 여기에서 소학과 가례를 먼저 배우도록 한 것은 修身을 하고 집을 다스리는데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를 실천하는 주체로서 개인의 수신을 중요시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소학과 가례에 이어 심경과 근사록을 배우도록 한 것은 마음을 다스려 학문에 나아가게 하는 데 이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고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율곡은 博文에는 공이 많으나 約禮에 있어서는 지극하지 못한 것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예를 의식적으로 중요시하여 실천하려고 하였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는 경연에서 말하기를 학문을 하는 근본은 먼저 敬을 주로 하여야 한다.
屋漏(神)에게 부끄럽지 않은 공부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여 공부를 함에 마음을 다스리는 敬공부를 중요시하였다. 敬공부는 행동 하나 하나에 잘못됨이 없이 조심을 하여 남에게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그는 窮理에 있어서도 철저하였다.
경서변의서(經書辯疑序)에 보면 「경전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는 것이 많고 여러 선생들의 설에도 의심나는 것이 있어 그때마다 적어놓고 공부하는 자료로 삼았더니 어떤 이가 묻기를 先正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는데 의론을 하는 것을 불가하지 않느냐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답하기를 의리를 논하는 것은 천하의 공공한 일이고 선현도 허락한 것이다. ...... 제공과 더불어 토론을 하여 시비를 바르게 하고자 할뿐이니 무엇이 해롭겠는가 ?」 라고 하였다. 이것은 선생의 말이라도 의심이 나면 그대로 따르지 않고 오래 생각을 하여 완전하게 이해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문헌고증에 있어서는 의리를 탐구하고 제가의 설을 고증하고 師友간에 강론을 할 때에도 문인의 설이라 할지라도 그 장점을 버리지 않고 경서변의에 기록을 하였다.
張溪谷은 사계의 학문하는 태도를 말하기를, 세상에 글 읽는 사람이 많지만 능히 의문점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것은 배우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을 한 후에 의심이 있고 의심이 있은 후에 문변이 있는 것이다. 문변이 있은 후에 행동으로 옮길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논어의 切問近思의 뜻이니 사계는 이 같은 태도를 지녔다. 라고 하였다.
행장에는 「선생은 평생 저술에 종사하지 않았으나 독서를 하다가 의심나는 것을 기록한 經書辯疑 8권, 近思錄釋疑 1권, 疑禮問解 8권 및 書疏雜錄 약간이 있고 家禮輯覽 3권 喪禮備要 1권이 있으니 상례비요는 간행된지 오래되어 먼 지방이나 시골집에서도 이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다. ...... 선생은 평소에 예에 가장 관심을 가졌다.」라고 하니 그가 예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저술목록을 보아도 알 수가 있다.
사계는 51세에 近思錄釋疑를 완성하였다. 근사록은 그가 13세에 송구봉을 만나 배우기 시작하여 82세 鄭時晦 著 近思錄釋疑의 서문을 지을 때까지 평생을 두고 연구한 책으로 그의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알 수 있는 책이다. 경서변의는 사계가 71세에 완성을 한 것으로 소학,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서경, 주역, 예기 등 유가경전 전반에 걸쳐 제가의 설을 취사하여 해설한 책이다.
예에 관한 책으로는 《家禮輯覽》, 《疑禮問解》, 《喪禮備要》, 《典禮問答》등이 있는데 이 책들에서는 사계의 예에 대한 이해를 볼 수 있다. 그밖에 書疏雜錄, 筵席問對에서는 그의 국가경륜과 성리철학과 예학에 대한 논변을 볼 수가 있다.
4.禮의 본래적 의미
유학에 있어서 仁과 義는 도덕적인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라면 예는 올바른 행위의 표준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예는 仁하고 義로운 것이어야 하지만 인하고 의로운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예라고 하는 바른 방법을 통하여 표현이 되어지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사회가 복잡하여지고 다양한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게되면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객관적인 행위의 기준이 더욱 요청이 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형성된 예는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인 배경을 기초로 하여 만들어지는 것이고 오랜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이 살아왔던 삶의 지혜가 담겨있기도 하고 한 민족이나 국가의 정치적 사회적 통합을 이루는 토대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禮는 示와 豊을 합하여 만든 會意文字인대 說文解字에서는 이것을 해석하여 "示는 天文을 살펴서 신의 계시를 받는 것이고, 豊은 예를 행하는 祭器"라고 하고 있다. 이것으로 볼 때 예의 원의는 上天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신을 섬기는 종교적인 의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종교적인 의례가 시대에 따라서 합리화한 것이 사회적 관습과 규범으로서 예가 되었고 이것은 종교적 의례로부터 그 사회적 합리성이 점차 독립을 하게 된 것이다.
예기에서는 "도덕과 인의는 예가 아니면 이루어지지 둽고 교화를 세워 백성을 가르쳐 풍속을 바로잡는 일도 예가 아니면 갖추어지지 않는다. 분쟁을 해결하고 소송을 판결하는 일도 예가 아니면 결정되지 않는다. 군신과 상하 부자와 형제의 관계도 예가 아니면 정해지지 않는다." 라고 한다.
이것은 예가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아 신을 섬기는 것에서 하늘의 뜻을 따라 사람을 섬기는 것으로 의미가 전환이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는 모든 도덕 관습 법률 사회제도의 기준이 되고 인간 행동의 근거가 되며 이러한 예를 위반을 할 때에는 형벌로 제재를 하는 것이다.
史記에는 "예는 사전에 방지하고 법은 사후에 금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즉 법은 범죄자를 형벌에 처하는 것에 의하여 사회의 질서를 보존하는 반면에 예는 인간의 도덕심에 호소하여 범죄가 일어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는 형벌과 같이 일정한 제재에 의한 강제력을 수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법보다는 관습과 유사하다.
그러나 원시사회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관습이나 단순한 도덕의식은 아니고 문화사회의 법률제도의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고 사회적 관습에서 법률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현상을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도덕이나 관습 법률 등을 그 안에 포함하면서 사회생활을 통제하는 중심이 되고 문화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5.朱子家禮 전래 이전의 禮.
유학이 전래하기 이전의 한민족은 고유의 생활방식을 가지고 살아왔다. 檀君의 건국이념인 弘益人間은 평화와 이용후생의 생활 지침이었다. 또 箕子의 八條禁法은 살인자에게는 사형을, 傷人者에게는 벌금을 부과하고, 도둑질을 한 자는 노예로 삼는다고 하였으며 특히 남녀간에 풍기가 엄하여 여자들이 정절을 중시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夫婦는 人倫의 시작이라고 하는 유가의 예와 부합되는 것이다.
고구려 시대에는 삼국사기에 소수림왕 2년에 유학이 전래되어 태학을 세워 귀족의 자제에게 유가의 경전을 교육하였다고 하니 유가의 예도 자연히 보급되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부여와 고구려에서는 조상을 숭배하는 관념이 강하여 죽은 사람을 반드시 후장하고 돌을 쌓아 봉토를 만들고 松栢을 심어 아름답게 하였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 것은 반드시 유학의 영향 때문은 아니라고 하여도 유학의 전래와 더불어 더욱 강화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 고구려의 풍속이었던 순장의 풍습도 유학의 영향으로 점차 없어지게 되었다. 신라를 지배한 가치의식은 花郞精神이었는데 화랑은 효제충신의 교육을 받고 도의를 닦는 것을 목적으로 한 집단이었다.
世俗五戒에 보이는 事君以忠 事親以孝 交友有信은 五倫에서 본뜬 것이다. 또 신문왕 2년에는 국학을 세워 유가의 경전을 가르쳤으며 특히 論語와 孝經은 필수과목이었고 論語의 仁과 忠 孝經의 孝道思想은 국민교양으로 강조되었다.
고려시대에 유학을 높인 治者는 成宗과 당시의 儒臣인 崔承老이다. 최승로는 윤리기강의 振作을 건의한 20여조의 上疏文에서 "중국의 제도는 반드시 준수하여야 할 것이나 사방의 풍속이 다르므로 모두 따를 수는 없습니다. 禮樂詩書의 가르침과 君臣父子의 도리는 마땅히 중국을 따라서 고쳐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것으로 볼 때 朱子家禮가 전래되기 이전에 있어서도 유학사상에 근본한 禮는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을 이끌어 온 중요한 生活儀禮이었음을 알 수 잇다.
6.朱子家禮 전래 이후의 禮.
주자가례는 고려말의 학자 安珦에 의하여 원나라로부터 주자학을 들여오는 것과 같이 시행하게 되었다. 고려말의 신진사류들은 당시의 사회를 주자학적인 기반 위에서 개혁을 하고자 하였으며 이들 사이에서 朱子家禮를 따라 행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恭讓王 元年에는 大司憲이었던 趙俊 등은 상소를 해서 "지금부터 주자가례를 따라서 大夫 이상은 三世를 제사하고 六品 이상은 二世를 七品 이하 庶人에 이르기까지는 다만 그 부모를 제사한다."는 관제개혁을 하였고 圃隱은 주자가례를 본따서 廟堂을 세워 선조를 받들게 하여 禮俗이 부흥하였다고 하며 恭讓王 3년에는 家廟立祀制가 시행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추세는 유교를 건국 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에서는 불교적인 의식에 대하여 유교적인 예의 실천과 이해가 더욱 요구되어지게 되었다. 즉 조선은 건국 초부터 유교적인 예제의 제정과 보급을 통하여 새로운 사회질서를 만들어나가야 하였다. 이때의 예에 대한 이해는 정치적인 필요에 의한 현실적인 치국이념으로서의 성격이 강하였다.
그러나 정신적인 지도이념인 주자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서 예의 이해도 깊어지게 된다. 이 예의 적용은 法制와 家禮의 양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법제적으로 보면 고려후기로부터 채용한 元 法制가 조선에서는 차츰 明의 法制로 대체되었고 따라서 大明律은 朝鮮經國典과 같이 강제되었다.
한편 주자가례는 법제에 비하면 강제성이 있는 것은 아니고 도덕적 윤리적으로 권장하는데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법제 면에서 예의 실천이 요구되는 것 못지 않게 강요되었다. 그것은 주자가례가 주자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朝野의 四禮의 준칙이 된 후 상류계층에서 따랐으며 주자가례의 예제가 대명률과 經國大典의 사례식과 같았기 때문에 大明律과 經國大典이 강제력을 가진 것처럼 주자가례도 적극적으로 따르도록 요청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태조 4년에 權近에게 명하여 冠婚喪祭의 예를 제정하도록 하고 三年喪과 宗廟制가 시행되었다. 또 태종 3년에 주자가례를 과거에 시험하였으며 같은 해 주자가례를 인쇄하여 반포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家廟立祀를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는 엄벌을 내리기도 하였다. 세종 5년에는 國朝五禮儀를 편찬하기 시작하여 성종 5년에 완성하여 조정의 예의규범이 되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불교식의 의례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즉 조선 초기에는 예에 대한 이해가 정신적인 면보다는 사회질서의 재편성이라는 필요에 의하여 요청되어졌기 때문에 강제성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 초기에 있어서의 예가 보다 강제적이었다면 주자학적인 세계가 확립이 되면서 상류계층으로부터 사대부다워야 한다는 계층적 자각을 하게 되고 보다 자발적인 예의 실천과 이론적인 연구도 진행하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 있어서 예에 대한 이러한 의식은 변화가 진행되는 동안에 예에 대한 이해도 깊어져 禮制(특히 주자가례)에 관한 저술이 많이 나오게 되었고 鄕約이 시행하게 되었다. 주자가례가 조선사회에 있어서 상류계층을 위한 예이었다면 鄕約은 주로 하부계층에게 주자학적으로 사회통제를 하기 위한 도의적인 규범이었다고 할 것이다.
주자가례는 송대에 저술된 禮書로서 중국의 전통적인 예관념을 계승한 것이기는 하지만 송대사회에 적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때문에 토속과 인정이 다른 조선에서는 적용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 이것을 조선 사회에 적용을 하기 위하여서는 조선의 실정에 맞게 고치고 쉽게 이해를 할 수 있는 계몽적인 저술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禮書는 그 수효도 적었고 주로 祭禮와 喪禮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것은 유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던 孝의 관념과 예의 초보적인 이해가 상부하는 데서 나온 것이며 가례 인식의 단계적인 현상이라고 할 것이다.
또 향약은 조광조 등의 지치주의 도학정치의 실천책으로 시행되었으며 이때의 향약은 呂氏鄕約이었다. 이것을 위하여 諺解呂氏鄕約과 鄕約諺解등이 간행되기도 하였으나 그의 실각으로 시행이 되지 못하다가 퇴계와 율곡이 여씨향약을 토대로 한국적이고 지방 실정에 맞도록 개편하여 토착화가 이루어지고 조선조의 예속은 향약을 통하여 굳어지게 되었다.
예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이념적인 인식이 시작되었고 예학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조선 전기 사회는 주자학적인 사회 체제의 확립기이고 주자학적 이론의 완성기라고 한다면 양란 이후의 조선은 전국토의 황폐화와 사회체제 전반에 걸친 붕괴 현상이 그 시대적 이념으로서 유학사상에도 많은 문제를 던져주었다.
조선 전기 통치이념으로 절대적 권위를 확립하였던 주자학적 체제는 비록 정통적인 지위를 잃지는 않았지만 지도이념으로서의 기능에는 상당한 동요를 보이게 되었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綱常의 재건을 위한 요구는 예학에로 관심을 돌리게 하였다. 즉 국가의 기강 확립을 예학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조선 후기의 예학은 영남학파의 예학과 기호학파의 예학으로 구분을 할 수 있다. 영남학파는 퇴계의 학문에서 비롯되어 心經과 儀禮를 중시하였다면 기호학파의 예학은 栗谷과 龜峯 宋翼弼에 의하여 계도되었으며 小學과 朱子家禮를 바탕으로 하였다.
영남학파의 예학은 王家의 특수성을 중시하여 天子와 諸侯 大夫士庶의 예를 분리하였다면, 기호학파의 예학에서는 가례를 왕에서부터 士庶人에 이르기까지 통용되는 보편적인 예로 보았다. 또 영남학파의 예학에서는 퇴계의 主敬思想을 바탕으로 君權의 강화를 목표로 삼았다면, 기호학파의 예학에서는 孔 孟 朱 三聖을 道統으로 삼아 강한 도통의식으로 朱子의 사상을 발양시키는데 힘을 쓰고 儒賢에 의한 도덕정치를 지향하였다.
服制問題에 있어서는 기호학파는 時制에 충실하여 왕실이라는 人統의 특수성보다는 天序가 중심이 되는 長子에 주안을 둔데 반하여, 영남학파는 古禮인 儀禮에 기초하여 統과 序를 일원화하려는 왕실의 특수성에 주안을 두었다.
조선 후기 사회는 주로 기호학파의 예학에 의하여 유지되었으며 기호학파의 도통의식은 개화기의 斥邪衛正論의 근거가 되었으며 의리사상은 한말 의병의 행동윤리로 작용하였다. 특히 宋時烈의 학맥을 이은 李縡는 四禮便覽을 편찬하여 조선 후기의 실용적인 生活禮가 되었다.
7.沙溪의 家禮에 대한 이해.
사계는 당시의 혼란한 사회현실을 보고 흩어진 인심을 바로잡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하여 朱子家禮를 기본으로 한 유교적 국가질서의 확립을 이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가례는 송대에 저술이 된 것으로 비록 중국의 전통적인 예 관념을 계승한 것이기는 하지만 송대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토속과 인정이 다른 조선에서 그대로 적용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때문에 주자학적인 학문분위기에서 가례의 실행이 강제된 조선사회에서 가례에 대한 계몽적인 저술이 나오게 되었다 .
그는 家禮輯覽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어려서부터 가례를 읽다가 通曉하게 알지 못하는 것을 병으로 여겨 친구인 申義慶과 강론을 여러 해 하고 율곡선생에게 지도를 받고 그 대개의 뜻을 이해하였다. 이에 제가의 설을 취사하여 책으로 만들어 家禮輯覽이라고 하였고 또 책머리에 도설을 붙여 초학자들의 참고가 되게 하였다. 라고 하였으니 가례를 이해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가례집람의 특징은 중국의 朱子家禮와 중국의 儀禮를 준거하였지만 한국의 俗制를 참작하여 현실에 적합하도록 융통한 것이고 더우기 당시의 한국학자들의 견해도 수록을 한 것이다. 사계는 특히 喪禮를 중요시하였는데 喪禮備要序에는 다음과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하는 말에 冠婚喪祭는 집에서는 日用의 體가 되는 것이다. 길흉의 때를 통털어서 반드시 알아야 하니 진실로 하나라도 강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예의 用은 평소에는 쉽게 행할 수 있으나 갑작스러운 때에는 잃어버리는 것이 많다.
평소에 강습하지 않으면 마땅하게 행하기 어렵고 節目에 응하기가 어렵다. 하나라도 잃으면 후회가 미치지 못하니 때문에 孝子가 반드시 다하고자 하는 것이고 四禮중에서 더욱 중하고 절실한 것이다.
또 喪禮諺解序에서 말하기를
예의 번거롭고 까다로운 것은 喪禮보다 심한 것이 없고 또한 初喪보다 급한 것이 없다. 비록 喪을 아는 자라도 깨닫지 못하여 잃어버리는 것이 많다. 라고 하여 四禮가 모두 일상생활에 중요한 것이지만 일상의 예는 쉽게 행할 수 있으나 갑작스럽게 당하는 喪禮는 평소에 강습하지 않으면 그 예를 다 갖추기가 어렵고 이미 지나간 후에는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후회를 해도 소용이 없으니 四禮중에서도 喪禮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喪禮備要는 본래 申義慶의 편저로서 주자가례의 상례편을 주로 하여 고금의 의례와 제가의 설을 참고하고 또한 당시의 우리나라 시속을 참작하여 만든 것이다. 그러나 수정되지 않은 부분과 빠진 부분이 많아 사계가 첨삭하고 고증하여 책을 만들게 된 것이다. 사계는 喪禮備要凡例에 "이 책이 비록 家禮를 조술한 것이지만 부득이 하여 덧붙일 것은 덧붙이고 고칠 것은 고치고 바꿀 것은 바꾸었다.
만약 儀禮와 家禮 今制 國制가 서로 다른 것이 있으면 같이 기록하여 참고하도록 하였으며 해설하기 어려운 것은 속명을 사용하여 갑작스러운 때에도 쉽게 알게 하였다"고 하였다. 이로써 보면 沙溪는 家禮를 따르기는 하였지만 첨삭을 하여 당시에 맞는 예의 확립을 위하여 노력을 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누구라도 쉽게 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8.正統에 대한 이해.
예는 조선사회를 지탱하여 온 뼈대이었으며 유교사회는 예를 근간으로 한 종법사회이었으므로 예의 문란은 곧 사회질서의 파괴를 초래한다고 생각하였다. 理學은 宗法에 기초한 예를 사회질서유지의 근간으로 삼았는데 종법은 엄밀한 신분윤리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理學은 결국 君君臣臣父父子子의 正名思想에 기초한 예학을 탄생시켰다.
여기에서 종법사회의 宗統관념이 나타나며 이것이 나라에서는 國統이 되고 가정에서는 家統이 되는 것이다. 즉 국가의 기강과 사회의 질서유지를 위해서 종묘사직의 統과 일반가정의 統을 높이는 일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하늘에 두 태양이 없고 나라에 두 임금이 없고 가정에 두 가장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하나의 진리를 구현하려는 정신적인 토대로서 예가 만들어지는 근간이 되는 것이다.
조선사회는 예를 근간으로 한 종법사회이었으므로 宗統을 높이는 것은 사회질서유지에 중요한 것이다. 종법제도는 중국에 있어서 은대에서 주대로 넘어감에 따라 이전의 모든 소유권이 민족공유이고 형제순차상속의 시기에서 종법제도의 체계화와 적서의 구별 전토전읍의 적자에의 계승권 또는 一人統治權의 필요에 따라 통치권과 왕위계승제의 제도적요구 등에 이르면 윤리적 당위성 마저 내재하게 되며, 주공의 종법상의 제사 혼상제도의 예제화는 이의 예라고 하겠다.
이리하여 종법은 嫡庶長幼親疏에 따른 신분윤리를 전제하고 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의 親義別序信에 의한 차등윤리를 낳게 되는 것이다. 張子는 말하기를 "宗子의 법이 서지 않으면 조정에 世臣이 없게 되고 公卿이 빈천한 가운데서 일어나 公相에 이르렀어도 종법이 서지 않고 죽으면 따라서 그 족속이 흩어지고 그 家가 전하여지지 않는다.
종법이 세워지면 사람마다 근본을 알게되고 조정에 도움이 된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조정에 무슨 도움이 있느냐기에 답하기를 公卿이 각각 그 家를 보전하니 어찌 충의가 서지 않음이 있으며, 충의가 서면 조정의 근본이 어찌 든든하지 않겠는가.
지금 부귀를 얻고 모은 것이 30-40년에 그 얻은 것이 造宅一區에 그치고, 죽으면 衆子가 분열하여 탕진하면 家도 따라서 없어지니 집도 보전하지 못하는데 어찌 나라를 보전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여 종법이 서야 家가 보전되고 또 국가도 보전될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程子는 말하기를 "骨肉간에 분쟁이 생기는 것은 실은 재물을 다투기 때문이다. 고루 나누어 주게 하고 종법을 세워 관에서 법으로 하면 다툼이 없게 된다." 라고 하여 종법이 서야 형제간에 분쟁이 없어지고 국가의 질서유지에도 도움이 된다고 하였다.
종법은 가정에서는 家統을 바로 세우고 국가에서는 國統을 바로 세우기 위한 것으로 沙溪는 제가의 설을 널리 연구하여 이 統을 바로 하는 것이 당시의 국가적 혼란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당시는 仁祖가 宣祖의 다섯째 아들인 定遠君의 아들로서 宣祖의 旁支로서 入繼大統을 하고서 私親인 定遠君에 親祭를 하면서 사용할 祝文 稱號와 仁祖의 어머니인 啓運宮喪의 服制問題와 定遠君을 追崇하여 入廟하는 것이 중요하게 논의가 되었다.
사계는 고금의 예가 한번 잘못이 있으면 돌이킬 수 없으므로 고금의 禮書를 참조하여 자신의 견해를 조정의 친구에게 편지로 보내었는대 이것을 모아 편찬한 것이 典禮問答이다. 여기에서 사계는 당시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로서 統을 바로잡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의 統에 대한 견해는 다음과 같다.
帝王의 家는 統을 잇는 것을 중하게 여긴다.
예에 사람의 후계자가 되면 아들의 도리가 있고, 人君에 이르면 비록 兄이 弟를 잇고 叔父가 姪을 이었어도 모두 父子의 도리가 있다.
昭穆이 바뀌면 인륜의 차례가 문란하여진다.
私親을 위로 祖考를 이어서 統을 이으려고 하는 것은 예의 본의를 잃은 것이다.
帝王이 統을 잇는 것은 사대부의 家와 다르다. 旁支로 入繼를 하면 뒤를 이은 君에 부자의 도리가 있게 되는 것이다.
父子가 서로 잇는 것은 禮에 항상 있는 바이다. 형제에게 전하는 것은 부득이한 것이니 이미 나라를 받으면 전하여 받은 자가 아들이 아니더라도 아들의 도리가 있는 것이다.
이상으로 沙溪의 統에 대한 견해를 요약하면 제왕의 家나 사대부의 家를 막론하고 부자가 서로 統을 이어서 조상을 높이고 家와 國을 보존하는 것이 常禮이지만 부득이하여 형제가 서로 잇거나 叔父가 姪을 이어야 하는 變禮의 경우에도 그 뒤를 이으면 부자의 도리가 있다는 것이다.
부자의 도리가 있다는 것은 統을 잇는 것으로 근본을 전일하게 하여 인륜을 바로 하려는 사계의 正統觀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정통관은 다음에서 논할 服制 稱號 追崇 등의 문제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며 이후 宋時烈 등에 이어져서 많은 영향을 주게된다.
9.正統의 典禮上의 具現.
사계는 近思錄釋疑에서 典禮는 常禮나 常法과 같으며 堯舜의 揖遜과 湯武의 征伐이 모두 典禮라고 한다. 즉 典禮는 人倫常事에 있어서 떳떳함을 드러내어 행하는 것이니 맹자의 五倫에서의 덕목인 五常(親義別序信)을 구제적 현실에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와 같이 전례는 人倫常事의 떳떳함을 생전 사후를 막론하고 행하는 것이라고 하겠으며 특히 喪을 당하였을 때에는 統의 승계문제와 더불어 親疏에 다른 服制 등의 문제가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되어왔다. 이러한 복상문제는 일반가정에서 말하면 부자의 관계는 親으로 맺어져있고 또 통을 계승하게 되므로 그 服이 重하고, 또 親疏에 따라 일가 친족의 服을 다르게 하며 인륜의 차서를 잡는 것이다.
이로써 친애의 감정을 다 표현하고 宗統을 확립하며 일가친족의 화합을 도모하는 것이다. 또 국가로부터 말을 하면 만인의 법이 되는 國統을 확립하여 국가의 계속성을 유지하며 국가와 사회의 질서유지와 안정을 이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 稱號問題
典禮의 문제가 최초로 제기되어진 것은 仁祖 원년 5월에 仁祖가 私親에 親祭할 때 사용할 祝文의 稱號에서 발단이 되었다. 仁祖의 私親인 定遠君은 宣祖의 5자로 光海君 11년에 죽었고 인조는 旁支로서 宣祖에 入繼大統을 하였다.
仁祖가 장차 私廟에 親祭함에 조정의 신하들이 祝辭를 의론하니 禮判 李廷龜와 副堤學 鄭經世 등 여러 대신이 주장하기를 "上이 親孫으로 宣祖의 統을 이어서 旁支로 入後한 것과는 같지 않고 이미 宣祖를 考라 하지 않았으니 私親에 대하여 考를 둘로 하는 혐이 없으므로 마땅히 考로 하고 子로 자칭할 것이다." 라고 함에 沙溪는 불가하다고 상소를 하여 말하기를
禮에 남의 뒤를 이으면 子가 된다. 人君에 이르면 비록 兄이 弟를 잇고 叔父가 姪을 이었어도 모두 부자의 도리가 있는 것이다. 春秋에 이르기를 '燦僖公'이라 함은 夫子의 微意를 볼 수 있고 春秋四傳의 뜻도 모두 僖公이 閔公을 아버지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뒤를 이으면 부자의 관계가 있다고 본 것이다.
漢宣帝가 그 所生父를 '皇考'라 존칭하였는데 氾氏가 '宣帝가 昭帝의 손자의 항렬이 되니 그 所生父를 皇考라 함이 가하다' 하였으나 사람들이 '옳지 않다' 고 한 것은 小宗으로 大宗의 統에 합함이요 정자도 또한 '亂倫失禮가 심하다' 하였다.
宣帝가 손자의 항렬로 왕통을 이어받고 昭帝의 뒤를 이었으니 私親을 위로 祖에 잇게 하는 것은 불가한 것이 분명하다. 지금 聖上께서 宣祖의 統을 계승하고 또 私親을 祖廟에 잇게 하면 小宗으로 大宗에 합하려 하는 것이니 亂倫失禮가 되는 것이다.
沙溪는 魯僖公의 예를 들어 남의 뒤를 이으면 子가 되고 人君에 이르면 兄이 弟를 잇고 叔父가 姪을 이었어도 父子의 도리가 있게 된다 하여 仁祖가 宣祖의 친손자이나 小宗으로 왕통을 이었으니 宣祖에 부자의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또 漢宣帝의 예를 들어 私親인 定遠君을 祖廟에 잇게 하는 것은 小宗으로 大宗에 합하려는 것이니 인륜을 해치고 예를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사친을 考라 칭하면 三年喪을 지내야 하는데 왕통을 계승하고 私親에 三年喪을 지내는 이치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사계의 이러한 주장은 여러 곳에서 볼 수가 있다.
만약 宣廟가 살아있을 때 主上(仁祖)을 택하여 元孫으로 하였다면 宣廟의 뒤가 되겠는가? 定遠君의 뒤가 되겠는가? 이로 미루어 보면 定遠君에 稱考 稱子하고 삼년상을 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帝王의 叔과 祖로 姪과 孫을 계승한 임금이 많은데 만약 公의 뜻과 같다면 계승한 임금을 마땅히 皇從孫 皇從姪이라 하고 自稱은 마땅히 孝祖父 孝叔父라 하여야 할 것이다. 내 생각에는 自稱은 皇某라 하고 先君에 대하여는 따로 칭호가 있어야 할 것이나 先儒의 정론이 없어 감히 창설하지 못하겠다.
이미 大統을 잇고 또 私親을 考라 하면 正統에 專一하지 못하고 根本이 둘이 되는 혐이 있으니 그 害禮亂倫이 심하다. 이상으로 사계의 견해를 살펴보면 私親에 대하여 祝號를 稱考 稱子라 하면 小宗으로 大宗에 합하는 것이 되어 正統에 專一하지 못하고 根本이 둘이 되는 혐이 있으니 害禮亂倫이 심하다는 것이다.
즉 沙溪는 統을 바로 함으로써 人倫의 차서가 바로 서고 인륜의 차서가 바로 섬으로서 국가의 모든 질서가 바로 잡힐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2) 追崇入廟의 문제
追崇入廟의 논의는 仁祖 2년(1644) 영월군수 朴知誡가 疏를 올려 私廟를 세우고 삼년상을 지내고 백관이 따라서 服을 입기를 청하며, 또 李義吉이 소를 올려 追崇하기를 청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사계는 經史와 先儒의 설을 참조하여 私親을 追崇하여 入廟함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沙溪는 朴知誡가 宣廟는 大宗이고 定遠君은 小宗이라고 한 것은 先儒의 大宗 小宗의 禮를 고찰하지 않고 억지로 자기의 견해를 아무런 근거없이 주장한 것이며 近思錄의 天子建國 諸侯奪宗의 설을 끌어다가 定遠君을 入廟하는 증거로 삼은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다.
大宗 小宗이라 하는 것은 諸侯의 別子가 스스로 大宗이 되고 그 支派가 小宗이 되는 것이니 人君을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諸侯가 宗을 뺏는다는 것은 漢의 肅何나 曹參과 같이 衆子라도 제후가 되면 長子의 宗을 뺏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 通典의 奪宗議를 보면 漢의 梅福이 말한 것을 인용하여 제후가 宗을 뺏는다는 것은 父가 士庶인데 子가 諸侯로 봉하여지면 宗嫡을 빼앗아 祭祀를 주제한다는 것이다. 제후에도 오히려 奪議가 있는데 황차 천자이겠는가? 소위 聖庶라 하는 것은 武王이 庶子로서 聖德이 있어 伯邑의 考의 宗嫡을 빼앗은 것을 말하는 것이고 또한 人君이 私親을 入廟하는 뜻은 아니다.
라고 하여 奪宗이란 漢의 肅何나 曹參과 같이 처음 제후가 되었으니 비록 支子라 하더라도 마땅히 宗을 빼앗아 자신에게 옮기고 所封한 나라에 入廟하는 것이므로 奪宗이라 함은 父가 士庶인데 子가 제후가 되었을 때 宗嫡을 빼앗아 제사를 주제함을 이름이니 人君이 私親을 위하여 入廟하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仁祖는 旁支로서 入繼大統을 하여 宣祖의 統을 이어 人君이 되었으니 私親인 定遠君을 入廟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祖가 孫을 잇고 叔父가 姪을 잇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昭穆이 도치되어 인륜의 차서가 문란함이 있으나 帝王의 家는 士大夫와 다르니 常道로 논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하여 말하기를
남의 뒤를 잇는 것과 入繼함은 그 일이 비록 다르더라도 私親을 돌보지 않음은 마친가지이다. 사대부도 그러한데 人君이겠는가? 父子의 倫이 비록 중하다 하나 入繼의 義가 지엄하니 범할 수 없다. 고 하였다. 沙溪는 入繼하여 大統을 이으면 入繼의 義가 중하니 私親을 追崇하여 入廟함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의 근거는 고래로 유교사회는 종법제도를 기반으로 한 禮가 사회 질서유지의 근간이 되었으니 沙溪가 統을 바로하는데 힘쓴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3) 服制問題
服制의 문제는 仁祖 4년 봄에 仁祖의 所生母인 啓運宮의 喪을 당함에 私親服制를 혹은 '삼년이 옳다' 하고 혹은 '齊衰杖朞'가 옳다 하고 혹은 '不杖朞가 옳다' 하여 논의가 분분하였으나 마침내 杖朞로 결정이 되자 沙溪는 옳지 않다 하고 말하기를
儀禮賈疏에 말하기를 天子諸侯의 庶子로 天子諸侯가 된 자는 그 母를 위하여 栙服을 입는다. 이 설은 또 家禮에 父를 이은 庶子는 그 母를 위하여 栙服을 입는다는 조에도 보인다. 대저 天子諸侯가 그 所生母를 위하여 降服을 하는 것은 宗廟社稷의 主가 되어서 삼년상을 지낸다면 宗廟에 제사를 드릴 수 없으니. 祖宗이 大院夫人을 보면 어찌 茫然하지 않겠는가?
情이 비록 至重하나 삼 년 동안 祖宗의 제사를 폐하는 것은 미안하지 않는가? 라고 하여 천자제후의 서자나 사대부의 서자가 천자제후나 부의 뒤를 잇고서 친부모에게 삼년상을 행한다면 삼 년 동안 제사를 드릴 수가 없으니 祖宗과 先祖에게 미안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계는 말하기를 (啓運宮의 喪에)삼년상을 하면 節節이 방해가 되니 절충하여 杖朞의 服으로 하였으나 예전에 祖를 이은 자가 있었으나 杖朞의 服을 행하였다는 예는 들은 적이 없다. 制禮作樂은 庶人이 天子의 자리에 있은 후에나 가능한 것이다. 라고 하여 禮經에도 없는 杖朞의 服으로 私親服制를 행하려 함은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沙溪는 "남의 뒤를 이은 자는 함부로 私親에게 사사로운 情을 펼수 없다"고 한다. 그리하여 말하기를 朱子는 入繼大統者는 그 所生父母를 위하여 不杖朞한다고 했고 이 설은 또 儀禮에서도 볼 수 있다.
또 家禮에 남의 뒤를 이은 자는 所生父母를 위하여 不杖朞로 갚는다....朱子가 참작을 하여 정하였으니 不杖朞로 하는 것이 마땅히 후세의 법이 된다. 고 하여 不杖朞로 할 것을 주장하였다. 즉 沙溪의 주장은 統을 중시하며 入繼의 義를 강조하고 私親에게는 마땅히 降服하여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10.맺음말.
한국유학사에 있어서 예학은 조선시대 중기 이후의 사상적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며 사계는 퇴계 율곡의 성리학 전성시대에서 예학시대로 넘어가는 교량적 역할을 하였다. 사계가 주장하는 바는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이 될 수 있다.
첫째 예를 실현하는 주체로서의 개인의 수신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점은 그가 글을 가르치며 제시한 학문의 순서에서 볼 수 있다. 小學과 家禮에서 시작하여 心經과 近思錄을 다음에 가르치고 四書와 五經을 배우게 한 것은 소학과 가례를 통하여 일상생활에서 바르고 떳떳한 삶을 살도록 한 것이고, 심경과 근사록을 통하여는 예실현의 주체로서 인간의 내면적 심성의 개발과 天理의 공공한 법칙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 그는 일상생활에서 항상 삼가고 조심하여서 언제나 심성의 온전함을 지키고 기르며 그 마음이 발함에 있어서는 모두 예에 맞게 행하여서 조금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을 하려고 하였다.
둘째 家禮를 기본으로 한 종법사회를 이룩하려고 하였다. 유가의 예는 周公이 制禮作樂한 것을 기본으로 하여 이를 仁義의 정신으로 계승 발전시킨 것은 孔子이다. 孟子는 인성이 타락함을 보고 예 실현의 주체로서 인간의 본성이 善함을 주장하였으며 이는 송대 성리학 형성의 중요한 이론이 되었다.
송대 성리학은 자연의 법칙인 天理와 人性의 합일점을 찾아내어 자연의 일부인 현실의 세계에 천리와 인성이 조화를 이루는 인간적 질서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것이 朱子家禮의 제작원리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유가 예제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사계는 고금의 예서를 참고하고 당시의 풍속과 인정에 맞추어서 가례를 고치고 보급하는 데 힘썼던 것이다.
세째 국가 기강의 확립과 사회질서의 확립을 위하여 統의 확립을 주장하였다. 즉 조선사회는 예를 근간으로 한 종법사회이었으며 이 사회의 질서를 위하여는 종묘사직의 統과 일반가정의 統을 높이는 일이 매우 중요하였다.
그리하여 사계는 인조의 친아버지인 定遠君에 대한 稱號問題나 追崇入廟의 논의가 일어났을 때, 또 인조의 친어머니인 啓運宮의 喪을 당하여 服制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을 때 모두 統을 바로 함으로써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사계의 이러한 예학관은 이후의 조선사상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宋時烈에게 계승되어 정명주의적인 예치주의와 조선말 의리정신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전통예제의 근간을 이루며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즉 정통을 수호하려는 정신은 국가의 자주 자립적 주체의식을 배양하였으며 중기 이후의 예속의 순화와 백성 교화에 중요한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예론의 사상적 기반이 주자학이고 주자학이 정통적 학문으로 인정되었던 조선에서는 다소 사상적 경화현상을 볼 수는 있었지만 이것은 중국과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유학의 한국적 수용이라고 할 것이다.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유와 평등이 강조되는 것은 강제와 불평등의 폐단을 고치는 데 필수불가결한 것이지만 금권주의라든가 인간소외라는 또 다른 폐단을 자아내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예의 가치는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善에 있는 것이요,
우열에 있는 것이 아니라 中에 있는 것이요, 집착에 잇는 것이 아니라 權에 있다고 할 때 사계의 예설에 있어서 家統이나 國統에 관한 이해는 국가 사회윤리의 새로운 의미부여 뿐만 아니라 힘 위주의 오늘날 국제사회에도 새로운 가치를 시사해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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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http://dragon.skku.ac.kr/~sulhang1/miner/inmul.htm#예절교실>
<자료 : http://dragon.skku.ac.kr/~sulhang1/majer/ma5/ko12.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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