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정경운(鄭慶雲) /함양 수동출신

야촌(1) 2017. 3. 8. 13:13

■ 정경운(鄭慶雲)

 

정경운(鄭慶雲, 1556∼?)의 자는 덕옹(德 )이고, 호는 고대(孤臺)이며, 본관은 진양(晋陽)이다.

그는 함양읍 백연리(栢淵里) 돌뿍[席卜]에서 살았으며 주변에 위치한 위천수(渭川水)의 뇌계(뇌溪) 냇가에 고송반석(古松盤石)으로 경승(景勝)을 이룬 소고대(小孤臺)가 있었으므로 자신의 호를 '고대'라고 하였다.

 

집안은 고려 때 첨정(僉正)을 지낸 송헌(松軒) 정중공(鄭仲恭)을 1세로 하였고, 12세손인 정희보(鄭希輔, 1488∼1547) 때에 이르러 함양군 동면 모간리(毛看里, 현 咸陽 水東面 牛鳴里 院坪里 일대주변)로 이주하여 세거(世居)한 후 그 후손들이 일부 함양 각지로 분포하여 살아왔는데 그 세계(世系)는 다음과 같다.

 

 

↑정경운(鄭慶雲)선생의 세계도

 

정경운은 필사본 『고대일록(孤臺日錄)』 4권4책을 썼다.

이 자료의 내용은 임진왜란 때 남명학파의 의병활동상황과 선조 후기부터 광해군 초에 이르는 국내 정치사회적 상황에 관한 것이다.

 

즉, 권1은 1592년(선조 25년, 임진) 4월부터 1593년(선조 26년, 계사) 12월까지 2년간, 권2는 1594년(선조 27년, 갑오) 1월부터 1597년(선조 30년, 정유) 12월까지 4년간, 권3은 1598년(선조 31년, 무술) 1월부터 1602년(선조 35년, 임인) 12월까지 5년간, 권4는 1603년(선조 36년, 계묘) 1월부터 1609년(광해 1년, 기유) 11월까지 7년간으로 모두 18년(1592년∼1609년) 동안의 여러 사실과 사건들을 기록한 것이다.

 

그는 1556년(명종 11년) 2월 29일에 경상도 함양에서 아버지 율(栗)과 어머니 고령 유(兪)씨 사이에 태어났다.

2세 때(1557년, 명종 12년, 정사)에 부친이 사망하고, 이후 외조부의 슬하에서 자랐으며, 9세 때(1564년, 명종 19년, 갑자) 외조부가 세상을 떠나자 모친과 외조모의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13세 때(1568년, 선조 1년, 무진) 모친이 별세함으로써 부모를 모두 잃고 외조모 밑에서 의식(衣食)을 해결하고 형 경손(鄭慶孫, 字 德裕, 號 渭川)에게 수학하였다(『感樹齋集』, 「天嶺孝烈錄」 및 「晋陽鄭氏世譜」). 15세 때(1570년, 선조 3년, 경오) 외조모가 세상을 떠나자 이후 형 경손(慶孫)의 집에 의탁하여 형과 형수를 부모처럼 섬기며 살았고, 19세 때(1574년, 선조 7년, 경술) 형이 세상을 떠나자 형수를 어머니처럼, 조카들을 친자녀처럼 여기며 살았다.

 

24세 때(1579년, 선조 12년, 기묘) 함양의 탁영서실(濯纓書室)에서 박여량(朴汝樑, 1554∼1611, 字 公幹, 號 感樹齋), 박선(朴선, ?∼1597, 字 景實, 號 景齋)과 함께 『주자대전』을 읽었고(『感樹齋集』, 卷7, 附錄, 「年譜」 26歲條), 25세 때(1580년, 선조 13년, 경진) 선산(善山) 김씨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26세 때(1581년, 선조 14년, 신사) 정인홍(鄭仁弘, 1536∼1623, 字 德遠, 號 來庵)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그를 위해 「부음정헌수운(孚飮亭獻壽韻)」외 11수(首)의 시를 지었다(『來庵集』, 卷15, 附錄).

 

33세 때(1588년, 선조 21년, 무자) 박여량, 박선, 노사상(盧士尙, 1559∼1598, 字 志夫, 號 道溪), 吳長(1565∼1617, 字 翼承, 號 思湖), 姜 (1568∼?, 字 克修, 號 濩蔭) 등과 도의(道義)로 교유하였으며, 서로 권면하면서 학문에 힘썼다.

(『感樹齋集』, 卷7, 附錄, 「年譜」 35歲條).

 

37세 때(1592년, 선조 25년, 임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양출신 노사예(盧士豫, 1538∼1594, 字 立夫, 號 弘窩), 노사상(盧士尙, 1559∼1598, 字 志夫, 號 汚溪) 등과 함께 함양에서 창의(倡義)하여 구국의병활동에 참여하였고, 초유사 김성일(金誠一, 1538∼1593), 김면(金沔, 1541∼1593, 字 志海, 號 松菴) 등의 소모유사(召募有司)로 활약하였다.

 

39세 때(1594년, 선조 27년, 갑오) 남계서원( 溪書院)의 원임(院任)으로 활동하였다.

「임진의적(壬辰義蹟)」에는 그에 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임진(壬辰)에 영남의 고을들이 연이어 왜적에 함락되고, 임금이 서쪽으로 파천(播遷)하게 되자 의병을 일으켜 군사를 모집하였다.

 

그 때 초유사 김성일이 공「정경운」을 소모유사(召募有司)로 삼았다.

이에 힘을 다하여 군사를 모집하고 병곡(兵穀)을 많이 얻었다. 김면(金沔)이 또 공을 소모종사관(召募從事官)으로 삼았다. 마침내 도(道) 마을 관내에 격문(檄文)을 전하니 모집에 응한 의병이 수백명이 되었다.

 

혹은 진주(晋州)를 성원(聲援)하기도 하고, 또는 지례(知禮→金陵郡 知禮面)를 정탐하여 우현(牛峴→경남 거창군 熊陽面 山圃里에서 경북 금릉군 大德面 台里로 넘어가는 고개, 現 牛頭嶺)에 군사를 매복시키기도 하였다.

 

장곡(長谷→금릉군 대덕면 館基里)에서 왜적을 추격하여 사면으로 습격하여 참살(斬殺)함이 매우 많았다.

(『湖南節義錄』, 卷4, 上, 「壬辰義蹟」, 他道附錄).」

 

42세 때(1597년, 선조 30년, 정유)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남계서원이 병화(兵火)로 소실될 무렵 서원의 유사로서 일두(一 ), 옥계(玉溪), 개암(介庵) 세 선생의 위패를 성황산 결처(潔處)에 매안(埋安)해 두었다가 왜적이 물러간 후 그곳에 가사(假祠)를 세워 선생의 위패를 안치하였고, 뒤에 남계서원의 탄 나머지 재료를 수습하여 나촌(羅村→咸陽郡 牛鳴里 九羅部落)에 자리를 고쳐 정하고 두 사우(祠宇)를 세워 다시 서원의 전규(前規)를 회복하였다.

(『感樹齋集』, 卷5, 雜著, 「天嶺孝烈錄」 鄭慶雲 條).

 

46세 때(1601년, 선조 34년, 신축) 정인홍(鄭仁弘), 노예산(盧禮山), 강응황(姜應璜, 1571∼1644, 字 渭瑞, 號 白川), 최덕구(崔德久), 문경호(文景虎, 1556∼1619, 字 君變, 號 陽), 하혼(河渾, 1548∼1620, 字 性源, 號 暮軒), 성변규(成辨奎, 1556∼?, 字 賓如, 號 齋) 등과 해인사(海印寺)에서 만났으며, 5월 12일에는 해인사에서 『남명집』 임인본(壬寅本)의 간행작업을 하였다.

 

겨울 10월 3일에는 최영경(崔永慶, 1529∼1590, 字 孝元, 號 守愚堂)의 신원(伸寃)을 청하는 경상도 유생의 고령소(高靈疏)가 작성되었는데, 이산립(李山立)이 소두(疏頭)가 되고, 문경호(文景虎)가 만들고, 성여신(成汝信)이 글을 썼다.

 

51세 때(1606년, 선조 39년, 병오) 11월 12일에 강응황(姜應璜)과 더불어 산음(山陰)의 도사헌(道士軒)으로 가서 정구(鄭逑)를 배알하였다. 11월 18일에는 정구(鄭逑)가 덕산으로부터 안의(安義)의 용추폭포(龍湫瀑布)로 와서 노닐다가 서원에 도착하였고, 오후에 정여창의 묘에 제(祭)하였다.

 

62세 때(1617년, 광해 9년, 정사) 남계서원의 원장을 역임하였다(『 陽集』, 卷4, 雜著, 「通諭咸陽士林」(丁巳)條). 내암 정인홍의 문하에서 그와 함께 수업한 동문은 권양(權瀁, 字 景止, 號 花陰), 노주(盧胄, 1557∼1617, 字 景承, 號 風皐), 정홍서(鄭弘緖, 1571∼1648, 字 克承, 號 松灘), 정온(鄭蘊, 1569∼1641, 字 輝遠, 號 桐溪), 박이장(朴而章, 1547∼1620, 字 叔彬, 號 龍潭), 정순(鄭淳, 1556∼1597, 字 士古, 號 孤臺), 문경호, 박여량, 강인, 강응황, 노사상, 박선, 하혼 등이 있다.

 

그에 관해 사우의 문집에 남아 있는 글은 朴汝樑 -『感樹齋集』, 卷1, 詩, 「獨捿雲達菴 待鄭德 」; 仝書, 卷5, 雜著, 「天嶺孝烈錄」; 仝書, 卷8, 祭文, 敎官 鄭慶雲 撰, 「祭文」; 仝書, 卷8, 挽詞, 鄭慶雲 撰, 「挽詞」. 河 渾 -『暮軒先生文集』, 卷4, 師友詩章, 「次郭存齋韻贈暮軒」.등이 있다.

 

그는 효성과 우애가 극진하고 학문에 뛰어난 것이 세상에 드러나 행의(行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기도(『咸陽郡邑誌』, 人物, 儒行錄, 鄭慶雲條) 하였다.

 

그의 몰년(沒年)에 관해서는 『晋陽鄭氏世譜』(517∼518쪽)에 1610년 정월 15일에 5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이는 『고대일록』의 기록과는 다소간 차이가 나므로 정확한 몰년의 확인은 곤란하다(金侖禹, 「咸陽 義兵有司 鄭慶雲과 『孤臺日錄』」, 『南冥學硏究』2, 1992, 146∼147쪽)고 할 수 있으며, 내암의 「문인록」에 네 번째의 문인으로 등재되어 있다.

 

글>史 載 明(경상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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