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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이르게 한 정치보복을 통탄한다.

야촌(1) 2009. 5. 25. 20:15

[칼럼] 죽음 이르게 한 정치보복을 통탄한다.

2009년 05월 24일(일) 01:31:43 김환태 칼럼니스트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국민 대충격

 

2009년 5월 23일 아침 서거한 노무현(盧武鉉.63) 전 대통령은 빈농에서 태어나 형설지공끝에 대통령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간승리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치사에 큰 획을 그으며 일세를 풍미한 정치풍운아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故) 노 전 대통령은 1946년 8월6일 경남 김해에서 아버지 노판석씨(盧判石)씨와 어머니 이순례씨(李順禮) 사이에서 3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노 전 대통령의 형제자매로는 큰형 영현씨(英鉉)와 박연차게이트로 구속된 둘째형 건평씨(建平·구속), 그리고 누나 명자(明子)씨, 여동생 영옥씨(英玉)가 있다. 그의 두 형은 1967·1968년 각각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세무공무원이 되었을만큼 형제들이 머리가 좋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해 진영읍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산골에서 농사를 짓던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노 전 대통령은 진영 대창초등학교(1959년)와 진영중학교(1963년), 부산상업고등학교(1966년)를 졸업했다. 넉넉지 못한 서민 가정에서 어렵게 성장한 노 전 대통령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1968년 3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해 당시 강원도 원주에 있는 육군 1군사령부에서 부관부 행정병으로 복무·만기제대했다.

 

노 전 대통령은 군 제대 후 고향에서 부인 권양숙씨(權良淑)와 1973년 1월 결혼해 아들 건호씨(建昊)와 딸 정연씨(靜姸)를 낳았다.

 

그리고는 둘째형 건평씨의 도움을 받으며 독학으로 고졸 출신에게 사법고시 응시 자격을 주는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에 도전하여 합격했으며 이후 두 차례 시법시험에 낙방한 끝에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40여명의 합격자 가운데 유일한 고졸 출신으로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후 노 전 대통령은 1977년 대전지방법원에서 판사로 부임했지만 세무공무원이던 형 건평씨가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자 7개월만에 자진하여 판사직을 그만 두고 1978년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변호사로 활동하던 1981년 제5공화국 정권이 사회과학 서적을 읽은 혐의로 대학생 20여명을 기소해 민주화 세력에 대한 용공조작 사건으로 알려진 부림사건(釜林事件)에 변론을 맡으면서 노 전 대통령은 본격적인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기에 이르렀다.

 

부림사건 변론이후 학생, 노동자등이 연루된 각종 인권사건에 뛰어들어 적극 변호에 나서면서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특히 1987년 대우조선 노동자가 시위 도중 사망한 사건에 개입하였다가 제3자개입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면서 민주인권 투사로 각인되었다.

 

이러한 변호사활동을 눈여겨 본 김영삼 전 대통령의 권유로 1988년 13대 총선 당시 부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초선의원 시절인 1989년 국회 5공청문회는 정치인 노무현의 존재를 전 국민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청문회장에서 국민 가슴에 와닿는 핵심을 찌르는 정연한 논리와 송곳같은 심문으로 뛰어난 활약을 한 끝에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이 3당합당을 강행하자 정치적 야합이라며 결별을 선언하고 부산에서 14대 총선(1992년), 부산광역시장 선거(1995년), 15대 총선(1996년)에 출마했지만 모두 낙선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당선 확률이 희박했지만 지역주의를 타파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연이어 출마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순수함과 신선함을 뜻하는'바보 노무현'으로 불리며 일약 정치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광재,안희정등 측근들과 지방자치연구소를 이끌며 원외에서 김원기 전 국회의장,유인태 전의원등 통추멤버들과 정치행보를 함께하며 권토중래를 꿈꾸던 노전 대통령은 1997년 대선당시 김대중 대선캠프에 합류하였고 김대중정권이 출범한후 종로 재보궐선거를 통해 원내에 복귀하였다가 2000년 총선에서 또다시 지역주의 청산을 내세워 지역구를 부산으로 옮겨 출마하였으나 낙선하고 말았다.

 

총선 실패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2000~2001년까지 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했다. 해양수산부장관 시절 진행되었던 대대적인 언론사 세무조사 당시 앞장서서 족벌언론을 강도높게 비판하는등 김대중정부의 세무조사 정당성을 옹호하는 결기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 대통령의 정치적 경력과 영호남 지역감정해소,선거구도상 영남후보 유리라는 판단에 따른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적극적 지원으로 마침내 강력한 대선주자였던 이인제후보를 꺾고 민주당 대선후보로 나서 호남을 비롯한 전통적 민주화 세력의 전폭적 지지와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와의 단일화 성사를 통해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 이회창후보 물리치고 당선됐다.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노 전 대통령의 정치 역정도 파란의 연속이었다. 도덕성에 바탕한 김대중 정권과의 차별화, 영남지역의 반호남, 반김대중정서를 의식한 호남지역주의 타파를 중심으로 진행한 전국정당화를 위해 정치적 보금자리인 민주당해체를 주장하고 김대중정권을 실패한 정권으로 공격하다 끝내 민주당을 분당, 열린우리당을 창당함으로써 범민주진영이 두동강나기도 하였다.

 

한발 더 나아가 대북송금특검으로 역사적 6.15남북 정상회담을 뇌물회담으로 규정, 단죄하고 현대비자금 사건 등 국민의정부와 호남인사들에 대한 지속적인 사정과 김영삼 안기부 도감청 사건을 국정원 도감청 사건으로 확대시켜 정몽헌 현대회장, 박태영 전 전남지사와 이수일 전 국정원 차장이 자살하고 박지원,권노갑,한광옥,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 등 거물 정치인들이 구속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야기된 범민주진영의 분열여파와 한나라당을 비롯, 조중동 등 보수언론을 위시한 보수세력의 정권타도 공세가 어우러지면서 노 전 대통령은 선거법 중립 의무 위반, 국정·경제 파탄, 측근 비리 등의 이유로 16대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됨으로써 2004년 3월12일부터 헌법재판소가 탄핵안을 기각한 5월14일까지 63일동안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또한 정권의 정체성을 도덕성에 두었음에도 재임기간 중에 안희정씨와 최도술씨 등 386세대로 불려진 측근들이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검찰에 구속 수감되었는가 하면 퇴임후에도 청와대에서 집사로 불렸던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 역시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받은 3억원과 노 전 대통령 특수활동비 12억5000만원을 빼돌린 혐의로 구속수감되는 사건이 터져 곤욕을 겪었다.

 

특히 2008년 12월 형 노건평씨가 세종캐피탈 대표 홍기옥씨(59·구속)로부터 농협중앙회가 세종증권을 인수하도록 정대근 당시 농협 회장에게 청탁해 달라는 명목으로 29억6300만원을 받아 구속수감되고 부인 권양숙 여사와 아들 건호씨 및 딸 정연씨 부부까지 참고인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침내 노무현 전 대통령 자신도 재임 중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640만 달러의 '포괄적 뇌물수수' 혐의를 받아 피의자 신분으로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어 역대 대통령으로는 세 번째로 검찰에 출석함으로써 '부패가족','정치적 파산'이라는 비판에 시달렸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은 이러한 상태에서 권여사와 자신의 검찰 재소환과 사법처리설이 끊이지 않자 마지막 결단을 자살로 정리한 듯 하다.

 

노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몬 이명박 정권과 정치검찰, 보수세력, 그리고 언론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진 서거는 한국 정치사는 물론 대한민국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전직 대통령이 검찰조사를 받은 건 노무현 대통령이 세번째이지만 광주학살과 지금의 화폐가치로 치면 무려 1조원대의 불법 정치자금을 기업들로부터 받아 쓴 권력형 비리로 실형을 산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도 생물학적 생명력이 다할때까지 악착같이 노후를 보내는 것과 비교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진서거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명박 정권의 나팔수 부대로 보수세상 만들기에 전력투구하고 있는 보수언론과 정치권력의 그늘아래 들어간 것 같은 검찰, 그리고 노무현 죽이기에 끝없이 몰두한 자칭 보수세력들은 악착같이 노무현 추문의 확대재생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노 전 대통령이 자살이라는 극단적 방법으로 생을 마감하자 그 이유로 "자신과 가족은 물론 측근들까지 사법처리되거나 수순을 밟는데 대한 심리적 압박감과 도덕성 추락에 따른 자괴감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자살을 택했을 것" 식으로 바람을 잡는 저열한 언론공작마저 춤추고 있어 분노의 슬픔을 억누를길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 하여금 자진서거를 택하도록 내몬 주역은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 보수언론과 보수 시민단체를 비롯한 범 보수진영 그리고 정치검찰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선후보시절 부동산투기, 세금탈루, 위장전입, 위장취업 등 수많은 의혹에다 대선전 납부한 당비 30억원까지 박연차게이트에 핵심으로 떠오른 천신일 세중나모회장의 대납의혹까지 있다. 또 이 대통령의 최측근이라는 천신일 회장은 박연차 세무조사 무마로비에 핵심으로 검찰의 조사를 받고 구속수감되기 일보 전이다.

 

우리나라 형법은 대법원 확정판결 전까지는 모든 피의자를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대우해야 한다. 이 때문에 엄연히 피의사실공표죄라는 죄목까지 두고 피의자가 피의사실이 공표됨으로 받을 불이익을 법으로 보호하고 있다. 그럼에도 검찰은 수사기간 중 수사내용을 수시로 언론에 흘리고 자필서명할 때 손을 떨었으며 명품시계를 선물로 받았다는 등 언론플레이로 노 전 대통령의 자존심까지 건드렸다.

 

또 이 같은 검찰의 언론플레이에 보수언론은 화답, 여론몰이 공작을 도움으로써 노 전 대통령의 자존감을 짓밟아 결국 죽음을 결단하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어 간접교사의 책임을 피할 수 없다.

 

특히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조중동문 등 보수언론과 보수시민단체들이다.

 

이들 보수세력들은 수천억원대의 권력형 부패비리를 저지른 전두환,노태우 정권과 천억원 안기부 비자금의 김영삼 정권에 대해서는 비판은 커녕 옹호,두둔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검찰, 청와대, 한나라당과 연계, 온갖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여론을 조작,오도하는 등 노무현과 김대중 정권 죽이기에 광분하였다. 여기에 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는 직접 글로 노 전 대통령의 자살을 압박하기도 했다.

 

하여 결론은 분명하다. 용산 살인진압에 이어 전직 국가원수인 노 전대통령까지 죽음으로 몰아간 반인간적,반화합적, 반민주적 무도한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 정권은 국정담당 세력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만큼 당장 정권을 내놓아야 한다. 인간의 도리는 커녕 권세에 눈이 어두워 삶을 지탱할 수 있는 마지막 자존감까지 짓밟은 세무,수사관련 책임자들도 하루빨리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한편 범민주 진영의 분열로 민주개혁세력의 동력을 떨어지게 했으나 이땅의 민주화와 서민대중, 그리고 민족화합을 위해 정치적 열정을 불사르며 치열하게 살아왔던 인간적 삶에 경의를 표함과 함께 죽음으로 모든걸 안고 떠나간 노무 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진심으로 애도하며 고이 영면하시길 빈다.

 

네이션코리아(http://www.nakore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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