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문성공 회헌(안향)선생 묘지명
(安文成公 晦軒(安珦)先生墓誌銘)
14대손 府使(부사) 安應昌(안응창)
공의 성(性)은 안(安)이요. 처음 휘는 유(有)인데 뒤에 향(珦)으로 고쳤다. 전후의 족보와 역사책에 모두 표덕(表德,자(字)를 가리킴)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우리 조선(朝鮮)조에 들어와 현종(顯宗)의 어휘(御諱)를 피하여 처음 이름으로 쓰고 있으며, 스스로 회헌(晦軒)이라 칭하였다. 선계는 경상도(慶尙道) 순흥부(順興府)(현재 경상북도 영풍군 순흥면))에서 나왔다.
증조(曾祖)는 자미(子美)인데 보승별장(保勝別將)으로 신호위 상호군(神號衛 上護軍)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조고(祖考)는 영유(永儒)인데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추증되었다.
선고(先考)는 부(孚)인데 밀직부사(密直副使)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치사(致仕)하였고 수태사문하시중(守太士門下侍中)에 추증되었으며 선비(先妣)는 강주 우씨(剛州禹氏)로 예빈승동정(禮賓丞同正) 우성윤(禹成允)의 따님이다.
원종(元宗) 초년(初年), 공은 18세의 나이로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였고 교서랑(敎書郞)에 보직(補職) 되었으며,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옮겼다. 삼별초(三別抄)의 난에 공이 적에게 포로가 되었는데 적들은 평소 공의 명망을 중히 여겨 그 부하들에게 명령하기를 ‘안한림을 놓아주는 자는 처벌하겠다’ 하였다.
공(公)이 계책으로 빠져 나오자 왕은 의롭게 여기고 가상히 여겼다. 사명을 받들고 서도로 부임하여서는 청렴하고 근신함으로 칭찬을 받고, 불려와 내시원으로 들어오자, 내시원(內侍院)의 오래된 폐단을 아뢰어 제거 하였으며. 얼마 후 감찰어사(監察御使)로 옮겼다.
충렬왕 원년(1274)에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나갔는데 이 때 여자 무당 세 사람이 요상한 귀신을 받들면서 사람들을 혹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웃고을 사람들도 모두 달려와 귀신을 받들었으며 여러 고을들의 수령들도 모두 이를 따랐다. 무당이 상주에 이르자 공은 곤장을 치고 형틀을 씌웠는데, 무당은 귀신을 빙자하여 화를 내리겠다고 겁주었다.
이에 고을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였으나 공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는데 그 무당은 요망함을 끝내 부리지 못하였다. 상주에 부임한지 3년 만에 안렴사(按簾使)가 공의 훌륭한 정사를 칭찬하여 판도좌랑(版圖佐郞)으로 불려갔다.
얼마 후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옮겼다가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승진하였으며, 우사의(右司議)로 있다가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임명(任命)되고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로 공신(功臣)의 칭호(稱號)에 참여되었다.
공신을 축하하는 잔치에 공이 시를 지어 축하하자, 왕은 가상히 여겨 백미 50석을 하사하였다. 뒤에 합포로 나아가 주둔하였는데 군사와 백성을 어루만지고 구휼하여 고을이 편안하였다. 여러 번 벼슬을 옮겨 판공조사첨의(判工曹事僉意)에 이르렀다.
충선왕이 즉위하자 참지기무(參知機務) 행동경유수(行東京留守)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 계림부윤(鷄林府尹)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참리(參里)가 되었다. 충렬왕이 복위한 다음 충선왕이 원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공(公)이 수행(隨行)하였다. 하루는 원(元)나라 황제가 급히 왕을 불렀다. 충선왕이 두려워하자 승상이 나와서 말하기를 ‘수행한 신하 중에 가장 높은 자가 들어와 대답하라’ 하였다.
공이 들어가자 승상은 황제의 명을 전달하기를 ‘네 왕은 어찌하여 공주(公主)를 가까이 하지 않는가?’ 하고 꾸짖었다. 공이 대답하기를“규중 안의 일은 밖에 있는 신하가 알 수 있는 바가 아니요, 또한 오늘에 물어야 할 일이 아닙니다” 하였다.
승상이 돌아가서 황제에게 그대로 아뢰자 황제는 “이 사람은 대체를 아는 자라 할 것이니, 어찌 먼 지방 사람이라 하여 가볍게 볼 수 있겠는가” 하고는 다시 묻지 않았다. 뒤에 찬성사(贊成士)에 임명(任命)되었으며, 얼마 후 도첨의 중찬(中贊)으로 승진되었다.
공은 학교가 날로 황폐해짐을 우려하여, ‘양부의 대신들과 의논하기를 재상(宰相)의 직분은 인재를 교육시키는 것이 가장먼저인데 지금 양현고(養賢庫)의 재원이 고갈되어 선비들을 기를 수가 없으니, 조정은 벼슬아치들로 하여금 각기 차등을 두어 은과 폐백을 내도록 한다음, 이것을 양현고에 소속시켜 학전을 풍족히 할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양부에서는 이를 쾌히 응하고 조정에 보고하자 왕도 또한 내탕고(內帑庫)의 돈을 내어 보조하였다. 밀직(密直)인 고세(高世)는 자신이 무인(武人)이라 하여 돈을 내지 않으려 하였다. 공은 마침내 탄식하여 이르기를 “부자(夫子:공자(孔子))의 도는 만세의 법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신하는 군주에게 충성하고, 아들은 부모에게 효도하니, 이것이 누구의 가르침인가. 만일 나는 무인이니 어찌 돈을 내어야지 유학의 생도들을 기를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공자를 무시하는 것이니 그래서야 되겠는가?”하였다. 고세는 몹시 부끄러워하여 돈을 내었다.
공은 또 남은 재정을 박사(博士)인 김문정(金文鼎)등에게 맡겨, 중국에 보내어 선성(先聖:공자(孔子))과 72제자들의 화상을 구입하고, 아울러 제기와 악기, 육경과 여러 자서와 사서들을 구입하여 오게 하였으며 또 밀직부사(密直副使)인 이산과 전법판서(典法判書)인 이진을 경사교수(經史敎授) 도감사(都監使)로 추천하였다.
이에 금내(禁內)의 학관(學館)과 내시부(內侍府)와 삼도감(三都監), 오고(五庫)에서 배우기를 원하는 선비들과 칠관(七館), 십이도(十二徒)의 여러 생도들이 앞에 경서(經書)를 끼고 수업하러 오는 자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여러 생도 중에 선배에게 예우하지 않는 자가 있자, 공이 노하여 벌을 주려 하였다.
그 생도가 자신의 죄를 사과하자, 공은 경계하기를‘나는 여러 생도들을 내 자손처럼 보고 있는데 ,여러 생도들은 어찌하여 이 늙은 사람의 뜻을 체념하지 않는가?’ 하고는 인하여 그를 데리고 집에 와서 술자리를 베풀었다.
이에 생도들은 서로 말하기를 ’공이 이처럼 선비들을 정성으로 대하시니 우리들이 만일 교화되고 복종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간이 아니다‘ 하고는 공의 가르침을 어기지 말자고 서로 말하였다. 이후로부터 유풍(儒風)이 크게 진작되었다.
삼사좌사(三司左使) 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로 재직해 있을 때 에 왕은 공에게 국사(國史)를 감수(監修)하도록 명하였다. 공은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하고 별세하니 바로 충렬왕 32년(1306)병오 9월 12일 갑신일로 향년은 64세였다.
왕이 친히 시호를 문성(文成)이라 내리니 도덕에 대한 문견이 넓은 것을 문(文)이라 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며 정사를 확립한 것을 성(成)이라 한다. 공을 장례할 때에 십이도의 여러 생도들이 소복을 입고 노제(路祭)를 지냈다. 충렬왕은 공의 화상을 그려 문묘의 가운데에 모시도록 명하였으며 충숙왕 6년(1319) 기미에 문묘의 동무(東廡)에 배향하였다.
공의 인품이 장엄하고 후중하며 편안하고 자상하여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고 두려워하였다. 상부에 있을 때는 계책을 잘 세우고일을 결단하니 동료들이 모두 사랑하고 사모하여 한마디 말이라도 다투는 말을 내지 못하였다.
왕씨의 세대에는 기자의 교화가 멀어져 학교가 무너지고 폐지되었으며, 온 세상이 무식하여 다만 불교만을 숭상할 줄 알고 다시는 우리 유도가 있음을 몰랐는데 공은 홀로 혼탁할 때에 도학을 제창하여, 항상 학교를 일으키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여겼다. 공은 유학이 쇠함을 개탄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곳곳마다 향 사르고 등달아 부처에 기도하네. 香燈處處皆祈佛(향등처처개기불)
집집마다 퉁소 불고 피리 불며 신에게 제사하네. 簫管家家盡祀神(소관가가진사신)
홀로 몇 칸 되는 부자(스승, 즉 공자)의 사당에는, 獨有數間夫子廟(독유수간부자묘)
봄풀만 뜰에 가득한데 찾아오는 이 없네. 滿庭春草寂無人(만정춘초적무인)
공(公)은 학문을 힘쓰고 도(道)를 구하며 오묘한 진리를 탐구하였다. 그리하여 은(殷)나라 태사(太師)인 기자(箕子)의 끊긴 도통을 이어 동방 성리학(性理學)의 조종(祖宗)이 되었다. 매양 후학들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효(孝), 제(悌), 충(忠), 신(信)을 우선하여 고명정대(高明正大)한 경지에 이끌어서 긴긴밤에 밝은 촛불이 되어 나쁜 풍속을 크게 변화 시켰다.
그리하여 당시 인재가 많이 배출되고 학교가 크게 부흥되었으니 이는 공을 힘입은 것이다. 공은 비록 정사를 그만 두고 집에 있었으나 학교를 일으키고 인재를 양성함에 있어서는 일찍이 마음속에 잊은 적이 없었다.
빈객(賓客)들을 좋아하고 남에게 물건 주기를 좋아하였으며 문장이 말고 꿋꿋하였으며 또 훌륭한 식견이 있었다. 김이와 백원항이 영달하지 못했을 때 공이 이들을 보고 말씀하기를 이 사람들은 후일에 반듯이 귀히 되고 드러나 것이다 하였으며 또 이제현과 이이는 동년생으로 당시는 모두 명망(名望)이 있었는데 공은 이들로 시를 짓게 하여 보고는 말씀하기를 이제현은 반듯이 귀히 되고 장수를 누릴 것이나 이이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하였는데 그 후 과연 모두 적중하였다.
말년에는 항상 회암 주선생(晦菴朱先生)의 화상을 걸어 놓아 사모하는 마음을 다하고는, 마침내 회헌(晦軒)이라 호(呼)하였다. 일찍이 선비가 타는 거문고 하나를 집에 두고는 가르칠만한 선비를 만나면 이것을 타도록 권하였다.
이로부터 공의 덕망이 더욱 높아지고 명성이 널리 전파 되었다. 그리하여 원(元)나라 황제(皇帝)는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원외랑(員外郞)을 제수하였으며, 얼마 후 낭중(郎中)을 가하고 해동(海東) 유학제거(儒學提擧)에 임명(任命)하여 표창(表彰)하였다.
공은 또다시 토지(土地)와 노비(奴婢)를 희사하여 태학(太學)의 경비를 보태어 생도들을 공급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생도들이 매우 많았는데 그때마다 제물을 준비하여 제사하고 있는바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고 있다.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공정대왕(恭定大王)은 공이 사문(斯文)에 공로(功勞)가 있음을 추념하여, 특별히 공의 자손들은 동반(東班)과 서반(西班)에 기록하여 등용(登用)하도록 명하고 비록 서손이라도 또한 군역에 소속시키지 말아서 훌륭한 할아버지의 덕망을 높이도록 명하였다.
그리고는 인하여 태학의 여종들도 또한 궁중(宮中)으로 뽑혀 들어오지 못하도록 명(命)하였으니, 이는 공이 학교를 부흥(復興)하려는 뜻을 잊지 않아서 다른 부역에 옮겨 사역시키지 않고자 해서였다.
성종 임자년(1492)에는 공의 묘소(墓所)를 개수하고 나무꾼과 목동들을 금지하도록 명하였으며 중종 때 신재 주세붕은 풍기군수(風箕郡守)로 부임한 다음 가정 계묘년(1543)에 공이 평소 강학(講學)하던 곳에 서원을 창건하고 봄과 가을로 제사를 올렸으니 실로 우리나라에서 서원이 처음 생긴 시초였다.
가정 기유년에(1549)에 퇴계 이황선생이 군(郡)의 일을 맡게 되자, 학칙을 다시 정하고 도백에게 글을 올려 조정에 아뢰게 하자, 명종(明宗)께서는 친필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사액(賜額)현판을 내리고 인하여 태학사(太學士)인 낙봉 신광한에게 기문(記文)을 짓도록 명하였으며, 또 토지와 노비 경적을 하사하시어 공을 숭배하는 뜻을 표하였으니 여러 성조에서 공을 표창하고 영화롭게 한 것이 훌륭하다.
신재 주세붕은 일찍이 말씀하기를 “문성(文成)의 올바른 학문이 삼한의 누추한 학문을 깨끗이 씻었다. 그리하여 240여년이 흘렀는데 천리가 밝아지고 문교(文敎)가 부흥 되었으며 고려 말기의 익제 이제현, 포은 정몽주등의 여러 선현들도 모두 선생의 여파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先生)같은 분은 참으로 동방 도학(道學)의 원조(元祖)라 이를 것이다 우리 도학이 없어지지 않음은 그 누구의 힘이겠는가?”하였으니 이 말씀은 참으로 옳은 말씀이다. 공의 묘소는 경기도(京畿道) 장단부 남쪽 송림의 폐지된 고을 동쪽 대덕산 북쪽 자좌(子坐)오향(午向)의 산에 있다.
위토(位土)가 묘소 아래에 많으며 관청(官廳)에서 세금을 면제하고 부역을 면제하여, 해마다 제향을 올려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공의 선부인은 한남김씨(漢南金氏)로 우사간(右司諫) 김록연의 따님이고, 후부인은 서원염씨(瑞原廉氏)로 예빈경 염수장의 따님이다.
김씨(氏)는 모두 1남 5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우기(于器)로 찬성사(贊成士)를 지내고 순평군(順平君)에 봉해졌으며, 호를 죽옥선생(竹屋先生)이라 한다. 장녀(長女)는 지개성부사(知開城府事) 문욱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판전객시사(判典客侍事) 허수와, 통문서(通文署) 녹사(錄事)박제, 직사관(直使館) 한수연, 찬성사(贊成士)를 지낸 정경공 김원진에게 출가하였다. 후배(後配) 염씨(廉氏)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순평군은 문하시랑 철원 최충약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인 목(牧)을 낳았는 바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지고, 시호가 문숙공(文叔公)이며 호가 겸제이다. 뒤에 이씨에게 장가들어 1남인 신(愼)을 낳았는 바, 노부판관(蓾簿判官)을 지냈다.
문숙공은 정승(政丞)인 광주(光州) 김태현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원숭(元崇)을 낳았는데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순성군에 봉해지고 시호가 문혜공(文惠公)이다.
문혜공은 평리(評理)인 원주(原州) 원선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인 원을 낳았는데 고려 때 형조전서를 역임하였으며 조선조가 개국한 다음 여러 차례 관직(官職)을 제수하였으나 부임(赴任)하지 않았는 바 시호를 경질공(景質公)이라 한다.
경질공 이후 여러 백년(百年) 동안 여러 자손(子孫)들은 대관(大官)이 대대로 이어져 경대부와 재상(宰相)의 지위에 올라 지금까지도 면면히 이어와 거의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며 특별히 외손이 번창하여 대대로 국모를 배출하고 성군을 탄생시켰다. 그리하여 금지 옥엽(玉葉)같은 후손들이 매우 많으니 이 어찌 공이 선을 많이 쌓은 음덕으로서 그 뿌리가 튼튼하고 근원이 깊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공의 신도(神道)에 옛날 표석(表石)이 있었는데 지금은 350년이 지나 이지러지고 망가져 읽기가 어려우니 우리 선조(先祖)의 체백(體魄)이 모셔진 곳이 그대로 매몰되어 후세에 전해지지 못할까 깊이 두려웠다. 그리하여 우리 부자는 힘의 약함을 헤아리지 않고 기묘년에 종인(宗人)들과 재물을 모으고 돌을 사서 큰 비석을 세우고 또한 묘소에도 지문(誌文)이 없을 수 없음으로 다시 묘지(墓誌)를 구워 만들어서 무덤 속에 넣어 유구히 전하도록 하며 후일의 재난을 방지하려 하는 바이다.
숭정9년(1636)겨울 14대손 부사 안응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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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文成公 晦軒(安珦)先生 墓誌銘
14代孫 府使 安應昌
公姓安氏初諱裕後改珦前後諱史俱失表德入我朝避顯廟御諱以初名稱自號晦軒系出慶尙道順興府 曾祖曰子美 保勝別將贈神虎衛上護軍 祖曰永儒 贈樞密院副使 考曰孚 密直副使版圖判書致仕 贈太師門下待中 妣剛州禹氏禮賓丞同正成允之女 元宗初公年十八登第補校書郞遷直翰林院三別妙之亂公陷賊賊素重公名令其徒曰縱安翰林者罰公以計得脫王義而嘉賞焉 奉事西道以廉謹被獎召還內侍院奏祛院中宿弊尋遷監察御使 忠烈王元年出爲尙州判官時有女巫三人奉妖神惑衆列邑守宰亦靡然從之巫至尙公杖而戒之巫托神怵以禍福州人皆懼公不爲動其妖遂不得肆在尙三年按康使褒其政遂徵爲版圖佐郞娥遷殿中待御史陞國子司業由右司議拜左副承旨于以副知密直司事入參功臣號賀宴公作詩以進(詩逸不傳) 王嘉賜白米五十石後出鎭合浦撫恤軍民州郡以寧累遷判工曹事僉議參理忠宣卽位拜參知機務行東京留後集賢殿太學士鷄林府尹復爲參理及忠烈復位忠宣如元公從行一日元主召王急王懼丞相出曰從臣爲首者宜入對公入丞相傳旨曰汝王何不近公主曰閨闥之事固非外臣所能知而亦非今日所宜問丞相還奏主曰此人可謂知大體者庸可以遠人視耶遂不復問後拜贊成事尋加都僉議中贊公憂學校日廢議于兩府曰宰相之職莫先於敎育人才今養賢庫殫竭無以養士請令朝官各出銀幣有差歸諸庫以贍學錢兩府從之聞于朝王亦出帑藏而助之密直高世自以武人不肯出錢公曰夫子之道垂憲萬世臣忠於君子孝於父是誰敎耶若曰我武人何苦出錢以養爾生徒則是無孔子也其可乎世聞之慚甚出錢公又以餘資付博士金文鼎等送中國畵先聖及七十二子像拜購祭器樂器六經諸子史來且薦密直副使李㦃典法判書李瑨爲經史敎授都監使於是禁內學官內待三都監五庫願學之士及七管十二徒諸生橫經授業者動以數百計有諸生不禮先進者公怒將罰生謝罪公戒曰吾視諸生猶吾子孫諸生何不體老夫意仍引至家置酒諸生相謂曰公之待士以誠如此若不化服我則非人相戒莫敢違自是儒風大振其在三司左使修文般太學士時王命公監修國史以都僉議中贊致仕卒卽忠烈王三十二年丙午九月十二日甲申也 享年六十四 贈諡文成道德博聞曰文安民立政曰成及葬七管十二徒諸生素服祭於路忠肅王五年戊午命圖形文廟又六年已未從祀文廟東廡公爲人莊重安詳人皆畏敬在相府能謀善斷同列皆愛慕不敢出一言以爭王氏之世父師化逖學校頹廢擧世貿貿徒知竺敎之爲尙不復知有吾道公獨孤倡獨時常以興學育才爲已任慨然有詩曰香燈處處皆祈佛簫管家家盡祝神獨有數間夫子廟滿庭春草寂無人力學求道探賾蘊奧直繼殿師已絶之統蔚爲東方理學之祖每訓誨後學必先以孝悌忠信引之於高明正大之域擖燭長夜丕變陃俗當時人才之盛學校之興繁公是賴雖謝事家居其於興學養賢未嘗忘于懷喜賓客好施與文章淸勁且有識鑑金怡白元恒未達時公見之曰他日必皆貴顯李齋賢李異同年生俱有名公令賦詩見之曰齋賢必貴且壽異則不年果皆驗晩年常掛晦庵先生眞以致景慕遂號晦軒嘗蓄儒琴一張每遇士之可敎者歡之又以土田臧獲補學舍供給其徒甚蕃歲於公諱日輒備物報祀入我 朝恭定大王追念公之有功斯文特敎公子孫東西班錄用雖庶出亦勿屬軍役仍命學宮婢女功選入宮中蓋母忘公崇學之意也成廟朝壬子命修公墓禁樵牧中廟朝周愼齋世鵬知豊基郡卽公平日講學之地創建書院春秋享祀實東國書院之始也嘉靖己酉退溪李先生繼知郡事增定學式上書方伯以聞于朝明廟親筆賜額紹修仍命太學士申光漢撰記文又賜土田臧獲經籍以示敦崇列聖藵寵吁亦盛矣愼齋嘗謂文成所向之正一洗三韓之陃邇來二百四十餘年天理明而文敎興若李益齋鄭圃隱諸先生皆公之餘波所漸如公者眞可謂東方道學之祖斯道之不亡其誰之力耶者信不誣矣公墓在於湍府北松林廢縣東大德山子坐之原祭田多在墓下自官給復歲致享祀至今不絶 公之先夫人漢南金氏右司諫祿延之女 後夫人瑞原廉氏禮寶卿守藏之女也 金氏凡生一子五女 子曰 于器 贊成事順平君竹屋先生 女適知開城府使 文頊 次適判典客寺事 許綏 次適通文暑錄事 朴璾 次適直史館 韓守延 次適贊成事貞敬公 金元眞 廉氏無嗣 順平娶門下待郞鐵原崔冲若女 生一子 牧 政堂文學 順興君 諡 文淑公 號 謙齋 後娶李氏生一子 愼 鹵簿判官 文淑娶政丞光州金台鉉女生子 元崇 政堂文學順城君 諡文惠公 文惠娶評理原州元善之女生 瑗 刑曹典書 我朝屬授官不起 諡景質公 景質以後累百年子姓諸孫冠冕赫世布列卿相至今綿綿殆不可勝記而益隆外裔代出國母誕生聖人金枝玉葉不啻若螽斯之 先則茲豈非我公積善之慶能深其根固其本而然耶公之神道舊有表刻經今三百五十餘年殘缺難讀深恐使我先祖冠履之藏?致泯沒而無傳吾父子不揆力綿歲己卯與宗人鳩財買石堅豊碑新表刻而?維墓固不可無誌更圖瘞中燔誌納壙俾傳悠久且防災患淡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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