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最高 시선집 '국조시산' 원본 찾았다.
《최초의 국문소설 ‘홍길동전’을 남긴 허균이 편찬한 조선 시대 최고(最高)의 시선집으로 꼽히는 ‘국조시산(國朝詩刪)’ 원본이 처음 발견됐다. 이 원본은 허균이 조선 전기의 한시를 골라 당대 최고의 궁중 사자관(寫字官)들에게 필사를 맡겼으며 본인이 직접 시에 대한 비(批)와 평(評)을 붙인 것이다.
따라서 허균의 소장인(印)과 수정한 흔적, 필사자인 사자관들의 이름이 남아 있다. 허균이 소장했던 실물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사자관이 필사본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특히 이번 발견으로 지금껏 학계에서 ‘국조시산’의 정본(正本)으로 생각돼 온 ‘목판본’에 비평(批評)과 작자명 등이 잘못 실려 있으며, 시의 편집 체제 역시 원본과 크게 다르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국조시산’ 연구를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다. 목판본은 허균이 죽은 지 80여 년 뒤인 1697년 조선의 문신 박태순이 간행한 것을 가리킨다.
고문헌연구가인 박철상 씨는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해제(解題) 사업 자문위원으로 도서관 수장고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허균이 소장했음을 증명하는 인장과 직접 수정한 흔적이 남아 있는 9권 3책의 ‘국조시산’ 수정고본(手定稿本)을 발견했다”고 26일 밝혔다. 그는 이 같은 내용의 연구 결과를 30일경 발간되는 ‘한국문화연구’ 12집에서 발표한다.
이번에 발견된 수정고본은 허균이 1609년 이전에 펴낸 것으로 추정되는 최종본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자관들을 동원해 필사한 원본 중 하나다. 각 책의 첫 장에 허균의 호인 교산(蛟山)을 수로전(垂露篆·세로획의 끝을 붓을 눌러 그치는 방법)으로 새긴 도장이 찍혀 있다.
허균은 대단한 장서가였지만 역모를 꾀한 죄로 광해군에게 참형을 당해 소장인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게다가 허균이 자신의 저작에 직접 소장인을 날인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수정고본에 이름을 남긴 필사자 6명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할 정도로 최고의 실력을 자랑한 사자관들. 이 중 이해룡은 글씨를 잘 써서 한석봉에 필적한 이로 알려져 있다.
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적은 것은 ‘국조시산’이 단지 허균 개인의 취향으로 편찬된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임진왜란 직후 붕괴된 조선의 출판시스템을 회복하기 위해 공적 목적으로 편찬됐다는 의미다.
수정고본 첫 줄에는 ‘양천허균단보비선(陽川許筠端甫批選)’이라고 명시돼 있다. 목판본엔 없는 문장이다.
양천은 허균의 본관, 단보는 허균의 자. 허균이 비평하고 뽑았다는 뜻이다.
이번 발견으로 그동안 목판본 비평 부분의 오류도 확인됐다.
박 씨가 분석한 결과 수정고본에는 시구에 대한 평(評)이 해당 시구의 옆에, 시 전체에 대한 감상평인 비(批)가 시 맨 끝에 표기돼 있으나 목판본은 비평 자체가 누락되거나 전혀 다른 구절에 평이 실린 곳들이 있었다. 작자명이 다른 경우도 있었다.
수정고본을 확인한 안대회 명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허균 당대의 필사본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그는 “목판본은 허균이 편찬한 원본을 구하지 못해 오류가 많았다”며
“당대 최고의 글씨를 통해 비평가로서 허균의 위상을 새롭게 조명하는 발견”이라고 말했다.
정민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국조시산은 최고의 앤솔로지”라며
“연구자들에게 통용되는 목판본과 다른 오리지널의 등장은 시 비평사 연구에 획기적인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국조시산(國朝詩刪): 조선 초 정도전부터 허균 당대의 인물인 권필에 이르기까지 35명의 당대 최고의 한시 889
수를 뽑아 엮은 시선집. 명실상부 조선 최고의 시선집으로 많은 이의 호평을 받았다.
허균이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 뒤 1697년 문인 박태순이 ‘용감하게도’ 이 책을 간행한 것은 그만큼 이 시선집
의 가치를 높이 샀기 때문이다.
[용어풀이]
◇사자관(寫字官) : 규장각에서 문서를 정서(正書)하는 일을 맡은 벼슬.
◇수정고본(手定稿本) : 소장인이 있는 수택본이자 ‘산삭(刪削·필요 없는 글자나 글귀를 지워 버림)’ 표시가 있
는 고본을 가리킨다.
<출처:동아일보(2007.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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