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모재기(遠慕齋記)
(전주이씨 재실)
외서(外西 : 오늘날 밀양시 청도면의 옛 지명) 지역은 옛날 도주(道州 : 청도면의 옛 지명)에 속(屬)했는데 지금은 밀양이다. 사방(四方)이 산으로 첩첩(疊疊)이 둘러 싸여서 계곡은 매우 깊숙하고 궁벽해 수석(水石)의 경관이 조 좋은 마을 인목(仁牧)골이 있다.
구루(甌娄=사발모양)한 모양의 집은 모두 이씨들이 사는 곳이다. 그 선조에 휘(諱) 감(堪)의 아들 리(利)와 복(復) 두분이 계셨으니 실(實)로 이곳에 기초(基礎)을 닦고 공덕(功德)을 세우고 돌아가심에 남(南)쪽 사청산(士廳山) 태원(兌原)에 장사(葬事) 지내고 후손(後孫)들이 세사(歲祀)를 근수(謹修)한지 팔구대(八九代)에 이르렀다
일가가 점차로 장대하여 호구가 십(十) 여가구가 되니 이에 서로 모여 의논(議論)하여 가로되 사청(士廳 : 선비집 대청) 같이 보이는 것은 모두 우리들의 역대 선조의 무덤인데 재숙(齋宿)하는 곳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또 친족 간에 귀한 것은 돈독(敦篤)과 화목(和睦)인데 모여서 돈목(敦睦)을 쌓을 곳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드디어 정성(精誠)을 합하고 힘을 모아 마을을 향해 동쪽 못 둑위 한 곳에 평탄한 넓은 터를 구획(區劃)하여 정사(精舍) 수간(數間)을 건축(建築)하고 편액(扁額))을 걸어 원모재(遠慕齋)라 하였다.
인(因)하여 그 족인(族人) 강병(康棅) 군(君)을 시켜 나를 동협(東峽)으로 방문하게 하여 재실 기문(記文)을 청하였다.
생각하면 나도 외서(外西)에 오래 살았고 또 군(君)과는 친하였으니 감(敢)히 사양 할 수 없었다.
이에 가만히 생각하니 천지가 인도(人道)를 낳게 함에 있어 존조(尊祖)보다 더 소중 한게 없고 선조(先祖)를 이미 존숭(尊崇)하였으니 경족(敬族)을 높이 거론(擧論)함도 또한 한 가지 사람의 도리에 돌아감이지 다른 도(道)는 아닌 것이다.
이제 재실(齋室)이 이미 존조와 경족(敬族)을 위해 지어 젔고 이름하여 원모재라 하였으니 또한 간명(簡明)하고 해박(該博)하지 아니한가. 이씨는 효령대군 휘(諱) 보(補)에서 계출(系出) 하였으며 상세(上世)는 나라의 사승(史乘)에 있고 밀양에 전거(奠居)하신 선조는 낙주재 휘(諱) 번(氵+旙)이시다[입향조]
인조(仁祖) 조(朝)를 당(當)하여 벼슬을 피(避)하여 남쪽으로 내려와 낙동강의 모래섬에 놀았으니 그 청덕고풍(淸德高風)은 족(足)히 백세(百世)를 흥(興)하게 할 만한 인품이었다. 그러므로 이에 그 후손된 사람으로 이 재실에 기거(起居)하는 사람은 때 맞춰 그 일이 있을 시(時)는 재숙(齋宿)하고 치성(致誠) 하여서 그 추원감모(追遠感慕)의 뜻을 두는 것이니 어찌 다만 사청산 선영(先塋)을 위한 것 만으로서 능(能)히 끝났다고 하겠는가!
즉 또한 멀리 낙주재(洛洲齋) 이번『李?,1575년(선조 8)∼1633년(인조 11)』 옹의 일세(一世)에 뛰어난 인품을 추모(追慕)하여 오직 그어른의 덕행(德行)을 이어 닦아 혹시도 감히 이 원모(遠慕)를 정성(精誠) 되게하는 행위를 무느뜨림이 없게 한다면 진미(盡美)에 도달(到達)한 것이라 하겠다.
그런 즉 이와 같이 마음으로 후손들이 이 재실에서 모이고 돈목(敦睦)을 닦는다면 그 선조들이 자손을 골고루 보시는 마음을 생각지 앉은이 있겠는가! 나는 그들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나 느낌이 저절로 일어 날 것임을 알겠노라!
그러나 또한 배우지 아니하면 능히 참으로 원모(遠慕)하는 실사(實事)를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나는 바라 건데 이 재실에 거처(居處)하는 후손(後孫)들은 혹 교양서적(敎養書籍) 수백권(數百卷)이라도 구입하여 여기에 소장하고 힘써 읽는다면 문(文)과 질(質)이 갖추어 원모(遠慕)의실사(實事)가 흥기(興起)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기문(記文)을 지어주고 힘쓰게 하는 바일뿐이다.
단기 四二九六년(1963) 계묘(癸卯) 十二월 상순일에
경주(慶州) 이온우(李溫雨)는 기(記) 하노라.
☆국역 : 휘(諱) 감(堪)의 九代孫 병현(秉賢) 삼가 번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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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遠慕齋記(원모재기)
外西之地古屬道州而今爲密四疊(외서지지고속도주이금위밀사첩)
以山谷頗幽僻多水石觀里有仁牧(이산곡파유벽다수석관리유인목)
甌娄比屋而居皆李氏也其先有諱(구루비옥이거개이씨야기선유휘)
堪及子諱利復二公實肇基樹德及(감급자휘리복이공실조기수덕급)
卒葬其南士廳山兌原而後孫謹修(졸장기남사청산태원이후손근수)
歲祀迄八九世族漸張戶口數十乃(세사흘팔구세족점장호구수십내)
相會而謀曰彼睾如士廳者皆我世(상회이모왈피고여사청자개아세)
葬矣可無所齋宿耶且有族之所貴(장의가무소재숙야차유족지소귀)
敦睦矣可無所會修耶遂合誠聚力(돈목의가무소회수야수합성취력)
直里東池堰上規一平曠址築精舍(직리동지언상규일평광지축정사)
數間而扁掦曰遠慕齋因使其族人(수간이편척왈원모재인사기족인)
康棅君訪余東峽而靖記之顧余亦(강병군방여동협이정기지원여역)
於外西故矣且與君善耳敢有辭乃(어외서고의차여군선의감유사내)
窈惟天地之生人道莫善於尊祖而(요유천지지생인도막선어존조이)
祖旣尊矣敬族擧亦一歸非二道耳(조기존의경족거역일귀비이도이)
今齋旣爲此而作而命以遠慕不亦(금재기위비이작이명이원모불역)
簡而該乎哉盖李氏系出孝寧大君(간이해호재개이씨계출효령대군)
諱補而上世國有史載其奠密之祖(휘보이상세국유사재기전밀지조)
曰洛洲齋諱氵旙當仁祖朝避仕南作(왈낙주재휘번당인조조피사남작)
遨遊洛江之洲其淸德高風有足以(오유낙강지주기청덕고풍유족이)
興百世之人耳然則乃其爲後孫而(흥백세지인이연즉내기위후손이)
居斯齋者時其有事而齋宿致誠以(거사재자시기유사이재숙치성이)
寓其遠慕也寧但以士廳先壠之爲(우기원모야령단이사청선롱지위)
能乎已哉卽且遠追洛翁所高也之(능호이재즉차원추낙옹소고야지)
作而聿修厥德無或敢隕斯誠遠慕(작이율수궐덕무혹감운사성원모)
之爲至乎盡美矣則以若斯心會族(지위지호진미의즉이고사심기족)
於斯睦於斯其有不念祖均視之心(어사목어사기유불념조균시지심)
而之者耶吾知其自不覺油然於斯(이지자야오지기자불각유연어사)
矣然夫亦非學鮮能眞知遠慕之實(의연부역비학선능진지원모지실)
事吾願居是齋者其或有購書數百(사오원거시재자기혹유구서수백)
卷而藏之仡仡而讀彬而興焉者也(권이장지흘흘이독빈이흥언자야)
耶是余所爲記而勗之也已 (야시여소위기이욱지야이)
檀紀七二甲上旬之日(단기칠이갑상순지일)
慶州 李溫雨 記(경주인 이온우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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