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재기(四友齋記)
허균 찬(許筠 撰)/ 신해년(1611, 광해군 3) 2월 사일(社日)에 쓰다.
[생졸년] : 1569(선조 2)∼1618(광해군 10).
재(齋)를 사우(四友)라고 이름지은 것은 왜냐? 허자(許子 저자 자신을 가리킴)의 벗하는 자가 셋인데, 허자가 그 중 하나를 차지하고 보니, 아울러 넷이 된 셈이다. 세 사람은 누구인가? 오늘날의 선비는 아니고 옛사람이다. 허자는 성격이 소탈하고 호탕하여 세상과는 잘 맞지 않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꾸짖고 떼지어 배척하므로, 문에 찾아오는 이가 없고 나가도 더불어 뜻에 맞는 곳이 없다. 그래서 탄식하며,
“벗이란 오륜(五倫)의 하나인데 나만 홀로 갖지 못했으니 어찌 심히 수치로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했다. 물러나와 생각건대, 온 세상이 나를 비천하게 여기고 사귀지 않으니 내가 어디로 가서 벗을 구할 것인가. 마지 못해 옛사람 중에서 사귈 만한 이를 가려 벗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는 진(晉) 나라의 처사(處士) 도원량(陶元亮)이다. 그는 한가하고 고요하며 평탄하고 소광(疏曠)하여 세상일 따위는 마음에 두지 않고 가난을 편히 여기며 천명을 즐기다가 승화 귀진(乘化歸盡)하니, 맑은 풍모와 빼어난 절개는 아득하여 잡을 길이 없다. 나는 몹시 그를 사모하나, 그의 경지에는 미칠 수가 없다.
그 다음은 당(唐) 나라 한림(翰林) 이태백(李太白)이다. 그는 비범하고 호탕하여 팔극(八極)을 좁다 하고 귀인들을 개미 보듯하며 스스로 산수간에 방랑하였으니, 내가 부러워하여 따라 가려고 애쓰는 처지이다.
또 그 다음은 송(宋) 나라 학사(學士) 소자첨(蘇子瞻)이다. 그는 허심탄회하여 남과 경계를 두지 않으므로 현명한 이나 어리석은 이, 귀한 이나 천한 이 할 것 없이 모두 그와 더불어 즐기니, 유하혜(柳下惠)의 화광동진(和光同塵)을 본받고자 하나 못하는 처지이다.
이 세 분의 군자는 문장이 천고(千古)에 떨쳐 빛나지만, 내 보기에는 모두 그들에게는 여사(餘事)였다. 그러므로 내가 취하는 바는 전자에 있지 후자에 있지 않다. 만약 이 세 분 군자를 벗삼는다 할 것 같으면, 어찌 속인들과 함께 어깨를 포개고 옷소매를 맞대며, 사분사분 귓속말하며 스스로 우도(友道)를 삼을 것인가.
나는 이정(李楨)에게 명하여 세 군자의 상을 꼭 같이 그리게 하고, 이 초상에 찬(贊)을 짓고 석봉(石峯)으로 하여금 해서(楷書)로 쓰게 하였다. 매번 머무는 곳마다 반드시 좌석 한쪽에 걸어놓으니 세 군자가 엄연히 서로 대하여 권형(權衡)을 평정(評定)하며 마치 함께 웃고 얘기하는 듯하고, 더욱이 그 인기척 소리를 듣는 듯하여 쓸쓸히 지내는 생활이 괴로운 것을 자못 알지 못하였다. 이러고 보니 나는 비로소 오륜을 갖추게 되었으며, 더욱 남과 더불어 사귀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게 되었다.
아, 나는 확실히 글을 못하는 자라 세 분 군자의 여사에도 능하지 못하지만 성격마저 탄솔(坦率)하고 망용(妄庸)하여 감히 그러한 인물이 되기를 바라지는 못한다. 단지 그분들을 존경하고 사모하여 벗으로 삼고자 하는 정성만은 신명(神明)을 느끼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벼슬에 그 출처와 거취는 암암리에 그분들과 합치되었다.
도연명이 팽택(彭澤)의 영(令)이 되어 80일 만에 관직을 벗었는데, 나는 세 번이나 태수가 되었으나 임기를 못 채우고 문득 배척받아 쫓겨났다. 이태백은 심양(潯陽)과 야랑(夜郞)으로 가고 소동파는 대옥(臺獄)과 황강(黃岡)으로 갔었다.
이는 모두 어진이가 겪은 불행이지만, 나는 죄를 지어 형틀에 묶이고 볼기맞는 고문을 받은 뒤 남쪽으로 옮겨지니, 아마도 조물주가 희롱하여 그 곤액은 같이 맛보게 하였으나, 부여된 재주와 성품만은 갑자기 옮겨질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늘의 복을 입어, 혹시라도 전야로 돌아가도록 허락된다면, 관동(關東) 지방은 나의 옛 터전이라 그 경치며 풍물이 중국의 시상산(柴桑山)ㆍ채석산(采石山)과 견줄 만하고, 백성은 근실하고 땅은 비옥하여 또한 중국의 상숙현(常熟縣)과 양선현(陽羨縣)보다 못지 않으니, 마땅히 세 군자를 받들고 감호(鑑湖) 가에서 초복(初服) 입던 신세로 돌아간다면, 어찌 인간 세상의 한가지 즐거운 일로 되지 않겠는가.
저 세 분 군자가 아신다면 역시 장차 즐겁고 유쾌하게 여기실 것이다. 내가 사는 집은 한적하고 외져서 아무도 찾아오는 이가 없으며, 오동나무가 뜰에 그늘을 드리우고 대나무와 들매화가 집 뒤에 총총히 줄지어 심어져 있으니, 그 그윽하고 고요함을 즐기면서 북쪽 창에다 세 군자의 초상을 펴놓고 분향하면서 읍을 한다.
그래서 마침내 편액을 사우재(四友齋)라 하고 인하여 그 연유를 위와 같이 기록해둔다. 신해년(1611, 광해군 3) 2월 사일(社日)에 쓰다.
[주]사일(社日) : 춘분(春分) 및 추분(秋分)에서 가장 가까운 앞뒤의 무일(戊日)을 말한다. 여기서는 춘분에서 가까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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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四友齋記
齋以四友名者。何耶。許子所友者三。而許子居其一。倂而爲四也。三人者誰。非今士也。古之人也。許子性疏誕。不與世合。時之人群詈而衆斥之。門無來者。出無與適。喟然曰。朋友者。五倫之一。而吾獨缺焉。豈非可羞之甚。退而思曰。擧世而鄙我不交。吾焉往而求友哉。無已則於古人中。擇其可交者友之。吾所最愛者。晉處士陶元亮氏。閑靜夷曠。不以世務嬰心。安貧樂天。乘化歸盡。而淸風峻節。邈不可攀。吾甚慕而不能逮焉。其次則唐翰林李太白氏。超邁豪逸。俯阨八極。蟻視寵貴者。而自放於川岳之間。吾所羨而欲企及者。又其次。宋學士蘇子瞻氏。虛心曠懷。不與人畦畛。無賢愚貴賤。皆與之驩然。有柳惠和光之風。吾欲效而未之能也。三君子文章。振耀千古。以余觀之。則皆其餘事。故吾所取者在此。而不在彼也。若友此三君子者。則奚必與俗子聯袂疊肩。詡詡然耳語。自以爲友道也哉。余命李楨繪三君像。惟肖。作贊倩石峯楷書。每所止。必懸諸座隅。三君子儼然相對軒衡解權。若與之笑語。怳若聆其謦欬。殊不知索居之爲苦。然後余之倫始備五。而尤不樂與人交也。噫。余固不文。不能三君子之餘事。而性又坦率妄庸。不敢望其爲人。唯其敬慕欲友之誠。可感神明。故其出處去就。默與之相合。陶令在彭澤八十日而解官。不佞三爲二千石。不滿限輒斥去。謫仙之潯陽夜卽。坡公之臺獄黃岡。皆賢者之不幸。而余以罪械纍受榜掠徙于南。殆造物者戲同其困阨。而賦與之才性。猝不可移歟。徼天之福。倘許歸田。則關東。余舊業也。其景物風煙。可與柴桑采石相埒。而民愿土沃。又不下於常熟陽羨。當奉三君子。返初服於鑑湖之上。豈不爲人間一樂事乎。彼三君子者有知。則亦將以爲婾快矣。余所寓舍。適僻而無人來訪。桐樹布蔭于庭。叢竹野梅。列植舍後。樂其幽靜。張三像於北牖。焚香以揖之。及扁曰四友齋。因記其由如右云。時辛亥春仲社日。書。<끝>
강릉에 교산 허균의 아버지[허엽]가 태어난 본가의 우뚝선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본 사랑채가 보입니다.
허균이 한때 공부하던 본가의 사랑채를 훗날 사우재(四友齋)라 이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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