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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京城) 팔대문(八大門)과 오대궁문(五大宮門)의 유래(由來)

야촌(1) 2016. 3. 31. 15:34

■ 경성(京城) 팔대문(八大門)과 오대궁문(五大宮門)의 유래(由來)

 

정동 돈의문 자료를 찾던 중 옛날 잡지에 논설로 실린 내용이 흥미로와 이곳에 올립니다. 

원문에서(혹 저처럼 한자에 어려움이 있는 분들이 있을까봐) 한문에 음을 달고 조사, 어미 등을 조금 바꾸었습니다.

 

아래 내용에 대해 제게 물으시면 당연히 저는 아직 잘 모르는 바입니다.

궁금하신 분이 찾아보시고 제게도 가르쳐 주심이....

 

<출처는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

 

一팔대성문(八大城門)

지금의 경성(京城)에는 南大門과 東大門 二大門 外에 광희(光熙), 혜화(惠化), 창의(彰義) 三小門이 有할 뿐이나 원래에는 八門이 있었으니 즉 正東은 흥인지문(興仁之門), 正西는 돈의문(敦義門), 正南은 숭례문(崇禮門), 正北은 숙정문(肅靖門), 東北은 혜화문(惠化門), 西北은 창의문(彰義門), 東南은 광희문(光熙門), 西南은 소의문(昭義門)이오 이외에 東大門과 光熙門 間에 小門이 또 있었으니 즉 水口門이다. 이제 그 유래를 잠깐 말하자면

 

소의문(昭義門: 속칭 西小門)은 원래 소덕문(昭德門)이라 칭하다가 성종(成宗)3년에 소의(昭義)라 개칭(改稱)하였으니 그것은 예종비 한씨(睿宗妃 韓氏:韓明澮女)의 익호(謚號)를 휘인소덕(徽仁昭德)이라 추상(追上)한 까닭에 이를 피(避)하야 개(改)함이었다.

 

그 초루(譙樓)는 英祖28년 8월에 어명(御名)으로 금영청(禁營廳)에서 시건(始建)하고 소의문(昭義門)의 편(扁)을 게(揭)하였다. 소의문(昭義門)은 무슨 특별한 역사는 별로 없으나 왕석(往昔: 옛날에) 중죄인(重罪人)의 참형장(斬刑場)이 이 문밖에 있었으므로 사형(死刑)에 임(臨)한 사람을 이르는바 『서소문참(西小門斬)』이라 하였고 근래(近來) 광무(光武) 10년 정미(丁未) 8월 1일 한국군대해산(韓國軍隊解散)할 때에는 이 문 내에 있던 시위대(侍衛隊 : 현금(現今) 西小門 관사(官舍)터)와 일본군대간(日本軍隊間)에 충돌이 생겨서 양방(兩方)의 多數 사상(死傷)이 생기고 일본수비대(日本守備隊)의 梶原 大尉가 또한 죽었으니 지금까지 민관(民官)에서 서소문접전(西小門接戰)이라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때에 이 門도 다수(多數)한 탄환의 세례를 받았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부근 일대도 성혈(腥血)의 참상(慘狀)을 보게 되었다. 이 문은 그 후 大正3년 12월에 철훼(撤毁)하였다.

 

혜화문(惠化門) 이문은 속칭 동소문(東小門)이니 원명(元名)은 홍화문(弘化門)으로서 성종(成宗)14년에 창경궁(昌慶宮) 東門을 홍화(弘化)라 칭한 후 양문(兩門)의 명(名)이 서로 혼동(混同)됨으로 중종(中宗)6년에 혜화문(惠化門)이라 개칭(改稱)하였다. 그 초루(譙樓)도 英祖20년 8월에 어명(御命)으로 어영청(御營廳)에서 시건(始建)하고 혜화문(惠化門)이란 편액(扁額)을 게(揭)하였다.

 

창의문(彰義門) 속칭(俗稱) 자하문(紫霞門)이라 하니 이는 그 門의 위치가 자하동(紫霞洞) 막바지에 있는 까닭이오 창의(彰義)라 함은 전날 그 門밖에 藏義寺(장의사 一名 彰義寺)란 고찰(古刹)이 있었기 때문에 그 고적(古蹟)을 취(取)하야 지은 것이니 인조반정시(仁祖反正時) 이귀(李貴), 이서(李曙), 최명길(崔鳴吉), 김류(金瑬), 이기축(李起築), 원두표(元斗杓) 등 모든 공신(諸功臣)이 경성(京城)을 습입(襲入)할 때에 소위 도끼정승(政丞) 원두표(元斗杓)와 역사(力士) 이기축(李起築)이 작파(斫破)하고 들어오던 門이다.

 

이에 감(鑑)하야 인조(仁祖)는 이문 부근의 성벽을 견고히 수축(修築)하고 門도 크게 수선(修繕)하였었는데 속간(俗間)에서는 문명(門名)을 창의(彰義)라 한 것도 그때 반정(反正)한 것을 기념(紀念)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라 하나 인조(仁祖) 이전 즉 국초(國初)부터 창의(彰義)라 칭한 것은 기록(여지승람(輿地勝覽), 지봉유설(芝峯類說) 등에 기록되어 있음)이 명백(明白)히 있은 즉 이것은 전연(全然) 오해(誤解)다.

 

또 장의사(藏義寺)는 옛날에 신라(新羅)가 백제(百濟)와 황산(黃山)에서 싸울 때에 장춘랑(長春郞), 파랑(罷郞)이 절사(節死)하였으므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이 2사람을 위하여 세운 절이니 려조(麗朝)이래 명찰(名刹)로서 이조(李朝) 세종(世宗) 때에 이를 집현전(集賢殿) 제신(諸臣)의 독서소(讀書所)로 삼았다가 성종(成宗) 이후에 절(寺)를 폐(廢)하고 이에 관방(關防)을 설(設)하며 탕춘대(蕩春臺)를 축(築)하였다. (현재 세검정洗劍亭 전면前面)

 

광희문(光熙門) 지금은 광희문(光熙門)과 수구문(水口門)이 동문이칭(同門異稱)이 되었지마는 원래는 광희문(光熙門)과 수구문(水口門)이 아주 딴 門이었다. 수구문(水口門)은 상술(上述)함과 같이 八門 외에 특히 따로 있어서 사시(死尸)만 나아가게 한 부정문(不淨門)이니 속담에 『못된 바람은 수구문(水口門)으로 분다』하던지 또는 죽음에 임박한 노인(老人)이나 병자(病者)를 가리켜 『水口門 차례』라 하는 것이 그것이오. 

 

光熙門은 속칭 남소문(南小門)으로 원래 장충단(獎忠壇) 계류(溪流)의 상류(上流), 즉 한강통로(漢江通路)의 오지 성벽(奧地 城壁)에 있었었는데 풍수학상(風水學上)에 그 門이 거기에 있는 것은 京城에 불리(不利)하다 하야 폐쇄(廢鎖)하고 광희문(光熙門)이란 명칭만 띠어다가 원수구문(元水口門)에 이관(移冠)하였다.

 

그리하여 원광희문(元光熙門) 즉 남소문(南小門)은 유야무야간(有耶無耶間)에 없어지고 수구문(水口門)이 수(遂)히 광희문(光熙門)이 되었다. 이 수구문(水口門) 부근에는 옛날 이조초(李朝初)로부터 근대(近代)까지 동활인서(東活人署: 현금(現今) 장충단(獎忠壇) 입구 동편東便)와 한증막(汗蒸幕)이 있었으니 이것은 일종(一種) 전염병(傳染病)의 피병원(避病院)으로 그 관리는 모두 승려가 하였었다.

 

南大門 일명은 숭례문(崇禮門: 禮는 火에 속하였으니 즉 남방(南方)의 의(意)다.)이니 경성(京城) 八大門 중 최대(最大) 건물로 웅려장대(雄麗壯大)함이 그 예가 없을 뿐 아니라 역사가 또한 오래다. 낙성(落成)하기는 이태조(李太祖)7년 2월 8일이오(경성京城 축성築城 後2년) 일반(一般)의 장식(粧飾)과 수선(修繕)은 世宗3년 성벽석축시(城壁石築時)에 하였고 그 후 숙종(肅宗) 30년에 경성성벽(京城城壁)을 크게 수축(修築)할 때에도 또한 수선(修繕)하였으니 경성(京城)의 모든 건물(建物)이 대개 임난(壬亂) 때에 소화(燒火)되었으나 특히 이문은 그 화를 면하여 금일(今日)까지 내려왔다.

 

현재 문루(門樓) 현판액면(懸板額面)의 숭례문(崇禮門)이란 3大字는 속간(俗間)에서 흔히 안평대군(安平大君 李瑢: 文宗의 弟)의 필(筆)이라 하나 이것은 오해(誤解)이오 실(實)은 중종시대(中宗時代) 명필(名筆)로 유명한 죽당 유진동(竹堂 柳辰同)의 필(筆)이다.

 

이것은 숙종(肅宗)시대에 유씨(柳氏)의 후손인 유대장 혁연(柳大將 赫然)이 그 문을 수선할 때에 발견한 것이다. 정동유(鄭東愈)의 주영편(晝永篇)에 의하면 유씨가(柳氏家)에는 원래 숭례문(崇禮門)이라 쓴 유진동(柳辰同)의 서축(書軸)이 여러장이 전하여 왔었는데 그 후손도 처음에는 그냥 연습(練習)하던 서축(書軸)으로 알았더니 그 뒤에 유대장(柳大將)이 문(門)을 수선(修繕)할 때에 그 현판(懸板)의 후면(後面)에 가정모년죽당서(嘉靖某年竹堂書)라 기(記)한 것이 있는 것을 보고 비로소 자기의 선조(祖先) 죽당(竹堂)이 쓴 것을 알고 그 집에 있는 서축(書軸)과 대조(對照)하여 본즉 서법(書法)이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고 운운(云云)하였다.

 

그리고 모든 문의 문액(門額)은 다 횡서(橫書)하였으되 유독(惟獨) 남대문(南大門)을 종서(縱書)한 것은 관악(冠岳)의 화산(火山)을 압(壓)하기 위함이라 한다.

 

동대문(東大門) 일명 흥인지문(興仁之門: 仁은 木에 속(屬)하니 東方의 意다.)이니 四大門과 같이 李朝 初에 창건하였다가 임난병화(壬亂兵火)에 소화(燒火)되고 그 후 숙종(肅宗) 때에 수축(修築)하였다가 또 붕괴(崩壞)되어 이태왕(李太王) 을축(乙丑)에 경복궁(景福宮) 중건시(重建時) 다시 중건(重建)하였다.

 

경성(京城)의 모든 문은 다 三字이되 유독(惟獨) 동대문(東大門)을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하여 之(지)자를 가(加)한 것은 경성(京城)의 동방(東方)이 허(虛)한 고(故)로 이(此)를 보(補)하기 위하야 之字를 加하고 또 곡성(曲城)을 설(設)하였다 한다.(그 門 액서(額書)는 필자(筆者)의 氏名이 미상(未詳)하다.)

 

北門 즉 숙정문(肅靖門)은 삼청동(三淸洞) 東北方 山地에 있으니 四大門 중 제일 지벽(地僻)하고 성북동(城北洞)을 통행(通行)하는 이외에는 별(別)로 행인(行人)이 없음으로 항상 폐쇄(지금은 문이 파괴되어 자연 개통(開通)되었다)하여 두고 건물도 모든 문 중에 아주 보잘 것이 없음으로 비록 경성(京城)에 있는 사람들도 흔히 그 존재조차 알지를 못하고 대개는 서북문(西北門)인 창의문(彰義門)을 북문(北門)으로 오인한다.

 

여항(閭巷)의 부녀(婦女)들 間에는 상원(上元) 전에 이 門에 삼차(三次)만 가면 도액(度厄: 액막이)를 한다는 미신이 있으니 이것은 필경 그 지대가 험난한 까닭에 생긴 말인 듯하다.

 

二 오대궁문(五大宮門) 

 

돈화문(敦化門) 이는 창덕궁(昌德宮)의 正門이니 이태조(李太祖)3년 甲戌(서기1394- 거금(距今 이제부터)536년 전)에 창덕궁(昌德宮)을 창건할 동시에 건설한 것이다. 임진난(壬辰亂) 때에 모든 宮殿이 모두 소화(燒火)되었으되 유독 이 문은 창경궁(昌慶宮)의 홍화문(弘化門), 명정문(明政門), 명정전(明政殿) 남대문(南大門)과 같이 면화(免禍)하였으니 하기(下記)한 홍화문(弘化門), 명정문(明政門), 명정전(明政殿), 남대문(南大門)을 병(幷)하여 경성오대고건축물(京城五大古建築物)로 유명한 것이다.

 

門 액자(額字)는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의하면 정국형(鄭國馨 : 허백당虛白堂 정란종鄭蘭宗의 자왈字曰 국형國馨)이 창경궁(昌德宮) 모든 전(殿) 및(及) 문액(門額)을 서(書)하였다 하였는데 상기(上記)한 바와 같이 이문은 임난시도 무사(無事)하였은즉 이 門 액자(額字)는 정씨(鄭氏)의 필(筆)이 분명하다.

 

홍화문(弘化門) 창경궁(昌慶宮: 今 昌慶苑)의 정문이니 성종(成宗)14년 계묘(癸卯: 서기1483-거금(距今) 447년 전)에 昌慶宮을 창건할 시(時)에 건설한 것이다. 그 액(額)에 홍화문(弘化門) 三字는 인조(仁祖) 때의 사자관(寫字官) 이지한(李之翰)의 필(筆)이다. [之翰의 字는 자번子藩, 호號는 수곡壽谷, 강음인江陰人이니 선조宣祖37년 갑진생甲辰生, 인조仁祖13년 을해乙亥 진사進士, 관지상호군官至上護軍, 선서善書]

 

흥화문(興化門) 이 門은 경희궁慶熙宮(원명元名 경덕궁慶德宮, 속칭 새문안大闕) 정문이니 광해(光海)8년 병진(丙辰: 서기1616- 距今314년 전)에 경덕궁(慶德宮) 창건할 때에 입(立)한 것이오 그 문액(門額)의 흥화문(興化門) 三字는 이신(李伸)의 필(筆)이다. [李伸은 여주인(驪州人)이니 현감(縣監) 이복장(李福長)의 子다.

 

무과(武科)로 벼슬(官)이 현감(縣監)에 달한 바 그는 명필(名筆)로서 이 문과 태복사(太僕寺), 상대아문(霜臺衙門) 편액(扁額)을 서(書)하였다. 속간(俗間)에서 그 문 액자(額字)는 명필(名筆) 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 李瑢)의 필(筆)로 야간(夜間)에도 그 필광(筆光)이 야조현(夜照峴)까지 비추었기 때문에 야조현(夜照峴)이라 칭하다가 임진난(壬辰亂) 때에 글자가 적탄(敵彈)에 맞은 후 그 빛(其光)을 실(失)하였다.

 

단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의 편액 글씨를 쓴 사람이 조선시대 경천군(慶川君) 북악 이해룡(北嶽 李海)의 글씨란 설과 능성군(綾城君) 이신(李伸, 1542~1615)의 글씨란 설이 존재하는데, 이신(李伸)의 글씨라고 적어 놓은 것의 하나로 순조때 사람 류본예(柳本藝)가 정리한 『한경지략(漢京識略)』이다.

 

오전(誤傳)하나 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 李瑢)은 누구나 잘 아는 바와 같이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제삼자(第三子)요 이 경덕궁(慶德宮)은 그 후(약 160여년 후) 광해조(光海朝)에 건축(建築)한 것인즉 아무리 항축(巷祝)이라도 안평대군(安平大君)의 글씨란 말은 천만부당(千萬不當)한 것이다. 이 문의 위치는 원래 동향(東向)이었다가 대정(大正)4년 8월에 서대문(西大門) 통로(通路)를 개수(改修)할 때에 현재지(現在地)로 이(移)하였다.

 

광화문(光化門) 경복궁(景福宮)의 동문(東門)은 건춘문(建春文)이니 전일(前日)에 종실(宗室), 외척(外戚), 부마(駙馬), 여관(女官) 등만 한(限)하여 출입(出入)하던 門이오 영추문(迎秋門)은 서문(西門)이니 전일(前日)에 일반 관리가 출입하던 문이오 북문(北門)은 신무문(神武門)이니 보통으로 통행치 아니하고 오직 주상(主上)이 경무대(景武臺) 과장(科場)에 임어(臨御)하거나 기타 특별한 경우에만 한하여 출입을 허(許)한 것이다.

 

이 三門은 물론 경복궁(景福宮) 건축할 때에 건립한 것이나 건축이 그리 웅대(雄大)할 것은 없으되 오직 남문(南門)인 광화문(光化門)은 정문이니 만치 웅대굉걸(雄大宏傑)할 뿐 아니라 건축이 또한 교묘하여 남대문(南大門)과 같이 경성(京城)의 이대위관(二大偉觀)이다.

 

건축하기는 이태왕(李太王) 2년 乙丑10월(서기1865-距今60년 전)이니 건축사(建築師)는 김원식(金元植)이오 광화문(光化門)이란 三字의 문액(門額)은 향수(香壽 又號는 몽인夢人 일운몽중몽인一云夢中夢人) 정학교(丁學敎)의 筆이오 상량문(上樑文)은 이유원(李裕元)이 찬(撰:짓다)하고 신석희(申錫禧)가 서(書)하였으며(하기下記 상량문上樑文 참조) 전문(門前)의 쌍해치(雙獬豸 : 치豸는 신양神羊이오 음音은 해치니 속칭 해타海駝)는 근세(近世) 미술대가(美術大家) 이세욱(李世旭 : 일운태욱一云泰旭)의 작(作)이다.

 

[전일(前日) 문내(門內) 금천교상(錦川橋上) 東과 西에 南北 양측(兩側)에 4개 석천록(石天祿)은 국초(國初) 유물(遺物)이다.] 이 해치(獬豸)는 총독부(總督府)앞 도로(道路) 확장할 때에 총독부(總督府) 후원(後院)으로 옮기고 광화문(光化門)도 총독부(總督府) 낙성(落成) 동시 건춘문(建春門) 북편(北便)으로 이전(移轉)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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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化門上樑文

 

伏以若作室肯堂, 拊丕基而圖永迺立門有伉, 旋化樞而嚮明, 于時也天閭上開, 其方則帝車南指, 顧玆法宮聽政之所, 奧自神京定都之初, 背嵩面河, 王業奠中央之宅, 體國經野, 宸居近上紫之垣, 猗 殿宇正位辨方面眉扁顧各思義禹勤堯思, 敷盛德於春生秋成, 羲泰箕康, 迓景祿於日升月恒, 寶扆御當陽之位, 金門闢正南之維, 瑤躔候極宿之祥. 昇平有象, 璿籙兆亭午之運, 文明出治, 比若前代之承光宜光, 四方之所共仰, 有如兩闕之敦化興化百僚之所必趨, 自中古未遑重修, 在聖朝思述先志恭惟.

主上殿下升聞 潛邸. 泰運興邦. 承 文考之顯謨. 在厥初呼哲命吉. 奉 太母之懿訓, 率由章不憩不忘. 仁孝英明之夙彰令聞, 八城咸頌. 政敎施措之動合盛典. 百度鼎新. 爰攷玉帶之舊圖. 載營華蓋之重構. 肆 宸衷之先定. 又延議之僉同. 家國共休願乎上者願乎下者. 朝野相慶, 咸曰一哉咸曰大哉. 縱軫母奪民時. 擧皆如趨父事. 非謂公儲私蓄, 有裕於昔年. 抑以地利人和, 若待乎今日. 司徒按考工之記. 太史占定中之星. *鼓弗勝, 梓材惟丹臒垣墉惟塗墍. 棟宇協吉, 體象乎天地 經緯乎陰陽. 一礎一砌之無改前規, 寓精義於法祖中侈不陋之皆合中道, 垂遠圖於裕昆. 迨輪奐之奏新工, 迺棖闑之仿古制. 漢建章之千門萬戶, 豈取觀美而壯居. 周明堂之右个左扉, 亶爲縣瀍而布令. 碧瓦鱗動, 負神武而將將. 畵檐翼齊, 對冠嶽而屹屹揭舊號於寶額, 銀鉤重新. 護佳氣於丹闈金鑰增固. 週市如彩虹飮月之狀. 盤紆若赤螭捧日之形. 玉凧朝儀, 排雙扇面蹌濟靑繩御路, 方二軌而坦平. 烏臺風生, 宛是城上所舊址. 黃閣地近, 依然門下省遺撫. 軒豁之政如我心. 閌閬乎無遠天室. 閽人含口, 沈沈高閣漏聲. 閤吏引班, 蒼蒼禁城曉色. 臨朱鳥而正晷景. 聳金爵而凌雲霄. 被四著明峻之功, 一家氣像. 成萬推存神之玅, 八荒庭衢. 敢頌川至之休庸助霞擧之役. 兒郞偉抛樑東. 駱峰初日照新宮. 林葱匝域含生類, 自在吾王大化中. 兒郞偉抛樑西, 煌煌奎壁耀金題. 喜聽門卒平安報, 鞍峴烽光夜夜低. 兒郞偉抛樑南, 漢水環之碧於藍. 郡國舟車都會地, 恩波洋溢頌遐覃, 兒郞偉抛樑北, 母嶽參天瞻峻極. 授斗爲巵躋彼堂, 聖人請祝於千億. 兒郞偉抛樑上, 對越天心迓景貺. 筵臣退食每遲遲, 日昃猶勤治道訪. 兒郞偉抛樑下, 大庇群生居廣厦. 臨殿時聞擊壤聲, 黃雲處處滿田野. 伏願上樑之後. 日月光華之無私照. 雨露化育之所均霑. 闢之乾闔之坤, 宣*澤於家家戶戶. 仁爲關義爲鍵, 納景祥於子子孫孫, 建不拔洪基, 措諸泰山磐石, 開太平萬世, 躋之壽域春臺.

 

大匡輔國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臣李裕元奉敎謹撰

資憲大夫行龍驤衛大護軍兼經筵事臣申錫禧奉敎謹書

同治四年乙丑十月十一日戌時.

 

[상상량문(上上樑文)은 광화문(光化門) 이전시(移轉時) 기층루(其層樓) 천정(天井)에서 발견(發見)하였는데 적색단자(赤色緞子)에 서(書)한 것으로 폭(幅)이 약 3척(尺) 장(長)이 약 3장(丈) 云]

 

대한문(大漢門) 덕수궁(德壽宮)의 정문이니 원래는 대안문(大安門)이었다. 태황제(太皇帝) 당시에 현영운(玄暎運)이 승총(承寵)을 하며 그 첩(妾) 배정자(裵貞子)가 양장(洋裝)을 하고 궐내(闕內)에 무상출입(無常出入)을 하였더니 시신(侍臣)중 이(此)를 기악(忌惡)하는 자(者)가 태황제(太皇帝)에게 주(奏)하되 어떤 비기(秘記)에 있으되 대안문(大安門)의 안자(安字)는 女字가 관(冠)을 한 것인데 관(冠)쓴 女子가 그 門으로 出入을 하면 나라가 亡한다고 하였더니 태황제(太皇帝)가 그 말을 신청(信聽)하고 즉시 배씨(裵氏)의 궁중출입(宮中出入)을 엄금(嚴禁)하고 대안문(大安門)도 대한문(大漢門)으로 변경(變更)하였으니 그 문액(門額)은 근래(近來) 명필(名筆) 유한익(劉漢翼)의 소서(所書)다. 

 

- 잡지명 : [별건곤] 제23호 1929-09-27

-(펌)경성 팔대문과 오대궁문의 유래|작성자 growupg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