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가지설(山家之說) - 이항복
나는 약관(弱冠) 시절에 산가(山家)의 설(說)을 매우 좋아하였다.
그런데 여러 가지 서책(書冊)들을 널리 수집해서 빠뜨리지 않고 두루 열람하여 점차로 그 깊은 내막을 엿본 다음에는 그것이 낭설(浪說)이라는 것을 환히 알게 되었으므로, 마침내 버려 버리고 보지 않았다.
대체로 그 설(說)은 빈주 공읍(賓主拱揖)의 형세와 귀작 용호(龜雀龍虎)의 형상에다 취산 이합(聚散離合)과 융결 관쇄(融結關鎻)의 법칙을 참입(參入)시킨 데에 불과하고, 그 요점은 다만 유정(有情)이냐 무정(無情)이냐에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팔괘(八卦)니, 간지(干支)니 추배(推排)니 참착(參錯)이니 방위(方位)니 향배(向背)니 역순(逆順)이니 길흉(吉凶)이니 하는 설들은 더욱 후세에 지어 낸 쓸데없는 말들이다.
그런데 세상의 미혹된 자들이 그릇되이 서로 금기(禁忌)하여 혹은 때가 지나도록 장사(葬事)를 지내지 않거나 혹은 먼 곳에서 아주 좋은 묘지(墓地)를 찾곤 하면서 여기에 깊이 빠져들어 의리를 위배한 것들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선유(先儒)가 여기에 대해서 분명하게 정론(定論)을 내리어 이르기를, “토색(土色)이 윤택하게 빛나고 초목(草木)이 무성하면 그게 바로 아름다운 땅이니, 이런 땅에 묘(墓)를 쓰면 선령(先靈)이 편안하고 자손(子孫)이 번성하게 된다.”고 하였으니, 이 말이 만세(萬世)의 모전(謨典)이 될 만하다.
사마광(司馬光), 나대경(羅大經)은 모두 송(宋) 나라의 명유(名儒)이다.
나대경의 설(說)에 이르기를, “묘지(墓地)를 정밀히 가리는 것은 물과 산이 서로 회합(回合)하고 초목(草木)이 무성하여 어버이의 유체(遺體)가 편안할 수 있게 하려는 데에 불과할 뿐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수요(壽夭)와 현우(賢愚)의 성분(性分)이 이미 정해졌는데, 어찌 천명(天命)을 도리어 전이(轉移)시킬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사마 온공(司馬溫公)은 조부(祖父)를 장사 지내려 할 적에 제부(諸父)들이 술사(術士)에게 미혹되어 장차 소목(昭穆)의 차례를 어지럽히려고 하자, 온공이 술사에게 뇌물을 후히 주어 그로 하여금 제부들을 속여서 예장(禮葬)을 할 수 있게 하도록 했는데, 그 후로 가세(家世)가 오히려 빛나고 현달하였으므로, 온공은 더욱 술사를 믿지 않았다.
당(唐) 나라로 부터 이후로 선영(先塋)에 배소(拜掃)하는 예를 중히 여기어 지금까지도 그 예를 준행해서 폐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소가(小家 : 가난한집)들의 잘못된 설들을 좇아서 조부(祖父)와 자손(子孫)을 각각 원지(遠地)에 장사지내어 후사(後嗣)로 하여금 성묘를 폐하고 향화(香火)를 끊으며 초동 목수(樵童牧竪)도 금할 수 없게 하는 것이 어찌 타당한 일이겠는가.
나의 선영(先塋)은 조역(兆域)이 협착한데다 묘(墓)를 쓴 곳이 점차 넓어져서 더 이상 남은 땅이 없다.
그래서 항상 마음속으로 ‘내가 죽은 뒤에 자손이 미약하면 어떻게 다른 산을 따로 얻어서 영역(塋域 : 산소)을 정할까.’ 하고 생각하여 이 일을 깊이 근심했다.
그런데 하루는 우연히 교수(敎授) 박상의(朴尙義)와 이야기를 하다가 이 일에 대해 언급했을 때 그가 인하여 말하기를, “내가 옛날에 포천(抱川)을 지나다가 귀문(貴門)의 선영을 보았는데, 지금 이미 묘를 쓴 곳은 다만 지산(支山)일 뿐이고, 본종산(本宗山)의 복지(福地)는 버려 두고 쓰지 않았으므로, 내가 마음속으로 항상 괴이하게 여겼다.”고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뛸 듯이 매우 기뻐 조카 탁남(擢男)으로 하여금 말[馬]을 대령하게 해서 박상의(朴尙義)를 맞이하여 함께 포천에 가서 구경하고 그 산에 자리를 잡아 나의 신후지지(身後之地 : 살아 있을 때에 미리 잡아 두는 묏자리)로 정하였다.
그리고 그 설을 여기에 기재해서 후일의 참고로 삼고자 하니, 내가 죽은 뒤에 여러 자식들은 오직 법식에 맞추어 자리를 정하고 날짜를 잡아 장사를 지내기만 하면 될 것이다.
[자료문헌]
*白沙先生別集卷之四>雜記
*한국고전종합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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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사공(白沙公)의 신후지지(身後之地)를 잡아준 인물소개
●박상의(朴尙義)
*1538. 7. 4.(중종 33)∼1621년(광해군 13).
조선 중기 상수학자(象數學者) 자(字)는 의보(宜甫)이고, 호(號)는 백우당(栢友堂)으로. 본관은 태인(泰仁)이다. 전라남도 장성군(長城郡) 황룡면(黃龍面) 아곡리(阿谷里) 보룡산(普龍山) 기슭 하남(河南)에서 출생하였다.
증 이조판서(贈吏曹判書) 박종원(朴宗元)의 증손(曾孫)이며, 박수량(朴守良)의 종손(從孫)이고, 어모장군(禦侮將軍) 박사순(朴士珣)의 아들이다 재예(才藝)가 뛰어났고 고금의 역학(易學)과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하였다.
상수학(象數學)에 정통하였으며,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에게 “푸른 옷을 입은 적[靑衣賊]이 동문(東門)으로부터 쳐들어올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는데 곧이어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1597년(선조 30)에 명나라 장수인 양호(楊鎬)가 접반사(接伴使)인 이덕형(李德馨)에게 그 예언을 한 사람을 만나보기를 청하였다. 양호(楊鎬)는 박상의(朴尙義)를 윗자리에 앉혀 후히 대접하고 자신의 막하(幕下)에 머무르게 하여 전투의 승패를 문의하였는데 박상의(朴尙義)의 말이 틀림이 없었으므로 크게 상을 주었다.
관직은 월사((月沙 : 이정구(李廷龜/1564년 ~ 1635년)의 추천으로 봉훈랑(奉訓郞)에 발탁되었다. 관상감겸교수(觀象監兼敎授)를 거쳤으며, 효우(孝友)가 있다 하여 사재감주부(司宰監主簿), 전옥서주부(典獄署主簿)를 지내고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랐다.
광해군 조에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군공(軍功)이 있어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이 되었고, 1617년(광해군 9)에 절충장군(折衝將軍) 본위부호군(本衛副護軍)에 올랐다. 그 후 벼슬을 그만두고 자연을 벗삼아 노닐다가 1621년(광해군 13) 2월 6일에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성 수산사(水山祠)에 돈재(遯齋) 박연생(朴衍生), 교리(校理) 김개(金漑), 아곡(莪谷) 박수량(朴守良), 눌헌(訥軒) 박상지(朴尙智), 돈암(遯庵) 박자온(朴自溫) 등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1799년(정조 23)에 간행된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권지하(卷之下) 와 1964년에 간행된 《호남절의록》권지상(卷之上) 〈일도거의제공(一道擧義諸公)〉편에 기록이 보인다.
[참고문헌]
*호남절의록
*전라남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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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山家之說)/李恒福
余弱冠。切喜山家之說。廣搜諸書。遍閱無遺。稍稍窺其堂隩。然後洞然知其爲浪說。故遂棄不觀。盖其爲說。不過賓主拱揖之勢。龜雀龍虎之形。參之以聚散離合融結關鎖之法。而其要只在有情無情而已。至於八卦支干推挑01參錯方位向背逆順吉凶之說。尤後世之蔓言。而世之惑者。曲相拘禁。或過時不葬。或遠求奇域。沈迷背義者。何可盡數。故先儒於此。明有定論。以爲土色之光潤。草木之茂盛。則地之美者。如此則先靈安而子孫盛。斯可爲萬世之謨典也。司馬光,羅大經。宋之名儒也。觀大經之說曰。其所精擇。不過欲其水山回合。草木茂盛。使親之遺體得安耳。人之生也。壽夭賢愚。性分已定。豈天命反爲所轉移乎。溫公將葬祖父。諸父惑於術士。將亂昭穆之序。溫公厚賄術士。誑諸父。使得禮葬。其後家世猶光顯。故公益不信術士。自唐以後。禮重拜掃。至今遵而不廢。而猶循小家曲說。祖父子孫。各葬遠地。使後嗣廢掃絶香。樵牧無禁。豈所宜哉。余之先塋。兆域陜隘。卜葬漸廣。更無餘地。常念我死之後。子孫殘微。何得別作他山。以樹塋域。以爲深憂。一日。偶與朴敎授尙義。語及此事。朴仍言我昔過抱川。得見貴塋。今所葬者。只卜支山。至於本宗福地。棄而不用。心常怪之。余聞之。躍然大喜。卽令擢姪備馬。迎朴往觀抱川。卜得其山而定爲萬古宅。仍載其說。以爲後考。我死之後。諸子唯當按式定兆。卜日而葬可也。敢有橫生異議。以亂家訓。視此小說。
[01]挑 : 排
[자료문헌]
*白沙先生別集卷之四>雜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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