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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곡서원(聖谷書院) / 미복설 서원

야촌(1) 2016. 2. 20. 16:10

■ 성곡서원(聖谷書院)

   [소 재 지] : 전라북도 임실군 덕치면 사곡리

   [배향인물]  : 이 천(李 蒨) 이제현(李齊賢) 이정견(李廷堅) 이항복(李恒福) 이두연(李斗然) 이 주(李 宙)

   [창건연도] : 1784년(정조 8)

 

●연 혁

  본 서원은 1784년(정조 8)에 ‘덕천사(德川祠)’라는 사우로 처음 세워졌다가 1868년(고종 5) 전국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그 뒤 1918년 사곡리 자경동(自耕洞)에 중건되어 ‘성곡서원’이라 이름 하게 되었는데 1938년 화재로 불타버렸다.

 

이 서원에는 문효공 국당 이천(文孝公 菊堂 李蒨)을 주벽으로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 화암 이정견(華菴 李廷堅),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정리당 이두연(靜履堂 李斗然), 삼수재 이주(森叟齋 李宙)를 배향하였다.

 

●배향인물 소개 

  1)주벽-이천(李蒨, ?∼1349)

   출생에 관하여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세기(世基)의 아들이다. 그의 자는 군실이고, 호는 국당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그는 1299년(충열왕 25) 국자시에 수석으로 합격한 뒤 충숙왕 때 우사보가 되고, 1343년(충혜왕 복위4) 첨의평리상의(僉議評理商議)에 승진하였다가 다음해 동지공거(同知貢擧)를 겸했다. 이 해 충목왕이 즉위하자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서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가 이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다. 1345년(충목왕 1) 첨의참리를 거쳐 월성군에 봉해졌다.

 

祝文 : 百世英風 士林宗謨 千古聖谷 遺風不沫 扶義存社 闡學衛道 澤及後蒙 永垂矜式

 

2)이제현(李齊賢, 1287∼1367)

   고려 후기의 학자·정치가.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역옹(櫟翁). 고려 건국 초의 삼한공신(三韓功臣) 금서(金書)의 후예이지만, 아버지 진(山)이 과거를 통해 크게 출세함으로써 가문이 비로소 떨치기 시작했는데, 진은 검교시중(檢校侍中)에까지 올랐다.

 

정치가로서의 그는 당시 고려가 원의 부마국(駙馬國)이라는 현실을 시인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국가의 존립과 사회모순의 광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급격한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온건한 태도로 현실에 임하였다. 당시 복잡한 정치상황 아래에서 원과 고려를 넘나들면서 활약해 최고의 지위에 오르지만, 화를 당하거나 유배된 적이 없었다.

 

학자로서의 그는 뛰어난 유학자로 성리학의 수용·발전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우선 그는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백이정(白頤正)의 제자였고 ≪사서집주 四書集註≫를 간행해 성리학의 보급에 크게 노력한 권보의 문생이요 사위였다. 또한 그의 제자가 이곡(李穀)·이색의 부자였다는 학통(學統)으로 보아 그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그가 만권당에서 교유한 중국의 문인·학자가 성리학에 깊은 조예를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점에 비추어 중국의 성리학에 직접 접하면서 그것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수 있었으리라고 여겨진다. 충목왕 때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도를 강조한 것은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에만 경도되지는 않았고, 그 때문에 뒷날 성리학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문학부문에서 그는 대가를 이루었다. 많은 시문을 남겼는데, 시는 전아하고 웅혼하다는 평을 받았고, 많은 영사시(詠史詩)가 특징을 이룬다. 또한, 사(詞)의 장르에서 독보적 존재로 일컬어지고 있다. 고려의 한문학을 세련시키면서 한 단계 높게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한국문학사를 통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한편, 빼어난 유학지식과 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사학(史學)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민지(閔漬)의 ≪본조편년강목 本朝編年綱目≫을 중수(重修)하는 일을 맡았고, 충렬왕·충선왕·충숙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만년에 ≪국사 國史≫를 편찬했는데, 기년전지(紀年傳志)의 기전체를 계획해 백문보(白文寶)·이달충(李達衷)과 함께 일을 진행시켰으나 완성시키지 못하였다.

 

그의 저술로 현존하는 것은 ≪익재난고 益齋亂藁≫ 10권과 ≪역옹패설≫ 2권이다. 흔히 이것을 합해 ≪익재집≫이라 한다. 그는 이색이 그 묘지명에서 “도덕의 으뜸이요, 문학의 종장이다(道德之首 文章之宗).”라고 말한 바와 같이 후세에 커다란 추앙을 받았고, 경주의 구강서원(龜岡書院)과 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1376년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3)이정견[李廷堅, ?∼1409(태종 9)]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아버지는 고려 말의 정랑 육(毓)이다.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한 뒤 좌상시(左常侍)·밀직사사 등을 거쳐 조선 태조 조에는 간관을 역임하고, 태종 조에 첨서승추부사(簽書承樞府事)에 이르렀다.

 

1402년(태종 2)에는 예문관제학으로 우의정 성석린(成石璘)과 함께 전해의 고명인장(誥命印章) 하사를 사례하기 위한 대명사행(對明使行)을 수행하였다.

 

 

4)이항복(李恒福, 1556∼1618)

   자는 자상(子常)이고 호는 백사(白沙)·필운(弼雲)·청화지인(淸化眞人)·동강(東岡)·소운(素雲)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그는 1556년(명종 11) 고려 문하시중 제현의 후손이자 참찬 이몽량(李夢亮)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580년(선조 13)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권지부정자를 거쳐 다음 해 검열이 되고 1583년 사가독서를 하였다.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589년 예조 정랑으로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다스리기도 하였으며 다음 해 이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평란공신 3등에 올랐다.

 

다음 해 정철의 죄를 처리하는데 태만했다는 죄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도승지에 기용,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비를 개성으로, 선조를 의주로 각각 호종하였으며, 두 왕자를 평양으로 호위하기도 하였다.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602년 오성부원군에 봉해졌다.

 

1604년(선조 37) 호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1617년 폐모론이 대두하자 이에 극력 반대하다 관직이 삭탈되었으며, 다음 해 북청에 유배되었다가 1618년(광해군 10) 배소에서 죽었다.

 

그는 임진왜란 중 난의 뒷수습을 위해 노력한 명신으로 활발했던 당쟁에 참여치 않은 채 붕당의 위기가 있을 때마다 그 조정에 힘썼다. 그가 죽은 해 복관되었으며,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그의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그의 저서로는≪백사집≫·≪북일천록≫·≪주소계의≫·≪사례훈몽≫·≪노사영언≫·≪유연전≫등이 전해지고 있다.

 

5)이두연(李斗然, 1595~ )

   자는 건백(建伯)이고 호는 정이당(靜履堂)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그는 1595년(선조 28)에 태어났다. 그는 한강 정구의 문인으로 1617년(광해군 9) 사마시에 합격한 뒤 학행으로 천거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이괄의 난에 거의(擧義)하여 공주에서 이수일과 함께 난군을 토평하였다. 정경세·정온 등의 추천으로 시강원자의에 임명되었으며 뒤에 이조참의·홍문관 직제학·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는 이흥발(李興發), 최온 등과 함께 창의하여 과천에 이르렀는데, 그 곳에서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의병을 해산하고 집으로 돌아와 사곡 성수산에 은거하였다.

 

6)이주(李宙, 1546~ )

   자는 대백(大伯)이고 호는 삼수재(三叟齋)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그는 1546년(명종 1)에 태어났으며 천자가 탁월하고 기우가 청준하였다고 한다. 율곡 이이와 교유하였고, 학행으로 천거 찰방을 거쳐 영변대도호부사가 되었다가 평안감사를 역임하였다.

그는 왜적의 침략에 대비하여 양병을 할 것과 군사훈련을 주장하는 소를 임금에게 올리기도 하였다. 이 소로 말미암아 그는 능주로 귀양갔다. 그 뒤 유배에서 풀려나와 두문자정하다 죽었다. 그가 죽은 뒤 조정에서는 그에게 이조판서를 추증하였다.

 

참고-임실군지199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