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대한제국. 근대사

일본 천리대서 잠자는 선조들의 영정

야촌(1) 2016. 3. 7. 00:29

(174)선조영정 | 일본 천리대서 잠자는 옛 숨결

 

중앙일보] 입력 1968.11.30 00:00 | 종합 3면 지면보기

 

우리나라 역대 명인의 초상화2백여 점이 일본의 천리대박물관에 소장돼 있다는 최근의 소식은 학계뿐만 아니라 온 국민에게 충격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덕수궁미술관·서울대박물관등 국내의 여러 박물관에 간수되고 있는 초상화가 고작 1백여점에 불과한데비하여 천리대소장의 그것은 굉장 한 게 아닐 수없다.

 

그중 1백여명에 달하는 선조의 모습은 이제 새롭게 대하게된 것이다. 그러나 아쉽고 분하게도 그것은 이미 남의 것. 우리에게 피와 숨결을 물려준 우리의 조상임에도 그 영정을 우리가 모실 수 없게 됐다.

 

● 5년 전 천리대에 후손의 청으로 공개

 

근엄 속에 구수한 인품 | 어버이모습 그대로…지금은 남의 땅에

 

천리대는 5년전 이 한 아름의 보물을 입수했다. 그러나 전시하기는 커녕 금고에 넣어 극비에 붙여뒀다. 그곳 박물관장도모르게 학장이「키」를 갖고 있다가 선조의 모습을 뵙기 원하는 후손의 간청에 못이겨 비로소 공개한 것이다. 

 

일부러 일본에 가서 이를 조사,「필름」에 수록해온 육군사관학교 이강칠 박물관장이 전하는 말이다. 그들은 그게 남의 조상임이 문제되지 않는다. 벌써 그것은 진귀한 미술품으로서 높이 받들고 있는 것이다.

 

● 역대명인 2백명 신라의 얼굴까지>

 

이들 초상화는 신라 말의 대학자 최치원으로 시작해 1백년 전 이조말의 대신 조령하에 이르는 역대 명인들이다. 고려 말의 안 향, 이제현, 이 색, 정몽주는 물론 황희, 김시습, 이덕형, 송시열등 역사에서 빛나는 이조의 명신들이 포함돼있다.

 

이름이 밝혀진 초상화가 1백20점. 그 밖의 80여점은 주인공의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지만, 모두 명인임에 틀림없다. 본시 정삼품이상의 고관이 아니면 나라의 화원에게 부탁해 초상화를 그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 의관 단정한 남자들인데 단 한폭 여인의 초상화가 거기 끼여 있어 이채롭다. 50대로 보이는 부인은 머리에 조바위를 썼고, 비단 저고리 위에 장의를 걸쳐 입고 두 손을 모아 공손히 앉아있다.

 

얼굴에서 후덕한 기품이 넘치는-우리의 가정에서 따뜻이 느끼는 어머니, 혹은 할머니의 모습 그대로이다. 화폭 머리의『경제부인 이씨존오녀』란 기록으로 보아 고려말의 문신 이존오의 따님. 세종 때 영의정 벼슬에 올랐던 하연(1373∼1454)의 부인이라 남편의 벼슬에 따라 경제부인이란 존칭을 받고 있다.

 

● 여성으론 최고품 왕후도 초상 없어.

 

도대체 여성으로서 초상화를 남겨 놓았다는게 진귀한 일이다. 덕수궁미술관소장의『운낭자22세상』이 여성초상화로서 유일하게 전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백여년 전 의기의 사당에 추모해 모셨던데 불과하다. 이조시대엔 왕후라도 초상화를 남기지 못했던 것이다. 

 

경제부인이 유독 초상화를 남길 수 있던 것은 고려시대의 유습이 조선 초까지 미친것으로 서화 전문가 최순우씨는 해석한다. 어쨌든 옛날의 우리나라 여성으로서 가장 오래된 초상화요, 인물을 앞에 대하고 실제 묘사한 점에서도 유일한 작품이다.

 

● 진귀한 의상자료 머리장식도 화려.

 

의상전문가들은 또 다른 면에서 높이 평가한다. 그림은 고사하고 기록조차 찾아보기 힘든 당시 여성의 의상에 대하여 획기적인 자료로 지목되는 것이다. 굳이 예복차림이 아니요, 평상의 단정한 옷 차림이란 점은 더욱 값진 증거로 인정받는다.

 

머리는 아마 큰머리를 얹어 비녀와 구슬채등 장식품으로 화려하게 꾸몄다. 까만 비단으로 감싼 것은 조바위의 전신. 저고리는 비단겉저고리 이외에 속저고리 들을 받쳐 입었는데 동정이 길게 내려와 옆구리에서 섶을 여민 고풍의 것이라고 석주선여사는 설명한다.

 

이러한 초상화의 일부는 국내에 있는 것과「더블」되는 것도 적지 않다. 천리대의 그것은 원래 국내의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것의 모사본인 까닭이다. 대개 2백 년 전쯤일까. 개중에는 그 이전의 작품도 포함됐을지 모른다. 

 

헌종 때, 조대비의 친정으로 세도를 누렸던 조만영 조인영형제가 모아 화첩으로 묶어 가보로 물려줬던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 일본 간 건 슬픈일 반환교섭 벌여야.

 

한 결 같이 발이 고운 견에 한지를 배접해 채색으로 그렸다. 본시 진채인 것은 진채로, 담채는 담채대로 복사하되 30×50센티의 소폭으로 하여 상반신만 옮겨 담았다. 규모는 작지만 이 같은 초상화 화첩은 국내에도 몇 책 전 하는게 있다. 

 

선현의 모습을 통하여 그 얼을 되새기고 이어받으려는 뜻있는 이들의 유산이다. 또 그것은 값비싼 댓 가를 지불하고 얻은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커다란 자랑이었다. 능히 한가정의 보배가 아닐 수 없다.

 

천리대로 들어간 화첩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도 실은 그것을 끔찍이 아끼는 마음에서 였으리라. 한일합방당시 영친왕 이은씨의 시종무관이 되어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조동윤(조영하의 아들)씨는 결코 가보를 남의 손에 넘겨주기 위해 지니고 떠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죽고 그의 아들 조중구씨는 수년전 일본에 귀화하면서 선현에 대한 애착마저 돌볼 겨를이 없었으리라. 양도의 형식은 대외적으로「기증」이라 하지만, 얼마쯤의 돈과 바꾸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문화재위원희 김상기위원장은『귀화하는 거야 개인적인 일이겠지만, 우리문화재까지 일본에 바친 것은 친일이상의 행위』라고 못내 아까와 하며 국민의 이름으로 반환 요구할 뜻을 비친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재는 지금도 줄기차게 밖으로 흘러 나가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수천 점 전해온 듯 남에 보이기 꺼려

 

현재 우리나라엔 수천 점의 옛 영정이 전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아직도 방방곡곡의 서원이며 사당에 간수돼 오는 초상화가 적지 않고 남에게 보이기조차 꺼리면서 비장하는 후손들이 허다하다. 그렇건만 개중엔 조상의 초상을 거리로 내다파는 이가 있고, 특히 동란을 겪는 동안에 잘못 흘러나온 것도 적지 않다.

 

우리민족 전통에는 초상화의 매매란 있을 수 없다. 남의 조상이라고 해서 사는 일도 없다. 걸어 두다가 낡으면 새로 복사하되 전 것은 소각해 버렸다. 그런 형편이라 우리문화재의 약탈에 혈안이 됐었던 일제도 여기엔 아예 손쓰지 못했다.

 

● 동양제일의 세필 사마귀 곰보까지.

 

해외로 나간 초상화는 일본보다 오히려 구미 쪽이 더 많다. 미국을 비롯하여「프랑스」독일 영국 등에 널리 퍼져나갔다. 그들은 동양의 초상화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을 한국에서 찾아낸 것이다. 

 

근엄한 표정임에도 구수한 애정을 전해주는 한국의 초상화는 우리풍토 그대로 맑고 담박하다. 

주름살과 수염을 낱낱이 헤일 듯 하고 사마귀와 곰보까지 분명히 표현한 얼굴은 세필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데 비해 옷의 표현은 대범하고 간략 되어 있다. 과장과 허식을 모르는 이 초상화에 구미의 안목은 한껏 탐내고 있다.

 

● 해외로 계속유출 보존대책 세워야.

 

가장 오래된 초상화로서 고려 때의 그림인 익재와 매헌의 영정은 이미 국보로 지정돼있다. 그밖에 임란전의 것은 조말생 황정혹 등 3, 4점에 불과하며, 대개 조선후기의 작품이거나 중모본들 이들. 문화재는 국민이 돌보지 않는 틈에 무수히 계속 해외로 유출되고 있어 이의 보존 책이 시급한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