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대한제국. 근대사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의 재임기간 및 추진정책

야촌(1) 2016. 2. 26. 16:50

조선총독부 청사

 

 

조선 총독부 휘장

 

■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의 재임기간 및 추진정책

 

1905년 11월 18일 을사늑약 5개 조항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조선의 을사5적(敵) 사이에 이루어지고 초대통감으로 부임, 지배 와 간섭이 시작 되다.

*을사 오적 :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

 

 

순위 이름 재임기간 추진정책 비고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1906.03.02~
1909.6
을사늑약과 고종황제의 양위, 한일합방 등 악명 높은 지배와 간섭이 강화되던 중 1909. 10월 만주를 방문하다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의사에 의해 10월 26일 사살됨. 이토히로부미는 일본에서 네 번 수상을 재임 후 부임함
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
(曾禰荒助)
1909.6.14~
1910.5
순종황제의 실권을 빼앗다.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의사에게 피살됨. 육군대장출신,
3대
통감
데라우치마사타케
(寺内 正毅)
1910.5.30~
1910.10
한일합방을 성사시킴 한일합방성사 후 초대총독에 오름.
초대
총독
데라우치마사타케
(寺内 正毅)
1910.10.01.~
1916.10.14
자신의 기존 조선통감 자리를 계승하여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 뒤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10월 1일, 초대총독으로 정식 취임하여 본격 무단통치가 실시 됨 육군대장,원수, 수상/일차세계대전
2대
총독
하세가와 요세미치
(長谷川 好道)
1916.10.14~
1919.08.12
3·1 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토지를 강제로 빼앗은 등 무단통치로 악명 높았으나 병약하여 불과 3년 만에 교체되었다. 육군대장, 원수/일차세계대전
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
(齋藤 實)
1919.08.12~
1927.12
형식상의 문화통치정책을 추진하여 기존의 강압적 통치에서 회유적 통치로 방향을 돌렸다. 해군대장,수상
임시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 
(宇垣 一成)
1927.12 경제 개발 정책을 표방하면서 조선어 교수 시간을 대폭 축소시키는 등 민족문화 말살정책을 폈다. 육군대장
4대
총독
야마시나 한조
(山梨 半造)
1927.12~
1929.08.16
조선총독부의옥(朝鮮總督府疑獄) 사건에 관련되어 사임하였다. 육군대장출신
5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
(齋藤 實)
1929.08.17~
1931.06.16
형식상의 문화 통치 정책을 추진하여 기존의 강압적 통치에서 회유적 통치로 방향을 돌렸다. 3대후 재임
6대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
(宇垣 一成)
1931.06.17~
1936.08.04
경제 개발 정책을 표방하면서 조선어 교수 시간을 대폭 축소시키는 등 민족 문화 말살 정책을 폈다. 1927년 임시총독 후 재임
7대
총독
미나미 지로
(南 次郎)
1936.08.05~
1942.05.28
내선 일체를 주장하며, 지원병제도를 실시해 강제징용으로 청년들을 중일전쟁에 참전시켰으며, 일본어사용, 창씨개명, 황국신민화 구호 등의 민족 말살정책을 강행하였다. 육군대장출신/태평양전쟁
8대
총독
고이소 구니아키
(小磯 國昭)
1942. 05.29~
1944.07.21
학도병제도를 실시하여 조선청년들을 총알받이로 사용하고,1944년 도조 히데키가 총리직에서 물러남으로 총리가 되었다. 육군대장. 수상/태평양전쟁
9대
총독
아베 노부유키
(阿部 信行)
1944.07.22~
1945. 09.28
전쟁수행을 위한 물자와 인력의 수탈에 총력을 다하였다. 국민의용대를 편성하여 비협조적인 조선인에 대한 대규모 탄압과 검거를 자행하였다. 육군대장, 수상/태평양전쟁

 

1910년 8월 조선을 침탈한 한반도를 통치한 조선총독은 9대에 걸쳐 모두 8명이다. 이들 가운데 사이토만 유일하게 해군대장 출신이었고 나머지 7인은 모두 육군대장 출신이었다. 또 사이토는 제3·5대 두 차례에 걸쳐 조선총독을 지냈다.


또 7대 미나미, 8대 고이소는 일제 패망 후 극동군사재판(일명 도쿄재판)에서 ‘A급 전범’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각 개인별로 약술하면 아래와 같다.


<사이토 마코토>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병약한 2대 통감 소네(曾禰荒助)에 이어 3대 통감으로 부임했던 자로 1910년 강제 한일병탄 후 앉은 자리에서 초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했다. 당시 현직 육군대신이었던 데라우치는 총독부임 후 1916년 일본 내각총리대신으로 전직할 때까지 혹독한 무단통치를 단행했다. 


그는 특히 부임 초기 소위 ‘105인사건’을 꾸며 민족지사들을 대거 탄압했으며, 토지조사사업을 통한 경제수탈은 물론 조선의 민족정기와 전통문화 말살을 위해 51종 20여만 권의 책을 압수해 불태우기도 했다.


2대 하세가와는 이토 통감 시절 한국주차군사령관으로 근무했던 자로 데라우치에 이어 무단통치를 정착시킨 장본인이다.


1919년 3.1만세의거가 일어나자 군대를 동원해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무자비한 탄압과 학살로 일본 내에서도 말썽이 돼 부임한지 3년만에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조선총독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그는 평소 정치에 관심이 없어 순수한 무관으로 일생을 마쳤다.
하세가와에 이어 제3대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는 해군대장 출신인 그는 문사(文士)적인 이미지로 소위 ‘문화통치’를 표방했다. 


그러나 ‘문화통치’는 3.1만세의거로 폭발한 조선민족의 저항을 잠재우기 위한 선전술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는 무단통치의 상징인 헌병경찰제를 폐지하고 대신 보통경찰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헌병경찰들을 예편시켜 보통경찰에 충원시키고 ‘1면 1주재소’ 방침을 세워 폭압기구를 확대 개편하였다.


또 자치제를 도입해 실시하였으나 이 역시 허울뿐 이었다. 부임하던 날 그는 서울역에서 강우규 의사가 던진 폭탄을 ‘선물’로 받았다.


4대 야마나시는 예비역 육군대장 출신으로 평소 돈을 밝혀 ‘배금장군’으로 불렸다. 이 때문에 부임 전부터 조선총독 임명에 대한 배척운동이 일었으며, 육사시절 그의 단짝이었던 다나카의 도움으로 겨우 임명됐다.


그 후 부산 미두취인소(米豆取引所, 미두거래소) 설립허가를 둘러싸고 5만원을 뇌물로 받은 사실, 소위 ‘야마나시 총독
독직(瀆職)사건’에 연루되어 사임하였는데 재판에서 무죄를 받고 석방되었다. 총독 재임시절 본국과의 왕래 때 ‘배 타기가 싫다’며 울산과 여의도에 비행장을 만들기도 했던 그는 특이한 외모와 괴팍한 소유자였다.


<우가키 가즈시게>


6대 우가키는 1924년 이후 4 차례에 걸쳐 육군대신을 지낼 정도로 군부의 실력자였다. 그러나 이른바 ‘3월사건’과 워싱턴회의에서 군비축소에 합의한 것 등으로 군부 강경파의 반발에 부닥쳐 수상 취임에는 실패했다.


1931년 60대 중반 나이에 조선총독에 부임한 그는 젊고 경제 분야에 밝은 이마이다(今井田 淸德)를 정무총감으로 데려와 조선의 안정화 및 체제내화에 주력했다.


우가키는 우선 조선의 공업화를 추진해 장차 대륙침략의 발판으로 삼았으며, ‘정신교화’라는 이름하에 조선인들의 황국신민화를 적극 추진했다. 역대 조선총독 가운데 별로 이름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는 5년간의 재임기간 중 가장 다양한 일을 한 총독이라고 할 수 있다.


7대 미나미는 사이토와 함께 조선총독의 얼굴격으로 통하는 사람이다. 1930년에 육군대장으로 승진한 그는 육군대신, 관동군 사령관을 마치고 1936년 예편과 함께 조선총독에 부임했다. 


그는 ‘조선통치의 2대 목표’로 재임 중 일왕의 조선방문과 조선에 징병제를 실시를 정했는데, 전자는 성사시키지 못했으나 후자는 이루었다.


<미나미 지로>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미나미는 전시체제를 빙자하여 사회통제를 한층 강화시켰으며, 지원병제도 실시 및 조선교육령 개정을 비롯해 ‘황국신민의 서사’ 제정, 일어 상용(常用), 창씨개명, 신사참배 등 황국신민화 정책을 강도 높게 추진했다. 조선총독 퇴임 후 추밀원 고문관으로 지내던 그는 일제 패망 후 전범재판에서 무기형을 선고받았으나 가출소 후 사망했다.


8대 고이소는 전임 미나미가 다져놓은 체제를 바탕으로 태평양전쟁 개전 이후 조선을 ‘결전체제’로 끌어올린 장본인이다. 재임 중 그의 주요임무는 전쟁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 동원이었는데, 이를 위해 그 자신이 수시로 공장이나 광산을 방문해 작업을 독려하기도 했다. 바로 이 시기가 조선인들에게는 일제 기간을 통틀어 가장 고통스런 시기였다.


일제 패망 1년 전에 부임한 마지막 9대 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유일하게 수상을 역임한자였으나 능력·개성 면에서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는 인물이다. 1945년 9월 9일 일본을 대표하여 연합국 대표 하지중장에게 항복문서를 전달한 그는 아내와 손자 2명을 데리고 부산에서 80톤짜리 배에 짐을 가득 싣고 일본으로 달아나다 폭풍을 만나 물건을 다 버린 뒤 겨우 부산으로 되돌아오는 해프닝을 빚기도 했다.


끝으로 마지막 조선총독이었던 아베노부유키(阿部信行ㆍ78세ㆍ1875~1953)가 한반도를 떠나며 남긴 마지막 저주 글이다. “우리는 비록 전쟁에 패했지만, 조선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인이 제정신을 차리고 옛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은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놨다.
조선인들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는 다시 돌아온다.”

우리국민은 일본식민의 마지막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의 말을 항상 잊어서는 아니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