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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사림의 학맥과 서계 이득윤과의 관계에 대한연구

야촌(1) 2015. 12. 18. 00:22

청주 사림의 학맥과 서계 이득윤과의 관계에 대한연구

 

이종관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미래예측학과

 

요약본 연구의 목적은 16-17세기 청주사족의 동향을 이해하기 위한 사례연구의 하나로 선 행연구와 경주이씨 익재공파 대동보를 중심으로 서계 이득윤(1553~1630)의 생애와 학맥을 살펴보았다.

 

서계 이득윤은 일찍이 부친 섬계 이잠과 서기 박지화로 부터 수학하였으며, 학문의 근본지향을 '위기지학'에 두었다. 그리하여 그는 소학을 특히 강조하였으며, 소학에 수록된 여씨향약을 보급하여 주자학적 세계를 구현하려하였다.

 

더욱이 부친의 뒤를 이어, 후생을 훈도하는 것을 자기의 책무로 삼아서 청주지역의 교육에 힘썼다.

그리하여 서계는 수기에 힘을 쏟았던 유학자 일 뿐만 아니라 치인, 계도에 있어서도 사회적 책임의식을 다 하였던 실천적 사림으로서 17세기 전반 청주지역의 재지사족의 학문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이득윤은 문인 이덕수와 함께 낭성 팔현의 일인으로 청주지역에 기호학파와 호서사림이 형성되는데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그는 신항서원의 창건에 주역으로서 청주지역의 기호학파가 자리 잡을 수 있는 사회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고, 당파를 가리지 않고 사계 김장생 선생의 예학정신을 계승한 기호사림이다.

 

자신의 문인 이었던 이덕수가 기호학파의 학맥과 연이 닿을 수 있도록 징검다리가 되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그의 역할을 통하여 김장생, 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와 호서사림은 비교적 쉽게 17세기 후반부터 청주지역에 그 기반을 마련하고 세력을 형성 할 수 있었다.

 

1. 서 론

 

1.1 연구의 필요성

 

재지사족에 관한연구는 향토사회사 연구의 하나로 각종자료를 활용하여 전국 각 지역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조선시대 청주지역에도 여러 사족들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이들 사족 중에 토착세력으로 확고한 기반을 갖춘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조선 전기에 입향 하여 혼인과 관직진출 등 을 통해 점차 그 기반으로 마련하면서 유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다른 지역과는 달리 청주지역의 재지사족에 대한연구는 김장생, 송시열등 기호학파를 중심으로 한 호서사림의 테두리 안에서 파상적으로 연구 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17-18세기의 청주지역에서 활동했던 호서사림에 대한연구와 비교하면 그 이전의 청주사족에 동향에 대한연구는 아직 시작단계에 머물고 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우암 송시열 이전에 형성 되었던 초창기 기호사림, 특히 15-16세기 청주사림에 대한연구의 필요성은 꾸준히 제기 되어왔다. 15-16 세기 청주사림에 대한 연구로 [1]은 호서사족 친인척 집단의 혼인관계”를 검토 하였고, [5]는 신항서원의 건립과정을 중심으로 청주사림에 대해 고찰 하였다.

 

[1]은15-16세기 청주지역의 사림을 이끈 핵심세력 이었던 세칭 '낭성팔현'이라는 인물들이 조선후기 우암 송시열

     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의 형성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4]는 모계 조강(1527~1599”을 중심으로 청주사족의 동향을 살펴보았다.

    서계 이득윤(1553-1630)은 낭성팔현의 일인으로 청주지역 사림의 구심체이던 신항서원에 배향된 인물이다.

 

조선중기 청주지역에서 활동 했던 문인이자 교육자로 해동명신록과 국조인물고에 수록되어있으며, 청주지역 사림들의 정신적 스승으로 추앙되어 청주지역 선비문화의 형성에 바탕이 된 인물이다.

 

“서계 이득윤은 괴산군수로 선정을 베풀었으며 역학에 능통 하였고 거문고악보인 현금동문류기를 남긴 인물로만 알려져 있을 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 하였다. 이러한 원인으로는 서계가 출사에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내세울 만한 관력이 없다는 점과 청주지역에 기반을 두고 활동한 지방 문인으로 현전하는 문집이 부족함 때문으로 보여 진다[2].

 

서계이득윤에 대한연구는 대부분 그의 문학과 예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6]은 이득윤이 지은 육가인 서계육가. 옥화육가를 다루면서 서계 이득윤의 생애에 대해서 고찰 하였다.

 

[2]는 서계 이득윤의 생애”를 고찰하고 그의 시 세계를 학문과 사상 이라는 두 축에서 살펴보았다.

[3]은 한국 음악사에서 이득윤이 가지는 위치와 현금동문류기가 가지는 의미를 알아보기 위하여 이득윤의 생애와

     악학사상에 대해 고찰하였다." 이외에도 다수의 논문이 이득윤의 문학과 예술에 대해 연구 하였으나 대부분의

     연구가 그의 작품을 중심으로 고찰 하고있다.

 

이 논문은 청주지역 향촌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사례연구의 하나로 청주지역 사학자들의 선행연구와 경주이씨 익재공파대동보를 중심으로 서계 이득윤의 활동을 살 핀 것이다.

 

본 논문의 연구목적과 연구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서계 이득윤의 가계를 살펴봄으로써 경주이씨의 청주 입향 과정을 확인하고, 이득윤의 수학과정과 생애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 다음 이득윤의 학맥과 문인관계를 살펴 봄 으로서 그와 청주사림과의 관계를 확인 하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서계 이득윤이 청주사족에서 가지고 있는 위치와 역할을 확인하고, 17-18세기의 청주지역에서 활동했던 호서사림의 형성에 미친 영향을 밝히고자 한다.

 

이 연구는 서계 이득윤을 통 해 청주사족의 동향을 이해하기 위한 사례연구에 불과하며, 앞으로 더 많은 사례가 밝혀진다면 청주사족의 동향에 대한 실체가드러날 것으로 생각한다.

 

2. 서계 이득윤의 가계와 생애

 

이 논문은 청주지역 향촌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사례연구의 하나로 청주지역 사학자들의 선행연구와 경주이씨익재공파대동보를 중심으로 서계 이득윤의 활동을 살 핀 것이다.

 

본 연구는 서계집에 실린 행장과 [6]가 정리한 서계선생연보 그리고 가승을 중심으로 살펴본 [2]의 연구와 [8]을 바탕으로 이득윤의 생애 에 대해서 고찰하고자 한다.

 

이득윤의 본관은 경주이다. 경주이씨는 알평을 시조로 하고 있는데, 이알평은 양산 촌장의 신분으로 신라 시조왕(박혁거세)의 좌명공신이 된 인물이다.

 

경주이씨 후손들은 대대분이 고려 말 대학자였던 익재 이제현(1287~1367)을 중시조로 삼고 자신을 익재공파 라고 부르고 있다. 익재공파에 해당하는 경주이씨 집안은 많이 있겠지만 청주로 이거하여 청주사족으로 자리 잡은 경주이씨는 계유정난과 관련된다.

 

이알평의 23세손인 창평공 이공린은 박팽년(1417~1456)의 딸과 결혼하여 처향 이었던 청주 수락동(현재 청주시 미원면 가양리)으로 이거하여 정착한다.

 

그는 어려서 부터 재질이 뛰어났고 포부가 원대 하였으나, 장인 박팽년의 죄에 연좌되어 몇 년간 관직에 나 갈수가 없었다. 그 뒤에 사면되어 무반의 직을 잠시 가졌다가 천거로 통례원인의가 되고, 한성부참군을 겸하였다.

 

이어 흥덕현감, 함열현감 ,창평현감을 역임하면서 향리를 잘 통솔하고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아들 이원의 죄에 연좌 되어 해남에 유 배 되었다가 중종반정에 의하여 풀려났다.

수차례 자신의 죄가 아닌 일에 연좌 되었고 또 나이가 많아 관직에 있기를 바라지 않았으므로 청주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이공린은 오, 구, 원, 타, 별, 벽, 경, 곤 8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여덟 형제가 모두 총명하고 강직하여 세칭 '팔별'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8형제의 대부분이 부모 생전에 바른말을 간 하다가 사화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거나 형의 고통으로 죽었고, 또는 유배를 받아 각자 유배지로 흩어지게 된다.

 

이중 막내이며 이득윤의 조부가 되는 곤은 현 청주시 미원면에 자리를 잡았으며 곤의 넷째 아들인 잠이 서계의 아버지 이다. 경주이씨는 “이공린”을 시작으로 청주에 입향 하였고, 이후 덕수이씨, 파평윤씨, 남양홍씨, 초계변씨 등과 통하면서 송시열의 학풍이 청주지역에 자리 잡기 이전 청주사족의 학문에 영향을 끼쳤다.

 

[4].서계 이득윤의 부친인 섬계 이 잠(1528~1575)은 16세기 후반 청주 사족의 학문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섬계 이 잠은 진사로서 청주 수락동에 섬계 학당을 열어 많은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 냈다.

 

그는 이득윤, 이대건, 나윤충, 홍순각, 변유청, 변유정등 71명의 후학을 양성 하였으며, "섬계학당에 왕래하면서 강학한 인물도 변경복, 신발, 신경행, 김곤, 노일원 등 22명 이었다. 제자 중에서 문과 급제자는 4명, 무과 급제자는 6명, 사마시 입격자는 19명이 배출 되었다.

 

문인들의 본관을 보면 경주이씨 족인이 12명으로 가장 많고, 경주김씨 8명, 청풍김씨 5명, 안정나씨 4명 등 대체로 고르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섬계 이잠의 명망이 청주지역에 많이 알려지고, 또한 아직 당쟁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 된다[5].

 

이상의 연구에서 우암 송시열의 학풍이 청주지역에서 자리 잡기 이전에 서계 이득윤의 부친과 함께 향촌사회를 이끌어 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선행연구의 대부분이 서계 이득윤의 문학적 이해와 음악적 이해의 연구 이다. 그러나 서계의 부친은 청주지역에 많은 인재를 배출한 교육자임을 알 수 있다.

 

이득윤의 자는 극흠, 호는 서계이다. 선생의 초휘를'덕윤' 이라 하였는데 이 때문에 관련된 연구에는 이득윤과 이덕윤의 표기가 혼용되고 있다. 선생은 1553년(명종 8) 현 충북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석화리에서 섬계 이잠(1660~1706)과 진주 강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득윤은 그의 나이 6~7세 부터 부친에게서 가르침을 받기시작 하였는데, 이미 그때부터 어른스러운 도량이 있고 책을 받으면 스스로 읽고 기억하려 애쓰는 것을 보고 그의 부친이 기특해 하면서 "이아이가 뜻을 돈독히 하고 게으르지 않으면 대유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득윤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관직생활 보다는 학문에 전념 하였으며 어려서는 정구(1543~1620)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연마 하였다 약관의 나이를 넘자 화담 서경덕의 문인이었던 서기(1523~1591)와 박지화(1513~1592)를 직접 찾아가 그들의 문하에서 수학 하였다.

 

1575년에는 부친상을 당해 삼년상을 모시면서 묘하에 조그만 집을 짓고 '추원'이라는 편액을 써 붙였다[8].

1580년 그의 나이 28세때, 초취인 파평윤씨와 사별하게 되었으며, 또한 이해에 모친상을 당했다.

1600년 48세에 왕자사부에 발탁 되었으며 .권학잠을 지어 올리자 선조께서 칭찬하셨다.

 

1602년 50세에는 선조께서 주역에 주를 단 것이 오류가 많아 교정을 설국하라 명하자, 역학에 밝은 자를 가려 그 일을 담당하게 하였는데 이득윤이 그 선발에 우선적으로 참여 하게 되었다. 1604년 공조좌랑에 제수 되었다가 다시형조에 추천 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604년 52세에 의성현령에 제수 되여 어진정치를 베풀어서 선조로부터 표리고 2년 후인 1582년에 옥구 장씨에게 장가들었다.

 

1588년 36세에 장남 홍유를 낳았으며 그해에 진사에 합격하는 경사가 겹쳤다.

이득윤은 평소 과거공부 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으나 연로하신 부모님을 위해 뜻을 굽혀서 과거에 응시 한 것이었다.

 

1579년 45세에 학행으로 천거 되어 희릉참봉에 제수 한 벌을 하사받았다.

서계는 광해군 때에 시사가 변한 것을 보고 청주 옥화동에 들어가서 춘풍당 ,추월헌을 짓고 공부에 전념 하였다.

 

1611년 59세에 정인홍(1535~1623)이 이언적(1491~1553)과 이황(1501~1570)을 무고하자 이 소식을 들은 서계는 분개하여 삼남지역에 통문을 돌리고 정인홍을 배척 하였다.

 

1613년에 이이첨(1560~1623)이 인목대비를 폐하러 모의할 때는 "어찌 어머니 없는 나라에서 구차히 살 수 있겠는가 "하면서 분연히 관련 편지를 불에 던져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1622년 71세에 여러 현인들이 선생을 유일로 천거하여 지평에 비의되었다가 곧 공조정랑에 제수되었다.

그 해 9월 선공감 첨정에 승진되었으나 물러날 뜻을 보이자 특별히 어찬을 내려 우대하는 뜻을 보였다.

 

1624년 그의 나이 72세에 괴산군수로 부임하여 괴산군민의 폐단을 소상하게 적어 .괴산군민 .소 .를 올렸으며, 향약 법을 시행하여 백성의 윤리를 돈독하게 하였다. 서계는 그의 나이 78세에 타계 하였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그의 졸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괴산군수 이득윤이 죽었다. 처음의 이름은 덕윤이고 자는 극흠으로 경주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효행이 있었다. 반정 초에 공조정랑에 제수되어 부름을 받고 왔다가 뒤에 괴산군수로 제수되었다.

 

서울에 와 사은하는 길에 도성사람들의 음성을 듣고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아직도 쇳소리가 거세게 나오고 있으니, 난리가 끝이 안 났다."하였는데, 정묘에 이르러 그가 한 말이 과연 들어맞았다. 고을을 다스리는데 성적이 으뜸 이었으므로 상이 특별히 통정의 자급을 주어 포상하였다.

 

결국은 늙고 병들어 집에 돌아갔다가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78세였다(조선왕조실록 인조 8년(1630) 5월 28일) 서계의 묘갈명을 지은 이경석은 그가 예문관으로 있을 때에 서계의 상소문에서 오음이 그 조화를 상실했을 때는 변란이 생긴다고 하였는데, 얼마 안가서 이괄이 변란을 일으켰다고 적고 있다.

 

[8]선행의 연구에서는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서 서기, 박지화와 함께 수학 함으로서 새로운 학맥을 형성함을 알 수 있다.

     또한 몇 번의 출사의 기회가 있었으나 사양함은 출사하지 않고 학문에 전념함으로서 그의 사상은 “위기지학” 의 성향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평소 과거공부 하는 것 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으나 연로하신 부모님을 위해 뜻을 굽혀서 과거에 응시 한 것은 그가 상당한 효자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비록 72세에 괴산군수로 제수 되면서 선정을 베풀었으니 정치가의 일면을 알 수 있다.

 

나라의 어려움에는 자신에 의지를 확고히 하는 인물인 것이다.

서계 이득윤의 묘는 한남 금북정맥의 상당 산을 지나북향하여 현 충청북도 청주시 미원면 가양리 수락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의 태생지에는 지금도 선생이 식재하였다고 하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긴 세월을 지키면서 청아한 모습으로 마을을 수호하고 있다.

 

재취인 옥구 장씨와의 사이에서 3남 2녀를 두었으나 2남 1녀는 죽고 아들은 이홍유(1588~1671)이다.

이홍유 역시 조부와 부친을 이어 교육자로 활동 하였으며 산장에 추대 되었던 인물이다.

 

그의 문집인 둔헌집에는 600여수의 시가 실려 있으며 가승에는. 산민육가가 수록되어 있다.

사위는 이득윤의 문인인 변시망이다. 이득윤은 현재 청주의 신항서원, 옥화서원, 구계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3. 청주사림의학맥과 서계와의관계

 

3.1 청주사림의 학맥

 

이득윤의 학문적 원연은 부친 이잠의 가학과 서기, 박지화의 가르침에서 찾을 수 있다.

부친 이잠(1528~1575)은 일찍이 조실부모 하였으나 힘써 공부하여 39세에 진사가 되었다.

 

그러나 청주 벽서재로 은거하여 향리의 수재를 가르치는 것을 일삼았다 . 경사를 가르쳐서 날마다 고과하고 차례차례 법도가 있게 되자, 이에 원근의 학자들이 소문을 듣고 모인 자 가 성대하였다.

 

당숙의 고규가 있어서 재목에 따라 성취한 자가 거의 백 여인 이었다.

이잠은 영숭전 참봉과 동몽교관에 제수 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잠의 문인은 이대수 .이대건. 홍순각 등 72명이며 왕래하며 강학 한자는 김질중, 변경복, 신경행등 22인이다.

 

이들 문인들은 청주뿐만 아니라 제천, 보은, 목천, 서울 등 각처에서 모인 인물 들이었다.

이로 보건대 이잠은16~17세기 청주 사족의 학문에 큰 영향을 만나면서 비로소 유학이 정도임을 깨닫게 되었다.

 

홍천과 지리산, 계룡산근처로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 오로지 학문과 강학에만 전념하였다.

약관의 나이 끼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5].

 

서기(1523~1591는 본관이 이천, 자는 대가, 호는. 와고 청초로, 구당이다 .

어려서 부터 학문에 전념하여 제자백가는 물론 기술의 이론까지 통달 하였으며 선학을 좋아하였다.

 

서경덕, 이중호, 이지함에게 사사하였으며, 특히 이지함을 만나면서 비로소 유학이 정도임을 깨닫게 되었다.

홍천과 지리산, 계룡산근처로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 오로지 학문과 강학에만 전념하였다.

 

약관의 나이를 넘긴 이득윤은 .서기가 공주에서 유학을 업으로 하고 학문에 독실하다는 말을 듣고 가서 대학, 소학, 주역, 계몽 등의 책으로 질의한다. 그리고 수년 뒤인 1578년 26세에 다시 찾아가 논란하니 서기가 놀라서 학문으로 우리나라에 이름 난자가 그대가 아니고 누구리오? 라고 하였다[2].

 

이득윤은 그의 나이 22세에 역학에 밝은 수 암 박지화(1513~1592)를 찾아가 평소 명료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 질의 하였다. 박지화는 서경덕의 문하에서 예설과 주역을 배웠으며 특히 상수학에 몰두했던 인물이다. 당시 이미 문장과 조행으로 세상에 이름이 있었는데 청연(현 충청북도 청안)의 오속 촌에 있었기 때문에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박지화는 항상 사사로이 학자들 에게 말하기를 세간에 학문에 뜻을 둔 자가 어찌 한정이 있으리오. 그렇지만 역학에 마음을 두고 두루 깨닫고 정미한 자는 이아무개만한 이가 없다. 고 칭찬 하였다. 이득윤이 역학에 정미하다는 박지화의 평가는 훗날 서계학문의 중심축이 역학에 있다는 인식을 확고하게 심어 주게 하였다[2].

 

서계가 흠모 하였다는 고인 중에서 주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게 두드러진다. 그렇기 때문에 '공령지업' 보다는 오로지 위기지학 만을 강조 하였던 주자의 주장대로 그 역시 평생토록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 에만 전심 한 것이다.

 

그런 그가 노모가 생존해 계신 까닭으로 잠시 뜻을 굽혀1588년(선조 16) 36세의 늦은 나이로 진사에 합격 하였으나, 이는 연로하신 어머니를 위한 효심에서 우러난 것 이었지 본인 스스로 원했던 것은 아니다.

 

그의 평생 많은 관직이 주어졌으나 그때마다 사양 한 것은 그의 학문적 지향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인 것 이다.

선조에게 올린 .권학잠.에서"학문의 요체는 방심을 거두는 것 이라고 피력 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2].

 

16세기 청주사족의 학맥은 한훤당 김굉필(1454-1504) 모재 김안국(1478~1543), 서봉 유우(1473~1537) 규암 송인수(1499-1547), 동주 성제원(1506~1559) 모계 조강(1527~1599) 또는 화담 서경덕(1489~1546) 토정 이지함(1517~1578), 과 서기(1523~1591), 수암 박지화(1513~1592), 화천당 박춘무, 서계 이득윤으로 이어진다.

 

이들의 학풍은 김굉필의 문인처럼 소학을 중시하고 향약의 실시와 서원의 건립 등을 통해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구현하는데 적극적 이었다. 또한 주역을 강조하면서 개방적이고 절충적인 경향을 보이는데 ,이지함과 서경덕이 상수역, 술 수학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의병 활동을 한 박춘무 역시 침술에 뛰어나 등용 된바 있고, 이득윤은 역학에 정통하여 선조 대에 주역을 교정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4]. 서계는 학문의 요체를 터득하기 위한 방법으로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안으로는 덕성을 함양하는 근본으로는 소학을 읽어야 하고 밖으로는 격물치지를 위한 방법으로 사략 을 읽어야 한다고 하면서 이두 방법 이야말로 취도에 있어 지름길 이라고 하였다.

 

"소학의 강조는 결국 주자가 주장하는 성리학적 세계를 구현하는 하나의 방편이었으며, 동시에 그 당시사림들의 공통된 지향이기도 하였다[2]. 이상의 연구자들이 밝히듯이 16새기 청주사족의 맥은 김굉필 이후 박춘무에 이르기까지 성리학적 세계의 구현이 학문의 원천임을 알 수 있다.

 

3.2 서계이득윤과 청주지역의 사림

 

이득윤은 18세가 되던 해인1570년(선조3년)에 모계 조강(1527~1599), 진사 변경수와 함께 상의하여 신항서원의 모태가 되는 유정서원을 창건하였다. 이로써 보건대 이득윤은 약관이 되지 않은 나이에 이미 청주지역에서 명망 있는 인사로 거론되고 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유정서원 창건에 함께 앞장선 조강과 변경수는 모두 이득윤과 종유한 인물로 청주지역의 재지사족이었다. 한양조씨는 기묘사화 이후 조강의 부친 조승윤 을 청주로 이거하여 정착하였고, 안동김씨 밀양박씨등과 통혼 하면서 청주에서 점차 유력한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초계변씨는 중종대 기묘사화이후변경수의부친인 변충남이 입향하여 안동김씨, 전의이씨, 경주이씨, 고령신씨, 은진송씨 등 청주지역의 유력사족과 혼인하면서 정착하였다. 이득윤도 교육자로써 16세기 청주사족의 형성에기여한 부친의 영향을 받아서 무엇보다도 교육에 힘을 쏟았다. 일찍이 진사에 입격한 이후로 다시 영달할 뜻이 없었으며 유학을 흥기 시키고 후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책무로 여겼다.

 

그리하여 서계의 풍문을 들은 원근의 선비들이 찾아와 배움을 청하였다. 서계자신도 나이가 80세가 가까워옴에도 책 읽기 를 그만두지 않았으며, 괴산군수로 있을 때, 에는 도훈장을 정하여 학동을 가르쳤다. 서원의 장으로 추대되었으며 그의 문하에 많은 선비들이 출입하였다.

 

이로써 보건대 서계는 수기에 힘을 쏟았던 유학자 일 뿐만 아니라 치인, 계도에 있어서도 사회적 책임의식을 다 하였던 실천적 사림으로써 17세기전반 청주지역의 재지사족의 학문에 큰 영향을 끼쳤다[2].

 

서계의문인은 이유당 이덕수(1577~1645), 벽오 이시발(1569~1626), 홍석기(1606~1680), 양일당 신지익(1588~1629), 오재 신지제(1562~1624), 구암 한백겸(1552~1615),양서 이광윤(1564~?),송승길, 윤승임, 변시망, 변시익등 28명이다.

 

서계의 문인가운데 이덕수(李德洙.韓山人)이시발(李時發,이득윤의 제종손)은 서계 이후 청주사족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키는데 크게 공헌한 대표적인 제자였다. 홍석기는 민첩한 시작과 다양한 시체를 구성하여 시인으로서 이름이 높았으며, 신지익은 효염으로 벼슬에 천거된바 있고 그의 정려한일은 삼강행실도에 실려 있다.

 

신지제는 창녕부사로 나가 백성을 괴롭히는 도적을 토평, 민심을 안정시켜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던 인물이다 .

"한백겸은 호조좌랑을 거쳐 형조좌랑, 청주목사를 지낸바 있으며 동국지리지 같은 실증적이고 고증적인 저술을 펴낸 학자이다[2].

 

이들 문인들은 다양한 관계로 네트워크화 되어 있다. 이를테면 이시발, 김경익, 나만기, 나만종, 신간, 김극정, 지순해등 은 부친 이잠의 문인이기도 하며 홍석기는 이잠의 사위인 홍순각의 손지이며, 이득윤의사위인 변시망은 변경수의 아우인 변경복의 손자가 된다.

 

또한 이덕수의 사위인 김익희(金益熙)는 김장생의 손자가 되며, 변경수, 조강, 변경복, 이득윤, 홍순각, 이덕수, 이시발 등은 신항서원의 원장을 역임하였다. 이들은 학연, 지연, 혈연 등을 바탕으로 네트워크화 되어 "16~17세기 청주지역을 이끈 하나의중심축이 되었으며, 그 가운데 이득윤은 교육자로서의 일익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2].

 

조선중기 청주가 학문의 고장으로 주목 받게 된 데는, 낭성팔현(琅城八賢)'으로 불리는 학자들로부터 기인한다.

여기서'낭성팔현'은 행정지역상 충청북도 청원군(현 통합청주시) 낭성면에 국한 시킨 것이 아니라 청주일대의 사림을 지칭한 말 이다. 이 말은 조강의 문집인모계집에 실려 있는데, 이 문집은 조강의 13세손인 조철형과 조병훈과 함께 1904년에 간행한 것이다.

 

모계집에서 언급한 낭성팔현은 박훈(1484-1540), 한충(1486-1521), 송인수(1499~1547), 조강(1527~1599), 정사호(1553~1616), 이득윤(1553~1630),이덕수(1577~1645),홍석기(1606~1680)를 일컫는다.

 

최근 "[1]은 연구를 통하여 이른바 낭성팔현이 기호학파와 호서사림을 형성 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밝혀낸 바 있다. 청주지역의 사림은 적어도 신항서원이 설립되고 운영되었던 16세기까지는 서인계열로 단정 할 수는 없으며, 여러 계열의 사림들이 학문적 사승관계와 혼인관계로 연계되어 혼재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 이 타당하다.

 

이득윤자신도 서인계열의 기호학파보다는 영남사림을 지지했던 화담학파(花潭學派)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청주지역에서 서인계열의 세력이 부각 시킨 것은 바로 이득윤에게서 비롯된 것 이었다.

 

서계 이득윤과 기호학파와의 연관성은 그와 사계 김장생(1548~1631)과의 나누웠던 교유관계와 그의 문인이었던 이덕수(1577~1645)의 사승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서계 이득윤은 기호지방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였던 사계 김장생과 서신교류를 통하여 태극도와 역학 에 관한토론을 벌였다.

 

이득윤과 김장생이 나누었던 서신은 그들의 문집에 그 원문이 남아있어 확인이 가능하며, 주로 김장생이 역학에 대한 질문을 하고 이득윤이 이에 대한 답을 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이득윤과 김장생과의 학문적 교유관계가 이득윤의 문인이었던 이덕수에게도 영향을 미쳐 이덕수가 김장생과 사우관계를 형성 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보통 이덕수의 학맥을 이야기 할 때에 첫 번째 스승은 서계이득윤으로 일컬어진다. 이덕수가 정확히 언제 서계이득윤에게 수학 하였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그가 청주지역에 세거한 재지사족 이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유년시절의 학문성숙기에서 계의 가르침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덕수는 사계 김장생의 문인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위에 언급한 첫 번째 스승인 이득윤과 김장생의 교유관계 외에도 이덕수와 김장생의 인연은 집안 여러 형제들의 학연과 사계의 수제자인 우암 송시열과의 혼맥 등 매우 많다. 하지만 "1634년(인조12)에 함께 연산현에 유배되면서 더욱 돈독한 관계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7].

 

한산이씨 이덕수의 아버지 이도(李 濤)를 청주로 입향 한 후 청주지역의 유력 사족이었던 밀양박씨, 인천 채씨와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청주에 정착 하였다. 호서사림의 영수로 정계를 주도한 우암 송시열은 이덕수의동생인 이덕사(李德泗)의 딸과 혼인하고 처가인 주성동 수름재에서 이덕수에게 학문을 연마 하였다.

 

이러한 족적인 연결은 학문적으로도 이어져 이후 신항서원의 운영에 서인세력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송시열이 신항서원의 원장을 역임한 이후 신항서원의 원장 직은 송시열의 문인들이 독점하게 된다.

 

결국 이득윤은 조강 변경수와 함께 서원을 건립함으로써 서우원을 축으로하는 학연, 혈연, 지연의 단단한 향토사림의 유대를 형설하게 됨을 알 수 있다. 특히 서계이득윤과 기호학파와의 연관성은 그와 사계김장생과 나누웠던 교유관계로 인하여 이루어진 것 이다.

 

기호학파의 대표적 성리학자 사계 김장생의 예학정신의 학풍을 공유한 서계선생 이후 사계의 수제자인 호서사림의 영수 우암송시열로 이어짐을 알 수 있다. 결국 신항서원을 서계선생이 재지사족과 함께 건림 하였지만 신항서원의 원장을 우암이 맡음으로서 이후 원장 직은 우암의 문인들이 독점함으로서 기반이 확고하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3.3 서계 이득윤과 청주 지역의 서원

 

서계 이득윤은1570년(선조 3)에 약관의 나이로 모계 조강, 진사 변경수와 함께 청주의 여러 사림들과 상의하여 신항서원을 창건함으로써 지역사회를 이끄는 구심점으로 삼았다. 신항서원은 청주지역에서 최초로 건립된 서원이며 창건당시에는 설립된 마을인 유정곡의 이름을 따서 유정서원 이라고 하였다.

 

창건당시의 제향인물은 성종 대에 효자로 이름난 경연(慶延, ?~1478), 기묘명현인 강박훈(1484~1540), 을사명현인 규암 송인수(1499-1547) 이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병화를 입은 후 광해군대에 서원을 다시 세우면서 기묘명현인. 김정(1486-1521)을 추향하였고, 1632년(인조 10)에는 기묘명현인 송제 한충(1486~1521)을 추향하였다.

 

이들 배향인물들은 도학 정치를 추구하다 희생당했거나 효성이 지극하여 성리학적사회질서의 구현뿐만 아니라 유교적 교화와 실천에 모범이 되는 인물들 이었다. 기묘사화에 피화된 김정과 한충을 추향한 것을 보면, 당시 서원건립의 의도를 잘 짐작할 수 있겠다[4,5].

 

처음 창건시에는 사와 기본적인 교육시설 만을 갖추고 있었던 것 같고, 임진왜란으로 병화를 입은 후에 동서양재를 새로 건축함으로써 서원의 면모를 제대로 갖추었던 것 같다. 신항서원은 초기에는 창건을 주도한 인물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었다. 서원의 원장은 원사를 총괄하며 대외적으로 서원을 대표하는 실질적인 책임자이다.

 

대체로 남인계 서원은 향중인사가 선출 되었으며, 서인계서원은 향내를 벗어난 중앙정계의 고위관료들이 담당하였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데, 신항서원의 경우 두가지 모습이 모두 나타나고 있다.

 

초대원장은 조강과 함께 서원을 건립한 변경수 이고, 그 후 조강의 처가인 안동김씨의 김응생, 김계생과 변경수의동생 변경복, 창건에 참여했던 이득윤등이 계속 원장을 지내며 서원을 운영하였다. 따라서 초기 신항서원의 원장은 청주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재지사족들이 담당 했던 것으로 확인된다[5].

 

이러한 청주지역에서 서인계열의 세력이 부각되는 것은 이득윤에서 비롯되었다. 이득윤은 광해군 때 옥화대에 은거하면서 김장생과 교류하였고, 이득윤과 김장생의 문인인 이유당 이덕수(1577~1645)가 원장을 지내면서 송시열(1607~1689)이 청주지역으로 세력을 확장 시 킬 수 있었던 것이다.

 

신항서원의 원장은 대략 송시열과 롱계 이수언(1636~1697)을 기점으로 두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앞 시기에는 청주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설립자가문의 중심의 재지사족이 원장을 담당 하였다가, 청주의 명문거족이었던 한산이씨의 이덕수와의 혼인관계를 매개로 등장한 송시열이후의원장은 모두 송시열의 문인들이 독점하면서 재지사족은 철저하게 배제 된다[5].

 

1650년(효종1)에는 천곡 송상현(1551~1592)과 함께 서계 이득윤이 추향하였다 .

이득윤이 배향된 이유는 학문에 있었던 것 같다. 이득윤은 역학에 능통하여 입사 하였고, 김장생과 주역을 논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청주지역에서 경주이씨 집안의 가지고 있던 영향력과 신항서원 창설의 공으로 배향된 측면이 더 컸다고 여겨진다.

 

즉 청주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송시열. 송준길 세력과 경주이씨를 중심으로 한 재지사족과의 타협 속에서 배향 되었던 것 이라하겠다[5]. 1656년(효종7)에는 목은 이색(1328~1396)과 율곡 이이(1536~1584)를 추향 하였다.

 

다음해인 1657년(효종 8)에 산에 송시열을 독향한 화양서원이 설립되기 전까지 100여 년 동안 청주지역의 유일한 기호계서원으로 이이-김장생-송시열로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맥을 이어나가는 학적 전통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청주의 사림들이 신항서원을 삼남제일'의 서원이라는 긍지를 갖게 했던 것 이다[2,1].

현재 청주지역의 서원중에서 이득윤을 배향 하고 있는 서원은 신항서원, 옥화서원, 구계서원 등 총 3곳이다.

 

신항서원은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 정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현재 청주시 미원면 옥화리에 위치한 옥화서원은 이득윤이 강학을 하였던 곳으로, 1717년(숙종 42)에 이득윤을 주향으로 하여 설립되었다. 이득윤외 에도 주일재 윤승임(1583~1688), 옥계 박곤원(1477~1607), 사헌집의 둔암 윤사석(성종대)을 배향하고 있다. 매년 음력 3월 중 정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청주시 흥덕구 분평동에 위치한 구계서원은 1613년(광해군 5)에 현감 조인행과 신경행 등이 주축이 되어 충청좌도 청안현에 창건한 서원이다[5]. "이득윤외에도악재서사원(1550~1615),수암 박지화(1513~1592), 동고 이준경(1499~1572), 이당(1528 ~미상)을 배향하고 있다. 매년 음력 3월 17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청주지역의 신항서원은 이득윤과 조 강, 변경수 등 3인이 시작하여 설립 하였지만 우암 송시열이 괴산에 독향한 화양서원 이전에는 삼남 제일의 100년간의 독보적 교육 기관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우암 송시열의 등장으로 재지사족이 원장을 역임 하다가 송시열의 문인들이 독점하게 됨으로서 서인계열의 세력이 부각됨을 알 수 있다.

 

4. 결 론

 

조선중기를 지나면서 관학인 향교가 점차 교육기능의 역할을 제대로 못함에 따 라 사족들은 사숙인 서당과 서재에서 수학하기를 선호하게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러한 현상은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고 당시의 정치. 사회적인 현상과 맞물려 서원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청주지역에서 이러한 역할을 담당한 가문이 바로 경주이씨 이잠(李潛), 이득윤의 집안이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이잠과 이득윤을 중심으로 한 경주이씨 집안은 16~17세기에 걸쳐 청주지역(在地士族)의 사림, 재지사족들의 교육에 적극적이었으며, 이러한 교육적 노력은 결국 신항서원의 창건으로 이어졌다.

 

서계 이득윤은 일찍이 부친인 섬 계 이잠(剡溪 李潛)과 서기, 박지화 에게 수학하였으며, 학문의 근본지향을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두었다. 그리하여 그는 소학을 특히 강조 하였으며, 소학에 수록된 여씨향약을 보급하여 주자학적 세계를 구현하려 하였다.

 

더욱이 부친의 뒤를 이어 후생을 훈도 하는 것 을 자기의 책무로 삼아서 청주지역의 교육에 힘썼다.

이로써 보건대 서계는 수기에 힘을 쏟았던 유학자 일 뿐만 아니라 치인, 계도에 있어서도 사회적 책임의식을 다하였던 실천적 사림으로써 17세기전반 청주지역의 재지사족의 학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득윤은 문인이덕수와 함께 낭성팔현의 일인으로 청주지역에 기호학파와 호서사림이 형성되는데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그는 신항서원을 창건한 주역으로써 청주지역에 기호학파가 자리 잡을 수 있는 사회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고, 당파를 가리지 않고 사계 김장생과 학문적 교유를 종유함으로 자신의 문인이었던 이덕수가 기호학파의 학맥과 연이 닿을 수 있도록 징검다리가 되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그의 역할을 통하여 김장생-송시열로이어지는 기호학파와 호서사림은 비교적 쉽게 17세기 후반부터 청주지역에 그 기반을 마련하고 세력을 형성 할수 있었다. 이득윤과 조 강, 변경수등 3인이 시작하여 설립한 청주지역의 신항서원은 재지사족이 원장을 역임 하다가 송시열이 원장역임 일후 그의 문인 들이 독점하게 됨으로서 서인계열의 부각 됨 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득윤은 사계 김장생과 의 학문적 교류를 함으로서 사 계 김장생의 예학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며 청주지역에 기호학파와 호서사림의 기반을 마련한 인물 이라고 결론 을 내 릴 수 있다.

 

이종관(Jong kwan Lee) [정회원]

☀2006년 6월 : 전 충북도청근무(서기관)
☀2006년 9월 : 녹조근정훈장 수상
☀1996년 7월 : 청주대학교 행정대학원졸업(행정학석사)
☀2006년 2월 : 청주대학교일반대학원 행정학박사수료
☀2014년 2월 : 동방대학원대학교 교육학과졸업(교육학박사)
☀2014년 7월~현재 :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미래예측학과 박사과정재학
                            <관심분야 : 민속문화. 향토문화. 교육학. 동양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