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재 이동휘((誠齋 李東輝)선생에 대한 단상.
보재 이상설선생의 재자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 등.......
성재 이동휘(誠齋 李東輝) 선생에 대한 단상(수정판).
[생졸년] 1873년(고종 10) ~ 1735년 01월 31일
2008. 06 .26 14:29 by 두막루 >bokli.egloos.com/521710
일반인들에게 인식되는 이동휘(李東輝)는 어떤 존재일까?
이동휘는 사회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한국사 최초의 사회주의자. 이 때문에 그는 지금도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 듯하다. 심지어는 독립운동계열을 분열시킨 자라는 인식마저도 어디엔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동휘는 한국 근대독립운동사에서 도산 안창호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이다. 우리가 안창호를 기억하며 그의 위상을 인지하는 것처럼, 이동휘도 마땅히 비슷한 위상을 가진 인물로 인식되어야 한다.
먼저 그의 초기 삶에 대해 꼭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단천군수 화로 사건"과 "삼남검사관 시절"일 것이다. 이동휘는 중인 출신이었으나 빈농으로 살고 있던 이승교(李承矯)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스스로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는 단천 군수(端川郡守)의 온갖 시중을 드는 통인(通引)이란 직을 맡고 있었는데, 이 시기는 잘 알려진 것처럼, 세도 정치시기로 중앙 조정에서부터 지방행정에 이르기까지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그는 어느 날 단천군수의 심히 부패한 모습을 보고 격분하여 그에게 화로(혹은 요강이라고도 함)를 집어던진 일이 있었다. 그는 불의에 대해서 직접 저항할 정도로 용기 있는 인물이었으며, 열정 또한 대단한 인물이었다.
이후 그는 한성무관학교(漢城武官學校)에 입학하여 군인의 길을 걸었는데, 삼남검사관(三南檢査官)에 임명되어 삼남도의 부패한 지방 관리들을 엄격하게 처벌하여 지방 관리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된 일이 있었다. 이 일을 기점으로 이동휘는 민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일화하나가 같이 전해지는데, 어느 날 어떤 백성이 소를 끌고 지나가자 "소를 놓고 가라!"라고 고함을 친 적이 있었다. 그 백성이 소를 놓고 달아나자 이동휘는 그 백성을 데려와 높은 사람이 소를 내놓으랬다고 아무런 저항 없이 달아나느냐고 야단을 쳤다고 한다. 그는 그만큼 민중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다.
필자가 이동휘 관련 저서들을 읽으면서 새로 알게 된 사실들이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 강조하고 싶은 점들을 위주로 서술하고자 한다. 이동휘는 일반적으로 강경한 이미지가 각인되어있다. 실제로 그가 독립전쟁론을 주장한 만큼 그는 온건파로 분류될 만한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이동휘는 독립협회(独立協会)에서 활동을 시작한 이래로 교육, 종교 등 계몽활동에 대단히 적극적이었다.
그는 기독교에 입문한 후(강화도 진위대장 시절 기독교에 정식 입교한 것으로 보임) 전국을 순회하며 기독교 전도 활동에 대단히 열심이었다. 그에게 기독교는 나라를 구하는 일과도 직결되어 있었고, 단순히 서양의 종교가 아니라 단군을 기점으로 하는 한민족을 위한 종교였다. 게다가 교육활동에도 열심이어서 1900년대에 그는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2대교육가로 꼽힐 정도였다.
그는 독립전쟁론을 구상하면서도 계몽활동을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갔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눈물의 애국자요 영웅'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아마 1900년대 민중들에게 최고의 인물을 꼽으라 한다면 안창호와 이동휘를 꼽았을 것이다.
(각종 언론자료들을 보면 이동휘는 대중의 확고한 지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920년대 동아일보의 민족지도자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그는 10위 안에 들었는데, 당시 그가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필자의 위와 같은 추측은 1900년대 국내에서 안창호와 함께 명성이 자자하던 시기임을 고려한 것이다)
그렇다면 안창호 못지않게 계몽활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한 그가 왜, 어떤 계기로 무장투쟁론(독립전쟁론)으로 전환한 것일까? 이는 당시 독립운동계의 전반적 분위기를 보면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다. 1907년 이동휘 등 7인이 창건위원이 되어 창립한 신민회(新民會)에서 계몽운동 외에 독립전쟁론이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다. 독립전쟁론으로 나아간 사람들 가운데 이동휘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국권회복, 조국광복이라는 최대의 목표를 이루어내기 위해 최선의 운동을 찾아 전향적으로 자신의 활동을 변경하였던 것이고, 독립전쟁론이라는 최고의 방법론에 도달한 것은 그 결실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동휘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강화도(江華島) 진위대장(鎭衛隊長)으로 임명된 이래 오랫동안 강화도와 인연을 맺었는데, 그가 강화학파(양명학파)와 연관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그의 동지들 가운데에는 강화학파(江華學派) 인물들이 많이 있었다.
강화학파(江華學派)의 진보 격이었던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 이동휘(李東輝)와 거의 동일한 정신의 소유자였던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를 비롯하여 우당 이회영(友堂 李會榮), 성재 이시영(省齋 李始榮), 애당 권동진(愛堂 權東鎭) 등 양명학(陽明學)과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 그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여기에서 이들의 아호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모두 ‘~재’ 혹은 ‘~당’의 돌림자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강화학파(江華學派)의 인물들은 호(號)에 돌림자를 썼는데, 이동휘의 아호인 성재(誠齋) 또한 이와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이외에도 하곡 정제두(霞谷 鄭齊斗),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 겸곡 박은식(謙谷 朴殷植),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등이 있음).
양명학은 조선 후기 주자학(朱子學)에 대응하는 진보적 사상 조류로서 등장하였는데, 그 진보성은 이동휘가 기독교와 사회주의(社會主義) 등의 진보적 사상들을 받아들이고 역시 강화도 출신인 조봉암(曺奉岩)이 사회주의를 수용하는데 일정한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있다.
이동휘가 사회주의자였다는 사실 때문에 무쳐진 점이 있는데, 바로 그가 독실한 기독교도였다는 것이다.
그는 전국에 이름난 설교자였고, 그를 통해 기독교에 입교한 사례들도 많이 있다.
그는 단순히 독립운동을 위해 기독교를 이용하려고 임시방편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독립운동에 소극적인 기독교회의 현실을 보고 종교를 버리는 와중에도 기독교신앙을 굳게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기독교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독특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강화도 마니산에서 단군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기독교와 연관시켜서 파악하였고, 이러한 정신을 가진 한민족이기에 일본에게 어육(나라)은 먹혀도 어골(정신)은 먹힐 수 없다고 생각했다.
즉 그의 기독교신앙은 한국역사와 깊이 관련되었다는 특징이 있었다. 이렇듯 독실한 기독교도였기에 그가 사회주의를 수용하면서 기독교를 과연 탈각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남아있는 기록으로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그가 기독교를 버렸다고 단정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다. 이 점은 밑에서 다시 다루도록 하겠다.
또한 그는 1913년 북간도(北間島)로 망명한 이래 북간도와 연해주에서 전설이라 해도 좋을 정도의 활동을 남겼는데, 그의 계몽활동으로 재 만한인(在滿韓人) 사회가 혜택을 얻고 무관학교에서 훌륭한 애국자들을 길러내고 연해주 한인사회의 지방색을 타파, 민족적 단결을 이루어내는 활동들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자체가 당시 청년들에게 그를 영웅으로 각인시키는데 심대한 영향을 주었을 것임은 자명하다.
그는 1917년 러시아 당국에 체포된 뒤 러시아 혁명과정을 지켜보면서 사회주의를 수용하게 되었다.
한국사회에서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역사는 당대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1945년 해방이후 한반도에 위성국가를 세우려던 팽창주의 시절과는 달리, 러시아 혁명을 통해 이제 막 탄생한 신생소비에트 공화국은 당시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기대를 끌기에 충분했다. 이동휘를 비롯하여 김립(金立), 박진순(朴鎭淳), 계봉우(桂奉瑀), 김철수(金錣洙) 등 상해파 그룹뿐만 아니라 여운형(呂運亨)이후 이르쿠츠크파에 가담하지만 그 전에는 이동휘와 함께 활동함), 홍범도(洪範圖) 등 많은 사람들이 소련을 우호적으로 보았으며, 비(非) 사회주의자였던 이광수(李光洙)는 간디와 레닌을 2대 성인(聖人)으로 꼽기도 했다.
공산주의에 대한 인식도 거의 마찬가지여서 기독교인 조만식(曺晩植)은 맑스주의를 긍정적으로 보고 기독교와 비교해서 어느 것이 더 나은지 경쟁해보자고 할 정도였다.
이동휘가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고 소련과 제휴를 모색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것이다.(참고로 그가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것은 젊은 시절의 삶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민중들의 입장을 대변하던 그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는 점도 인정해야한다)
공산주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측면에서 그가 1917년 공산주의를 수용한 이후 민족주의자(民族主義)들과 결별하거나 갈라선 것처럼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필자도 그런 편견을 갖고 있었는데, 그는 사회주의자가 된 이후로도 홍범도(洪範圖), 유동열(柳東說), 계봉우(桂奉瑀), 신채호(申采浩) 등 수많은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더 정확히 말한다면 공산주의 수용 이후를 포함한 전 생애에 걸쳐 민족주의자라고 평가함이 옳을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를 받아들였으면서도 항상 민족과 조국광복이라는 현실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노선은 1차적으로 민족혁명을 우선시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점은 실제 그들의 활동과 반대파인 이르쿠츠크의 비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런 그들이었기에 만주독립운동 부대들과 연합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격은 이후 1923년 적기단(赤旗團)에서 민족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의 동시수행이라는 슬로건을 내거는 등 면면히 이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사회주의를 수단이나 부차적 방편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이동휘는 그들의 시초였던 것이다.
(그의 특징적 활동가운데 하나는 사회주의 수용이후에도 만주지역의 독립운동부대들과 연합을 지속적으로 모색하였다는 점이다. 홍범도부대를 비롯, 이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등 여러 독립군부대들이 통합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에서는 이동휘에 대해 대단히 우호적이었고, 사실상 이 부대는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따라서 자유시 참변은 대한독립군단의 참변이면서 동시에 상해파에게도 큰 타격을 준 사건이었다)
또한 우리가 흔히 공산주의자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가운데 하나로 "소련공산당과 코민테른이라는 중앙조직에의 종속"을 들고 있는데, 이동휘는 불합리한 사안에 대해서는 이들의 결정도 거부하거나 항의하기도 하였다. 그에게 소련은 어디까지나 독립전쟁을 위해 제휴할 수 있는 대상이었을 뿐, 떠받들어야 하는 종주국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1923년 독자적인 단체인 적기단(赤旗團)을 조직하여 의열단(義烈團) 등과 함께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철두철미한 공산주의 이론가는 아니었다. 그에 대한 주변인들의 회고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면모는, "그는 철저한 이론가라기보다는 실천을 중시했던 무인형(武人形) 인물" 이라고 한다. 아마 그는 공산주의에 대해 기본적인 이론은 이해하였겠지만, 깊이 있는 지식을 갖지는 못했던 것 같다. 또한 비밀경찰 등 소련정치의 실상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지는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공산주의 수용이후 그는 과연 기독교를 탈각하였을까?
현재 남겨진 기록으로는 그가 1917년 러시아 옥중에서도 매일 기도를 하는 등 기독교 자세를 철저히 유지하고 있다는 것 이상의 내용을 볼 수 없다. 다만 이전 그의 적극적인 기독교 활동으로 볼 때, 그가 기독교를 탈각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20년대에는 YMCA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기독교사회주의 사상이 부각되었는데, 이동휘는 그에 앞서 기독교인으로서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최초의 전형이 되었던 것이다. 다만 최초의 시도였던 만큼 기독교 사회주의자로 나아가지는 못했던 것 같다. 아울러 종교를 마약으로 인식하는 사회주의계열의 풍토도 이동휘로 하여금 적극적인 기독교 의식을 갖지 못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이동휘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는 그동안 그가 우리 사회에서 주목받지 못하며 부정적으로 인식되어왔던 점에 대해 경종을 울려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물론 필자는 영웅주의 사관을 갖고 있지 않다. 필자에겐 이동휘도 우리와 같은 사람일 뿐이다. 그는 여러 실수와 잘못을 하기도 하였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직을 맡던 시절 소련으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원조 받았는데, 이를 임정을 위해 쓸 수 없다고 하여 자신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활동에 사용하여 이 문제는 이후 그에게 계속 걸림돌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연해주(沿海州) 권업회(勸業會)에서는 지방색을 타파하고 민족적 단결을 이루어내는 쾌거를 보여주었지만, 이후 러시아 귀화한인과 비 귀화한인들의 갈등에서 비롯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會),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의 파쟁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사회에서 이동휘에 대한 인식은 많이 변해야 한다고 본다. 그는 한국 근대독립운동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으며, 이론보다는 민족의 독립을 위한 실천적 활동에 주력하였다. 또한 그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 자신의 활동방식을 변경하며 적극적으로 매진한, 보기 드문 혁신적 인물이었다.
필자는 임정(臨政) 에서만도 그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보다 훨씬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좀 더 솔직히 말해 비교 대상이 아니라고 본다).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자라는 그의 위치는 특이하다.
남한에서는 반공주의 때문에, 북한에서는 김일성우상화 때문에 그는 어디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민족주의, 기독교, 사회주의 어느 입장에서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아이러니를 겪어야 했다.
한국사회가 특정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이들을 조화시킬 수 있는 풍토가 형성되어 그의 위상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덧붙여 단군상을 파괴하고 단군신화를 인정하기를 한사코 거부하는 일부 기독교도들은 이동휘를 보고 반성하길 바란다.
김방 저 『이동휘 연구』와 서정민 저 『이동휘와 기독교』를 주로 참고하여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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