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근현대 인물

정순만(鄭淳萬)/독립운동가

야촌(1) 2015. 9. 27. 16:06

■ 정순만(鄭淳萬)

 

정순만(鄭淳萬, 1876~1911)은 37년의 짧은 삶을 불처럼 살다 간 민족운동가이다. 그의 생애는 일제의 침략이 격화되던 격랑의 시기였고, 그는 일제에 온 몸을 던져 항쟁하였다.

 

한말부터 1910년의 망국에 이르기까지 국내는 물론 북간도와 연해주에서 전개된 민족운동의 중요한 사건의 순간마다 정순만이 있었고,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곧 정순만은 한국근대사의 여명을 밝힌 격정의 민족운동가이다.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의 공적을 기려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운동계의 '3만' 정순만

↑정순만의 생가 터(충북 청주시 옥산면 덕촌리)

 

정순만은 1876년 옥산면 덕촌리에서 정석종과 밀양 박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하동이며, 호는 검은(儉隱), 이명으로 왕창동(王昌東, 또는 王昌道), 왕일초(王一初), 왕한(王韓) 등을 사용하였다.

 

그는 시조 응(膺)의 24세손인데, 중시조는 광주유수를 지내고 자헌대부 의정부 참찬에 증직된 목(穆)으로, 그의 둘째아들 광업(光業)이 옮겨 온 이래 덕촌리에 세거해 왔다. 일제의 기록에도 덕촌의 하동 정씨는 충청북도의 저명한 동족마을로 보고되어 있다. 지금도 마을 주민의 절반 이상이 하동 정씨이며, 다른 성씨의 경우도 처가나 외가 등 인척관계로 연계된 경우가 많다.

 

정순만은 일찍이 이승만·박용만과 함께 독립운동계의 '3만'이라 불리던 인물이다.

그가 한말에 민족운동을 주도하다가 옥에 갇혔을 때 함께 투옥된 이승만·박용만과 의기투합하여 동지가 되었기 때문에 생겨난 말이다. '3만'은 그가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존재였음을 상징하는 용어이다.

 

실제 그는 국내는 물론, 망명 이후 북간도와 연해주를 독립운동기지로 개척한 선구적 인물이었다.

그러나 학계의 연구 현황이나 일반의 인지도를 보면 정순만에게 '3만'이란 호칭은 무색하기 짝이 없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해 보면 자료건수가 이승만은 무려 18,763건이고 박용만은 1,189건인데 비해, 정순만은 120건에 불과하다. 연구의 편중 현상은 더욱 심각하다.

 

이승만은 관련 논저가 931건이고 박용만은 73건임에 비해, 정순만은 고작 19건 뿐이다(2015년 4월 현재). 그나마 그에 대한 기록은 오류투성이다. 문중 기록은 물론 독립유공자공훈록 등 정부 기록에도 오류는 마찬가지이다.

 

이 같은 연구의 부족과 인지도가 낮은 현상은 그가 비극적으로 생을 마친 사실과 관련이 있다.

1910년을 전후한 시기 연해주 한인사회의 분파로 인한 극심한 대립과 알력은, 그의 비극적 종말 후에 정당한 역사적 평가의 장애요소로 작용하였다.

 

더구나 그 파쟁이 미주 동포사회에까지 파급되며 부정적 평가가 확산되게 되었다.

그의 후견인 격인 이상설 또한 파쟁의 여파로 곤란한 지경에 처하고, 얼마 후 사거하여 더 이상 방패막이가 되지 못하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독립운동계의 '3만' 중 정순만은 역사에서 잊힌 인물이 되었다.

 

●상동청년회 총무로서 민족운동 주도

↑정순만이 한말 민족운동을 주도한 상동청년회가 있던 상동교회(1900년)

 

정순만은 고향에서 1896년 전기의병 참여를 시작으로 민족운동의 길에 나섰다.

이후 독립협회에 참여하여 개화계몽의 길을 걸었고 유신당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한편 고향에 근대학교인 덕신학교를 세워 문중 자제와 인근 지역 청년들을 인재로 양성해냈다.

 

정순만의 국내 민족운동은 상동청년회를 주도하며 본격화하였다. 상동청년회는 상동교회 안에 조직된 청년단체로서, 그는 전덕기와 함께 이 회를 이끈 쌍두마차였다. 상동청년회를 주도한 인물은 이승만·박용만·김구·이준·이동녕 등으로, 상동청년회는 가히 민족운동의 본산이라 할 수 있다.

 

일제 또한 상동청년회를 독립협회를 계승하여 신민회의 모체가 된 단체로 파악하였으니, 당시 민족운동에서 정순만의 위상을 가늠하기에 충분하다. 그는 이 회의 총무로서 멕시코 이민 참상 규탄,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반대, 을사오조약 반대, 을사오적 처단 등 민족운동을 주도하였고, 이준과 적십자사 설립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망명과 북간도, 연해주의 독립운동기지 개척

↑정순만이 이상설과 함께 건립(1906)한 북간도 민족교육의요람 서전서숙.

 

일제의 탄압으로 더 이상의 국내 활동이 불가능하자, 그는 1906년 봄 이상설·이동휘 등 동지들과 함께 망명길에 나서 북간도 용정에 터를 잡았다. 여기에서 그는 이상설 등과 북간도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개설하고 동포 자제들의 교육에 온 힘을 쏟았다.

 

↑연해주 민족운동의 중심지인 블라디보스토크항.

 

1907년 4월, 헤이그 특사 파견 소식을 들은 그는, 이들의 사행을 지원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달려갔다.

그와 절친한 이상설과 이준이 특사로서 사행하는 것이었으나 경비가 부족하였던 것이다.

 

그는 백방으로 노력하여 자금을 모아 특사가 출발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헤이그 특사를 전송하고 다시 서전서숙으로 돌아온 그는 교육활동에 전념하고자 하였다.

 

↑정순만이 활동한 블리디보스토크 개척리 한인촌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활동이 곤란하자,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해조신문』을 창간하고 주필·주간·총무의 1인 3역을 맡아 동포들을 계몽하였다. 또한 『대동공보』가 발행되자, 미하일로프와 함께 주필을 맡았다.

 

한편 그는 연추에서 최재형·이범윤 등과 의병을 도모하기 위해 동의회를 조직하였다. 이는 민족운동을 위해서는 무장투쟁과 계몽운동을 모두 수용하여 병행하고자 한 그의 전방위적(全方位的) 투쟁 방법론을 잘 보여준다.

 

1909년, 그는 대동공보사에서 수차 안중근을 만나 이토 히로부미 처단 계획을 수립해 나갔다.

일제의 비밀자료는 안중근 의거 계획을 주모한 인물로 정순만을 꼽았고, 중국의 한 신문은 '안중근과 정순만은 생사를 같이 할 동지'라고 보도하였다.

 

이는 안 의사의 의거에 정순만이 핵심적 역할을 하였음을 입증하는 자료이다.

안중근이 이토를 처단하고 피체되자, 그는 성금을 모아 변호사를 선임하는 등 안중근 구명에 발 벗고 나섰다. 곧 북간도와 연해주에서 전개된 중요한 민족운동은 거의 정순만이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연해주 한인사회 파쟁의 희생양

 

1910년 1월 23일, 정순만이 민회장 양성춘을 권총으로 쏴 죽이는 '양성춘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정순만의 격정이 빚은 과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정순만이 고의로 양성춘을 쏜 것이 아니라 오발에 의한 사고였던 것이다.

 

당시 연해주 한인사회는 출신 지역에 따라 몇 개의 파벌로 분열되어 있었다.

일제는 정순만을 이범윤·이갑·최봉준과 함께 연해주 한인사회의 '유력한 파의 수장(首長)'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서북파의 수장으로서 민회장을 지낸 양성춘이, 기호파의 수장인 정순만에게 피살당했다는 사실은 동포사회에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블라디보스토크 일본총영사대리가 외무대신에게 정순만살해 상황을 보고한 비밀문서(1911. 6. 27)

 

1911년 2월 8일, 그가 1년 남짓의 옥고를 치르고 옥문을 나섰다.

곧 서북파가 정순만을 죽일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그는 민족운동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더구나 옥고를 치르고 있는 동안 조국은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5월 하순, 그는 홍범도 등 동지들과 함께 의병의 국내 진공작전을 논의하는 자리에 참석하는 등 조심스럽게 재기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6월 21일, 그는 양성춘의 미망인과 형 양덕춘에 의해 도끼로 처참하게 살해당하였다.

격정의 민족운동가 정순만은 그렇게 비명에 생을 마감하였고, 조국 독립의 꿈도 꺾이고 말았다.

그의 장례를 둘러싸고도 논란이 있어 10여 일이나 지난 7월 1일 밤, 겨우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독립운동은 독립운동가들의 격정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그러나 그 격정은 때로는 자기 노선과 다른 이념과 방법론을 배척하는 폐쇄성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단순히 출신 지역에 따라 형성된 파벌은 극단적 배타성을 보였다.

그것은 동포사회에서 무의미한 파쟁과 갈등을 유발하였다.

 

독립운동사에서 동포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불상사가 야기된 것은 깊이 반성해야 할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정순만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연해주 한인사회가 통합을 이루는 밀알이 되어, 1911년 말 한인단체인 권업회의 조직으로 결실을 맺었다.

 

●새롭게 조명되는 정순만

 

2008년, 정순만이 '충북의 역사문화인물'로 선정되며 이름을 알렸다.

2011년 11월 17일에는 필자가 기획한 『정순만의 생애와 민족운동 조명』이란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정순만을 다룬 최초의 학술세미나였다.

2013년에는 북간도와 블라디보스토크 현지조사와 자료수집 등 일련의 연구를 바탕으로 『독립운동계의 3만 정순만』(경인문화사)을 출판하였다. 이로써 필자는 그 분에 대한 마음의 빚을 다소 갚은 것이나,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

 

향후 연구과제의 하나는 미주지역의 활동을 인정받아 독립유공자가 된 아들 정양필과 며느리 이화숙(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을 학술적으로 조명하는 것이다. 정순만은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비운의 독립운동가이다.

 

여기에 게재한 초상화는 그의 아들 사진을 토대로 작가(한국화가 이재갑)의 상상력이 그려낸 것이다.

다행히 하동정씨 문중과 뜻있는 분들이 오는 17일 '애국지사정순만선생기념사업회'를 발족한다고 한다.

만시지탄이 있으나, 그에 대한 연구와 선양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를 기대한다.

 

글 : 박걸순 충북대사학과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