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자료]용정의 지명유래는 우리민족의 것
2004.01. 27. 22:30
압록강과 송화강 상류 지방인 백두산 일대를 서간도라 했고 두만강 북부를 북간도라 했다.
우리에게는 북간도가 더 친숙하다.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진 뒤에도 조선 영토였으며 우리 동포의 손으로 개척한 곳이고, 항일독립전쟁의 근거지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북간도의 큰 도시 연길보다 용정을 더 친근하게 생각한다.
이곳이 우리 조상이 일군 고토(故土)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해란강이 용정을 관통해 흐른다.
[선구자]에 나오는 바로 그 강이다. 작사자 윤해영의 친일행적이 발견돼 빛을 잃고 말았지만 항일운동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파견
'해란(海蘭)'은 느릅나무의 여진말을 한자어로 음차한 것이라고 한다.
북경 민족출판사가 간행한 [조선족 전설집]에는 이런 설화가 실려 있다.
"강변에 '해'와 '란'이라는 조선인 오누이가 살았는데 두만강 건너 외가에서 볍씨를 가져와 어른들에게 심게 했다.
그 뒤 강변은 논으로 개척되었다. 어느해 가뭄이 들자 오누이가 산기슭을 헤쳐 샘물을 찾아내고 물길을 내니 그것이 강이 되었고 그래서 해란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설화는 민중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저절로 형성되는 것이다.
해란강설화는 이 지역이 우리 민족이 일군 땅임을 말해준다.
중국이 언제고 기회가 오면 간도가 본디 중국 영토였다는 것을 논거하기 위해 출간한 [장백총서]는 지명 기원을 '해랑하(海浪河)'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설화가 없으며 '해란'을 다른 한자로 음차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해란강뿐만 아니라 용정의 지명 유래도 우리 민족의 것이다.
조선인 유민들이 개척하기 전 해란강 일대는 느릅나무와 갈대가 무성했다.
처음 장-박씨 두 유민이 와서 강변에서 옛 우물을 발견해 파헤쳤다. 옛날에 살았던 고구려인 또는 발해인의 것이었다. 물맛이 매우 좋은지라 두 사람은 용두레를 달고 초가삼간을 지어 본격적인 개척에 나섰다.
두만강을 건너온 사람들이 그들과 합류하거나 이 우물에서 목을 축이고 북간도 일대로 퍼져 나갔다.
간도 동포들은 함경도에 속해 세금을 납부하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
1900년을 전후하여 청나라가 연길에 관리를 보내 통치하려 하자 조선 조정은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파견했는데 그는 용정에 체류하였다. 한 번 생각해보자. 간도가 조선 영토가 아니고 중국 영토라면 국력이 쇠할 대로 쇠한 조선 조정이 어떻게 감히 관리사를 파견했겠는가.
1907년 이상설은 용정이 장차 해외독립전쟁의 근거지가 될 것으로 판단하고 '서전서숙'이란 학교를 세워 인재를 키웠다. 이곳은 지금 용정소학교가 앉아 있다.
옛 일본영사관 자리는 용정시 인민정부가 들어서 있다.
일본이 을사조약 이후 간도가 조선의 땅이라고 주장하며 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설치했던 그 자리다.
그러나 그 후 일본은 만주철도부설권과 맞바꿔 간도를 청나라 영토라고 인정해버렸다.
1919년 3월 14일, 용정에서 대대적인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시위 군중이 몰려갔던 용정 역사는 당시 건물이 헐리고 1960년대에 다시 지어졌다.
도시 외곽에 옛날 영국과 캐나다 선교사들 숙소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영국데기'라는 구릉이 있다.
간도가 낳은 지절시인 윤동주의 묘가 이곳에 있다.
[소설가-동국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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