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독립운동

나라밖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독립운동

야촌(1) 2013. 4. 8. 20:25

■ 나라밖에서 시작한 독립운동

 

일제가 한국의 강제 병합 이후, 한반도에서 전개된 헌병 경찰을 통한 무단통치가 시행되는 동안 독립 운동은 나라 밖에서 더 활발히 진행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간도와 옌하이저우, 블라디보스토크 등은 한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어서 독립 운동의 본거지 구실을 했던 곳이다.

 

북간도의 서전서숙(신학문 교육기관)과 서간도의 경학사와 신흥 무관 학교(독립군 양성 기관), 간민회, 중광단, 상하이의 신한 청년당, 옌하이저우의 권업회, 하바로프스크의 한인 사회당(사회주의 정당) 등이 대표적인 독립 운동 단체나 교육 기관이다.

 

이상설(1870~1917), 이회영(1867~1932), 박은식(1859~1925), 신규식(1879~1922), 유인석, 홍범도, 이범윤, 이동휘 등이 이들 단체를 이끌었다. 이런 활동을 통해 수만 명의 의병들은 정식으로 지휘 체계를 갖춘 독립군으로 거듭날 수 있었고, 그런 힘으로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때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던 것이다.

 

또 다른 지역을 살펴보자. 1903년부터 1905년 사이에는 많은 한국인이 미국과 멕시코, 하와이 등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사탕수수 재배나 농업에 종사하기 위한 노동 이민이 대부분이었다. 이들과 더불어 여러 지식인들도 미주 지역으로 건너가 독립 운동을 준비해 나갔다.

 

그 중 안창호(1878~1938)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는 교육이 중요하다고 여겨 학교를 세웠다.

국권 침탈 이후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활동하던 교민들로부터 독립 자금을 모아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 자금으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청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황제가 다스리던 체계를 무너뜨리고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이 때 혁명을 이끌었던 레닌도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나라들과 동양의 모든 노동자들에게 민족 자결주의 원칙을 선언했다. 남북 분단의 가능성이 태동된 사건이다.

 

그런데 그 중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에 불편한 진실이 들어 있다.

미국이 전쟁에서 진 동맹국에 대해서만 민족 자결주의를 지키라고 요구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독일, 오스트리아, 터키 등이 식민지로 다스리던 나라들만 해방시키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우리는 해당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 독립 운동가들은 윌슨의 자결주의가 모든 나라에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만주와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가 39명이 모여 ‘대한 독립 선언’을 발표했다.

1918년 ‘무오 독립 선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