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독립운동

신한촌(新韓村)

야촌(1) 2010. 4. 5. 02:00

우리선조들의 한과 독립정신이 깃든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

 

↑옛 신한촌 마을의 전경이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로 병해있다.

 

일제 당시 극동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리 한인들이 집단으로 거주 했던 이곳 한인촌은 당시 국내외를

막론하고, 독립운동이 가장 치열하게 펼쳐졌던 역사의 현장으로서,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선생,성재(誠

齋) 이동휘(李東輝)선생을 비롯하여,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 최재형(崔才

亨), 이종호(李鍾浩), 장도빈(張道斌-단국대학교설립자),등 기라성 같은 애국지사들이 이 마을을 근거지로

활동했다.

 

 

↑1920년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전경(수원대 박환교수 제공)

 

신한촌은 지난 1911년 러시아 당국이 블라디보스토크항 인근 해안가(오늘날 지명 : 나베르즈나야)에 들어선

한인들의 최초 정착지 "개척리" 마을을 강제 폐쇄함에 따라 만들어진 말 그대로 새로운 한인 마을 신한촌(新

韓村)인 것이다.

 

1880년대 이후 조성된 개척리라는 이곳 마을은 한인들이 많이 산다고 해서「까레이스카야 울리짜=한국의

거리)」라는 거리 이름이 있을 정도였다. 또 1908년 이 거리 344호에는 해조 신문사가 있었고, 해조신문사

이은 대동공보사가 600호와 498호 등지를 떠돌며 항일독립의지를 고취하기 위한 신문을 발간하였다.

 

↑구 한말 블라디보스토크에 세워진 한인들의 정착지 개척리 모습

(수원대 박환교수 제공)

 

↑위의 사진과 동일한 지점에서 촬영한 거리모습이다. 이 거리가 옛 까레이스카야 거리이다.

 

하지만 러시아 당국은 장티프스를 근절한다는 명분으로 마을을 철거하고, 기병단 병영 기지를 만들었고, 이에

따라 우리 동포들은 눈물을 머금고 시 외곽 야산으로 이사해야 햇다. 그곳이 바로 신한촌이다.

(지금은 블라디보스토크 서쪽바다인 아무르만과 뻬르바야레츠까라는 시장 사이에 있다)

 

신한촌으로 이주한 한인들은 망국의 설움을 그냥 지켜만 보지 않았다.

1911년 12월 이상설 이종호(李鍾浩)선생 등이 중심이 되서 권업회(勸業會)라는 독립운동 결사체를 만들었다.

 

권업회(勸業會)는 명분상으로는 재 러시아 동포들에게 실업을 권장하고, 노동을 소개하며 교육을 보급한다는

취지를 내 걸었지만 실제로는 조국 독립운동을 쟁취하기 위한 사업을 펼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를 위하여 러

시아 각 지역에 지회를 결성했고, 한인 학교도 세웠다.

 

권업회(勸業會)는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인 러시아 관헌들에 의해 1914년 강제 폐쇄되기 전까지 회원 수가

일만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신한촌의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했던 하바롭스카야 거리.

 

↑1919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했던 성재 이동휘선생이 거쳐했던 집터다. 지금은 상가

    건물이 들어서 있다.

 

특히 권업회는 이듬해 4월 동포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하여, 순 한글 신문 권업신문을 발간했다.

주필로는 이상설, 신채호, 장도빈선생 등이 활동했고, 《만고의사 안중근 전》을 연재하는 것을 비롯해,

《고구려광개토대왕 비문》원문을 싣는등 민족 의식 고취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권업신문은 당시 해외에서 간행된 몇안되는 민족지 가운데 하나로 미주에서 간행되었던 신한민보, 신한

보와 함께 한국 독립의식을 선도하는 3대 언론의 하나였다.

 

↑1920년 삼일운동 1주년을 맞아 신한촌 한인들이 나무를 이용해 독립문을 만들었다.(박환교수 제공)

 

신한촌 한인들은 1919년 국내에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같은해 3월 17일 집집 마다 태극기를 달

고,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일본의 요구로 러시아관헌들이 집회를 못하게 하자 신한촌 주민들은 집회 장

소를 블라디보스토크 시내로 변경해 만세를 불렀다.

 

또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11개 영사관과 6개 러시아 관청에도 독립선언서를 배포 하기도 했다.

 

 

↑1920년 3월 1일 신한촌 한인들이 3.1만세운동 1주년 기념행진을 하고 있다(수원대 박환교수 제공)

 

신한촌 동포들의 이같은 활동은 그러나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러시아 내전을 틈타 극동지역으로 진출한 일본군은 이듬해 4월 신한촌을 습격해 가옥을 파괴하고, 3백 여명을 집단 학살했기 때문이다.

 

소위 4월 참변「1920년 4월 4일 밤부터 이튿날 아침 까지 시베리아에 출병중인 일본군이 연해주 지역 러시아 혁명군과 정부, 관공서와 함께 브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 등지를 대대적으로 공격해 방화, 가택수색, 검거, 학살을 자행한 사건 」의 중심에서 가장 참혹한 피해를 보게되었다.

 

더구나 소련 통치자인 스탈린은 1937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해 극동지역에서 살던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재 이주시키는 바람에 신한촌은 폐허가 되고 말았다.

 

지금도 신한촌에 가면 과거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드듬어 볼수가 있게 된다. 과거 이동휘선생 등이 활동하셨던 하바롭스카야 거리에는 신한촌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99년 해외 한민족연구소가 후원금을 모아 세운 것으로 국내, 중국의 만주,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항일 운동을 상징하는 높이 7~8M 가량의 대리석 기둥 3개와 그 옆에 탑의 의미를 설명하는 비문(碑文)으로 구성되 있다.

 

또 옛 신한촌이 있던 5개의 거리 가운데, 한곳은 ≪세울스카야(서울거리) ≫라는 지명도 그대로 남아있다.

 

 

 

↑ 해외한민족연구소가 1999년 8월 세운 신한촌 기념탑과 비문.

 

하지만 최근 까지 러시아 한인들의 항일투쟁 역사를 소개하는 기념탑에 마음대로 들어갈수 없었다.당초

탑을 세운 한민족연구소는 기념탑이 러시아인들에 의해 자주 훼손되자 기념탑 주위에 철제 펜스를 설치

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는 이 베체슬라브라(57)라는 고려인 동포에게 관리를 맡곁는데, 그러나

이씨는 기념탑이 자기 재산이라고 주장하며, 한국총영사관에 조차 출입문 열쇠를 주지않는 실정 입니다.

 

이때문에 광복절 등을 기해 한국에서 온 수많은 관광객이 기념탑에 참배조차 하지 못하고, 발거음을 돌

려야 했었다.

 

↑한국의 관광객들이 놓은 꽃다발이 청소 관리도 되질 않고 말라버린체 방치되고 있다.

 

최근 이씨를 만나 물었다. 그는 이렇게 설명 했었다.「남한사람과 북한사람은 서로 만나기만 하면 싸우

고, 심지어 죽이기 까지 한다.」러시아 땅인 이곳에서 남북한 사람이 싸우면 고려인들이 무척 창피하다.

 

더우기 기념탑을 관리하는 나로서는 사건의 책임을 저야하기 때문에 열쇠를 어느쪽에도 줄수 없었다.

순간 난 피가 거꾸로 치솟았다. 속이 확 뒤집혔다.

 

취재를 마친 후 몇일뒤 이씨는 열쇠 한개를 복사해 한국총영사관에 가져왔다.

그러나 이씨가 마음을 바꿔 다른 열쇠를 사용하면 우리는 또다시 기념탑에 들어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기념탑의 주인은 이유가 어찌됬던 이씨가 책임을 진 단체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우리의 현실이다.

 

 

출처 : 연합뉴스 블라디보스톡의 특파원 강찬구 기자의 블로그에서.....

 

언젠가는 우리선조들의 한과 독립정신이 깃든땅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지역을 새롭게 바라보고

인식하는 날을 만들어 보기로 강기자와의 약속을 지키도록 해야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