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보재이상설선생.

이상설 불꽃의 시간

야촌(1) 2015. 8. 13. 02:17

광복70주년 KBS 특집 (1TV, 8월12일,13일) 이상설 불꽃의 시간

 

■ 1부 가려진 전략가 : 8월 12일 (수) 밤 11시 40분, KBS 1TV

■ 2부 불운한 시대의 천재 : 8월 13일 (목) 밤 11시 40분, KBS 1TV

■ 재방송 : 8월 13일~14일 오후 3시

 

 

 

불꽃의 시간을 살다간 이상설의 삶이 광복 70주년에 되살아나다!

 

중국, 러시아, 네덜란드 3개국 현장 취재와 이상설의 모놀로그 드라마, 삽화, 샌드 애니메이션 등. 감각적인 영상으로 잊혀진 거인 이상설의 삶을 복원하다.

 

독립 운동사의 가려진 전략가이자 불운한 시대의 천재!

광무황제의 외교 특사였지만 순종의 첫 번째 사형수가 되었던 사람!.

조선의 마지막 과거에 장원급제한 사대부 유학자이면서 법학, 정치, 수학, 과학 등 근대 학문의 선구자이자 민족교육가였던 보재 이상설!.

 

우리가 알고 있는 헤이그 특사 이상설, 그 너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모든 것이 미완성이다.’

 

1917년 3월2일. 연해주의 우수리스크에서 독립운동가 이상설이 눈을 감기 전 남긴 유언의 첫마디다. 그는 이어서 당부했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고혼(孤魂)인들 무슨 면목으로 조국 땅에 돌아가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마라.”

 

대한제국의 마지막 고위 관료로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광무황제의 특사로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괴로워한 이상설. 을사늑약 이후 망명하여 10여 년간 이국을 떠돌며 펼쳤던 독립투쟁에도 불구하고 그에겐 모든 것이 ‘미완성’이었다. 그리하여 빼앗긴 나라를 되찾지 못했다는 회한에 눈을 감는 순간까지 고통스러워했다.

 

그렇다면 과연 이상설은 자책과 회한 속에 역사 저편으로 잊혀도 좋은 인물인가?

 

광복 70주년을 맞아 기획된 이 프로그램은 충북 진천 출신으로 구한말의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한국 독립운동사의 거인이자 민족교육자, 근대 수학교육의 선구자인 보재(溥齋) 이상설(1870~1917)의 일대기를 2부작 다큐멘터리로 복원해 방송한다.

 

위태로운 한 시대의 모순과 역설을 온몸으로 감당해낸 이상설의 비극적인 삶!.

그러나 결코 비극으로만 끝나지 않은 그 열정과 냉정의 이야기는 광복 70주년의 우리 사회에 성찰을 위한 에너지로 쓰일 것이다.

 

 

 

가려진 전략가

 

-이상설의 시간에 말을 걸다.

 

 

한 사내가 있었습니다.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스스로의 흔적을 지웠던…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우라고 유언했습니다.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죽으니, 외로운 혼인들 어찌 조국에 돌아갈 수 있겠느냐고…

역사의 패자가 되어야했던 그 사내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궁금해 하신다면 좋겠습니다.

 

– 3ㆍ1운동 이전 독립운동의 가려진 전략가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 생애를 바친 이상설이지만 우리는 그를 잘 알지 못한다.

 

그나마 가장 널리 알려진 헤이그 특사로서도 먼저 떠올리는 인물은 이상설이 아니라 이준이다. 미주 한인 독립운동사에서 이승만과 박용만의 이름은 알아도 이상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가 가장 오랜 시간 머물렀던 러시아 연해주의 독립운동에서도 이상설이란 이름은 활약에 비해 가려져 있었다. 그것은 이상설이 스스로 원한 것이기도 했다. 그는 보이되, 보이지 않는 가려진 전략가였다.

 

 

 

나는 고종황제의 신임장을 받은 특사이자, 대한제국 최후의 외교사절이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나는 순종황제의 첫 번째 사형수가 되었습니다.

황제를 대신해 외교활동을 하는 특사이면서 역시 황제의 명에 의해 사형수가 된 모순된 운명…

 

실제로 그의 삶을 따라가 보면 우리는 단지 ‘헤이그 특사 이상설’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위대한 거인의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신하된 자로 임금에게 죽음을 권했던 을사늑약 상소투쟁과 1906년 망명이후 북간도 서전서숙 건립과 민족교육, 헤이그 특사, 구미 순방외교, 북만주와 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 13도의군, 성명회, 권업회, 대한광복군정부, 신한혁명당 등 3.1운동 이전의 초기 독립운동사에서 이상설의 위상과 역할은 실로 지대한 것이었다.그의 행적은 우리 독립 운동사를 통틀어 가장 폭넓고, 통합적인 전략가의 면모를 보여준다.

 

– 세 번의 기회와 세 번의 좌절

 

이상설의 독립운동에는 크게 세 번의 기회와 좌절이 있었다. 첫 번째는 1905년 을사늑약 당시 황제의 인준을 거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벌인 상소투쟁이었다. 이상설은 신하된 자로서 군주인 광무황제에게 죽음을 권할 정도로 강력한 문장의 상소를 올렸고, 그 역시 종로 거리에 나가 가두연설을 한 뒤 자결을 시도했다.

 

이 장면은 현장에 있었던 젊은 김구에게 목격돼 백범일지에 자세하게 묘사돼 있다. 두 번째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의 특사 활동이었다. 그동안 헤이그 특사 파견을 무모한 시도였다고 평하는 학자들도 있었지만 네덜란드 현지에서 한국 특사들의 활동상을 연구한 레이덴 대학의 쿤 드 취스테르 교수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들은 조용히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크게 한방을 생각하고 도착했던 거죠.

 

처음부터 목적을 가지고 움직였던 겁니다. 도착 후 특사단의 첫 마디는 회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참석을 거부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인지하고 있었던 특사 단은 만약 참여할 수 없을 시 적어도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를 중재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헤이그에 온 주목적이었기 때문이죠.”

<쿤 드 취스테르 교수(레이덴 대학 한국학연구소)>

 

 

 

[1907년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리더잘] [3인의 헤이그 특사의 정사였던 이상설 : 가운데]

 

세 번째는 연해주에서의 13도의군, 성명회, 권업회, 대한광복군 정부 활동 이후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마련하고자 추진한 신한혁명당이었다. 이상설은 생애 마지막이 되고만 이 비장의 계획을 위해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그리고 신규식, 박은식 등과 함께 독립전쟁을 주도할 조직을 만들고, 대한제국 망명정부와 중국, 독일을 아우르는 거대한 규모의 광복전략을 세웠다. 이를 위해 일본에 의해 강제 퇴위당한 광무황제의 망명계획도 실행에 옮기고자 했다. 이상설은 이렇게 탄생한 신한혁명당의 본부장이 되었다. 그러나……

 

 

 

[신한혁명당 회의 재현]

 

– 불꽃의 시간을 살다간 이상설, 광복 70주년에 되살아나다.

 

신한혁명당의 실패로 상심한 이상설은 병석에 눕는다.

그리고 일어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다.

 

‘내 모든 것을 불태우라’는 유언을 통해 스스로 잊히는 길을 택한 이상설. 그의 삶과 죽음을 담아낸 뜨거운 이야기가 자료를 통해 복원한 이상설의 모놀로그와 재연 이미지, 삽화와 샌드 애니메이션, 그리고 네덜란드, 중국, 러시아 3개국의 현장취재로 되살아난다.

 

 

 

[샌드아트로 재현한 13도의군 창의 장면]

[우수리스크 수이푼 강변의 이상설 유허비]

 

“독립운동 전선의 한복판을 관통하는 주요한 독립운동의 요목들마다 이상설 선생이 자리하고 계셨고, 그러한 이상설 선생으로 말미암아 독립운동의 전선이 풍부해지고 또 어떤 힘을 받을 수 있었던, 또 장기지속적인 독립운동의 방략들이 강구될 수 있는 초석을 다진 분이 이상설 선생이죠. 그래서 이상설 선생을 우리가 높이 평가하는 겁니다.” – <박민영 선임연구위원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 연구소)>

 

불운한 시대의 천재

 

– 이상설, 독립운동보다 먼저 수학에 빠졌다?

 

수학을 비롯한 한국의 근대 학문은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총독부의 조선교육령에서 비롯되었다는 게 그동안 일본 학계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 이전에 구한말 지식인들이 일본과 상관없이 자생적으로 서양의 근대 학문을 받아들이고 연구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수학의 경우 그 대표적인 증거가 바로 이상설의 《산술신서》와 수리》이다.

국권을 되찾지 못한 회한으로 괴로워하며 이국의 망명지에서 눈을 감은 독립운동가 이상설의 알려지지 않은 모습 중에 하나가 바로 광폭한 시대로 인해 재능을 마음껏 펼치지 못한 비운의 천재였던 것이다.

 

‘(이상설은) 대한의 학자 중에 제일류이니 재성(才性)이 절륜(絶輪)하고 조예(造詣)가 심히 깊어 동서 학문을 다 밝게 깨닫고 정밀하게 연구하였다. 성리학과 문장 그리고 정치·법률·산술(수학) 등의 학문이 모두 뛰어나고 풍부하다.’ <대한매일신보(1905.11.24.)>

 

 

[이상설의 영향으로 훗날 수학자가 된 동생 이상익, 오른쪽 이상설] [이상설의 산술신서]

 

이상설이 법학, 수학, 과학 등 신학문을 연구한 것은 1880년대 중후반에서 1900년대 초반까지. 당시 이상설과 죽마고우였던 이회영, 이시영 형제의 회고에는 이상설이 모든 학문을 독학으로 통달하고 학우들을 가르쳤다는 내용이 나온다.

 

1894년 과거 급제 이후 2년 뒤인 1896년 스물일곱 살의 젊은 나이로 성균관 관장이 된 이상설은 유학 중심의 성균관을 근대학문을 교육하는 곳으로 개혁한다. 수학이 성균관의 필수과목이 된 것도 이 무렵이다.

 

– 이상설의 수학연구 유고, 《수리》를 찾아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기 이전 수학자로서 이상설의 행적은 1900년 발간된 학부의 수학교과서 《산술신서》에 남아있다. 당시 1000부가 초판 인쇄된 《산술신서》는 국한문 혼용으로 저자가 알려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수학교과서이며 이후 재발행본이 나올 만큼 인기가 높았다.

 

교사 양성기관인 한성사범학교 등에서 교재로 사용됐다.

이상설은 성균관, 한성사범학교, 서전서숙 등에서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쳤을 것으로 보인다.

 

 

 

시대는 빠르게 변하고 있었고, 나는 신학문이 풍랑의 시대를 헤쳐 나갈 돛대가 되리라 믿었습니다.

내가 학부의 수학교과서 편찬 요청을 받아들여 《산술신서》를 엮은 이유입니다.

 

학생들과 함께 하면서 나는, 조선의 꿈을 보았습니다….

 

–전통산학에서 근대수학으로 넘어가던 시기, 그 변화의 중심에 섰던 이들은 누구인가?

 

한국의 근대수학이 일제강점기에 시작되었다는 말은 이전에 조선의 자주적인 근대 학문 수용 움직임이 없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최근 수년 동안 국내 수학계에서 이루어진 연구 결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상설의 《산술신서》가 재평가되었고, 베일에 쌓여있던 또 하나의 존재가 주목을 받게 되었다.

바로 이상설이 《산술신서》보다 10년 이상 앞선 시기에 썼다는 수학연구 유고 《수리(數理)》였다. 학계는 《수리》의 존재를 찾는 작업에 나섰고 제작진도 전설이 되어버린 《수리》의 원본을 찾아 나섰는데……

 

“이상설의 《수리》가 갖는 의미는 한국에서 전통산학과 현대수학을 연결해주는 고리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수리》 이전의 책들은 조선 산학까지를 다루 있다고 한다면 《수리》는 거기에 보태서 당시에 서양이 다루고 있던 최신 수학의 내용이 직접적으로 보태져 있다.” 《이상구 교수(성균관대 수학과)》

 

 

 

[방송 최초로 공개되는 이상설의 수학연구 유고 ‘수리’ 원본] [수당기념관에서의 ‘수리’ 찾기 작업]

 

– 이상설이 뿌린 민족교육의 씨앗, 광복의 전사들을 키우다

 

1906년 이상설이 망명길에 올라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북간도 용정에 최초의 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여는 일이었다. 이상설은 서전서숙의 모든 경비를 책임지며 무상교육을 실시했다.

 

이상설 자신도 직접 청년 학생들에게 수학 등 신학문을 가르쳤다.

서전서숙의 민족교육 이념은 당시 교가에도 잘 나타나있다.

 

불함산이 높이 있고 두만강이 둘렀는데

서전서숙 창립하니 총명하고 준수한 재자(才子)들이 모였노라

한 사람이 백 사람인 듯 공부하니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구해보세

《1906년 서전서숙 교가 》

 

이상설과 서전서숙은 곧 일제의 눈엣가시가 되었다.

통감부 임시 간도파출소장 사이토를 앞세워 감시와 탄압에 들어간 일제에 의해 서전서숙은 1년 만에 문을 닫고 만다. 하지만 서전서숙의 역사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서전서숙의 학생과 교사들이 옮겨 간 명동촌에서는 서전서숙의 교육이념과 교과과정을 고스란히 계승한 명동학교가 문을 열었고, 이어서 창동학교, 정동학교, 신흥강습소 등이 서전서숙의 민족교육을 계승했다.

 

이상설 자신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업회를 통해 연해주 최대 민족교육기관인 한민학교를 만들었고, 사관학교를 통해 실질적인 광복의 전사들을 양성했다.

 

실제로 사관학교에 지원한 청년들은 서전서숙을 계승한 각처의 민족교육 학교들의 졸업생들이었다.

이상설이 망명지에서 뿌린 민족교육의 씨앗이 광복을 위해 싸우는 항일 전사들을 길러낸 것이다.

 

 

 

[1906년 이상설이 근대민족교육, 무상교육을 실시한 서전서숙] [이상설의 한성사범학교 수학교육 재연 삽화]

 

“서전서숙의 민족교육 전통은 국내외로 파급되면서 독립운동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상설 선생에게 있어 민족교육은 그 자체로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민족교육을 통해 배출한 신진인사들이 후속 독립투사를 양성하는 학교의 교사가 되고, 사관학교 교육을 통해 독립군 장교를 양성해 독립전쟁의 첨병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박걸순 교수 (충북대 사학과)>

 

– 이상설의 꿈, 동양평화 – 해방을 넘어 평화로

 

 

 

나에게 조국의 독립은 반일이나 항일의 문제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나의 마음속에는 훨씬 더 넓고, 깊고,

아름다운 이름이… ‘평화’가 있었다.

 

비록 나의 삶은 분노와 투쟁으로 물들었지만

그 모든 것이야말로 진정 나의 꿈이자

조국의 꿈인 평화를 위한 몸부림이었다.

 

이상설의 꿈이었던 「동양평화론」에 가장 깊은 감화를 받은 사람은 안중근이었다. 실제로 안중근은 심문과정에서 이상설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았고, 일제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의 배후에 있던 인물로 이상설을 의심했으나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이상설의 포부는 매우 크며 세계대세에 밝고 동양시국을 간파하고 있다. 이범윤(李範允)과 같은 인물만인을 모아도 이상설 한사람에 못 미칠 것이다… 수차 만나서 보니 기량이 크고 사리가 통하는 큰 인물로서, 애국심이 강하여 교육발달을 기도하고 국가 백년대계를 세우는 사람이다.

 

또한 동양평화주의를 가진 점에 있어서 이 사람 같이 초절한 마음과 뜻을 갖춘 사람은 참으로 희귀할 것이다.”

<안중근의 뤼순감옥 진술> [1909.11.29. 일본공사관 기록]

 

밝아오는 조국의 새벽을 보지 못하고 떠난 사람..

그러나 그 자신이 조국의 새벽이었고, 칼날 위에 선 한 시대의 꿈이었다.

이상설의 꿈에서 우리시대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제작진의 말>

 

 

청주에 거주하는 이현원 여사(이상설의 외손녀) 이재승 교수 이상설의 동생이자 수학자인 이상익의

손자, 미국 미시건대 교수]

사진제공 : 광복70주년 KBS 특집 < 이상설 불꽃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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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0주년 KBS 특집 (1TV, 8월12일,13일) 이상설 불꽃의 시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