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보재이상설선생.

북간도의 민족주의교육-서전서숙

야촌(1) 2015. 7. 28. 13:54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16권 1910년대 국외항일운동Ⅰ

-만주·러시아 / 제1장 만주지역 민족운동 / 4. 북간도의 민족주의교육

 

4. 북간도의 민족주의교육

 

1. 서전서숙(瑞甸書塾)

 

서전서숙은 1906년 이상설(李相卨)의 선도로 북간도 용정(龍井)을 독립운동기지로 개척하는 과정에서 설립된 민족주의교육의 요람이었다. 서전서숙의 설립을 주관한 이상설을 비롯하여 이동녕(李東寧)·정순만(鄭淳萬)·여준(呂準)·박정서(朴楨瑞) 등 민족운동자들의 일치된 노력의 결실로 1906년 10월경 개숙되었다. 註64)

 

서전서숙은 민족주의교육 면에서 큰 자취를 남겼다. 구국운동은 민족주의교육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생각에서 이상설은 북간도 신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의 창설을 주도하였다. 여기에는 이상설의 동지인 이동녕·여준·정순만·박정서·김우용·황달영·홍창섭 등이 참여하였다. 註65)

 

그 가운데 이동녕은 이상설과 같이 활동하다가 3·1운동 이후 상해에서 국내외 민족운동자로 구성된 임시의정원의 의장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세운 독립운동계의 원로이다. 정순만은 이후에 연해주에서 『해조신문(海朝新聞)』을 주간하였다. 

 

여준은 이상설과 함께 수학한 지기로 서전서숙 활동 이후에도 계속 서북간도 각지에서 민족주의교육에 이바지한 인물이다. 박정서는 서전서숙 폐숙 후, 김약연과 함께 명동서숙을 세워 그 숙장이 되어 서전서숙을 정신적으로 계승한 인물이다.

 

이상설은 을사5조약 파기투쟁 후 자택에 은거하여 거의 표면적 정치활동에는 참여하지 않은 것 같이 보이면서도 은밀히 전덕기(全德基)를 중심한 상동청년회에서 활동하던 이희영·이동녕 또는 유완무(柳完懋)·장유순(張裕淳)·이시영(李始榮) 등과 의논하여 국외망명과 구국운동의 새 방략을 계획한 것 같다. 註66)

 

그리하여 1906년 음력 4월 18일 양부 이용우(李龍雨)의 친기(親忌)를 지낸 직후 이동녕(李東寧)과 같이 조국을 비밀리에 떠나 상해를 거쳐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이상설(李相卨)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황달영·정순만·김우용·홍창섭 등과 회합하여 북간도 중에서도 한인이 많이 이주하여 사는 연길현 육도구(六道溝) 용정촌(龍井村)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註67)

 

그는 이들과 함께 용정에 도착하자마자 그 일대에서 제일 큰 집인 천주교회장 최병익(崔秉翼)의 집을 이상설의 사재를 들여 매입한 뒤, 학교 건물로 개수하여 서전서숙이라 명명하였다. 註68)

서전(瑞甸)이란 그 지방을 총칭하는 지명인 것이다. 註69)

 

이상설은 숙장이 되었으며 이동녕과 정순만이 서숙의 운영을 맡았다. 교원의 월급에서 교재나 학생의 지필묵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비는 이상설이 전부 부담하는 무상교육이었다. 註70)

 

서숙의 건물은 70평 가량에 지나지 않고 처음 인근의 한인 청소년 22명을 모아 개숙하였다. 註71)

 

그곳 사람들이 신교육에 대해 이해가 없어 교직원이 여러 한인마을을 다니면서 입학을 권유해야만 했으며, 멀리 두만강을 건너 회령·종성·온성 등지까지 입학 권유에 나섰던 것이다. 뒤에 북간도 교육의 중심인물이 된 김약연이 그에게서 한문을 배운 제자 두 명을 보내왔던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註72)

 

서전서숙은 처음에 학생들을 갑·을반으로 나누었다. 갑반은 고등반이고, 을반은 초등반이며, 갑반에는 20세 전후의 청년학생들도 배웠다. 학생수는 그 후에 늘어나 다음해 학교문을 닫을 무렵에는 70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갑·을·병반으로 나누어 갑반에는 20명, 을반에 20명, 병반에 34명의 학생이 있었다고 한다. 註73)

 

이들 학생 중 현재 그 성명이 전하는 사람은 갑반 소속의 윤정희(尹政熙)·이병징(李炳徵)·윤규한(尹圭漢)·김승문(金昇汶)·남세극(南世極)·채우석(蔡禹錫)·이근용(李瑾鎔)·구자승(具滋昇)·구정서(具貞書)와, 을반 소속의 김학연(金學淵)·박일병(朴一秉)·오병묵(吳秉默)·이정휘(李庭徽)·박효언(朴孝彦)·구자익(具滋益)·박세호(朴世豪), 그리고 반을 알 수 없는 남위언(南韋彦) 등이다. 註74)

 

이상설을 비롯하여 개숙에 참여한 사람들이 직접 교단에 서서 가르쳤으며 역사·지리·수학·국제공법·헌법 등 근대교육을 실시하였다. 註75)

 

이렇게 하여 이 서숙은 북간도 신교육의 요람 구실을 한 셈이다. 註76)

 

 

이상설은 갑반의 산술을 맡아 『산술신서(算術新書)』 상·하권을 저술하여 가르쳤으며, 황달영은 역사와 지리, 김우용은 산술, 여준은 한문·정치학·법학 등을 가르쳤다. 註77)

그러나 이 서숙에서 보다 중점을 둔 교육내용은 신학문 과목과 함께 실시하던 철두철미한 반일민족교육이었다. 따라서 이름이 서숙이었지 실상은 독립군 양성소와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註78)
 
1907년 초에 일제는 장차 민주침략의 전초기지를 세우고자 북간도의 한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통감부 간도파출소를 두기로 하였다. 

일제는 그곳을 조사하고 출장소 후보지를 선정하기 위해 러일전쟁 때 참전했던 일군 중좌 재등계치랑과 식민지 어용학자 조전치책(田治策)을 밀파한 일이 있었다.

이들은 상인으로 가장하고 서전서숙을 찾아갔다. 이들은 점심을 먹기 위해 더운 물과 식사장소를 제공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상설은 이때 문을 나서다가 이 말을 듣고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 버렸다. 

이에 일본인들은 별 수없이 개울가를 찾아 식사를 하고는 돌아가 보고서에다 ‘태도가 교만했다’고 기술하고 분통을 터뜨렸다.註79)

 재등계치랑은 이후 1907년 8월에 일본군 기병대를 거느리고 용정에 들어가 간도파출소를 개설하고 일제의 만주침략 앞잡이로 등장하였다. 

그 무렵 그는 한국통감 대리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를 통하여 자국의 외무대신 임동(林董)에게 서전서숙을 내사(內査)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당 용정촌에 한인이 설립한 학교가 있다. 서전서숙이라 칭하고 있으며 설립자의 경력, 설치의 목적 및 자금의 출처 등에 있어서 시국상 의심할 점이 있으므로 취조한 바 좌기(左記) 사실과 같으므로 이에 보고한다.

명동학교가 이와 같이 발전함에 따라 그 명성이 국내외에 알려져 입학생이 북간도 일대뿐만 아니라 연해주와 함북 회령 등지에서도 몰려와 크게 융성하였다. 학생들의 나이는 특별한 제한이 없이 15~16세의 소년부터 30~40세의 장년까지 함께 섞여 문무쌍전의 철저한 민족주의교육을 받았다. 註92)
정재면의 간찰. 1911년 11월 25일자로 미국에서 활동중인 안창호에게 북간도 민족운동상황을 통보한 것이다. 

특히 그무렵 민족주의교육의 명문 명동학교의 학생수는 180여인, 창동학교의 학생수는 140여인,소영자 광성학교의 사범 및 중등학생수는 150여 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좌기

 

一. 서전서숙의 설립. 서전(瑞甸)이란 당지 즉 용정촌 지방의 총칭이다. 해(該) 서숙의 설립자는 보재(溥齋). 이상

      설(李相卨)· 이량(李亮), 이동녕(李東寧)· 전공달(田共達), 황달영(黃達永)· 홍창섭(洪昌燮)· 왕창동(王昌

      東), 정순만(鄭順萬)6명으로서 그 주창자는 이상설이다.

 

      1906년(명치 39) 5월경 이상설은 이량과 상휴(相携)하여 경성을 출발하여 상해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들

     어왔다. 한 별도로 동년 6월경 전공달·왕창동·김동환(金東煥)의 3명은 시찰이라 칭하고 함께 블라디보스토

     크에 이르러 동서 이상설·이량 등과 회합하고 자(玆)에 서숙 설립의 협의를 하고 7월경 5명과 함께 간도로

     향하여 출발 도중홍창섭과 출회(出會)하여 일행 6명이 용정촌에 도착하고 작년1906 12월 서숙의 성립을 보기

     에 이르렀다.

 

二. 설립의 취지. 설립의 취지는 그 발표한 바에 의하면 간도의 지(地) 변추문화(邊陬文化)에 뒤짐을 근심하여 이의

       개발주지로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三. 중요한 직원 및 경력. 숙장 이상설[李堂]은 경성 저동(苧洞)의 산(産), 본년 38세 가량으로 전에 법부협판을 한

       사실이 있고 프랑스(어)에 통한다고 말한다. 본년 5월 숙무(塾務)를 사(辭)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나가 평화

       회의에 차명(差命)하는 한황(韓皇)의 밀사에 가담하였다. 이량(李亮)은 충청도 회인(懷仁)의 산(産)으로서 8

       월중 당지를 떠났다. 

 

      목하 김동환(金東煥) 1인만이 잔류하여 숙무에 종사하고 있다. 본인은 평양산으로 조금 일본어를 통한다.

 

四. 자생(資生). 이상설 1인으로서 부담한다고 말한다. 혹은 각 직원의 회비로서 이상설은 오천원, 전공달·왕창동

      은 각 오백원, 김동환은 삼백원, 홍창섭은 백원을 각각 준비하여 그 자금에 충당하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김동

     환은 자금의 출에대하여 전혀 각자의 자산에서 지출하고 결코 타의 원조를 받은 것이 아니라고 진술한다.

 

五. 교과과목 및 생도수. 산술·습자·독서·지리·법률 등으로서 약간 중학 정도에 비교된다. 생도는 당촌(當村) 

       부근 각 락에서 내집(來集)하여 숙내(塾內) 등에 기숙시켜 일시 70여명이 있을 때가 있었으나 이상설 이하

       사퇴와 함께 점차 쇠미해져 현재 생도수 겨우 20명을 지나지 않는다.

 

六. 시국에 대한 직원의 태도. 한황(韓皇) 양위의 보(報) 한번 당(當)지방에 이르자 교원·직원·연장생도 등은 누구

      나 비분고 그중 왕창동은 의관을 찢고 이를 땅에 던지며 강개하였다고 한다.

 

七. 서숙의 장래. 서숙은 숙장인 이상설을 잃었기 때문에 점차 생도가 감소되어 가고 자금 또한 결핍하고, 또 시국의

       변에 따라 장래 유지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근근 폐교하기로 결정하고 숙사(塾舍)의 매각을 바라고 있다.

 

      이상의 사실에 의하여 그들이 발표한 설립의 목적, 자본금의 출처 등에 대하여 다소 의문점이 없지 않다. 또 이

      상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러 전 군부대신 이용익 및 상해에 있는 전 경성 주재 러시아공사 바파로프

      사이를 왕복한 행적이 있다는 설이 있다.

 

      생각컨대 그도 또한 이용익 일배(一輩)의 도(徒)에 참여하여 금회 밀사에 참여하였다고 믿어진다. 특히 당파

      출소가 치되자 곧 자금의 결핍으로 폐교하고, 그 직원 등을 각자 귀향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 상태로서 다소

      의 의미를 가졌다고 인정된다. 우(右)를 보고한다. 註80)

 

 

이와 같이 서전서숙은 불행히도 그 다음해 9~10월경에 문을 닫게 되었다. 
註81)

이상설이 1907년 4월 3일경 헤이그 사행으로 이동녕·정순만과 함께 연해주의 블리디보스토크로 떠났기 때문이다. 비밀지령을 받고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훈춘에 학교를 하나 더 세우려 간다고 하고 떠났다고 한다. 註82)

그 후 약 한 달 뒤에 이동녕만 이상설의 아우 이상익(李相益)과 같이 돌아왔다. 이후 서숙은 이상설이 없으므로 재정난도 닥치고, 더구나 통감부 간도출장소가 설치되어 그들의 감시와 방해로 견딜 수 없게 되자 스스로 문을 닫고 말았다. 

특히 간도파출소에서는 서전서숙의 명의를 이용하여 친일교육을 실시하고자 회유공작을 폈으나 실패하였다. 註83)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간행되던 『해조신문(海朝新聞)』에서는 「북간도서전학교와산실록(北間島瑞甸學校瓦散實錄)」이라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어 서전서숙이 일제의 강압으로 부득이 폐숙된 사실을 전하고 있다.

『해조신문』 1908년 5월 26일자 제75호에 게재된
「북간도서전하교 와산신록」 기사 

 

해아(海牙) 만국평화회의로부터 거절되었다는 흉보가 아교(我校)에 달하자 전교의 교사·생도는 통곡하였다. 전국의 동포 누가 통분하지 않을 것이냐. 연이나 비록 비분의 열루熱淚만으로써 아(我) 원수를 토멸하기 난(難)하여 익일부터 재차 학업을 수(授)하였다. … 그뒤 학교는 드디어 일본군 때문에 점령되어 드디어 폐교하지 않을 수 없기에 지(至)하였다.

 

오호라, 홀연 야만의 악습을 천행(擅行)하는 일본은 한국 삼천리의 강토를 탄呑하고 북간도의 학교를 병탄하였다. 문명으로써 연호然乎아, 강성(强盛)으로써 연호然乎아. 교육은 문명의 근본이다. 학교는 사회라고 한다. 금일 일본인은 교육의 원수이다. 학교의 도적이다. 註84)

 

서전서숙은 이와 같이 1년 미만의 짧은 역사로 끝나 버렸으나, 항일독립운동사상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이 서숙의 설립목적이 일반적인 신교육기관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독립운동의 기본방략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서전서숙이 국외 독립운동의 시작이었다는 사실을 계봉우 필명 사방자의 「북간도, 그 과거와 현재」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독립활동, 십삼 년 전에 서전서숙이라는 효종(曉鍾)이 방성(放聲)한 이후로 인인지사(仁人志士)가 내지로서 육속(陸續) 입래(入來)하여 대한독립을 모복(謀復)하려는 사위이외(事爲以外)는 사회도 없다, 교육도 없다, 종교도 없다 하는 대전하(大戰下)에서 온갖 마장(魔障)을 배제하고 온갖 고경(苦境)을 역행(逆行)하면서 갈갈경영(矻矻經營)한 바가 정신을 온축(蘊蓄)하고 심지(心志)를 규합하고 혈력(血力)을 조장하여 정(靜)을 수(守)하기가 처녀같이 하다가 동(動)하기는 탈토(脫兎)같이하기를 기도하였다. 註85)

 

독립운동의 방향이 민족의 자주역량 향상에 있으며, 그 자주역량의 향상은 무엇보다 근대적 민족운동을 선도할 인재가 필요하므로 민족주의교육의 보급이 중요한 과제였다. 더구나 일제 통감부치하의 국내 교육기관에서는 민족의식과 민족문화의 말살을 도모하는 식민지교육이 추진중이었으므로 보다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1907년 8·9월경에 서전서숙은 폐숙 되었으나 민족주의 교육기관은 그후 서전서숙이 자리 잡고 있던 북간도에서뿐 아니라 서간도와 러시아 연해주, 또한 국내 각지에서 일제 식민지교육과 대항하면서 크게 성장해 갔다.

 

우선 북간도에서는 서전서숙이 문을 닫자 바로 인접한 명동촌에 명동서숙(明東書塾)이 개숙된 뒤 명동학교로 발전하면서 3·1운동 때까지 북간도 교육기관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중추기관이 되었다

 

명동서숙과 서전서숙의 관계를 살펴보면, 우선 명동서숙의 임원은 서전서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었다. 박정서는 숙장이 되고, 여준은 교원이 되었다. 또한 서전서숙에서 수학한 김학연과 남위언이 교원으로 있었다. 註86)

 

다음으로 서간도에서는 1911년에 이동녕·이회영·이시영·김창환·이상룡 등이 망명하여 신흥강습소를 세운 뒤 이를 신흥학교, 나아가 신흥무관학교로 발전시키면서 민족운동의 인재를 양성해 나갔다. 이 학교도 설립자의 면모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서전서숙의 교육방향을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06년에 함께 망명하여 서전서숙을 같이 경영했던 이동녕은 말할 것도 없고, 이회영·이시영 형제는 이상설의 죽마고우로 공사간에 밀접한 길을 걷던 인물들이었다. 註87)

 

그밖에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한민학교와 북만주 밀산부의 한흥학교 등도 모두 이와 같은 성격의 것이었다. 이상설은 서울을 떠날 때 국권을 찾지 못하면 다시 고국 땅을 밟지 않겠다고 결심하여 저동苧洞에 있던 집을 팔았으며, 그 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충당하였다. 註88)

 

집을 떠난 뒤의 행적으로 보아 스스로 조국광복을 이루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품고 떠났던 것으로 해석된다.

 

2. 명동학교 

 

명동학교가 들어선 명동촌은 19세기가 저물던 1899년 2월 18일 함경도 회령 출신의 젊은 선비 규암(圭巖) 김약연(金躍淵)이 인솔하던 가솔 31명을 비롯해 회령의 김하규(金河奎) 가문 63명, 종성의 문치정(文治正) 가문 40명, 남위언(南韋彦) 가솔 7명 등 모두 22가구 142명이 집단으로 두만강을 건너 오랑캐령을 넘어 용정촌에서 남쪽으로 40리 떨어진 화룡현 지신향 장재촌(長財村)에 자리잡고 건설한 한인 마을이다.

 

다음 해인 1900년에는 두만강 대안 자동(滋洞)으로 이주했던 윤재옥(尹在玉)과 그의 가솔들이 합류해와 5가문의 공동체 촌락이 형성되었다. 그들은 중국인으로부터 사들인 황무지와 임야 1,000여 경(耕)을 5가구가 투자한 몫대로 나누어 합심 협동하여 황무지를 옥토로 만들고 가옥과 서당을 세워 개척마을을 건설한 것이다. 

 

1905년에 이르면 선바위골에 40호, 수남동에 80호, 장재마을에 400호, 중용촌에 250호, 선교촌에 130호 등 모두 900호가 넘는 ‘동방을 밝힌다’는 뜻의 대규모 명동촌이 형성되었다. 그 안에는 1901년에 용암촌에 세운 규암재(圭巖齋)와 대룡동에 세운 소암재(素巖齋), 그리고 상중용촌에 세운 오룡재(五龍齋) 등이 있어 이주민 자제들의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그후 인근에 있던 용정촌의 서전서숙이 신교육을 바탕으로 하는 민족주의교육을 실시하다가 중단되는 것을 보고 규암재·소암재·오룡재를 통합하여 새로운 민족주의교육을 실시할 명동서숙으로 개편하였다.

 

1908년 4월 신식교육기관으로 개숙한 명동서숙의 숙장은 김약연이 맡았으며, 박정서[朴茂林]가 명예숙장, 문치정이 재무를 각각 담당하였다. 그리고 교원으로는 김약연의 4촌 동생인 김학연과 서전서숙 출신의 남위언(南葦彦)을 비롯하여 김하규·여준 등의 애국지사들이 부임하여 세 서숙에서 모인 42명의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註89)

 

 

1909년 명동서숙은 국내의 신민회에서 파견된 정재면을 단장으로 하는 북간도교육단을 맞아 그들과 합심하여 명실상부한 민족주의 교육기관으로 성장해 갔다. 

정재면은 북간도로 오기 전에 신민회 회원으로 서울에서 애국계몽운동도 전개했지만 그 전에 평양숭실학교를 졸업한 후로는 원산 보광학교 교사로 구국교육운동에 종사하던 인물이었다. 

그가 신민회 간부인 이동녕과 이동휘의 권유로 교육단을 조직하여 북간도에 갔던 것이다.

북간도교육단의 중요 임원은 종교에 기독교 전도사 배상희, 의무에 평양 제중병원 의사 한봉의, 재무에 유기연, 고문에 이동녕과 이동휘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원산항에서 출발한 뒤 용정을 거쳐 명동촌으로 가서 그곳의 명동서숙을 발전시키는 데 힘썼던 것이다.
특히 정재면은 교무주임으로 취임하여 규암재 이래의 구식교육 체제를 완전히 쇄신하면서 교육의 이념을 독립정신에 두는 신교육을 철저하게 시행하였다. 

그를 구현하기 위해서 역사에 황의돈(黃義敦), 윤리에 박태항(朴兌恒), 한글에 장지영張志瑛, 체육에 김홍일金弘一 등이 차례로 국내외에서 초빙되었다. 註90)

한편 정재면 등 북간도교육단은 근대 민족주의를 신장시키는 데는 재래의 유교보다는 참신한 기독교가 우월하고, 또한 북간도의 특수사정으로 보아 중국과 일제의 견제를 보다 적게 받으려면 기독교에 귀의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 설득하여 명동학교를 기독교 학교로 개편케 하였다. 註91) 

그리하여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명동촌에 다시 명동교회를 설립하여 선교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얼마 후에는 김약연도 기독교에 입신하여 목사가 되고 간도 기독교 선교에 솔선하였다.

명동서숙은 1909년 4월 다시 명동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으며 1910년에는 중학부까지 증설되었다. 소학부에서는 국어·동국역사·성경·교육학·창가·체조 등의 과목을 이수토록 하였다. 註93)
규암 김약연(圭巖 金躍淵,1868~1942).선생 존영 

함경북도 회령 출신. 한학자로 1899년 북간도에 이주하여 명동촌을 건설학고, 명동학교를 세워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기독교에 귀의하여 명동교회도 세웠고, 장로회 목사로 선교사업에도 헌신하였다.

 

궁극적으로 명동학교의 교육이념은 민족의식 고양을 통한 구국인재의 양성에 있었다. 1911년에는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북간도에서 처음으로 명동학교 내에 여학부를 신설하였다. 이 무렵 교원으로는 박태항·최기학·송창희·황의돈·박정서·박태식·장지영·김철·박경철·김성환·김승근 등이 봉사하고 있었다.

 

또한 정신태, 이동휘의 딸인 이의순, 그리고 이봉윤 등이 명동학교에 재직하던 대표적인 여성 교원이었다. 이와 같은 명동학교는 날이 갈수록 명성이 높아져 북간도 민족주의 교육기관의 모범학교로 부상하였다. 이 무렵 학생 수는 중학부에 160명, 소학부의 보통과 121명, 고등과 159명, 그리고 여학부에는 65명이 등록되어 있었다. 註94)

 

명동학교의 교육내용이 항일교육에 본령이 있었던 사실의 일단을 소개하면, 입학시험을 비롯해 평시의 각종 시험에서 작문을 매우 중요시했는데, 그 제목이 무엇이든간에 문장 가운데 애국과 독립의 내용을 담지 않으면 낙제점을 받거나 불량성적으로 평가되었다. 

 

또한 매주 토요일마다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일제는 이후 1920년 10월 훈춘사건을 조작, 만주침공을 감행하여 독립군과 민족운동자를 탄압·학살하면서 명동학교를 ‘항일’의 소굴이라고 지목하여 소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명동학교의 항일민족교육은 1908년 개교 때부터 1920년에 교사가 일군의 만행으로 소각당할 때까지 일관되게 계속되어 수많은 애국인재가 배출되었다. 명동학교 졸업생들은 이후 도처에 세워진 여러 민족주의 교육기관에서 교사로, 1920년대의 만주 독립군으로, 또는 항일민족운동을 주도하는 항일투사로 활약하였다. 

 

또한 명동학교의 중학부는 1925년 전후 기독교를 배척하던 공산주의 사조의 풍미 등으로 폐쇄되었지만 재학생은 김약연 목사를 따라 용정촌의 은진학교로 옮겨가 학업을 계승하였고 명동소학교만은 그 명맥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3. 창동학교 

 

1905년 을사5조약 늑결 전후 북간도로 건너와 연길 와룡동(臥龍洞)에 정착하게 된 남성우(南性祐·)이병휘(李炳徽)·오상근(吳祥根) 등의 민족운동자들은 이주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 민족주의 구국운동을 구현할 인재를 양성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결과 1907년에 창동소학교가 설립되어 민족주의교육을 실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3년만인 1910년에는 중학부를 신설하고 학교 이름을 창동학원(昌東學院)으로 고쳐 불렀다. 註95)

 

‘창동(昌東)’이란 ‘동국(東國)의 창성(昌盛)’을 의미하는 것이다. 개교 초기에 창동학원의 정·부원장은 오상근·이병휘·남성우가 맡았으며, 신홍남(辛鴻南)·김종만(金鍾萬·)홍우만(洪祐晩)·이진호(李鎭鎬)·김이택(金履澤)·송창희(宋昌禧)·서성권(徐成權)·문경(文勁) 등 8명의 교원이 재임하고 있었다. 註96)

 

중학생은 처음 80여 명 정도였으며, 그 가운데는 북간도뿐만 아니라 남북만주 혹은 러시아 연해주로부터 오는 학생도 있었다. 이 학교의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에 들어갔으며 그 경비는 학교후원회에서 부담하였다. 

 

창동학원 개교 초기에 불려졌던 다음과 같은 교가를 통하여 그 교육목표가 민족해방과 조국독립을 위한 인재양성에 있었음을 보다 확실히 알 수 있다. 

 

[1절]

한줄기 뻗친 맥줄 흰 뫼 아래

한배검이 처음 닦은 굳고 굳은 터

그 위에 우뚝 솟은 우리 창동은

인류문화 발전하려 떨쳐나섰다. 

 

[2절]

여기저기 배달나라 남녀제씨들

애를 쓰고 힘들여 거둬 기를제

피어린 역사로써 거름을 주어

사랑스런 강토에 다시 보내자. 

 

[후렴]

참스럽다 착하다 아름다워라

정신은 자유요 이상은 독립. 

 

창동학원의 교원들은 학교를 활동기지로 삼아 민족문화를 전수하는 한편, 학생들과 주민들에게 항일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벌였다. 중학부에는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기 위하여 군사훈련과를 두고 있었다.

 

1915년까지 창동학원 중학부 졸업생만도 200여 명이 훨씬 넘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졸업 후 왕청현 나자구(羅子溝)의 대전학교(大甸學校)로 들어가 전문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뒤 독립군 간부로 성장하였다. 註97) 

 

창동학교의 스승과 제자들은 이와 같은 민족주의교육을 기반으로 와룡동을 중심으로 원근의 한인들을 규합하여 항일운동을 펼쳐 나갔다. 그 구체적 사례를 몇 가지 들면, 

 

첫째, 1919년 3월 13일 용정의 서전대야(瑞甸大野)에서 열린 ‘조선독립축하회’와 그들 이은 ‘피의 항일시위’에 창

          동학교 전 사생(師生)은 물론 와룡동 주민의 대부분이 함께 참가하였다. 

 

둘째, 이들은 또한 3·13운동 이후 이후 서둘러 무장독립군 항쟁에 가담하였다. 4월 25일에는 와룡동에서 ‘대한국

           민회’를 조직하여 북간도 전역에 걸쳐 한인사회에서 민정과 군정을 아울러 수행하는 군정부(軍政府)로 발

           전시켜 강력한 대한국민군(大韓國民軍)을 편성하였다.

 

         한편 창동학교와 대전학교에서 수학한 임국정(林國楨)과 교사인 최봉설(崔鳳卨), 그밖에 윤준희·한상호·

         박웅세·김준 등은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을 조직하고 군자금 마련에 헌신하였다.

 

        이들은 북로군정서의 특파대가 되어 일제가 회령 에서 용정으로 보내는 조선은행권 15만원을 1920년 1월

        4일 용정에서 20리 떨어진 동량리(東良里) 어구에서 기민한 특무작전으로 탈취한 뒤 와룡동 본부로 가져

        오는데 성공하다. 註98)

 

4. 광성학교

 

연길시 소영자에 있던 광성학교(光成學校)는 1912년 3월에 개교한 길동기독학당(吉東基督學堂)이 확대 개편된 학교였다. 현재 연길시로 편입된 소영치(小營峙)에 세운 길동기독학당은 이동휘의 주창에 의해 그의 경제적 후원자이며 민족운동의 동지였던 이종호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아 김립의 주관으로 운영되던 학교였다.

 

교장은 간민교육회장을 역임한 이동춘(李同春)이고, 재무는 정현설, 간사는 구춘선·이봉우·이남원·황원호, 식당주임은 박춘서가 맡았다. 교사는 계봉우를 비롯하여 보성전문 출신의 윤해(尹海)와 김립, 그밖에 정기영(鄭基永)·오영선(吳永善)·김하석金(河錫)·문경(文經)·지건(池建)등 10여 명이었다.

 

계봉우는 역사와 지리를 담당하였고, 문경은 군사교육을 겸한 체육을, 윤해와 김립은 법률과 정치를 가르쳤다. 학교 건물은 처음에는 마을에서 비교적 규모가 컸던 강과부집을 개조해서 사용하였으나 3년 뒤에는 기숙사만도 15칸으로 건축하고 100여 명의 교비학생들이 일시에 식사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공동식당도 마련하게 되었다.

 

길동기독학당에는 중학과와 법률정치과를 두었고 부속으로 여자야학과 소학과를 두었으며, 얼마 후에 속성사범과를 두어 시급했던 교사 양성에도 힘썼다. 특히 중학과는 얼마 후 광성중학교(光成中學校)로 발전되어 명동촌의 명동중학교, 와룡동의 창동중학교와 더불어 북간도의 명문학교로 부상하였다.

 

이 무렵 학생수는 150여 명에 달하였다. 이들 학생은 간도는 물론 국내와 연해주에서도 몰려들었다. 학생들의 연령은 일반 중학과의 경우 15~25세가 표준이었고, 사범과는 17~40세의 청장년들이었다. 원지에서 온 학생들은 기숙사에서 생활하였고, 학비 조달이 어려운 학생은 무상으로 교육을 시켰다.

 

그러나 이 학당의 운영경비까지 전담하다시피 했던 연해주의 이종호로부터 지원금이 제대로 공급되지 못하여 만 1년이 못되어 광성중학의 모체가 되었던 중학과는 일시 폐지되고 말았다. 대신에 광성중학 안에 속성사범과를 두어 6개월 단기의 교사양성 교육을 시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길동사범과를 졸업한 학생 가운데는 북경·미국·일본·서울 등지에 유학한 후 간도로 돌아와 민족주의교육·사회운동 등에 투신하는 경우도 있었다. 길동기독학당의 교사였던 계봉우는 매일 7~8시간씩 낮에는 중학과와 사범과에서, 밤에는 여자야학에서 주로 역사와 지리를 교육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틈틈이 교재를 만들고 그것을 등사하는 등 매일 10시간 이상의 고된 작업을 헌신적으로 수행하였다고 한다. 註99) 이 무렵 길동기독학당 여자과, 즉 길동여학교에는 이동휘의 장녀 이인순李仁橓이 교사로 근무하였다.

 

한편 이동휘의 2녀 이의순(李義橓)도 명동여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5. 대전학교

 

대전학교(大甸學校)가 소재한 왕청현 나자구(羅子溝)는 연해주로부터 길림성 동녕현 삼차구(三岔溝)를 거쳐 남까울령이라는 험산을 넘고 노호산 무인지경을 지나 궁벽한 오지에 위치한 곳이다.

 

그러나 1910년대 초기에 나자구에는 한인의 개척 마을이 여러 곳에 산재하여 모두 1천호를 넘었다. 나자구 거주 한인은 국내로부터 직접 이주하여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연해주에서 살다가 전주(轉住)한 것으로 보인다.

 

권업회 등의 한인단체에서 계획적으로 이 지역을 한인의 집단 개척 촌락으로 조성한 것으로도 해석되는 곳이다. 특히 현지 주민 가운데 250여 명 가량은 러시아식 연발총으로 무장하고 유사시 일거에 출동할 수 있던 잠재병력이었다. 註100)

 

또한 나자구 삼도하자에는 1913년 3월 경부터 이종호의 지원으로 태흥서숙(泰興書塾)에 중학부를 두어 학교 이름을 태흥학교로 명명하고 김광사(金光使)·문학준(文學俊)·오기일(吳基一) 등 7~8명의 교사를 두고 한인 인재 양성을 위한 민족주의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註101)

 

처음 80명으로 시작한 이 학교는 곧 200여 명으로 번창하였으며, 체조교육과 군사훈련을 병수시켜 장차 일제와 싸울 독립군 간부 양성에 전념하고 있었다. 1914년 8월 연해주로부터 나자구로 옮겨온 이동휘는 현지의 유지들인 최정구·염재권·권의준 등과 합의하고 소동대전자(蘇洞大甸子 ; 楡芬大甸子)에 무관학교를 세웠다.

 

학교 건물과 학생 기숙사는 주민들의 추렴과 노력을 동원하여 세웠고, 학교 운영비는 이종호가 담당하였다. 교장은 이동휘였고, 김립·김규면·장기영·오영선·김영학·김광은·강성남·한흥·김하정 등이 교관이었다. 사관 학생은 태흥학교에서 수학하던 학생들을 비롯하여 간도와 연해주 각지에서 모집하였으며, 80여 명 이상 100여 명에 달하였다.

 

어떤 기록에는 사관 학생수가 많을 때는 300여 명에 달하였다고도 하였다. 註102) 대전학교와 같은 무관학교 건립은 이동휘가 주동이 된 연해주의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에서 당면한 중요사업으로 추진한 것이지만, 그 준비는 이동휘가 연해주로 가 권업회에 참여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 관헌의 탄압을 받은 태흥중학교 학생들이 무관학교 설립 직후 대거 이 학교로 입학하였던 것이다. 註103)

외형상 대전학교라 부르던 이 무관학교의 교육 내용은 군사학 교과서와 실습용 무기의 부족으로 군사기술의 연마는 미흡한 점이 없지 않지만, 조국을 광복하려던 독립군 사관으로서의 정신교육은 철저하였다.

 

그 모습을 이영일의 『이동휘 성재선생』에서는 애국 열정이 끓어 넘치는 사관학생들은 배고픔과 추위를 무릅쓰고 달마다 보여주는 보병 조련학습과 산병연습은 역발산 기개세하고 협태산 이초북해하는 용력을 보였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학생들이 부르던 군가의 가사는 다음과 같이 그들의 드높은 기개를 표현하고 있다. 註104)

 

1. 백두산하 넓고 넓은 만주 뜰들은 /

   건국영웅 우리들의 운동장이요 /  

   걸음걸음 대를 지어 앞을 향하여 /

   활발히 나아감이 엄숙하도다.

 

2. 대포소리 앞뒤 산을 둥둥 울리고 /

   총과 칼이 상설같이 맹렬하여도 /  

   두렴 없이 악악하는 돌격소리에 /

   적의 군사 공겁하여 정신 잃는다.

 

3. 높이 솟은 백두산아 내말 들어라 /

   저 건너 부사산 부러 말어라 /  

   우리의 청년들이 지진이 되어 /

   부사산 번칠 날이 멀지 않도다. 註105)

 

어떻게 보면 군사정치학교라고도 볼 수 있는 이 무관학교는 교사교련과 민족주의교육을 기본적 교양 내용으로 삼았고, 광복군의 군사 골간인 무관 양성을 교육의 지표로 삼았다.

 

대한광복군정부의 필수적 사업이기도 한 이와 같은 무관학교의 건립은 이동휘의 신념과 경륜의 결정이며 망명 후 최대 과제인 ‘독립전쟁론’ 구현을 위하여 처음부터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추진하였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대전학교의 존속기간은 1년을 넘지 못하고 만 것 같다. 1915년 말경 일본영사관의 강박에 의하여 중국 당국이 폐쇄조치를 내린 것이다. 이때 무관학교 학생들은 면학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해산하게 되었으나, 그 가운데 40여 명은 고학을 하더라도 면학을 계속할 결심으로 집단적으로 새 방도를 찾아 나서기로 하였다.

 

세계대전 발발 후 노동자를 대거 모집하던 우랄지방의 벨림이 대공장으로 가 노임을 벌어서 수학을 계속할 결심으로 그 공장을 찾아가 일하게 된 것이다. 그밖에도 상당수 학생들은 1917년 1월 훈춘 대황구(大荒溝)의 북일중학교(北一中學校)에 입학·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6. 북일학교

 

애국지사 양하구(梁河龜)와 서울 출신의 김철수(金哲洙)가 1911년 훈춘 서북방 90여 리 떨어진 대황구에다 신학문 교육기관으로 동창소학교(東昌小學校)를 세운 것이 북일학교의 연원이었다. 이 무렵 대황구로 들어온 의병장 유백초(柳百草) 역시 학교 창설사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註106)

 

그 후 1917년 1월에 나자구의 대전학교 폐교 이후 일부 사관생도들을 거느리고 이동휘가 김립 등과 함께 대황구로 오게 되었다. 이동휘는 이곳에서 현지 유지들인 양하구·김도연·김남극(金南極)·양병환(梁炳煥)·양병칠(梁炳七)·김하정(金夏鼎) 등과 협력하여 무장투쟁에 입각한 강렬한 항일민족 노선을 표방하는 북일중학교를 건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북일중학교는 건립주체나 교학이념으로 볼 때 대전학교 후신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북일중학교의 교사는 주민들의 자진 협력하에 건축한 8칸 가옥에 교실 3개의 규모였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입학순서와 연령을 고려하여 3개 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진행시켰다.

 

학제는 일정한 연한이 없었지만 대개의 경우 반년, 혹은 1년만에 수업을 마쳤다. 북일중학교의 교과내용은 그 교육취지에 따라 철저하게 민족주의 사상을 주입하고 전문 사관 양성을 위한 군사 훈련과 교육에 치중되어 있었다. 註107)

 

이러한 취지에 따라 국어와 역사·지리를 비롯하여 중국어·영어·러시아어·수학·물리·화학 등은 물론 체육과 군사 등 12개 과목이 부가되었다. 북일중학교는 창설 초기에 20여 명의 생도로 출발하였지만 뒤에는 40여 명으로 늘어났다.

 

학생 가운데는 북간도뿐만 아니라 국내와 연해주로부터 내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입·퇴교가 자유로웠기 때문에 2년 남짓한 기간에 2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성황을 이룰 수 있었다. 북일중학교의 임직원은 교장 양하구, 부교장 김남극이었다. 이동휘는 명예교장으로 추대되었다.

 

군사 교육과 훈련은 고경재高京在·김립 등이 담당하였고, 역사는 남공선(南公善)과 김하정이, 영어는 서울 출신의 이영 등이 가르치고 있었다. 註108)

 

7. 정동학교

 

정동학교(正東學校)는 두만강변의 화룡현 개운사(開運社) 자동두(玆洞), 현 용정현 광개향(光開鄕) 자동촌(子洞村)에 설립된 민족주의 교육기관이었다. 두만강변의 자동은 한인 이주민들이 간도에 첫 발을 들여놓은 곳으로, 연변지구에서 가장 먼저 개척된 한인 촌락 가운데 하나였다.

 

지역유지들인 강백규(姜伯奎)·강의헌(姜義軒)·유한풍(兪漢風) 등은 이주한인 자제들의 민족교육을 위하여 자동의 농가 한 채를 구입하여 1908년 10월 정동서숙(正東書塾)을 개숙한 것이 이 학교의 시작이었다.

 

개교 당시 학생은 20여 명이었으며, 숙장에는 강백규, 숙감에 강의헌, 학감에 유한풍이 선임되었으며, 교원으로는 최봉철崔鳳哲이 부임함으로써 모두 4명의 교직원이 근무하였다. 註109)

 

이와 같이 시작된 정동서숙은 1912년 김성래(金成來)·김윤승(金允升)·박희천(朴熙天)·최병국(崔秉國) 등의 지원하에 교실 6칸, 교무실 3칸의 교사를 신축한 뒤 이듬해 3월에는 교명을 정동학교로 바꿈과 동시에 신학 5년제를 실시함으로써 면목을 일신시켰다.

 

이때 교장으로 부임한 김윤승은 1920년까지 재임하면서 정동학교 발전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1913년 정동학교의 교직원은 김윤승 교장 이하 5명이었고, 80여 명의 학생이 등록되어있었다. 수업내용은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국어와 역사를 비롯하여 산수·지리·이과·체육·음악 등 신학문 전반에 걸쳐 있었다.

 

정동학교는 이어 1914년 8월 처음으로 여학부를 증설하고 25명의 여학생을 모집한 뒤 박에스컬(朴SKL)을 여교사로 초빙하였다. 註110)

 

그뒤 정동학교는 1917년에 이르러 중학부를 증설하고 이듬해에는 중학부 교사를 신축하였으며, 교사 7명을 새로 초빙함으로써 교육의 수준을 높여 갔다. 그리하여 중학부에서는 국어·역사·지리·대수·기하·영어·물리·화학·생물·체육·음악 등 다양한 과목을 가르쳐 경신참변으로 폐교될 때까지 북간도 일대에서 내실있는 민족교육기관으로 명성을 드날리기도 하였다. 註111)

--------------------------------------------------------------------------------------------------------------------------------------

 

[註 64] 서전서숙의 창설시기는 기록에 따라 약간씩 달라 확정하기 어렵다. 金海龍이란 일제 통감부 경관의 「龍

              井村 甸書調査記」(『間島在民韓人의 親族慣習及基他』, 중추원 문서로 한국학중앙연구원 도

             서관 霞城文庫 소장)에는 “광무 10년 10월에 이상설 등이 동지 6~7인을 대동하고 용정촌에 학교를 건축

             하고 생도 80여 명을 모집하여 육을 확장”이라고 하여 1906년 10월로 보고 있다.

[註 65] 『서전서숙조사보고문서』 ; 김해룡, 「용정촌 서전서숙조사기」 ; 윤정희, 「서전서숙기록」 참조. 이때

              이들은 변성명을 하여 이상설은 李堂, 이동녕은 李亮, 정순만은 王昌東, 여준은 呂祖(肇)鉉, 박정서는 朴

              茂林, 김우용은 金煥, 황달영은 田共達이라 하였다.☞

[註 66] 이관직, 『우당이회영선생실기』 ; 이완희, 『보재 이상설선생전기초』 참조.☞

[註 67] 조완구, 『이상설 보재소전』 ; 송상도, 『기려수필』 참조.☞

[註 68] 현규환, 「서전서숙」, 『한국유이민사』 상, 465~466쪽.☞

[註 69] 서전서숙은 기록에 따라 瑞甸義塾이라고도 하였으나, 현존하는 사진에 서전서숙이란 숙명 간판이 뚜렷

              이 보이고 있다. 용정 일대의 평야를 ‘瑞甸大野’라 한 데서 유래된 것이다.☞

[註 70] 현규환, 『한국유이민사』 상, 405쪽.☞

[註 71] 김성준, 「3·1운동 이전 북간도의 민족교육」 ; 현규환, 「서전서숙」,『한국유이민사』 상 참조.☞

[註 72] 이지택,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북간도 서전서숙」, 『중앙일보』 1972년 10월 17·19일자.☞

[註 73] 윤정희, 『간도개척소사』 ; 齋藤季治郞, 『서전서숙조사보고문서』 참조.☞

[註 74] 윤정희, 『서전서숙기록』(자필본) ; 현규환, 『한국유이민사』 상, 446쪽.☞

[註 75] 윤정희, 『간도개척소사』 ; 齋藤季治郞, 『서전서숙조사보고문서』 참조.☞

[註 76] 김성준, 「3·1운동 이전 북간도의 민족교육」의 ‘서전서숙’ 참조.☞

[註 77] 윤정희, 『간도개척소사』 참조.☞

[註 78] 이지택,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북간도 서전서숙」, 『중앙일보』 1972년 10월 17·19일자 참조.☞

[註 79] 동양척식회사, 『간도사정』, 812쪽.☞

[註 80] 『일본외무성문서』 135, 「間島版圖에 관한 淸韓兩國紛讓件(5)」(국회도서관 필름소장), 「명치

               40년 9월 16일 감부파출소장 齋藤季治郞 統派發 제5호」.☞

[註 81] 서전서숙의 폐숙시기에 대해서는 윤정희의 『간도개척소사』에 “정미(1908년) 8월에 폐교한다”고 되어

              있으나, 김해룡의 「용정촌 서전서숙조사기」에는 “융희 원년(1907년) 9월 초에 생도를 해산하고 학교

             를 폐지한 사”라하여 9월 초에 폐숙한 것으로 되어 있다.☞

[註 82] 윤정희, 『간도개척소사』 ; 이완희, 『보재이상설선생전기초』 참조.☞

[註 83] 윤정희의 『간도개척소사』에는 “서전서숙은 보재 이상설씨의 설립인 학교라 한다. 일본인의 압력과 일진

              회의 주목에 유지키 難하여 呂組鉉 선생은 폐교를 선언하고 일진회장 尹甲炳에게 교사와 일반 집기를 일

              금4백원에 매인계하시고 일행 5~6인은 70여 인의 생도와 작별 귀국하니 서전서숙은 차로써 종막을 고

              하얏고”라고 되어 있다.

[註 84] 『해조신문』 1908년 5월 26일 「기서」 ; 일제 관헌이 이를 입수, 일역하여 그들 상부에 보고한 것이, 일

                본공사관 기록인 「在露韓人發行新聞툢抗日行動(1908년)」에도 수록되어 있다.

[註85] 사방자, 「북간도 그 과거와 현재」 , 『독립신문』 1920년 1월 1일~13일.☞

[註 86] 이지택,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북간도, 명동과 김약연」, 『중앙일보』 1972년 10월 19~20일자 ; 김성

              준, 「3·1운동 이전의 북간도 민족교육」의 명동학교 기술 참조.☞

[註 87] 이관직, 『우당이회영선생실기』 참조.☞

[註 88] 이완희, 『보재이상설선생전기초』 참조.☞

[註 89] 연변문사자료편찬위원회, 『연변문사자료』 5, 83쪽.☞

[註 90] 현규환, 『한국유이민사』 상, 466~467.☞

[註 91] 서굉일,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가 정재면」, 『한민족독립운동사논총』, 박영석교수화갑기념논총간

              행위원회, 1992, 788쪽.☞

[註 92] 윤병석, 『국외한인사회와 민족운동』, 일조각, 1990, 20쪽.☞

[註 93] 연변문사자료편찬위원회, 『연변문사자료』 5, 83~84쪽.☞

[註 94] 연변문사자료편찬위원회, 『연변문사자료』 5, 84쪽.☞

[註 95] 연변문사자료편찬위원회, 『연변문사사료』 5, 25쪽에서는 창동학교 개교 시기를 1908년으로, 중학부

              설치 시기는 1912년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師恩紀念碑’에는 1907년에 소학으로 개교하였고 그

              로부터 3년 뒤에 을 신설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후자의 기록을 따랐다.

[註 96] 창동학원 ‘사은기념비’ 참조.☞

[註 97] 연변문사자료편찬위원회, 『연변문사자료』 5, 26~27쪽.☞

[註 98] 윤병석, 『한국독립운동의 해외사적 탐방기』, 지식산업사, 1994, 85~86쪽.☞

[註 99] 계봉우, 『꿈속의 꿈』 상, 153쪽.☞

[註 100] 『圖們江對岸移住鮮人의 狀況』(일본외무성사료관 소장) ; 연변문사자료편찬위원회, 『연변문

                 사자료』 5, 252~253쪽.☞

[註 101] 한웅, 「민국초기 왕청현 조선인 교육개황」, 『연변문사자료』 5, 164~165쪽.☞

[註 102] 이영일, 『리동휘 성재선생』, 201쪽 ; 연변문사자료편찬위원회, 『연변문사자료』 5, 252~253

                 쪽.☞

[註 103] 연변문사자료편찬위원회, 『연변문사자료』 5, 169쪽.☞

[註 104] 연변문사자료편찬위원회, 『연변문사자료』 5, 165쪽.☞

[註 105] 이영일, 『리동휘 성재선생』, 202쪽.☞

[註 106] 연변문사자료편찬위원회, 『연변문사자료』 5, 202쪽.☞

[註 107] 연변문사자료편찬위원회, 『연변문사자료』 5, 204~205·254~255쪽.☞

[註 108] 서굉일·동암 편저, 『간도사신론』 상, 우리들의편지사, 1993, 216쪽.☞

[註 109] 연변문사자료편찬위원회, 『연변문사자료』 5, 33~34쪽.☞

[註 110] 연변문사자료편찬위원회, 『연변문사자료』 5, 34~35.☞

[註 111] 연변문사자료편찬위원회, 『연변문사자료』 5, 35.☞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