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보재이상설선생.

보재선생과 독립운동

야촌(1) 2015. 6. 25. 22:57

보재선생과 독립운동

 

*집필자 : 권오돈<민족문화 고증회 이사>

*이 글은 1975년 9월 나라사랑 제20집, 보재 이상설선생 특집호에 수록된 글입니다.

 

  보재선생이 천추의 유한을 남기신 채, 차마 감지 못하실 눈을 감으시고, 장서(長逝, 서거)하신지 59년으로서 이제 1주갑(週甲)이 되었다. 48세라면 아직도 청년과 같은 원기로 일할 나이인데, 한사람의 동지로 믿던 자에게 배신당(密告者-)해 몇 해 동안 고심참담 하시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감을 지극히 가슴아파하신 끝에 그만 병환이 되어, 동지들의 정깊은 간호에도 아무런 효력 없이 이역만 리 시베리아의 니콜리스크(雙城子)에서 1917년 3월 2일에 영원히 가신 것이다.

 

  그 후 독립운동에 헌신 노력하던 여러 동지들은 독립운동이 여의하게 되지 않을 때 마다 선생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광복이 30주년째 되는 해에 새삼 선생을 추모하는 정이 간절하여 선생이 출생하신 고향 진천읍에 숭모비(崇慕碑)와 숭렬사(崇烈祠)를 건립하여 영원히 기념추모하기로 한 것은 실로 뜻 깊은 일이었다.

 

  필자는 세상에 난 것이 조금 늦은 탓으로 선생에게 직접 교훈을 받지는 못하였으나, 숭모하던 심정만은 어느 누구보다 과히 뒤지지 않으리라 여겨 다시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신 대강을 기록하여 보고자 한다. 그러나 선생을 직접 모시고 있지 못하였던 관계로 혹시나 잘못된 기사가 있을지 알지 못하는 바이니, 선생을 추모하던 동지 가운데서 지적하신다면 감사하게 여길 것을 부언하여 둔다.

 

[1]선생의 출생

 

  선생은 이씨왕조가 불치의 질환으로 최후의 내리막길을 달리던 중 대원군)大院君)이라는 호걸이 다시 한 번 그 정세를 만회하려고 안간힘을 쓰던 고종 7년(庚午年)에 충북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忠北 鎭川郡 德山面 山尺里) 산직마을에서 선비 이행우(李行雨) 씨의 장남으로 출생하시었다.

 

   본관은 경주(慶州)인데, 이 경주이씨는 초평이씨(草坪李氏)라 하여 명문으로 열 손가락 이내에 꼽히는 대가다.

멀리 고려시대 까지 올라 갈 것도 없이 임진란(壬辰亂) 이후만 해도 이시발(李時發), 이경휘(李慶徽), 이경억(李慶億), 이인엽(李寅燁) 같은 명현(名賢)을 배출하여 국가의 광채를 더해 주었던 터이었는데, 이제 또다시 선생이 출생한 것이다.

 

  선생은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용우(李龍雨)씨에게 출계(出系) 되었는데, 그것은 종통(宗統)을 중하게 여기는 당시의 도의로 그렇게 된 것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시고 근면하시어 학문에 힘쓰셨던 결과로 선생은 25세가 되시던 갑오년(甲午年,1894)에 실시한 우리나라 최후의 과거에 급제하여 청운(靑雲)의 길에 오르게 되시었다.

 

  과거에 급제하신지 불과 3년에 당상관(堂上官)인 정3품계(正三品階)에 승진되어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와 성균관장(成均館長)을 역임 하셨다. 그리고 10년에 겨우 2년을 지난 36세에는 이미 법부(法部)와 학부(學部)의 협판(協辦: 次官)을 지내시고,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으로서 의정부참찬관(議政府參贊官: 正二品)으로 승진하시었으니 선생의 관운도 상당히 좋으셨겠지만, 재(才)와 식(識)이 탁월하시지 아니 했던들 그 당시 난마(亂麻) 같은 정계에서 그 같은 출세가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해가 바로 망국의 첫길인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이 맺어지던 해다.

 

[2]을사조약과 선생

 

  을사조약은 어두운 밤에 홍두께 식으로 돌연히 나온 것은 아니다. 노일전쟁의 결과로 포츠담조약이 체결되고, 그 조약에서 한국은 일본의 보호하에 둔다는 조항이 있었으므로 간흉 일본이 그렇게 나올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리하여 조선왕조, 아니 대한제국에서도 그 대책을 연구하여 보았으나 별로 특별한 방법이 없고, 어떻게 일본의 강압을 막아 내느냐가 첫째 문제였다. 그래서 선생이 황제에게 건의한 것은 물론이고, 다시 정계 유력자들을 찾아서 이 보호조약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므로 상하가 일치하여 죽음으로서 거절하자고 역설하시었다.

 

  그것을 거절하면 묻지 않고, 병력으로라도 압박할 것이나, 그 조약을 수락하여도 나라는 망하는 것이요. 거절하다가 무력 침략을 당하여도 망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거절하고 망한다면 열성조(烈聖朝)에 대해서도 면목이 설 것이요. 또 천하만국의 동정이라도 받을 것이지만, 그대로 유유낙낙(唯唯諾諾) 하였다가는 후세 자손들에게 까지 두고 두고 조소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 당시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이었던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 씨의 동의를 얻어 충정공은 당시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과 의논하고, 그래도 버티는 데에는 무장(武將)이 나을 것이라 하여, 무장출신인 한규설(韓圭卨) 씨를 정부 수반인 참정대신으로 추천하여 임명되게 하고, 그와 함께 각부 대신이 일치 거절하기로 결정했다.

 

  어떤위협과 공갈이 있더라도 일사(一死)를 각오한다면 겁날 것이 없다고 굳게 맹세하게 했다. 그런 태세는 갖추었건만 흉적 이토오(伊藤博文)란 자가 2개 대대의 병력을 동원하여 궁전을 포위하는 한편, 제일은행이 발행한 5만 원짜리 수표를 각 대신에게 돌리는 등 초강경의 교섭으로 강압하였다. 

 

  그러던 중 가장 강인하리라 믿었던 한규설(韓圭卨,1856~1930)씨가 광규난양(狂叫亂攘: 미쳐 날뛰며 소란스럽게 떠들다)으로 발작을 일으키며, 내전으로 뛰어 들어가다 내시(內侍) 홍택주(洪宅柱)의 호령을 듣고, 쫓겨나오다가 일군 헌병에게 붙들려 감금당하였다.

 

  그 뒤 각 대신들은 죽기로 거절하자던 맹세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이토오(伊藤博文)의 강요에 유공불급(猶恐不及:두려워 할 바가 못 됨)하는 태도로 유유낙낙하였다. 그 당시 두 사람이 부(不)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감히 부라고 말한 것이 아니고, 이토오(伊藤博文)의 장난으로 두 사람의 부(不)를 만든 데, 지나지 않은 것이다.

 

  이에 선생은 땅을 치시며, 분기ㅘ시어 다시 황제에게 상소하였다. 최후의 결정은 황제의 재결(裁決)에 있으니 폐하께서 강경하게 거절하시는 동시에 저 유유낙낙한 비겁한 들을 모두 참수해 버리시면, 물론 폐하께도 온갖 위협과 공갈이 있고, 때로는 무력까지 있을 것이나, 망국의 군주라고 영세토록 지탄 받는 것 보다는 몇 천배나 더 정정 당당한 군주가 되실 것이라고, 역설한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황제에게 그런 결단력이 있었다면, 나라 일이 그런 지경에 이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에 선생은 민중을 동원하여 저지해 보려고 종로(鐘路)에 나가 가두에서 전 민족에게 호소하는 절규를 보내어 보았으나, 일군 헌병에게 총검으로 구축 당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단신의 적수공권으로라도 싸우려 하였으나, 그것은 모두가 허사에 지나지 않는 일이었다.

 

  이에 선생은 나라가 망해가는 꼴을 차마 보실수 없어 결연히 서울을 떠나 만주로 가시었다. 그것은 이곳에서 국외로 빠져나가는 지사들을 규합하여 독립 회복이라는 대업을 계획하려 하심이었다.

 

[3]헤이그의 평화회의

 

  국외로 나가시기 전에 선생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세계열강의 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말씀을 듣고, 평화회의라면 우리가 일본의 침략을 호소하여 그것을 제지 할 수 있을 것이므로 거기에 사절을 파견하여 열강의 심판을 받게 하는 것이 현재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라고 하셨다.

 

  선생은 이 일을 비밀리에 황제의 측근자를 통해 건의하자, 황제는 만폭(滿幅)의 찬의를 표시하며, 그 사절에 선생을 임명하겠다는 의사 표명이 있었다. 이에 선생은 그 일을 함께 의논하던 평리원(平理院) 판사 이준(李儁)씨에게 위임하여 평화회의가 열리게 된다는 소식을 듣는 대로 황제에게 건의하여 황제의 신임장을 얻어서 북만(北滿)으로 나올 것을 부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회의는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어 1907년에야 겨우 개최되게 되었고, 이준(李儁)씨는 곧 활약하여 황제의 신임장과 여비까지 받았다. 이때 황제의 명령은 아령(俄領: 露領-그때 선생은 블라디보스톡에 계셨다)으로 가서 이상설(李相卨)과 같이 가라는 것이었으며, 선생을 정사(正使)로 한다는 교서 까지 내리게 되었다.

 

  그래서 선생은 북만(北滿)과 노령(露領)에서 교포 동지들을 규합하여 항일조직을 결성하시던 일을 동지에게 맡기고, 이준씨와 같이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스부르크(현 레닌그라드)로 가시었다. 그 곳에서 을사조약 때까지 주로공사(駐露公使)로 있던 이범진(李範晉)씨를 만나 그에게 머든 일의 편의를 보아 줄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이범진 씨의 알선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와도 비밀리에 만나보고, 한국의 사정을 호소하는 동시에 평화 회의에 평화회의에 참여하게 하여 줄 것 까지 청하여 노제(露帝)의 동정을 얻어 평화회의의 의장으로서 이 회의를 주제할 러시아 대표에게 보낼 친서 까지 써서 선생에게 주었다.

 

  선생은 과거에 급제하기 이전부터 이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 박사 등, 외국의 학자들을 스승으로 삼아 일. 노. 영. 불어를 배우셨고, 또한 지리, 수학, 공법(公法) 등의 학문을 배우셔서 그 당시의 선비로는 선생을 따를 이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러므로 노제(露帝)를 만나서도 쉽사리 그의 동정(同情)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선생은 그곳에서 우선 만족할만한 성공을 거두시고, 헤이그를 향해 출발하셨는데,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이범진 씨의 아들인 이위종(李瑋鍾) 씨를 동반하였다. 그것은 그가 노어와 영어에 능통하므로 국제회의에서 여러 가지로 편의가 있을 것이고, 또한 이범진 씨의 부탁도 있고 하여서였다.

 

  그러나 그 회의라는 것이 말은 평화를 위해 한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열강의 세력 과시장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어느 나라의 대표가 감히 청일, 노일전쟁을 두 번이나 압도적으로 승리하여 기세가 당당한 일본 측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미 외교권이 없어져서 회의의 초청장도 보내지 아니한 한국의 사절을 회의에 참여시키자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구나 영국과. 미국 등은 이미 일본의 우호국이거나 동맹국인 이상, 그들의 호의를 받아 선생과 이준 씨가 회의 장소에 들어간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게 되었다. 다만 이위종 씨가 각국의 기자를 모아놓고 일본의 침략행위를 폭로하는 연설을 하자 그들은 열렬한 반응을 보일 정도였으니, 그것으로 대세를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서 이준 씨는 너무나 비분하고 너무나 원통하여 그것이 원인이 되어 순국하게 되었으며, 선생은 더욱 망국의 비애를 참을 길이 없었으나 할 수없이 다시 시베리아로 돌아오실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4]시베리아에서의 선생

 

  시베리아로 돌아오신 선생은 여기서 독립을 전취(戰取: 싸워 목적한 바를 이룸)할 무력을 양성하기로 결의 하였다. 그때 마침 러시아의 극동 행정을 담당하고 있던 극동 총독 보스타빈은 니콜라이 Ⅱ세의 사촌(일설에는 外叔이라고도 한다)으로서 선생이 이전에 노경(露京)에서 노제(露帝)의 우대를 받은 줄 알므로 선생을 지극히 존경하여 특히 선생이 그의 두 아들에게 불어와 수학을 가르쳐 줄 것을 부탁하였으며, 선생은 그의 권력을 이용할까하는 기대에서 그의 요청을 수락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보스타빈의 전폭적인 호의를 얻어 보스타빈으로 부터 니콜리스크 부근에 한국인 사관학교하나를 건설하여 주겠다는 승낙 까지 받았다. 약 1천명의 학생을 양성할수 있는 교사와 기구는 물론이요. 유지해갈 수 있는 재정까지도 어느 정도 보조해주겠다고 말하였으나, 단지 무기인 장총 한가지만은 자신의 임의로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무기에 대해서는 러시아 육군본부에서 지극히 엄격하게 다루므로 거저 줄 수는 없으나 자기가 사 줄 수는 있으니, 장총 1천자루의 값으로 10만 루우불리를 어떻게든지 주선하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이 말은 절대 비밀이어야 합니다. 만일 사미성(事未成)에 어선발(語先發)하면 낭패될 우려가 있으니 조심하여서 발설되지 않게 합시다.”하고 신신 당부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선생의 큰 계획은 일단 성공한 셈 이었으나 실은 커다란 난관에 부닥쳤으니, 그 당시에 10만 루우블리라면 큰돈 인데 선생의 형편으로는 그런 대금을 마련할 능력이 전혀 없었던 까닭이었다. 

 

  북만이나 노령에 있는 교포들이 많기야하지만, 그들에게 기대할만한 능력은 전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사람이 있다. 꼭 한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전날 우리정부에서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재무장관)과 내장원경(內藏院卿, 황실의 재정을 담당하는 관직)을 역임한 이용익(李容翊,1854∼1907) 씨의 손자인 이종호(李鍾浩)씨다.

 

  이용익은 매관육작(賣官鬻爵: 돈이나 재물을 받고 벼슬을 시킴)에도 참여하였지만, 광산에도 재주가 있어서 금광으로 막대한 재산을 만든 사람이었다. 그 후 그는 정권에서 멀어지면서 노령으로 건너가서는 어떻게든 국가의 독립을 유지시켜보려고, 러시아에 우리나라의 함경도 전체를 떼어 줄 것이니,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여 달라고 쫓아다니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아들도 역시 일찍 죽었는지 소식이 없고 그 손자의 이름만이 야단스럽게 나도는데, 전날 이용익의 막대한 유산을 가지고, 흥청대면서 역시 독립이니 항일이니 하고 떠들며, 보재선생을 위시하여 독립운동을 하는 여러 지사들에게도 호의를 보이고 있었으므로 선생도 그가 그리 진실한 동지는 아닐지라도 독립운동의 한 분자라고는 보셨으므로 궁여지책으로 그와 의논하게 되었다.

 

  그는 곧 10만 루우블리를 내놓겠다고 쾌히 승낙했다. 선생은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하시며, 반신 반의하시면서도 절대로 비밀을 지키라고 부탁했는데, 그는 그 이튿날 즉시 “내가 이제 우리 독립군의 사관을 양성할 사관학교를 니콜리스크에 건설한다. 

 

  그것은 극동 총독이 절대한 호의로써 원조하여 되는 것이다.”하고 떠들어 대었다. 그 소식이 곧 러시아어신문에 보도되자 보스타빈은 깜짝 놀라 선생을 초청하였다. 선생도 그 신문을 보시고는 실신할 정도로 놀라시고 통분해하시던 차에 보스타빈의 초청을 받고 거절할 수가 없어서 그를 만났다. 

 

  그러자 그는 창백한 안색으로 선생에게 “그만큼 당부하였는데 어찌해서 그런 발설이 있게 되었습니까? 어찌했던 그 문제가 그렇게 신문에 까지 보도되어 있으므로 나는 육군본부의 문책을 받게 될 것이고, 따라서 그 이상 더 이야기 할 수도 없게 되었으니 그 일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다시 더 말하지 마십시다.”하고 말했다. 

 

  이 때 선생은 묵묵히 변명하지도 아니하셨고, 다만 그동안의 호의만이라도 감사한다고 치하하고 돌아오셨다.

선생은 이종호란 자에게 배신당한 것에 대한 분노보다도 지금 까지 고심하여 어느 정도 구체화 되던 일을 그런 패악(悖惡)한 자에게 의논한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가 매우 컸으며, 그것이 심대한 충격을 심신에 가하여 주었다그리하여 원래가 그렇게 완건(頑健)한 체질이라고 할 수 없는 체력에 큰 병을 가져왔던 것이다.

 

[5]서전서숙

 

  선생의 약전을 보면, 선생은 북간도 방면에도 가시어 김교헌(金敎獻). 윤세복(尹世復)선생 등의 여러분과 대종교(大倧敎)에도 관계하신 것 같았고, 또한 북간도에다 서전서숙(瑞甸書塾)이라는 학교도 설립하여 간도의 교포자녀들을 교육 시키었다고 하였으나, 불행히도 필자가 그 약전을 불과 몇 일전에 분실해서 그것이 어느 시대였던지, 즉 헤이그에 가시기 이전인지 또는 돌아오신 이후인지 상세하지 못하여 상술하지 못함은 큰 유감이다.

 

  선생이 블라디보스톡(海蔘威,해삼위)에 계실 때, 의병 대장이었고, 우리 성리학(性理學)의 대학자인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1842~1915)선생은 서간도로 쫓겨 가서 울분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천지 번복의 큰 일 을 다시 거사하여야 하겠는데, 이렇게 서간도의 한구석으로 쫓겨와 있고서는 고장난명(孤掌難鳴)하여 독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멀리 블라디보스톡에 계신 보재선생을 생각하고 보재와 자기 두 사람이 합심하기만 한다면 무슨 일이든 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랴. 내가 가서 보재를 만나리라 하고서는 중국 사람들이 짐을 싣는 마차를 타고 덜컹거리며 수 천리의 먼 길을 여행하여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던 것이다. 이 때 선생의 환영은 이만 저만 한 게 아니었다.

 

  선생은 유인석선생을 모시고, 자기가 거처하던 처소로 가서 엄친에게 하는 공경으로 정중히 모시었다. 조석상(朝夕床)을 선생이 손수 들고 가서 그의 앞에 놓아드리고, 저녁이면 이부자리를 펴 드리고 아침이면 개놓고 다시 방안 소제 까지 하시었다. 그야 나이를 보아도 존장(尊丈)이었고, 또한 의병을 이끌고 정예 무비한 일군과 수십 차례의 혈전을 벌여 많은 타격을 준 그의 성력(誠力)을 존경해서 그렇게 예우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기가 헤이그에 가시기 조금 전이었으므로 어떤 큰일을 거사하지는 못하였지만, 숭고한 두 분 의열(義烈)의 대인물이 만나시어 흉금을 털어놓고 격의 없는 이야기를 주고 받으셨으므로 천상의 상진(星辰)도 동(動)하였으리라 여겨져서 생각만 해도 흔쾌한 일이다.

 

  그 때 정순만(鄭淳萬,1873~1928)선생과 이상설(李相卨)선생은 동향출신의 거물로서 그 당시 3만(李承晩, 朴容萬, 鄭淳萬)의 한사람이 그 자리에 참석하였을 것이고, 또한 몇 일 안에 방성대곡으로 유명한 숭양산인(嵩陽山人) 장지연(張志淵)선생도 참석 했을 것을 생각만 해도 참으로 장관(壯觀)이라 여겨진다. 

 

  여담이지만 정순만 선생은 그 때에 극렬하였던 지방열(地方熱: 같은 지방 사람들끼리 뭉쳐서 다른 지방 사람들을 따돌려 내치거나 비난하는 파벌적인 특성) 싸움으로 희생되어, 어떤 자가 선생을 암살하고, 그 시체를 자루 속에 넣어 앞바다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 참으로 비참한 일이다.

 

[6]선생의 최후

 

  전기한 바와 같이 선생은 1915년 가을경 그 심대한 충격으로 극동 정청(政廳) 소재지인 하바로프스크(哈發浦,합발포)에서 병석에 눕게 되셨다. 그런데 그 병환이 차차 심중하여 가므로 그 곳에 모여 있던 동지들이 의논하여 기후가 비교적 온난한 니콜리스크로 전지하시게 하였으나, 필경은 백약이 무효하고, 동지들의 정성어린 간호도 보람 없이 1917년 3월 2일에 장서(長逝) 하셨으니 향년이 겨우 48세이시다.

 

  선생은 명목(瞑: 눈을 감다) 하실 때, 유언으로 선생의 유품은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불태우고, 선생의 유해마저 다비(茶毗: 화장)에 부치라고 하셨다이 때 동지들의 비통은 지필로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러시아의 헌병들도 화장장소 주변을 경호하면서 동지들의 애통을 보고는 참으로 위대한 인물이 가셨다고 탄식하더라는 이야기를 고(故) 우천(藕泉), 조완구(趙琬九,1881~1955)선생이 어느 때엔가 필자에게 말씀한 일이 있었다.

 

  선생의 유족으로는 두 아드님이 있었는데, 6,25동란 중 모두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리고 근친으로는 선생의 계씨(季氏)인 이상익(李相益) 씨의 두 아들인 관희(觀熙) 씨와 완희(完熙) 씨가 있었으나, 관희 씨마저 연전에 작고하고 이제는 완희 씨 한분만이 남아 있으며, 여서(女婿)인 이창복(李昌馥) 씨가 있을 뿐이다.

 

[7]선생의 동지들

 

  선생이 시베리아에 계실 때 선생을 영수로 산하에 모인 분이 수십 수 백 명에 이르렀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1869~1940)선생과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1867~1932) 선생이 선생의 두 팔이었다. 그러나 두 팔은 두뇌가 있어서 명령해 주어야 두 팔의 임무를 수행해 나가는 것이지 두뇌가 없는 두 팔이 제 마음대로 놀아서는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다.

 

  더구나 한 팔이 한 팔을 제쳐놓고, 자기가 두뇌가 되려고 한다면, 그 제쳐놓은 한 팔이 잘 듣지 아니하여 멸렬(滅裂)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하여 두 팔과 다른 부분들이 각각 흩어져 나갔는데, 석오 이동녕선생은 상해로 내려가고 우당 이회영선생은 북경으로 들어갔으나, 상해에서는 곧 3.1운동의 여세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동녕선생은 항상 임정의 중심인물로 끝까지 노력하였으나 이회영선생은 북경에서 고립되어 곤궁하게 지내다가 최후에 상해로 내려갔으나 이동녕선생 아래에 서기를 싫어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만주 동지들과 연락하여 큰일을 꾸며 보려고 만주를 향하여 출발했는데, 도중의 가정간(家庭間)에 일본 경찰의 밀정이 있어 이회영선생이 상해에서 어느 날 어떤 배를 타고 천진(天津)으로 떠났다고 일경에 보고하여 대련(大蓮) 앞바다에서 체포되어 순국하고 말았다.

 

  이회영선생은 이상설선생보다 3살이 많았는데, 그때 까지 선생이 생존하셔서 동지들의 유화를 잘 유지하게 하셨더라면 그런 불상사가 일어날 리가 만무 할뿐 아니라,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면모가 달라졌을 것이다.

 

  따라서 광복 이후의 국가 양상도 달라졌을 덴데, 하늘이 이 민족을 돕지 아니하여 선생을 그렇게 일찍 장서하게 하였으니 아! 원통한 일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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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소개]

 

●권오돈(權五惇)

 

1901∼1984때의, 독립운동가·한학자.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아호(雅號)는 포명(抱溟). 경기도 여주 출신이다 그는 중동학교를 졸업하고, 상해의 호강대학(滬江大學)에 유학하였다. 1920년대 초 향리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경영하다. 1924년 11월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엄항섭(嚴恒燮)의 소개로 김구(金九)·이동녕(李東寧) 등 임시정부 지도자들과 면담하고, 김구의 알선으로 무창의 서호서원(西湖書院) 관비생으로 입학하였다.

 

1926년 서호서원이 문을 닫자, 1927년 중앙군사정치학교에 입교하여 훈련을 받았다. 그 뒤 상해로 돌아와 항일비밀결사인 다물단(多勿團)에 입단, 다물단의 지령을 받고 군자금과 단원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에 몰래 들어와 활동하였다.

 

1929년 2월 18일에 충청북도 충주군 읍내리 금성여관 주인 정운자(鄭雲慈) 집에서 안동규(安東奎), 김학원(金學元), 정진복(鄭鎭福), 서상경(徐相庚), 서상기(徐相夔) 등과 문예운동을 표방하고 무정부주의 비밀결사인 문예운동사를 조직하였다.

 

그는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모든 권위에 저항하고 절대적인 자유가 행해지는 인류사회의 구현을 지향하는 무정부주의사상에 입각, 한민족을 억압·착취하고 있는 일본의 식민지배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충주에서 정미소를 경영하던 김현국(金顯國) 등 단원을 모집하여 비밀리에 조직을 확장하였다. 그러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0년 5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언도받고, 4년 2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1934년 5월 27일 가출옥하였다. 광복 후 연세대 동양학과 등에서 교육활동에 종사하였으며, 유도회(儒道會) 고문 등으로 활동하다 1984년 2월 10일 서거하였다.

 

묘소는 본래 여주시 점동면 덕평리에 있었으나 후에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1977년 건국포장이 수여되었고,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