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근현대 인물

'을사늑약' 외교책임자 박제순

야촌(1) 2007. 10. 22. 14:29

■ 을사늑약 외교책임자 박제순(朴齊純, 1858년 12월 7일 ~ 1916년 6월 20일)

 

"이 땅의 황국신민들"-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경학원 대제학으로 이어진 친일 가도 외교통의 관료로 성장 정4위 종1품 훈1등 자작, 조선총독부 고문, 경학원 대제학.

 

박제순이 사망했을 당시 공식적으로 지칭되던 직함이었다.

그가 이러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1905년 이른바 '보호조약'을 체결했던 당사자로 '을사오적'이었던 덕분이었다.

 

박제순은 경기도 용인 상도촌 출생으로, 기호지방 관료층들의 학문적 배경이 되었던 유신환(兪莘煥)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특히 그의 아버지가 유신환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던 관계로, 같은 동문이었던 김윤식과 세숙세질(世叔世姪)의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김윤식과 관계를 맺고 그의 지도하에 청나라와의 외교상의 업무를 주로 담당하였는데, 김윤식이 주도하던 통리아문 주사로 시작하여(1883), 주차천진종사관, 청국전권대신(1899), 외부대신(1898, 1901)이 되었다. 그 사이 호조, 예조, 이조, 형

 

조의 참판과 전라도, 충청도의 감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는 당시 중요한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던 그의 경력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인면사무소 앞에는 동학농민전쟁 당시 충청도 관찰사였던 을사오적 박제순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박제순 공덕비'에는 당시 동학농민군을 토벌했던 을사오적 박제순을 칭송하고 있다.

 

박제순의 대표적인 친일행위로는 무엇보다도 을사조약 당시 외부대신으로 조약을 체결했던 당사자라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당시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음으로써 이른바 '을사오적'이 되었다.

 

1905년 10월 일본 정부에서는 한국에 대한 외교권 확립을 결정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하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서울로 파견하였다.


이토는 일본 '천황'의 친서를 보이면서 고종을 위협하였다.
동양의 평화와 한국의 안전을 위하여 한일 두 나라는 친선과 협조를 강화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이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또한 한국 왕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하는 길이라고 하였다.
일본이 침략을 단행하면서 언제나 내걸고 있었던 동양의 평화 유지, 왕실의 존엄 보존이라는 미사여구가 여기서도 등장한 것이었다.

박제순은 처음 고종과 각료들이 회담할 때에는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과 마찬가지로 조약의 체결에 반대하였다. 한규설의 전기 {참정대신 강석 한규설 선생 소전}에 그간의 사정이 상세하게 전해지고 있다.

박제순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대감, 사무는 위기에 절박했으므로 우리들의 생사가 판가름나는 중요한 때가 왔습니다. 우리가 물러서는 것은 단지 죽음을 각오하는 것일 뿐입니다. 의정부의 여러 대신들의 의지와 기개를 살펴보고 지난 일들을 미루어보아 확신할 수 없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대감께서와 외부대신인 이 사람, 둘이서라도 고집해서 물러서지 않는다면 이토가 제 아무리 버틴들, 효과가 없으면 자연히 되돌아 쫓겨나갈 것이 아닙니까.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외론(外論)이 어떠할지 모를 일입니다.…… 이미 이 사람의 뜻은 정해져 있습니다. 힘이 미치지 못하면 죽을 따름이지요. 가사에 대해서는 이미 유서를 족질에게 부탁했으므로 다른 걱정은 없습니다.

 

조약의 체결에 반대하는 굳은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자 한규설은 "다른 대신들이 설혹 다른 의견을 제출한다 해도 주무 대신이 끝까지 버티고 부결하면 무슨 조약이더라도 성립이 될 수 없으니 두 어깨가 무겁겠오"라고 격려하였다.

 

그러나 박제순의 이 비장한 맹세는 지켜지지 않는다. 이들의 결의는 어전회의에서도 확인되었지만, 이토는 이 어전회의 결과를 번복시키기 위하여 일본군을 동원하여 각료들을 감금하고 억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한 채, 한 사람씩의 의견을 물었다.

 

주무 대신이었던 이유로 남보다 먼저 지명된 박제순은 "어제 하야시(林權助) 공사와 회견할 때에 대략 의견을 말한 바와 같이 본 협약안에 대해 단연코 거부하기로 한 것인데, 이를 외교 담판으로 본인에게 타협하라고 하는 것은 감히 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명령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 않는가"라고 소극적으로 답하였다.

그러자 이토는 이를 놓치지 않고 "명령이란 무슨 뜻인가?


폐하의 명령이라면 조인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좋은가"라고 다그쳤다.

박제순이 명령 운운하다가 그만 말꼬리를 잡히고 만 것이다. 그는 한 두 마디 변명을 늘어놓다가는 자신의 말을 취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그만 침묵하고 말았다.

 

이토는 "당신은 절대적으로 이 협약안에 반대한다고는 볼 수 없다.

폐하의 명령만 내린다면 조인할 것으로 본다고 믿는다"고 못을 박았다.

박제순은 더 이상 말을 못하고 말았다.

 

(한규설의 전기에 의하면 박제순은 "4개조안을 수락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지 않았으므로 찬성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이토가 위협하자 "조약 체결에 대해서는 나는 모르겠소!, 마음대로 하시오"라고 하였고, 이에 이토는 "외부대신이 마음대로 하라고 했으니 찬성하는 것으로 간주 하겠소"라고 하였다).


이 이후의 회의에서는 이완용과 이하영(李夏榮)이 대세를 장악하였다.

이완용은 이때 친일파의 핵심으로 부각되었다. 그들의 논조는, 조약의 체결을 거부하면 일본이 무력으로 한국을 침략할 것이므로 차라리 체면을 살리면서 이를 들어주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른바 '외교'문제에만 한정한다는 문장 수정과, 왕실의 안녕과 그 존엄을 유지한다는 문장 첨가만을 요구하였다. 나라를 망하게 하면서도 그들은 왕실 타령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을사조약은 1905년 11월 17일에 박제순과 일본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사이에서 체결되었는데, 이 조약의 체결을 주도하였던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과 더불어 박제순은 '을사오적'이 되었다. 그러나 실제는 법부대신 이하영이 맹활약을 하였다.

 

'을사오적'에 박제순 대신에 이하영을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으나, 이들 모두를 포괄하여 '을사 6적'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을 골자로 한 '을사늑약'은 절차와 형식에서 무효라는 주장이

    학계에서 제기돼 왔다. 사진은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의

    당시 모습

 

이 조약을 체결한 공로로 박제순은 참정대신이 되었다. 1907년 초에 '을사조약'이 고종의 인허를 받지 않았다는 대한매일신보의 보도가 있자, 이 문제를 둘러싸고 친일적인 각료와 '친일'을 경쟁하고 있던 일진회에서 내각사퇴를 촉구한 일이 있었다.

 

박제순 내각에서 이를 사전에 막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의병이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도 모두 내각에서 내정개혁을 단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고 나온 것이었다. 게다가 나인영, 오기호 등에 의해 '을사오적'에 대한 암살기도가 있었다.

 

박제순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참정직을 사직하였다. 이에 이토는 박제순을 격려하면서 유임을 권고하였으나 이와 같은 어려운 시국을 감당할 만한 용기가 그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이토는 이완용 내각을 조직하였고, 박제순은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이토는 박제순 이외에 을사조약에 협조하였던 이근택, 권중현, 이하영 등을 모두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하여 이들을 위로하였다. 그리고 그후 박제순은 일진회 출신의 송병준이 실각하자 그 자리를 이어 받아 다시 내부대신이 되었다.

 

박제순은 또한 통감의 신임이 두터웠던 관계로 이완용이 이재명(李在明)에게 부상을 당하여 치료를 받는 동안에는 내각총리의 임시서리로도 활약하였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경학원 대제학으로 이어진 친일 가도 한말의 화려한 친일 경력을 밑바탕으로 박제순은 '합방' 후 [조선귀족령]에 의해 자작 칭호를 받은 데 이어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경학원 대제학이 되었다.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친일파들이 요구하여 얻어낸 자리에 스스로 들어앉은 것이었다.

그들은 왕실에 대한 예우와 한말 고급관료를 지냈던 사람들에 대한 응분의 대우를 요구함으로써 개인의 영달을 유지하였다. 박제순은 1910년 11월에 조선 귀족들의 일본 시찰에 참여하였다.

 

이때 이와 같은 여러 종류의 시찰들이 실시된 것은 물론 일제 당국자들이 일본 문명의 우수성을 과시하고, 식민지배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 박제순은 일본 '천황의 은덕에 감읍'하는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내가 가장 감격한 바는 일본 내지(內地) 도처의 풍광이 아름다운 것이나 문물제도의 찬란함은 고사하고, 위로는 천황폐하로부터 일반 문무백관, 아래로는 서민 제군이 모두 충심으로 신부(新附)한 우리들을 대함에 극히 간독(懇篤)함이라.

 

이러한 이상에는 금후 일선(日鮮) 양민 간의 친화는 오래 되지 않아서 이룰 것이오, 수년을 지나지 않아 일선이 일단이 될 것은 우리들이 확신하는 바로다. 더하여 성상폐하의 신들에 대한 특별 성의를 말한다면, 돌아오는 길에 우리들이 탄 열차가 카와야먀(岡山)역을 지날 때에 대연습 중에 있는 대본영(大本營)에서 특히 무관을 파송하여 특별히 두터운 칙령을 내려 시와 '지금은 동군 퇴각중의 역습전인즉, 일행은 그 뜻으로 차안에서 관전하라' 하옵심에 감읍하였노라.

 

다만 우리들은 도착한 후 이 같은 예성문무(叡聖文武)하옵신 천황폐하로부터 박애인자한 내지 동포의 지도에 의하여 장족의 발전을 계(啓)하여 성상의 홍덕(洪德)에 목욕하기를 절망할 뿐...({매일신보}, 1910. 11. 8)

 

또한 박제순은 경학원의 대제학으로 있으면서는 총독정치를 선전하는 역할을 하였다.

경학원은 외형상 '유림과 석학을 존중하여 미풍을 장려하고, 폐풍을 교정하고 양속을 조장하여 일반 교화의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본래의 목적은 유교의 인의충효사상을 강조하여 식민통치에 순응하고, 특히 '천황'에 순종하는 충량한 신민(臣民)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경학원에서는 여러 강사들의 강연회를 통하여 유교의 경전은 물론, 민풍 개량, 근검저축의 장려 등을 강조하여 결국 총독부의 새로운 정치를 선전하는 일을 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문명으로 이끄는 선(善)'이라 선전하였다.

 

일제는 경학원을 설치·운영하면서 박제순을 그 책임자로 삼았다. 당시 유림들로부터 명망을 인정받고 있었으며 한말에도 친일적인공자교회의 회장이었던 자작 이용직(李容稙)을 제치고 '성질이 온건'한 박제순을 택했던 것이다.

 

이용직은 '합방' 당시 학부대신으로 조약안이 각의에 상정되었을 때, "이 같은 망국안에는 목이 달아나도 찬성할 수 없다"고 하면서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리고 22일의 마지막 어전회의에도 불참하였다. 따라서 이런 이용직이 혹여 유생층을 격려하여 소요를 일으킬 줄도 모른다고 판단한 일제로서는 그를 경학원의 대표로 임명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일제 당국자는 조약 체결 직후 이용직을 만나 "귀하는 학자이므로 마땅히 대제학이 되어야 하지만, 지금은 경학원의 조직을 확장시켜야 할 뿐만 아니라 제사 이외에도 전국의 교화를 도모해야 하므로 행정 사무가 많다"면서, 박제순을 대제학으로 앉히고 이용직에게는 강학(講學)을 전담하는 부제학을 권하였다.

 

이용직은 이를 "지위의 상하를 떠나 미력이나마 기꺼이 행하겠다"면서 수락하였다.

이런 사정에 대하여 일제는 이용직이 처음 이완용의 병합 협의 때에 반대하였던 것은 일시의 계략이거나 말주변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하였다.(小松 綠, {朝鮮倂合之裏面}, 203∼205면)

 

경학원 대제학이 되었던 박제순은 유교 진흥을 주장하였다. 그는 공자교라는 것은 '임금은 임금의 직을 행하고, 신하는 신하의 직을행하고, 아비는 아비의 직을 행하고, 아이는 아이의 직을 행하여 만반의 일에 각자 자신의 직을 다하라는 것'이라면서, 본래 유교에서 강조하던 실(實)을 행하지 않고 허식만을 존중하는 말류의 폐단이 나타난 것이 조선의 가장 큰 문제라고 하였다.

 

그는 특히 신학문이 전래된 이후 일반청년들이 급속히 노장(老長)를 배척하고 능멸하는 현상이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유교를 진흥하고 자신의 직에 만족하고 안분하는 인간, 나이든 사람을 공경하는 인간 등을 중요시하였다. 유교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충효를 강조하여 식민지배체제의 유지에 일정하게 기여하였던 것이다.

 

글 : 김도형(계명대 교수·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