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주화론(主和論)과 척화론(斥和論)

야촌(1) 2015. 7. 1. 12:16

■ 주화론(主和論)과 척화론(斥和論)

 

병자 전쟁을 통해 되짚어봐야 할 점으로 전쟁에 대한 대응 방식의 문제를 들 수 있는데, 바로 주화론과 척화론을 둘러싼 논쟁이 있다. 이 문제는 국가의 운명이 달려 있는 외교 정책의 결정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분명한 패전 앞에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의 문제다.

 

우선 국제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친명배금정책(親明排金政策)이라는 경직된 외교 정책을 취해 전쟁을 자초하였다는 주장이 있으며, 광해군 때와 인조 때는 상황이 달랐기 때문에 유화 정책을취하였더라도 청이 쳐들어왔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또한, 척화론은 조선의 자주성에 대한 침해를 거부하는 논리로서 문화적 자부심에 기초한 조선의 주체적 대응이었다고 파악하는 입장이 있는 반면, 중원의 패자인 청의 침략에서 벗어나는 길은 주화론이 가장 적절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물적 기반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 없는 척화론은 민의 삶과는 괴리된 정책이었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못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주화론과 척화론에 대한 평가는 대표적인 주화론자였던 최명길과 척화론자였던 김상헌을 둘러싼 평가에서도 이어진다. 최명길은 청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전선에 나가 적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등 헌신성을 보인 인물이었다. 

 

병자 전쟁 뒤에는 국정을 주도하면서 청의 횡포에 대해 피해를 최소화하였다. 

또, 임경업을 명에 파견해서 한동안 우호 관계를 지속 시키다가 탄로가 나서 청에 잡혀갔을 때는 조선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혼자 떠맡아 버림으로써 청나라 사람들의 감탄을 사기도 하였다. 

 

때문에 반청론의 입장에서 만든 "인조실록"에서도 최명길에 대해서는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반면 김상헌은 척화론을 주장하여 나라의 명분을 지켰던 인물이다. 

 

그가 최명길이 쓴 항복서를 찢어버린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는 패전하여 남한산성에서 나온 후 고향 안동으로 내려갔다. 

 

이유는 임금을 잘못 모셔 신하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뒷날 척화신으로 청에 잡혀가 절개를 지키다 온갖 고초를 당하기도 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