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양반계급의 인구수
조선시대 양반계급의 인구 통계는 1910년의 전국 호구조사에서 확인이 되는데, 조선의 총 가구(家口) 수 289만 4,777호 가운데 양반이 5만 4,217호로 전 인구의 겨우 1.9%에 불과했다.
그 가운데 충청남도가 충남 전체 가구 수의 10.3%로 가장 양반이 많았고, 충북(4.5%), 경북(3.8%), 서울인 한성(2.1%) 그리고, 전북(1%) 순이었다. 여타 도는 모두 1% 미만이고 양반이 많았던 고을은 경북 경주군(2,599호), 충남 목천군, 경북 풍기군(지금의 영주), 충남 공주군 순이었다.
경상북도와 충청도, 한성(서울)에 양반들이 집중되어 있었고, 그나마도 전 인구의 5%를 넘지 못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나라 전 인구의 대부분은 중인, 상민(상놈)이나 천민(노비, 종)의 후손인 셈이다.
조선왕조의 지배권이 무너진 1894년(고종 31)의 갑오농민전쟁(동학혁명)이나 갑오개혁을 겪은 뒤 19세기보다 훨씬 후대에 와서는 양반을 사칭해도 법적으로는 처벌받지 않을 만한 환경이 되었는데도 양반이 겨우 1.9%에 불과했다는 것은 흔히 알고 있는 통설과는 달리 조선의 양반계급 인구수는 급격하게 늘어나지 않았으며, 늘어난 것은 향족(품관) 보다도 낮은 유학(유생. 벼슬을 하지 않은 학생)들 뿐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조선 초기에 성(性)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조선 전체인구의 15%에 불과 했었고, 조선 전기인 성종 때를 기준으로 보면, 당시 인구의 10%가 넘는 35만 명이 공노비였고, 양반들의 사노비까지 합치면 적게는 전인구의 3분의 1이, 많게는 전인구의 절반이 노비였다.
조선 중기이후 유교가 본격적으로 받아들여진 후에 비로소 성씨가 자리 잡게 되고, 갑오경장(1894년) 이전까지는 성을 가진 사람은 조선 전체 인구의 30%에 불과 했던 것이다.(갑오경장은 1894년 양력 7월 27일(음력 6월 25일)부터 1895년 8월까지 조선정부 김홍집 내각을 중심으로 전개한 제도개혁 운동을 말한다. 갑오개혁이라고도 불렸다.)
*족보를 위조하거나 사서 신분을 위조할 수 있었을까?
박지원의 소설『양반전』에서처럼 양반신분을 사지 않을 수 있었냐는 물음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유학을 칭해서 군역에서 빠질 수는 있었어도 상민이 양반신분을 사거나 족보를 사서 양반이 될 수는 없었다.(박지원의 소설에서도 상민인 부자가 양반신분을 스스로 포기한다)
『정오병오소회등록』에 실려 있는 손상룡의 기록을 보면, "양반이 없는 읍은 단지 7읍(邑) 뿐이었으나 조선중기 이래로 과거출신자가 없고 또한 양반가문과 혼인하는데 실패하여 차츰 향족(鄕族) 만이 있는 읍이 늘어났다. 이로 인해 양반이 없는 읍이 지금(1786년경)에는 15읍이 되었다." 고 나와 있다.
양반은 늘어난 게 아니라 오히려 줄어든 것이다.
그런데 그 이유를 보면
1.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없고,
2. 양반이었지만 양반가문과 혼인하지 못하고 다른 가문과 혼인하여 양반에서 굴러 떨어져 버린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양반들은 다른 계급과의 혼인을 하거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도 양반취급을 받지 못하고 낮은 신분으로 굴러 떨어진 것이다.
또 손상룡은 "경상도 50여 고을에 사는 양반들은 서로가 서로의 가문 내력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너무도 잘 아는 상황에서 그곳에 사는 상민이 족보를 사거나 위조해서 자기가 양반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었음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정약용도 그의 글 「발택리지(跋擇里誌)」에서 "양반이란 당연히 어느 한 곳에 터를 잡아 그곳에서 대대로 눌러 살아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마치 망국자(亡國者. 나라를 잃은 사람)와 같은 처지가 되어 버린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다른 곳에서 흘러 들어와 사는 사람이 스스로를 '양반'이라고 밝힐 수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대로 눌러 살면서 기반을 닦았으며,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고, 다른 계급과 혼인하거나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즉시 아래 신분으로 '굴러 떨어지는' 양반. 이런 양반 집안의 계통을 나타내는 족보를 위조해서(돈으로 사서) 양반 행세를 한다는 것은 조선왕조가 계속되던 동안은 불가능했다.
양반 집안의 족보가 팔리기 시작한 때는 조선왕조가 무너진 뒤인 서기 1920년대부터의 일이다.
조선후기인 19세기에는 신분을 위조하거나 상민이 양반으로 올라가는 일이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다.
(족보에 성씨를 지닌 모든 사람들이 들어가게 된 것은 20세기에 와서 평민에게도 문호를 연 뒤부터의 일이다)
비록 양반이 되고 싶은 욕망은 높았겠으나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하다가, 조선 왕조가 망하고, 옛 지배계급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뒤부터야 사람들은 족보를 사고팔며 족보를 사서 양반인 척 하기 시작했던 셈이다. 19세기의 가짜 '유학' 증가는 양반이 늘어난 것이 아니었고 신분제의 흔들림과도 거리가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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