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한국의 여성인물.

이긍탄(李亘坦)스님 -비구니

야촌(1) 2019. 9. 7. 22:26

■ 긍탄(亘坦) 스님/세계최초 비구니 종단 보문종 창립

 

◇생졸년 : 1885년 4월 15일(고종 22)~1980년 7월 17일.

◇법명 : 긍탄(亘坦)

◇법호 : 설월(雪月)

◇속명 :

◇본적 : 서울시 왕십리

◇주소 :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 3가 168번지(보문사)

 

[출가 이력]

◇1885년 서울 왕십리 출생.

◇1891년 탑골승방 보문사에서 세장(世長) 스님을 은사로 출가함.

◇1902년 금강산 장안사(金剛山 長安寺)에서 벽하(碧霞)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沙彌尼戒) 수지.

◇1903년 동학사 강원 졸업(東鶴寺講院卒業)

◇1910년 만화(萬化) 스님을 계사(戒師)로 비구니를 수지.

◇1912년~1945년 보문사 주지(普門寺 住持)

◇1937년~1952년 상원사(上院寺). 대성암大成庵). 화엄사 구층암(華嚴寺 九層庵). 견성암(見性庵). 대원사등

    안거성만(安居成滿).

◇1938년 도봉산 금강계단에서 용성(龍城)스님을 계사(戒師)로 다시 구족계수지(具足戒受持)

◇1954년 한국불교 승단 정화에 적극적으로 참여.

◇1972년 4월 20일 비구니 종단 대한불교 보문종 창종(大韓佛敎普門宗創宗)하고 1972년 7월 6일 문화공보부

    에 등록하였다. 초대, 2대, 종정 추대. 비구니 승단의 정신적 지주로 받들어지고 있다..

◇1980년 입적(세수 96세. 법랑 90세)

 

※ 스님은 정혜겸수(定慧兼修)는 물론 실천 불교에 앞장서고, 전통 불교 의식에 남다른 재능이 있어 11세 때, 이

     미 범패(梵唄). 바라(哱囉). 나비. 도량게(道場偈)등 불교 의식에 일가견(一家見)을 이루셨다.

 

◇문중 : 보문종(普門宗/비구니로만 구성된 한국의 불교종단)

◇수행지침 : 삼일수심(三日修心)은 천재보(千載寶)요. 백년탐물(百年貪物)은 일조진(日朝塵)이라.

◇생활신조 : 한 순간도 수행의 끈을 놓지 말라.

◇수계제자 : 은영(恩榮). 은각(恩覺). 명오(明悟). 은득(恩得). 은강(恩岡). 은진(恩眞)

 

●세계 유일의 비구니 보문종 창설

 

설월당(雪月堂) 긍탄(亘坦) 스님은 1885년 4월 15일 지금의 서울특별시 성동구 왕십리에서 아버지 경주이씨(慶州李氏)인 아버지 이춘근(李春根)공과 어머니 순흥안씨(順興安氏) 안칠영(安七榮) 사이에서 3남매 중 고명딸로 태어났다.

 

스님은 어려서 부친이 돌아가시자 1891년 8월 모친에 의해 세장(世長) 스님을 은사로 보문사에서 출가하게 되니 나이 겨우 7세였다. 그 후 어머니께서도 강원도 철원 보개산 석대암으로 출가해 <금강경>과 <관음경>을 하루 한편씩 독송하는 한편 문수. 지장. 관음주력과 여러곳의 선방에서 화두정진에 몰두해 당대의 고승(高僧) 방한암(方漢岩) 스님으로 부터「정서여장천(情緖如長天)」이요.

 

「사소흡하수(思素恰河水)」하며, 칭송 하셨다고 전한다.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스님은 나이 11세에 벌써 범패, 바라. 나비. 도량게등 모르는 의식 절차가 없었다. 탄인도(坦引道)스님 이라는 호(號)가 붙을 정도로 범패에 밝았다.

 

스님은 18세에 금강산 장안사에서 벽하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고, 19세에 동학사에서 경학(經學)을 마치고, 보문사로 돌아왔다. 그런데 절의 살림이 매우 어려워저 있엇다. 절에서 일을 하던 청운이란 자가 절의 땅 문서를 훔쳐서 팔아 그 돈을 다 쓰버린 것이였다.

 

스님은 관세음보살만 염(念)했고, 그 길로 탁발승이 되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일제치하에서 일본을 위한 식량 공급지로, 전략하여 황폐하기 이를데 없었으며, 독립투쟁이 곳곳에서 일어나는 등 인심이 흉흉하고 불안한 상황이였다.

 

승려가 사대문 안에 드나드는 것은 겨우 허락이 되었으나, 산중의 비구스님들은 누룩을 만들거나 부역을 했고, 비구니 스님들은 베를 짜거나 농사를 지으면서 연명 하는 것이 고작 이었다. 이러한 시국에 탁발이 잘 될리 만무여서 양어께에 바랑 자국이 혹처럼 부풀고, 발꿈치가 아프도록 다녀야 겨우 한 되박 정도의 시주를 받는게 전부였다.

 

우여곡절 끝에 3년 탁발로 겨우 논 아홉 마지기를 불량답(彿糧畓)으로 장만하여 놓고, 그만 병이 났다.

그런 와중에 금강산 장안사에 방부를 들이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금강산 구석 구석을 다니며, 가는 절마다 시주를 하였다고 한다.

 

긍탄스님은 1910년 나이 26세에 만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고, 1912년 보문사의 주지로 취임하였다.

주지 소임을 맡은 후, 호구책도 어려운 형편에 관음전을 신축하고 대웅전을 중수하였으며, 지금은 소실된 유마루를 지었다.

 

스님은 성품이 점잖고 자상한 분이였다. 한 번은 상좌 은영(恩榮)스님이 탁발을 나갔는데, 돌아올 때까지 고양도 제대로 들지 않고, 문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래서 상좌스님은 "스님께서 저토록 걱정하시니 내 어찌 탁발을 하랴" 하시며, 그만 두었다고 한다. 긍탄스님의 마음은 마치 멀리 있는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과도 같았다.

 

스님은 평생 지극한 보시행을 펼쳤는데, 무엇이던 베푸는 데 아낌이 없었다. 늘 소일 거리를 손에서 놓지 않았던 스님은 88세 되던 해에 눈물겹게 마련한 얼마간의 돈을 불사에 보태 쓰라며, 내놓아 대중이 울멱였던 일도 있었다.

 

스님은 60세 되던 해부터 생활속에서 정진을 거듭하는 가운데 10여 년간 사원사. 수덕사 견성암. 칠불암. 수정암. 윤필암. 부도암 등. 여러 선방에서 수행을 하여, 참선하는 이는 누구라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스님은 70세에 우연히 피부병을 얻게 되었는데, 전생의 업보라면서 금강경과 츰부다라니를 지극정성으로 독송하여 3년 만에 완쾌되었다. 부처님의 위신력이 늘 성성함을 시현(示顯)한 것이다.

 

스님은 고(故) 은영. 명오스님 등, 다섯분의 상좌를 두었는데, 그 중에서 맏 상좌인 은영스님은 지금의 보문사를 이룩한 장본인이다. 보문사의 많은 불사는 대중을 이끌어 가는 긍탄 노스님의 덕과 은영스님의 원력이 하나되어 이뤄낸 결과임을 대중 모두가 공감하고 있다.

 

긍틴스님은 1980년 7월 17일 세수 96세 법랑 90세로 입적에 들었다. 스님의 문도들은 생전의 스님을 기리고자 보광전 한 곳에 유물장을 마련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듬해 정월 화재로 인해 전부 소실되고, 지금은 방안에 걸려있는 영정만 남아 있을 뿐이다.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은영(恩榮 : 보문사). 은각(恩覺). 명오(明悟). 은득(恩得). 은강(恩岡). 은진(恩眞)스님 등이 있다.

 

출처 : 운문회보발취(1985년 11월 25일 제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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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긍탄스님 약사

 

1885년 4월 15일(고종 22)~1980년 7월 17일. 시대의 현대 승려로. 속성은 이(李)씨이고, 당호는 설월(雪月)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출생지는 서울이다.


아버지 이춘근(李春根)공과 어머니 안칠영(安七榮) 사이에서 3남매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비구니승려로 대한불교 보문종의 종정(宗正)을 지냈다. 1891년(고종 28) 서울 보문사 세장(世長)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하여. 1903년(광무 7) 동학사에서 사집과를 수료하였으며, 1910년(융희 4) 만화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동학사에서 교학을 연구하였으며, 1912년부터 33년간 보문사 주지를 맡아 오늘날의 보문사의 모습을 갖추는 데 일조하였다. 1972년 4월 20일 대한불교보문종이 창종되었을 때 초대 종정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