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갈명,묘비,묘표

이경절 묘갈명(李景節墓碣銘) - 옥산 이우 아들

야촌(1) 2014. 8. 26. 00:55

■증 승정원 좌승지  덕수 이공 묘갈명

 

우암 송시열 지음 

 

공의 휘(諱)는 경절(景節,1571~1640)이요. 자(字)는 길보(吉甫) 인데 덕수(德水) 사람이다.

 

시조 이돈수(李敦守)는 고려의 중랑장(中郎將)이며, 우리 조선에 들어와 이명신(李明晨)은 대관(大官)에 이르렀고, 시호(諡號)는 강평(康平)이다.

 

증조 이천(李蕆)은 증 참찬(參贊)이요, 할아버지 이원수(李元秀)는 감찰(監察)로 찬성(贊成)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 이우(李瑀)는 군자감 정(軍資監正)인데 율곡(栗谷) 문성공(文成公)의 동생이다.

 

배위는 는 덕산황씨(德山黃氏)인데, 그의 아버지 진사 황기로(黃耆老)는 필법(筆法)으로 세상에 유명하였다.

 

공은 융경(隆慶) 신미년(辛未年, 1571년 선조 4년) 11월 20일에 외가(外家)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뛰어나서 번거롭게 가르치고 독려하지 않아도 책을 풀이하고 글을 짓는 것이 이미 여러 아이들이 따를 바가 아니어서 율곡 선생이 매우 중히 기대하고 허여하였다.

 

병오년(丙午年, 1606 선조 39)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을묘년(乙卯年, 1615 광해군 7)에 향시(鄕試)에서 천거되어 경성에 들어와 명경시(明經試)에 응시하려고 하는데, 당시 간신(奸臣)이 정치를 어지럽혀 윤리(倫理)가 퇴폐하여 비색해졌다.

 

어떤 권귀인(權貴人)과 서로 만나 친해져서 그가 합격하는 지름길을 넌지시 알려주면서 밀어주겠다는 뜻을 보였으나 공은 이를 욕되게 여겨, 마침내 응시하지 않고 돌아왔는데, 상국(相國) 심희수(沈喜壽) 공이 말하기를, “본디 공이 그냥 돌아올 줄 알았다.” 하였다.

 

이때부터 공은 도하(都下)에 발걸음을 끊었다. 공이 살던 선산(善山) 땅에 매학정(梅鶴亭)이란 별장이 있어 공은 날마다 향리 사람들과 그 위에서 소요(逍遙)하여 마치 평생 그렇게 할것처럼 하였다. 

 

야은(冶隱) 길재(吉再) 선생의 사당(祠堂)이 황폐해졌는데도 수리하지 않자 공이 동지들을 창솔(倡率)하여 낙동강(洛東江) 위로 옮겨 세우고는 본전(本錢)을 넉넉하게 마련해 오래갈 계책을 세웠다.

 

계해년(癸亥年, 1623 인조 원년)에 인조대왕(仁祖大王)이 반정(反正)하여 간신들을 죽이고 선인(善人)을 표창하자 조정의 의논이 모두 공을 대각(臺閣)에 두어야 한다고 하였다. 얼마 안 되어 황산도 찰방(黃山道察訪)을 제배하였는데, 당시 포악한 정치 끝이어서 역로(驛路)가 잔폐(殘廢)함이 더욱 심하였으므로 공은 마음을 다해 무마하니, 오래지 않아서 거의 완전히 복구되었다.

 

이명준(李命俊)공이 수의어사(繡衣御史)로서 조사하여 포상하라고 아뢰니, 임금이 품복(品服) 표리(表裏)를 하사하여 총애하였으며, 역(驛)의 하인들 역시 비석을 세워 기렸다. 

 

오래지 않아 친혐(親嫌)으로 체직하고 돌아와 곧 중림도 찰방(重林道察訪)에 제배되었고, 임기가 차서 예에 의해 제용감직장(濟用監直長)으로 옮겼다가 이어 예빈시별좌(禮賓寺別坐)로 승진하였으며,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로 옮겼다가 문경현감(聞慶縣監)으로 나갔는데, 백성을 다스리고 아전을 거느리는 데 한결같이 성신(誠信)으로 하고 매를 사용하지 않아 온 경내가 부모와 같다고 칭찬하였다.

 

문경현은 영남의 큰길에 당해 있어 지나다 들른 빈객이 날마다 수십 명이 밑돌지 않았는데, 공은 문을 열어 친소(親疎)를 가리지 않고 접대하였다. 임기가 찼는데도 1년을 더 있다가 을해년(乙亥年, 1635 인조 13)에 비로소 체직하고 돌아왔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향인(鄕人)들이 의병(義兵)을 규합하여 공을 장수로 추대하고, 문경 사람들 역시 방백(方伯)에게 청하여 다시 공으로 하여금 현의 일을 섭행(攝行)하기를 청하였다. 

 

이때 방백이 군사를 이끌고 문경 경계에 머물러 있자, 여러 수령들이 모두 와서 모였는데, 하루는 밤에 놀라 여러 군사들이 모두 흩어져 도망치면서 저희들끼리 서로 유린(蹂躪)하였으나, 문경 사람들은 공을 호위하여 한 사람도 떠나는 자가 없었으며, 공 역시 굳게 누워서 일어나지 않자 곧 진정되었다.

 

얼마 후 나라에서 오랑캐와 삼전도(三田渡)에서 맹약(盟約)했다는 소식이 들려와 마침내 고향집으로 돌아왔는데,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다가 70세 되는 숭정(崇禎) 경진년(庚辰年, 1640 인조 18) 9월 29일에 집에서 졸(卒)하였다.

 

공의 아들 이증(李?)ㆍ이교(李穚)ㆍ이곤(李稇) 등이 처음에는 접성산(接聖山)에다 임시로 안치했다가, 6년 후인 병술년(丙戌年, 1646 인조 24) 3월 초5일에 선산부(善山府) 서쪽 비봉산(飛鳳山)의 오향(午向) 언덕으로 이장하면서 먼저 죽은 배(配) 김씨(金氏)와 합부(合祔)하였다.

 

공은 남들과 다툼이 없었고, 재리(財利)에는 더욱 소홀히 여김이 심하였다. 일찍이 공한지(空閑地)의 가시덤불을 베어 개간해서 양전(良田)을 만들었는데, 얼마 후 어떤 좋지 못한 자가 공의 이런 뜻을 헤아려 알고는 문에 와서 공에게 말하기를, “우리 고조와 증조가 일찍이 그곳을 경작해 먹었습니다.” 하므로 공은 “어찌 네가 나를 속이랴?” 하고는 곧바로 주고는 의심하지 않으니, 향리 사람들이 모두 후덕(厚德)한 장자(長者)라고 하였다.

 

자매(姉妹)들과 살림을 나누면서 모든 노비를 여섯집에 나누어주고 자신은 한 명도 차지하지 않았다. 또 생업(生業)을 일삼지 않아 집안이 매우 청한(淸寒) 하였지만 추위에 굶주리는 자를 보면 반드시 있는 힘을 다해 도와주면서 그 유무를 따지지 않았다. 그래서 향리에 세거한 50여년 동안 귀천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성심으로 친애하였다.

 

공은 서화(書畵)에 뛰어났는데, 비록 아버지 옥산(玉山)으로부터 전해 받은 것이겠으나 그 타고난 재능이 우연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거문고 타기를 가장 좋아하여 매양 달 밝은 좋은 밤이면 낭랑하게 혼자 탔는데, 그 소리가 청고(淸古)하여 듣는 자들이 쇄연(灑然)하게 마음으로 깨달아 자리를 뜨지 못하였다.

 

일찍이 영사공신(寧社功臣) 원종훈(原從勳)에 참여하였고, 신묘년(辛卯年, 1651 효종 2)에는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으며 김씨역시 숙부인(淑夫人)에 추증되었다. 숙부인은 광주 김씨(光州金氏)로 아버지 김영남(金穎男)은 공조참의(工曹參議)이고, 할아버지 김기(金誋)는 이조정랑(吏曹正郞)이다.

 

유순(柔順)한 덕이 있어 여러 첩(妾)들이 모두 애중히 받들었는데, 공과 같은 해 출생하여 기묘년(己卯年, 1639 인조 17) 12월 16일에 졸(卒)하였다. 이증(李?)은 응교 심광세(沈光世)의 딸에게 장가들어 5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이동야(李東野)이고, 다음 이동명(李東溟)은 과거에 급제하여 지금 강릉부사(江陵府使)로 있으며, 다음 이동유(李東維)는 생원이요, 다음은 이동주(李東柱)와 이동로(李東魯)이며, 딸은 이지(李墀)에게 시집갔다.

 

이교(李穚)의 두 딸은 신성(申垶)과 홍처형(洪處亨)에게 출가하였으며, 하나는 출가하지 않았다. 이곤(李稇)의 딸 하나는 성호웅(成虎雄)에게 출가하였으며 막내딸은 어리다. 이구(李龜)와 이확(李穫)은 측실 소생이다. 적녀서(嫡女壻)는 이만겸(李萬兼)이며 강계화(康繼華)ㆍ전계남(田繼男)은 측실 소생 사위이다.

 

세상에서 이씨집안은 율곡(栗谷) 때문에 모두 수행(修行)을 잘하여 선비가 되고, 또 조정에 녹사(祿仕)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공 같은 분의 자질은 하늘이 낸 자연의 아름다운 박옥(璞玉)과 같아서 갈고 다듬지 않아도 저절로 귀하게 될 것이고, 관질(官秩) 역시 이미 얻게 될 처지였으나 다만 그 덕(德)과 서로 짝하지 않았으니, 논자들의 말은 혹 공을 깊이 알지 못하여서 그런 것이리라.

 

비록 그러하나 구릉이 변하여 골짜기로 변한 후에 사람들로 하여금 공의 무덤임을 알아서 침범할 마음을 두지 못하게 하는 것은 누구 때문인가? 이는 다른 데서 구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오색(五色)이 비록 갖추어져도 흰 바탕이 아니면 어떻게 그리며, 염매(鹽梅)가 비록 아름답지만 실로 단맛을 받아들이네. 공의 자질은 온화하고 빛났는데, 지위가 차지 않아 이치에 어긋났네. 어진 부형(父兄)이 있어 백세까지 더욱 드러나리.    <끝>

--------------------------------------------------------------------------------------------------------------------------------------

 

[原文]

 

司議贈左承旨李公墓碣銘 幷序 

 

公諱景節。字吉甫。德水人。始祖敦守。高麗中郞將。我朝明晨至大官。諡康平公。曾祖蕆贈參贊。祖元秀監察。贈贊成。考瑀軍資監正。栗谷文成公之弟也。妣德山黃氏。其考進士耆老。以筆法大鳴於世。公以隆慶辛未十一月廿日。生于外氏家。自幼聰明絶倫。不煩敎督而解書作文。已非群兒所及。栗谷先生期許甚重。丙午。中進士。乙卯。擧省試。入京將赴明經試。時姦臣濁亂。倫紀斁塞。有一權貴人相遇致款。微示蹊徑而有推挽之意。公以爲辱。遂不取應而歸。沈相國喜壽喜謂曰。固知公之徑歸也。自是公絶跡都下。所居善山。有梅鶴亭別業。公日與鄕人逍遙其上。若將終身焉。冶隱吉先生祠宇荒廢不治。公倡率同志。移建于洛東江上。又贍本錢。以爲久遠之規。癸亥。仁祖大王誅奸旌淑。朝議皆欲處公以臺閣。俄拜黃山道察訪。時暴政之餘。驛路凋弊尤甚。公盡心撫摩。未幾完復如舊。李公命俊以繡衣廉問。褒啓其狀。上命賜品服表裏以寵之。驛隷亦立石以頌焉。未幾。以親嫌遞歸。旋拜重林道察訪。秩滿。例遷濟用監直長。仍陞禮賓寺別坐。轉司憲府監察。出監聞慶縣。治民御吏。一以誠信。屛鞭扑不用。一境稱之以父母。縣當嶺南之孔道。賓客之過者。日不下數十。公開門引接。無間親疏。考滿。仍加一年。乙亥。始遞歸。丙子虜難。鄕人糾合義兵。推公爲將。慶人亦請於方伯。復以公攝縣事。時方伯領兵留屯慶境。諸守令皆來會。一日夜驚。諸軍皆散走。自相蹂躪。而慶人環衛公。無一人去者。公亦堅臥不起。已而乃定。俄聞國家與虜有三田之約。遂歸鄕廬。屢除官。皆不就。崇禎庚辰。年適七十。其九月二十九日。卒于家。諸孤,穚,稛等。始權厝于接聖山。後六年丙戌三月初五日。移葬于善山府西飛鳳山午向之原。配金氏先沒而祔焉。公與物無競。其於財利。尤甚脫略。嘗就閒曠地。翦棘夷榛。以爲良田。旣而無良者。揣知公意。詣門告公曰。吾高曾嘗食於此。公曰。豈爾余欺。卽與之不疑。鄕人益以公爲厚德長者。與姊妹析著也。悉以臧獲分與六房。而不以一口自引。又不事生業。家甚淸寒。而見人凍餒者。則必極力周之。不計其有無焉。以故居鄕黨五十餘年。而無貴賤老少。無不誠心親愛焉。公妙於書畫。雖傳自玉山。而其得於天才者。亦不偶然。最喜彈琴。每於良宵月夕。郞然獨奏。調韻淸古。聽者灑然心醒。不能去也。嘗有寧社從勳。後辛卯歲。追贈承政院左承旨。金氏亦贈淑夫人。系出光州。考穎男工曹參議。祖誋吏曹正郞。有柔順之德。衆妾皆愛戴焉。與公同年生。己卯十二月十六日終焉。娶應敎沈光世女。有五男一女。男長東野。次東溟登第。今爲江陵府使。次東維生員。次東柱,次東魯。女適李墀。穚二女適申垶,洪處亨。其一未行。稛一女適成虎雄。其季幼。,穫側出也。嫡女壻李萬兼。而康繼華,田繼男。側出壻也。世謂李氏家以栗谷之故。皆能修行而爲士。亦以祿仕於朝。然若公之資之美。如天璞之自然。不待雕琢而可貴。其官秩亦是己致之物。而又不與其德相媲。論者之說。或未深於知公者爾。雖然。陵夷谷變之後。將使人人知爲公之墓。而不敢有侵抇之心者。則是伊誰之故歟。此不可以他求也。銘曰。

五色雖具。匪素曷施。鹽梅雖美。甘實受之。惟公之質。可和可絢。惟位不滿。惟理之舛。惟其有賢父兄。惟百世而彌顯。

 

宋子大全卷一百七十五 / 墓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