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집성촌·입향조

선비의 고장 영주의 경주이씨

야촌(1) 2014. 11. 25. 23:55

선비의 고장 영주의 뿌리(脈)-가문(家門)과 씨족을 찾아서, 경주이씨 편

2014년 05월 01일 (목) ㅣ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

 

 

 

경주이씨(慶州李氏) 연원(淵源)
 
경주이씨는 신라개국공신 대아찬을 지낸 알평(謁平)을 시조로 하여 1천여 년 동안에 인물이 이어졌다. 고려 말에 달충(達衷)이 호부상서(戶部尙書)로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고 손자 흥상(興商)이 세조때 이조판서(吏曹判書)로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또 흥상의 손자 숙정(肅靖)이 남부령(南部令), 그 아들 욱(昱)이 대호군(大護軍)을 지내고 용궁(龍宮) 대죽리(大竹里)에 낙향하여 살았는데 그가 바로 경주이씨 영주 입향조인 성오당(省吾堂) 이개립(李介立)의 조부이다.

영주의 경주이씨는 장수면 갈산1리 돌 마람 마을(돌이 많는 마을-석종제)에 입향한 성오당 이개립(省吾堂 李介立, 26세 영주 입향조)에 의해 시작된다.
 
유림에서는 역봉 선생이라고 함. 명종원년 1546년 8월 12일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에 출생하여 장수 갈산에서 활동하시다가 용문면 하금곡리에서 이거하여 인조2년(1625년)에 졸하였다.
 
명종 22년에 진사시에 31명중 3위로 입격하여 반궁(성균관)에 계시다가 귀향하실 때 100여인의 증별시를 받아 현제 소수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진사급제 홍폐와 그 외 성오당 팔영집 문집도 전시되어 있으며 그 외 유물은 타문중의 유물과 윤번제로 전시되고 있다.
 
귀향한 이듬해 부친이 병이 들어 6개월간 지극정성으로 간병하여 쾌유를 빌며 부친의 대변을 맛보고 증세를 간음할 정도로 정성을 다했으나 세상을 떠남에 슬픔으로 식음 끊으시고 무덤아래 여막을 짓고 3년 시묘 살이 했다.


복을 마치고 석 달이나 혼자서 산사에 침거하다가 돌아오매 지역민들이 선생의 효행을 경상관영에 알려 표창을 받게 하였으나 공께서 자제를 보내 자신의 효행표창을 기여이 사양 하였다.
 
이후 성오당의 아들 휘음(徽音)이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 문과에 올라 성균학유(成均學諭), 희음(希音)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찰방(察訪), 도사(都事)를 지냈다. 휘음의 아들 숭언이 진사(進士), 문과(文科)로 부사(府使)를, 상언이 또한 진사(進士), 문과(文科)로 여러 고을 수령(守令)을 지냈다.

또 숭언의 아들 달의(達意)가 진사(進士), 문과(文科)로 부사(府使)를 거쳐 통정(通政)에 올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희음의 손자 석의(碩意)가 문과로 찰방, 달의(達意)의 아우 적의(敵意)가 또한 진사(進士), 문과(文科)로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상언의 증손 중배(重培)가 문과로 정랑(正郞), 술의(述意)의 손자 광배(光培)가 문과로 정언(正言) 을 지냈다. 

 

또한 문집(文集)을 모두 8질을 내었으며 백패(白牌: 생원이나 진사) 16장, 홍패(紅牌, 문과) 8장을 내었다.
 
유적으로 성오당 이개립의 사당(祠堂), ‘의산서원(義山書院)’, 정자로는 ‘성오당(省吾堂)’·‘피염정(避炎亭)’·‘성서정(城西亭)’·‘송계정(松溪亭’) 등이 있으며, 이개립이 유성룡(柳成龍) 등 당대의 명류들로부터 받은 간찰(簡札)과 한석봉(韓錫奉)의 친필 전별시 등이 남아 있다.
 
선조 19년(1586) 유일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늙으신 모친을 두고 떠날 수 없어 사양하였고 학문 닦고 덕망을 높이던 중 모친상을 당하여 나이 이미 50에 시묘살이를 했다.
 
선조 24년 다시 영남에서 여현 장현광(구미, 소수서원에서동문수학 함)과 두분이 천거되었으나 가지 않고 이듬해 임진왜란을 당하여 지금은 신하가 편안이 있을때가 아니라 하며 선비들에게 격문을 띄워 의병을 일으켜 향토(경남 창령, 의령, 합천 고령)를 수호하여 공을 세움으로서 의주로 피난해 있는 선조께서 교서를 보내 충의를 격려 하였다.
 
선조 30년(1597년) 김경서의 군대가 황석에서 무너지자 찰부 종사관 황여일이 공을 향병대장에게 임명하여 공이 사양하다가 나아가 드디어 정예병을 모집하여 의병장 곽재우의 의병과 힘을 합해 화왕산성(경남 창령군)전투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렸다.
 
그때 사로잡은 적이며 배인 것을 김경서에게 보고하지 않고 의병장 곽재우에게 보고하므로서 김경서가 크게 노하여(장수의 명령)을 무시했다고 모함하여 조정에 장계하여 일이 불측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승지 한준겸 및 류성룡이 주선하여 큰 화를 면하고 별미(곡물벌금형)를 치르도록 처결하여 조정관원들이 봉록에서 도와줌으로 별미를 치르고 풀려나 고향에 돌아와 세염을 끊고 수년간 두문불출하고 시국이며 정치에 관한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다만 스승인 학봉 김성일, 소고 박승임 등과 만나고 김응조, 조관, 정윤목, 진상홍 등 후학들에게 학문 강론에만 전염하였고 젊은 시절에는 퇴계문인으로, 장성해서는 학봉 김성일의 실천도학을 전념 하였다.

 

 

유적으로는 성오당(省吾堂)의 사당(祠堂), 의산서원(義山書院), 정자로는 양졸당(養拙堂), 성서정(城西亭), 송계정(松溪亭) 등이 있고, 성오당 유물전시관(遺物展示館)이 있다.

 
유픔으로 문집 3권 2책(5대손 광배공이 편집 간행함)또한 이황, 류성룡, 김성일 등 서찰, 선현유묵 퇴계유묵 한석봉 글씨 한석봉과 이휘음의 유묵집, 서찰집, 율림 4경, 성오당 팔영집, 성오당답서, 종남산동도회(경상도출신 12명의 모임) 등 당대의 명류들로부터 받은 간찰(簡札)과 교지 등 유물다수를 영주시에 기증하여 소수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으며 사본은 성오당유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배위는 영천민씨 진사 운서(雲瑞)의 따님이다. 현재 경주이씨는 전국에 약 211만가구(인구수 약680만명)이며 영주에는 장수갈산3리(보통골), 상망동(단운마을), 영주시내에 약1800세대가 거주하고 있다.

경주이씨 종친회관은 가흥동 구학공원인근 삼판서고택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매년 춘추로 갈산리 선산에 입향조의 제향을 드리고 있다. 현재 경주이씨 영주 종친회장 이희양(79세), 이정태(61세)사무국장이 문중의종무활동 하고 있으며 금번 취재협조는 경주이씨 이형호(65세) 유선회장이 많은 도움이 있었다.
 
송인선 실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