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세자료

두문동 언지록(杜門洞言志錄)

야촌(1) 2011. 2. 7. 14:14

■ 두문동 언지록(杜門洞言志錄)

 

명나라 태조 홍무 25년(1392년) 임신7월 16일 병신(丙申)은 곧 고려조가 끝나고 이씨조선이 시작되는 때라 고려의 충신과 열사들이 신복의 뜻이 없어 스스로 절의를 세워 목숨을 다하고자 이에 함께 송도 동남 부조현에 올라가서 하늘을 가리는 방입을 이고 조회에 쓰던 갓을 벗어 걸고 각자 그 뜻을 말하였다.

 

이숭인은 평화로운 세상 슬프고 멀어지다. 하고 유순은 반계의 곧은 낚시로 주나라 낚는 것은 무슨 뜻 인고, 하였고. 우현보는 나라를 버린 마지막 글발 종신 본 받으리 하였고. 전조생은 밭 갈고 싶은 사람 어느 산으로 갈고 하였으며. 이맹예는 번개 같은 시원한 바람으로 머리 씻기 원하였고, 조의생은 두문동에 죽고 말리라 하였고, 전귀생은 깊이 산에 들어가 농사하면 뉘 알리요,

 

임선미와 고천상은 다같이 오직 그 절의를 쫓겠다 하고 조거는 마땅히 변을 본뒤에 죽으리라 하고 채귀하는 동으로 송경을 봄에 다시는 우리땅 될수 없으니 서쪽으로 수양산 바라보며 차마 한마음 잊으리 하였고, 서보는 이조에 벼슬하기를 원하지 않고 두마음 가진 사람되기 부끄러워 한다.

 

박심은 고려의 강산 살피기 원한다. 했고, 신안은 새임금은 내임금 않이니 차마 두임금의 신하 될수 있으랴 하였고, 변숙은 누송은 뉘집 아들인고 그 지조 사모하노라 하고 박영은 황조가 어디메뇨 망연히 가고싶다. 하였고, 김중한은 백이를 따라 서산에서 고사리나 캐고싶다 하고 고천우는 전리로 돌아가고싶다했고, 서중보는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없으니 내 장차 어디로 갈고 했고, 조안경은 때가 이미 글렀으니 가지 않고 무엇을 구하리요 하고, 민안부는 농부와 같이 함이 내뜻이다.

 

김명리(金明里)는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없으니 내 어디로 갈고 하고, 박문수는 천명(天命)이 이씨로 돌아갔으니 나는 어디로 갈고 하고, 성사제는 차라리 왕씨의 귀신이 될지언정 이가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 했고, 말을 마치고 다같이 송악산을 바라보며 말하기를, 백이숙제는 어떤 사람이기에 일찍이 서산에서 굶주리며 절의를 지켰는가 하며 눈물을 흘리며 다 같이 가는 것이 옳다고 했다.

 

그때 정몽주는 이미 고려를 위하여 선죽교에서 순절 하셨고 이색은 한산으로 내 치었고 김구용은 강문에서 죽었고 길재는 먼저 금오산으로 갔고 전귀생은 절도에 들어 갔고 박문수는 배록동으로 돌아가고 조거는 먼저 운장산에 숨었고 이맹예는 동오천에 숨었고 조승숙은 덕곡산에 숨었고 조의생과 임선미와 고천상은 다 두문동에 들어가고 조손은 송산에 숨었고 이수인과 정희 김진양 이종학 등은 원지로 유배되고 유순은 오봉산에 숨었고 김주 우현보는 중국에 들어가고 최자는 예산으로 물러가고 원천석은 치악산에 숨었고 서중보는 두문동에 들어가고 김오윤은 서운으로 돌아가고 최양은 중대산에 들어가고 박의중은 벽골제로 물러가고 조홍은 율월산에 숨고 김자수는 추령에 숨고 이사경은 숙신리에 들어가고 이수생은 율리에 숨고 김약시는 금광리에 들어가고 채귀하는 다의현으로 물러가고 조안경은 천산에 숨고 남을진은 고사천에 들어가고 박심은 입암에 숨고 변숙은 압산에 들어가 살고 박영은 법현으로 도망가고 서보는 적암에 자취를 감추고 이행은 예천동으로 물러가고 신안은 황의산으로 돌아가고 이윤은 도탄에 숨고 이양중은 광능에 숨고 서견은 긍양에 숨고 임탁은 금성에 돌아가고 김영은 고석산으로 물러가고 변귀수, 안종약, 고천우, 김준, 윤규, 박침, 허금, 배상지, 구홍, 이유인, 성사제, 민보문, 차원부, 엄태헌, 김충한, 이실명, 김상, 민안부, 신덕린, 신포시, 전조생, 장안세, 송계의 무리는 멀리 두류산밑 배록동에 숨어서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충절로 항거하며 그 의를 취하고 인을 이루었으니 당시에 사대부들이 다 그길을 고상하다고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 하고 다시 그 칭호를 표방 하더라. 유신 이대건 찬

 

[原文]

 

杜門洞言志錄/두분동 72현을 찾아서

 

儒臣 李大建 撰

 

有明太祖洪武二十五年壬申秋七月哉生魄丙申。卽麗朝運訖。本朝受命之際也。忠臣烈士罔有臣僕之志。自靖其義之所當盡。於是焉齊登松都市東南峴。戴蔽陽之笠。掛朝天之冠。因登不朝峴。各言其志。李崇仁曰。陶河之世。嗟已遠矣。柳珣曰。磻溪直鉤。釣周何意。禹玄寶曰。去國季札。終身可效。田祖生曰。欲爲耕者。何山可往。李孟芸曰。願灑淸風於雷首。曺義生曰。甘心杜門洞。死而後已。田貴生曰。深入於山。耕者誰知。林先味,高天祥咸曰。惟當從其義。趙琚曰。吾當觀變。死而後已。蔡貴河曰。東瞻松京。非復我土。西望首陽。忍忘一心。徐輔曰。願不北面於朝。愧二心之人。朴諶曰。願尋高麗山。申晏曰。新王非我王。忍作二王臣。邊肅曰。樓宋誰家子。其操可慕也。朴寧曰。橫島安在。欲往茫然。金沖漢曰。願從伯夷。採薇西山。高天祐曰。願歸田里。徐仲輔曰。國破君亡。余將焉往。趙安卿曰。時已非矣。不去何求。閔安富曰。混跡農夫。是吾志也。金明理曰。國破君亡。吾將何去。朴門壽曰。天命有歸。國事已非。成思齋曰。寧爲王氏鬼。不作李家臣。言訖。咸望松岳曰。夷齊彼何人。曾守西山餓。流涕而已。皆曰可去矣。時鄭夢周已殉國於善竹橋。李穡見放韓山。金九容卒于江門。吉再先去金烏山。田貴生逃入絶島。朴門壽歸排祿洞。趙琚先隱雲藏山。李孟芸隱東鼇川。趙承肅歸隱德谷山。曺義生, 林先味, 高天祥皆入杜門洞。趙狷隱松山。李守仁, 鄭煕, 金震陽, 李種學幷流遠地。柳珣隱五鳳山。金澍, 禹玄寶入中國。崔瀣退猊山。元天錫隱松嶽。徐仲輔入杜門洞。全五倫歸瑞雲。崔瀁入中臺山。朴宜中退碧骨。趙洪遯栗原山。金自粹隱秋嶺。李思敬入肅薪里。李遂生隱栗里。金若時入金光里。蔡貴河退多義峴。趙安鄕隱泉山。南乙珍入古沙川。朴諶隱立巖。邊肅入居鴨山。朴寧逃法峴。徐輔遯積巖。李行退醴泉洞。申晏歸黃衣山。李瀹遯桃灘。李瀁中隱廣陵。徐甄隱矜陽。林卓歸錦城。金英退古石山。邊貴壽, 安從約, 高天祐, 金埈, 尹, 朴忱, 許錦, 裴尙志, 具鴻, 李唯仁, 成思齊, 閔普文, 車原頫, 嚴泰憲, 金沖漢, 李失名, 金瑺, 閔安富, 申德隣, 申包翅, 田祖生, 張安世, 宋桂之徒。遠遯于頭流山下排祿洞。而皆抗不二之節。取其義成其仁焉。當時士大夫皆高尙其道。希之者惟恐不及。更將標榜。爲之稱號。儒臣李大建撰

 

출전 : 貞齋先生逸稿卷之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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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점풀이]

 

●어시언(於是焉)

- ‘於是+焉’으로 이루어졌다.

- 뒤에 따라붙은 ‘焉’의 느낌이 전달되도록 풀이하는 게 어렵다.

- ‘그리하여’, ‘이리하여’, ‘그래서’로 풀이한다.

 

有明太祖洪武二十五年壬申秋七月哉生魄1)丙申。卽麗朝運訖。本朝受命之際也。忠臣烈士罔有臣僕之志。自靖2)其義之所當盡。於是焉齊登松都市東南峴。戴蔽陽之笠。掛朝天之冠。因登不朝峴。各言其志。

 

명 태조 홍무 25년(1392년, 조선 태조 1년, 임신년) 가을 7월 16일 병신일이니 곧 고려조의 운이 다하고 본조(조선조)에서 하늘의 명령을 받을 무렵이었다.(고려조의) 충신열사들이 신하의 지조로 자정(自靖)하는 의리를 모두 토로한 것이 없었다. 이리하여 일제히 송도 저자[市] 동남쪽 고개로 올라가서 패랭이를 쓰고, 조천관을 벗어서 걸어 놓으니 곧 ‘부조현(不朝峴)’에 올라 각자 자신의 뜻을 말하였다.

 

註1)재생백(哉生魄) : 달의 검은 부분이 처음 생긴다는 뜻으로, 음력 열엿샛날을 이르는 말.

 ◇생백(生魄) : 음력(매월)열엿샛날, 또는 그 달의 달. '백(魄)'은 달의 어두운 부분의 뜻. 기망(旣望), 십육야육 보

     름날.

 

註2)자정(自靖) : 결정적인 시기에 자신의 거취를 정할 때에는 모름지기 자신의 참된 속마음을 토로해야 한다는 말.

     《서경(書經)》 미자(微子)의 “각자 속마음을 드러내어 선왕에게 그 뜻을 올려야 한다.

     [自靖 人自獻于先王]”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출전]

정재일고(貞齋逸稿) / 貞齋先生逸稿卷之三 / 摭遺 / 杜門洞言志錄